서구적인 동양인, 위구르 아가씨는 예뻐요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17] 투루판- 포도구· 위구르 민속공연· 야시장
조수영(sy0707) 기자
▲ 투루판의 건포도는 토벽으로 사면이 통풍이 되는 건물을 지어 자연그늘을 만들고, 덥고 건조한 바람을 이용하여 말린다.
ⓒ 조수영
카레즈가 엄혹한 자연의 도전을 이겨낸 예라면, 2천여 년 간 가꾸어 온 포도는 자연환경을 슬기롭게 활용함으로써 이룬 또 하나의 문명적 산물이다. 가는 곳마다 오래된 포도밭을 볼 수 있으며, 거리마다 집집마다 포도넝쿨로 덮여있다.

시내 중심에서 동북쪽으로 10㎞쯤 떨어진 골짜기에 이르니 멀리서부터 향긋한 포도 냄새가 풍겨온다. 그곳이 화염산 기슭에 자리잡은 거대한 포도농원, 곧 '포도구'다. 어귀부터 포도가게가 길 좌우에 쭉 늘어섰는데, 가게마다 형형색색의 포도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투루판에서는 사면이 통풍이 되는 토벽 건물을 지어 자연그늘을 만들고, 덥고 건조한 바람을 이용하여 포도를 말린다. 벽돌을 쌓은 방식 또한 독특하다. 두 개의 벽돌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둔 채 지그재그로 쌓았다. 건조한 공기가 창고 안으로 쉼없이 통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도는 씨 없는 흰 포도, 검은 포도, 자색 포도 등 수십 가지의 품종이 있고 연간 6천여 톤을 생산한다고 한다. 그 중 씨없는 녹색 포도는 달고 맛있어 '투루판의 녹색 진주'라 불린다.

거리마다 집집마다 '녹색 진주'가 넝쿨져

▲ 마당에는 갖가지 포도와 화미과, 수박, 포도주 등이 차려진다.
ⓒ 조수영
▲ 매력적인 위구르 소녀의 춤이 이어진다. 그들의 생김새와 언어, 문화는 한족과 확연하게 다르다.
ⓒ 조수영
위구르 소녀들이 맞아주는 대문을 들어서니 마당은 포도넝쿨과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송이로 운치있게 꾸민 포도터널로 이어진다. 바닥은 평상을 깔아 휴식공간으로 쓰인다. 마당에 갖가지 포도와 화미과·수박·포도주 등이 차려진다. 위구르 전통복 차림의 소녀가 흥겹게 춤을 춘다.

위구르족은 몽골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투르크계 유목민족이다. 자신들을 '웨이우얼'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연합' 혹은 '단결'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과거 몇 세기 동안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에 거주하며 중국과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해왔다. 이들의 주거지가 가진 전략적 위치는 이들로 하여금 동양과 유럽 사이의 중개상인으로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위구르인들은 양을 치거나 오아시스에서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제조업이나 원유굴착·무역업·운송업 등에 종사한다.

하지만 이들의 식생활은 여전히 과거 조상의 것을 물려받았다. 매끼 육식을 하고 매일 낙농품을 먹는다. 우유와 함께 차를 마시기를 좋아하고, 옥수수나 밀가루로 구운 빵이나 국수를 먹는다. 남녀 모두 화려하게 수놓아진 사각형 모자를 쓰고, 여자는 화려한 스카프와 원피스를 좋아한다.

중국 안에 있지만 언어로 중국어가 아닌 터키어 계통의 위구르어를 사용한다. 시내 곳곳에는 대부분 한자와 함께 위구르어가 씌어 있다.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 한족과 많이 혼혈이 되었겠지만 이들의 서구적인 얼굴은 한족과 확연히 구별된다. 또한 종교도 10세기경 전파된 이슬람교에 의해 불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중국의 문화와 뚜렷하게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위구르족이 빈 라덴의 지원을 받는다고?

▲ 위구르족의 민가 내부. 바닥과 벽이 카펫으로 덮여있고 보온을 위한 화덕이 있다. 한족의 입식 문화와 차이가 있다.
ⓒ 조수영
▲ 아랍춤과 비슷하면서도 동작이 시원시원하고 화려하다.
ⓒ 조수영
이 지역은 17세기 중국 청나라와 충돌하다 청나라에 흡수되었다. 지금의 신강 위구르 자치지역에 속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치열한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나, 1949년 인민해방군의 우루무치 진격으로 좌절됐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을 벗어나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1949년 중국에 의해 점령당한 신강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신강의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저항운동이 지속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현재 위구르 독립운동단체로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 '동투르키스탄해방기구(ETLO)' '세계위구르청년의회(WUYC)' '동투르키스탄정보센터(ETIC)'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 중 ETIM은 신강에서 위구르인이 주체가 된 동투르키스탄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ETIM와 더불어 가장 많은 조직원을 거느린 것으로 알려진 ETLO는 2005년 10월 중국에 대해 처음으로 무장투쟁을 공식 선포했다.

중국은 "9·11 테러 이후 신장의 분리·독립단체들이 오사마 빈 라덴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정권,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분리주의자들 등이 신강의 분리주의자들에게 무기와 탄약, 통신 및 운송장비 등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2002년 유엔은 ETIM을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같은해 10월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ETIM의 소탕을 목표로 키르기스스탄에서 해외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 일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희생되었다.

언론이 제대로 전달하지 않아서, 아직까지 이들의 활동상이 현지 위구르인들에게는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과의 교류 증대와 인터넷의 발달로 분리·독립운동 단체들의 존재가 알려지고 여기에 참여하려는 위구르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1933년 위구르족은 카슈가르에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국'을 건국한 바 있다. 인종과 언어·종교·문화가 중국의 한족과는 전혀 다른 신강의 위구르족 문제는 앞으로 중국에게 큰 고민거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

화려한 위구르족의 민속춤

▲ 우리나라 해금과 비슷한 현악기와 소금와 비슷한 관악기, 양금과 비슷한 현악기를 연주하는데 청명하게 울리는 소리까지 흡사하다.
ⓒ 조수영
▲ 허리에 손을 올리고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접었다 폈다 하는 것이 오락실에서 본 테트리스 인형같다.
ⓒ 조수영
위구르족의 민속공연을 보기로 했다. 숙소 뒤뜰 공연장에서 음악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린다.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땋은 여자가 나와서 중국어에 이어 위구르어로 이야기한다. 두 언어가 확연히 다르다. 공연내용에 대한 소개일 것이다.

길게 양쪽으로 머리를 땋은 여자들이 나풀거리는 민속의상을 입고 춤을 춘다. 춤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랍여인들의 춤과 비슷하면서도 동작이 시원시원하고 화려하다.

남자들은 깃 장식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긴 상의에 두꺼운 벨트를 했다. 헐렁한 바지에 부츠를 신었는데, 허리에 손을 올리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폈다 접었다 하면서 춤을 추는데, 예전에 오락실의 테트리스를 시작할 때 나오는 러시아인의 춤과 비슷하다.

우리나라 해금과 비슷한 현악기와 소금와 비슷한 관악기, 양금과 비슷한 현악기를 연주하는데 청명하게 울리는 소리까지 흡사하다. 탬버린 모양의 작은 북은 리듬의 흥을 더욱 북돋아준다. 마지막 무대에서는 무용수들이 관람객을 무대로 끌어내어 함께 춤을 추면서 막을 내렸다.

뜨거운 투루판을 식혀주는 야시장

투루판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야시장이다. 이곳의 낮은 너무 덥고 해가 길어 한낮에는 전체적으로 쉬고 저녁식사를 늦은 시간에 먹는다. 대부분 시내에 있는 야시장에서 양꼬치·물만두·낭 등을 즐긴다.

꼬치는 양고기 외에도 내장이나 소고기 등 재료는 다양하다. 손님이 주문하면 즉석에서 구워주는데 향신료와 고춧가루, 소금을 뿌려 맛을 낸다.

사실 우리 일행은 음식보다 일하는 위구르 여성들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 동서양의 장점만 지닌 묘한 매력의 아가씨들을 보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야시장에 사람들은 계속 몰려든다.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와 여기저기서 지글거리는 연기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 투루판의 야시장.
ⓒ 조수영
▲ 손님이 주문하면 즉석에서 양꼬치를 구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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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의 물줄기가 투루판을 살리다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16] 투루판 - 카레즈, 교하고성
조수영(sy0707) 기자
30km에 이르는 지하수로, 카레즈

▲ 폭이 1미터인 좁은 지하터널에는 손발이 시릴 정도의 천산의 물이 흐른다.
ⓒ 조수영
이렇게 건조한 투루판의 기후에서도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카레즈라는 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카레즈는 페르시아어로 '지하수'라는 뜻이다. 카레즈는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을 투루판까지 안전하게 끌어오기 위한 수로시설이다.

고산의 만년설이 녹아 아래로 흐르면 물이 증발하여 수량이 적어지고 멀리 가지 못하므로 땅속에 수로를 만들어 필요한 곳으로 보냈다. 지상에는 군데군데 우물을 파서 물을 퍼 올렸다. 매년 20억㎡의 용수를 공급하는 총연장 3000㎞ 길이의 지하 운하다.

가장 긴 수로는 30㎞에 달하고, 우물은 보통 20m 간격으로 팠다. 한 갈래의 수로를 만들기 위해선 수십 개의 우물을 파야 한다. 경사지게 이어지는 물길은 상류로 올라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므로 우물은 그만큼 더 깊이 파야 한다. 그래서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깊이 30~70m, 낮은 곳이라도 10~20m 정도를 파야 했다.

카레즈 박물관은 그 물길 중 한 곳을 개방하여 관광지로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카레즈의 우물과 포도 건조장 같은 투루판의 상징물들을 배합하여 박물관을 꾸며놓았다. 대형 카레즈 모형을 비롯해 카레즈의 굴설 과정과 방법, 공정에 쓰인 공구 등이 각종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전시품을 둘러보고 나서 박물관 지하를 관통하는 카레즈 현장으로 내려갔다. 깊이 10여 미터에 폭은 1미터 정도 되는 좁은 지하 터널에는 손발이 시릴 정도의 찬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저 멀리 천산의 눈 녹은 물이 화염산 바닥을 뚫고 흘러온 한 갈래의 카레즈다.

▲ 투루판의 카레즈 박물관
ⓒ 조수영
<사기>나 <한서> 등에 우물을 파서 물을 통하게 하거나 수로를 파서 물을 솟아오르게 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카레즈의 역사는 2천년이 넘는다. 요즘처럼 장비도 변변치 않았던 그 옛날에 이런 수로를 만들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인부 3~5명이 한 팀을 이루어 한 갈래를 파는 데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걸린다고 하니 숱한 노력과 희생, 지혜로 이루어낸 문명의 귀중한 소산이라 할 만하다. 중국인들은 3대 공사를 꼽으라면 만리장성, 대운하, 카레즈를 꼽는다.

아직도 카레즈를 통해 내려온 물은 투루판 사람들의 식수원과 농업용수로 사용된다. 사실 다른 건조지대에도 지하수로는 일찍부터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투루판과 마찬가지로 '카레즈'라고 부르지만, 이란에서는 '카나트(Qanat)'로, 시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서는 '호가라(Foggara)'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지하수를 바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러나 이런 지대에 있는 지하수는 오랫동안 땅 속에 고여 있어 흙 속의 염분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카레즈를 통해 산 아래로 내려온 담수만이 이들이 살아갈 방법이다.

▲ 30km에 이르는 지하수로, 카레즈의 단면도
ⓒ 조수영


▲ 기원전 차사왕국의 중심이었던 교하성
ⓒ 조수영
두 물줄기가 만나는 천연 요새, 교하고성(交河古城)

투루판시 북서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는 교하고성은 글자 그대로 두 물줄기가 만나는 지역에 만들어져서 천연요새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절벽 전체를 요새로 만든 모양이 기다란 항공모함 같다.

서울의 여의도처럼 흐르는 물이 교하고성에 이르러서는 양쪽으로 비껴 지나 다시 합쳐진다. 두 하천사이로 치솟은 30m 높이의 벼랑 위에 가로 300m, 길이 1650m의 고성터가 있다.

▲ 절벽아래로는 강물이 흐르고 멀리 화염산이 보인다
ⓒ 조수영

▲ 교하고성. 관공서와 주거지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 조수영
실크로드의 각축장이었던 교하성

기원전 250년부터 차사전국의 도읍이었던 이곳 교하성은 흉노와 한나라의 지배 번갈아 받다가 당나라 때 도독부가 설치되면서부터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장안에서 교하성까지는 몇만 리의 먼 길로 병역의무를 치르는 젊은 군병들이나 처자를 떼어놓고 온 장수들의 외로움은 항수병을 깊게 하였을 것이다. 황량한 고비사막을 건너 수만리 변방인 서역 땅으로 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고 희생이었다.

당의 전쟁시인이라 불리는 이기는 이러한 교하성을 소재로 하여 <고종군행(古從軍行)>이란 시를 지었다. 기다리는 병사는 돌아오지 않고 서역의 특산품인 포도만 들어온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낮에는 산에 올라 봉화를 바라보고
해질녘에는 교하에서 말에 물을 먹이네.
행인의 밥솥에는 모래바람이 짙고
공주의 비파 소리에는 원한이 깊다.
야영하는 만리에는 성곽 하나 없고
눈비 분분하게 대사막에 연이었네.
북쪽의 기러기 슬피 울며 밤마다 날면
오랑캐 아이 눈물은 두 줄기로 떨어진다.
듣건대 옥문관은 아직 막혀 있다는데
마땅히 목숨 걸고 경차를 따라갈까.
해마다 병사들의 뼈는 황량한 사막에 묻히는데
포도만 부질없이 한나라로 들어오네.


▲ 고성의 중심에 있는 대불사. 대불사의 사각탑은 사각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 조수영

▲ 대불사 중심에 있는 사각의 방형탑. 감실의 형태가 전형적인 인도식이다.
ⓒ 조수영
다리를 건너고, 비탈길을 오르면 350m에 이르는 벽돌길이 남북에 걸쳐 일직선으로 나 있다. 대로가 끝나는 곳에 광장과 거대한 사원지, 대불사가 있다.

대불사는 남북으로 80m, 동서로 40m, 높이 5m의 사각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북쪽에는 3층으로 된 높이 7m의 탑이 세워져 있다. 흙벽돌을 쌓아 만든 사각의 탑은 전형적인 인도식이다. 감실에는 아직까지 불상의 흔적이 있었다. 그 주변을 빙빙 돌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 감실에는 아직까지 불상의 흔적이 남아있다.
ⓒ 조수영
사원 앞에 있는 우물도 지금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성터의 중앙에는 궁실, 관청가, 고급저택이 있고 남쪽은 일반 주택가로 추측된다. 이곳은 특이하게 흙벽돌을 쌓아 올리지 않고 개미굴처럼 바닥을 파 내려가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벽만 남기고 흙을 파낸 뒤 지붕을 얹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고창고성보다 보존상태가 좋다. 지하에 만든 집터도 그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정말로 벽에 지층 모양의 무늬가 그대로 보였다.

▲ 교하성의 주거지. 흙벽돌을 쌓아 올리지 않고 바닥을 파 내려가는 방법을 사용했다.
ⓒ 조수영
교하고성은 예로부터 실크로드의 천산남로와 천산북로에 위치하는 교통의 요충지여서 각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렇게 아픈 과거를 보여주듯 교하고성 한 귀퉁이에는 흉노의 침입 당시 학살당했다는 아이들의 떼무덤이 있었다.

무더운 투루판의 햇빛을 뚫고 성터의 끝까지 걸었다. 절벽 끝에 서니 벼랑아래가 아찔하다. 저 아래 흐르는 물줄기가 보인다. 강 건너로 멀리 눈 덮인 천산산맥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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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법사가 당나라 스파이?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15] 투루판, 고창고성, 아스타나 고분군
조수영(sy0707) 기자
▲ 외성벽에서 고성의 중심까지 당나귀 마차가 달린다. 저 멀리 화염산이 보인다.
ⓒ 조수영
오아시스 마을로 들어선다. 화염산 주변의 막막한 자갈과는 달리 가로수도 있고 작은 개울도 흐른다. 더운 날씨 탓에 밖에서 잠을 자서 집집마다 침대를 밖으로 꺼내놓았다.

흙더미 성벽이 이어진다. 고창고성(高昌故城·가오창구청)이다. 고대 고창왕국의 성터이다. 성벽의 둘레는 5.4㎞에 이르고 그 면적은 2.32㎢로 상암 월드컵경기장의 40배 정도 크기이다.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꺼운 성벽은 아랫부분이 12m 정도이며 현존하는 최고 높이는 11.5m이다.

예전에는 훨씬 높았을 것이다. 또한 원래는 사각형의 화려한 성곽도시였다고 하나 흙벽돌을 쌓아 만들었기 때문에 파손이 심해 지금은 궁전이나 사원 같은 큰 건물의 잔해만 있을 뿐 거의 폐허가 된 도시유적이다.

▲ 대불사터. 불공을 드렸던 사각의 방형탑과 강의실인 복발탑이 있다.
ⓒ 조수영
▲ 지금은 흙벽만이 남은 고성의 흔적
ⓒ 조수영
입구에 서니 흙으로 지었다가 황폐화된 도시의 흔적이 눈앞에 넓게 펼쳐졌다. 그 뒤로 붉은 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는 화염산과 만년설이 뒤덮여 있는 천산이 보인다. 입구에는 고성의 중심까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마차들이 대기하고 있다. 잠시나마 뜨거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마차를 타야했다.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당나귀가 달린다. 진흙벽돌을 쌓아 만든 집터와 내벽의 흔적이 보인다. 생각보다 넓어 마차로도 한참을 달려 대불사 터에 도착했다. 사원의 중심에는 사각의 방형탑이 있고, 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복발탑이 있다. 모두 인도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불공을 드렸던 사각의 방형탑
ⓒ 조수영
▲ 정상부가 떨어져 나간 복발탑. 현장이 설법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 조수영
현장이 설법을 했던 방형탑

사원의 정면에 있는 사각의 방형탑은 작은 감실이 뚫려 있는데 불상들은 대부분 없어지고, 벽화는 흔적만이 있었다. 탑 주변을 돌면서 불공을 드렸을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복발탑은 천정에 원형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현장법사가 400명을 모아두고 설법하던 강의실로 유명하다.

이 좁은 공간에 어찌 400명이 들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강의실은 흙을 말려 만든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천정은 원형으로, 바닥은 사각형의 모양으로 만들어 소리의 울림을 조절했다고 한다.

627년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현장법사는 이 곳을 지날 때 국왕의 부탁으로 두 달간 머물면서 설법을 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렀을 때 고창국은 이미 멸망하고 없었다.

▲ 복발탑의 둥근 천정으로 보이는 투루판의 하늘
ⓒ 조수영
이에 혹시 현장이 당나라의 스파이가 아니었나 하는 설도 있다. 우연히도 현장이 여행 중에 들렀던 나라와 그 직후 당이 정복했던 나라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당시 당나라는 불교를 이데올로기로 삼기 위해 힘썼고 현장은 왕조의 입장에서 서역에서 가져온 불경을 해석했다. 이렇듯 박식한 현장은 당시 서역 소국들은 대부분 불교를 신봉했기에 훌륭한 스파이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혹시 황제가 은밀하게 밀지를 내렸다면 모르지만 황제가 직접 서역으로 떠나는 승려에게 여행을 허가했다는 '현장법사전'의 기록은 믿기가 힘들다.

게다가 그가 황제의 명령으로 쓰게 된 <대당서역기>에는 그가 다녀간 각국의 상황과, 기후, 관습과 국왕의 성격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현장이 꼼꼼하게 관찰하여 정리한 서역 여러 나라의 정보는 중국의 상인에 의해 본국으로 전달되었다는 의혹을 받는다. 이것이 위대한 <대당서역기>로 변모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의 장소'

▲ 복발탑의 바닥은 사각으로 만들어 소리의 울림을 조절했다고 한다.
ⓒ 조수영
아스타나 고분군(阿斯塔那古墓群)은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이 500년간 사용한 공동묘지인 셈이다.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의 장소'라는 뜻이다. 죽음을 생의 끝으로 보지 않고, 잠시 쉬는 휴식으로 보는 것이다.

입구에는 12지신과 함께 사람 얼굴에 뱀의 꼬리를 달고 있는 남녀 2인이 손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복희여와상이 있다. 란주의 복희사당에서 보았듯이 복희와 여와는 중국의 신화전설에 나오는 인류의 시조로서 이들의 남매혼인에 의해 인류가 탄생되었다고 전해진다. 여기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길이 2m, 폭 1m의 유명한 복희여와도가 출토되었다.

10㎢의 면적의 공동묘지에는 수천 개의 무덤이 있다. 그 양식은 대부분 비슷한데 땅 표면에서 지하로 45도 방향으로 길을 만들고 묘실 입구에 문을 만들었다. 묘실은 사방 3~4m, 높이 3m 정도이며 높이 50㎝정도의 단을 만들어 시신을 놓았다.

▲ 아스타나 고분군.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이 5백년간 사용했던 공동묘지다.
ⓒ 조수영
초기에는 관을 만들었지만 후기에는 관이 없다. 입구와 묘실 사이의 벽에는 또 다른 방, 이실을 만들었는데 그림이나 각종 문서를 보관했다. 묘실 안에는 이 지역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아도 자연 상태로 만들어진 미라가 있다.

뼈에 살가죽이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삭아서 찢어진 옷이 그리 오래된 것 같이 보이지 않아서 어쩐지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는 것조차 민망하다. 우리는 천 년이 넘은 미라의 '휴식'을 방해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간 216호분 묘실 정면에는 유교의 가르침을 풀이한 6첩 병풍이 그려져 있다. 그중 4첩은 왼쪽부터 앞가슴이나 등에 '옥인(玉人)', '금인(金人)', '석인(石人)', '목인(木人)'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옥인은 청렴결백을, 입을 막은 금인은 언행에 신중함을, 금인과 마주보고 있는 석인은 돌처럼 결심이 굳어 흔들리지 않는 결심부동을, 목인은 거짓이 없이 올바른 무위정직을 뜻한다.

엄청난 유물이 발견되다

▲ 묘실은 땅 표면에서 지하로 45도 방향으로 길을 만들고 입구에 문을 만들었다.
ⓒ 조수영
▲ 216호분 묘실 정면에는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풀이한 6첩 병풍이 그려져 있다. 지금 사진에서 보니 촬영이 금지된 곳이었다.
ⓒ 조수영
두 번째 묘는 상인의 묘다. 고향을 떠나 멀리 이곳 아스타나에 묻히면서 고향의 그리운 풍경을 벽에 그렸다.

또 하나의 묘는 부부 합장묘인데, 미라가 유리관 속에 전시되고 있다. 남자는 베개를 베고 있고, 여자는 베개가 없다. 부부합장이 당시의 풍습인지 알 길은 없으나 부부의 인연이 사후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스타나 고분군에는 고창국과 당나라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대량의 유물, 벽화, 미라가 출토되었다. 특히 216호에서 나온 풍만하고 화려한 당대 미인의 모습을 조각하여 채색한 여인의 목상, 종이로 만든 관, 관을 덮을 때 쓰던 수십 점의 복희여와도가 대량 출토되었다.

이밖에도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통행증이나 관용문서, 고소장 등도 출토되었다. 사불나의 아들 금아와 조설창의 딸 강실분이 우차에 치여 배상해달라는 내용의 고소장이다.

관용문서가 아닌 사문서도 있다. 적강녀라는 여인이 명주 20필을 주고 목관을 산다는 매매계약서다. 그런가 하면 탄원서도 있다. 장식현이라는 병사가 징집되어 간 뒤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그의 누이동생인 아모가 관청에 올린 탄원서이다. 오빠가 군역에 들어가 교하거방에 배속되었으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집안 일이 곤란하니 대신 자신을 데려가 대신 일하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지금은 거의 모든 유물이 투루판시 박물관이나 우루무치 박물관으로 이전되고 무덤과 3개의 미라만 공개하고 있을 뿐이다.

투루판에서 한낮에 어디를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늘만 벗어나면 마치 화재 현장 곁에 있는 것처럼 뜨거운 기운이 확확 끼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식사 후 1시간 정도 낮잠을 잔다. 오후 일과는 3시부터 시작해 6시에 끝난다.

그러고 보면 8시간 근무라 하지만 낮잠시간을 빼고 나면 얼마 되지 않는다. 이곳에 왔으니 이곳의 법을 따라야 함은 물론이겠거니와 한낮의 더위는 더 이상 관광을 할 수 없게 했다. 숙소로 들어와 한숨 자고 오후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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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약탈의 현장 '베제크릭 천불동'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14] 투루판 - 화염산, 베제크릭 천불동
조수영(sy0707) 기자
▲ 화염산은 붉은 사암으로 되어있어 한낮이 아니어도 달구어진 불판 같다.
ⓒ 조수영
오공이가 파초선으로 불을 끈 화염산

투루판 시내에서 벗어나 베제크릭 천불동(柏孜克里克千佛洞)으로 가는 길에서 화염산(火焰山)을 만났다. 화염산은 흔히 생각하는 원뿔모양의 산이 아니라 길게 병풍처럼 이어진 작은 산맥의 모양이었다. 약 500m정도 높이의 산이 길게 이어져 있다.

붉은 사암으로 되어 있어 한낮이 아니어도 달구어진 불판 같다. 산 표면에는 풍화침식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 세로로 쭈글쭈글, 크고 작은 무늬가 있다. 태양열에 의해 달구어진 지표면의 아지랑이라도 어른거리면 마치 산 전체가 불에 싸여 이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화염산이라 이름 붙여졌다.

열기에 이글거릴 때 화염산의 온도는 평균 60℃를 넘기 때문에 아직 아무도 이 산을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약 40년 전 이곳 투루판의 기온이 48.5℃에 달해 중국에서 가장 높은 기온으로 기록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화염산 지면의 온도는 무려 82.3℃에 이르렀다고 한다.

▲ 화염산. 산 표면에는 풍화침식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 세로로 쭈글쭈글, 크고 작은 무늬가 있다.
ⓒ 조수영
화염산이 뜨거운 이유는

이렇게 화염산의 온도가 높은 것은 산의 모양이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마치 태양열을 모으기 위한 열판처럼 태양을 향해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화염산은 최고봉의 높이가 850m에 불과하지만 해수면보다 낮은 투루판 분지에서는 대단히 높게 보인다.

화염산은 소설 <서유기>에도 등장하는데 불타는 화염산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삼장법사 일행은 그 불을 끌 수 있는 파초선을 얻기 위해 철선 공주와 한판승부를 벌인다. 결국 파초선을 빌려 49번의 부채질을 함으로서 불씨를 끄고 비가 내리게 해 무사히 화염산을 건넌다.

▲ 천불동 입구에 있는 손오공상. 소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파초선으로 화염산의 불을 껐다.
ⓒ 조수영
소설의 주인공이 된 삼장법사는 실제로 7세기경 이곳을 지나 인도로 갔었다. 묘하게 빛나는 화염산의 붉은 빛을 한참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정상에서부터 지그재그로 이어진 길이 보였다. 얼마 전부터 관광객에게 개방된 총 450m의 미끄럼대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리프트 모양의 것이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뜨거운 미끄럼을 어떻게 타고 내려올지 궁금하기만 하다.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남은 것이 없는 베제크릭 천불동

화염산을 지나 베제크릭 천불동으로 향했다. 베제크릭이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이다. 아름답게 장식된 집을 찾아 무르툭 계곡으로 들어선다. 양쪽으로 붉은 화염산 절벽에 싸여 있는 협곡의 오른쪽에는 천산의 눈 녹은 물이 황토와 함께 흐르고 있다. 가는 길에는 천불동을 재현해 놓은 마을이 있었는데 아쉽지만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손오공 일행의 상이 있는 천불동의 입구 광장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협곡 절벽의 중턱을 따라 석굴이 구축되어 있다. 붉은 화염산과 무르툭 강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 무르툭 계곡과 베제클릭 천불동
ⓒ 조수영
여러 층으로 빽빽이 들어선 것이 마치 벌집 같다. 절벽에 굴을 파고 입구에 문을 만든 다른 석굴에 비해 이곳은 둥근 돔 형식으로 지붕을 만들어 장식을 했다. 그래서 굴이라 부르지 않고 장식된 집이라 했나보다.

이곳은 6세기 국씨 고창국 시대부터 13세기 원나라 때까지 성지역할을 하여 불교 관련 벽화가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특히 위구르인들이 투루판을 지배했던 9-12세기에 가장 번영하였다.

당시 석굴 중에는 가운데에 주로 예불공간인 중당이 놓이고, 이를 회랑이 둘러싼 구조인 것이 많다. 중앙의 천장은 둥근 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펜으로 그린 그림처럼 섬세한 선으로 묘사한 중국 미술의 영향을 받은 그림과 명암과 양감을 강조하는 위구르 및 서역양식의 그림이 있었다.

▲ 원래 82개의 석굴은 지금은 42개만 남아있고 그나마 6개만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사진은 6개 중의 하나.
ⓒ 조수영
▲ 이슬람 교도들은 벽화를 긁고, 심지어 눈알을 파내어 벼렸다.
ⓒ 조수영
▲ 벽화를 잔인하게 뜯어간 흔적. 칼과 톱을 이용하여 독일, 일본 등으로 싹쓸이 해 갔다.
ⓒ 조수영
서양의 탐험대가 싹쓸이 해 간 벽화들

그러나 위구르인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후 이슬람 세력들이 들어와 벽화를 칼로 긁고 또 파괴했으며, 심지어는 눈알을 파내어 버렸다. 이들은 종교상 모든 형태를 부정했기 때문에 이란과 파키스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불상과 많은 유적들을 파괴했다.

게다가 1898년 러시아학자 클레멘츠가 석굴을 발견한 이래, 20세기에 이르러 독일 고고학자 르콕과 그륀베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네 차례 조사하며 위구르인 공양도, 사천왕도 같은 수백 상자 분량의 벽화조각들을 칼과 톱으로 무자비하게 떼어갔다.

이런 식으로 가져간 벽화들은 동굴 하나를 거의 완벽하게 옮겨 놓은 듯했다. 그러나 이 벽화들은 베를린 박물관에 있다가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뒤이어 일본 승려 오타니 탐험대와 아스타나 고분을 발굴한 영국의 스타인도 들러 남아있는 유물들을 하이에나처럼 쓸어갔다. 도둑들은 벽화의 외곽 둘레에 깊은 칼자국을 낸 뒤 뒤로 톱을 집어넣어서 벽에서 떼어냈다. 석굴들은 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벽에는 아직도 약탈의 잔인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석굴의 수도 원래 82개였다고 하나 지금은 42개만 남아있고 그나마 6개만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뜯겨진 부분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부분의 색채는 세월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뚜렷했다.

제33굴의 뒷벽에는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는 그림이 있는데 아랫부분은 없어지고 윗부분만 남았다. ‘각국사절도’라 불리며 그림의 왼쪽에는 보살과 호법신들이, 우측에는 각국에서 온 사절단이 있다. 동서 문화교류가 왕성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각 민족의 얼굴 생김새와 표정, 풍속 등이 잘 나타나 이곳의 상징적 벽화로 입장권에도 그려져 있었다.

천불도를 베제크릭에 돌려주자!

▲ 제 33굴의 각국사절도
ⓒ 조수영
뜯어간 유물은 현재 독일의 베를린박물관, 인도 뉴델리박물관, 러시아 박물관, 일본의 동경박물관 등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다.

숱하게 털린 투루판 보물들의 상당수는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물려받은 것인데 보통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한다. 20세기 초 실크로드를 답사했던 일본 승려 오타니와 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3차례 조사 끝에 수집한 유물들 중 일부다.

오타니는 탐험 뒤 재정난에 시달리자 구하라라는 상인에게 유물 일부를 팔았고, 구하라가 1916년 이를 다시 총독부에 기증해 오늘날에 이른다. 베제크릭과 토욕구 등에서 가져온 석굴 벽화 조각들과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생활유물들이 주종이다.

베제크릭 15굴에서 절취해온 공양보살상의 경우 가장 아름다운 서역 보살상으로 손꼽힌다. 또한 아스타나 고분 출토품 중에는 무덤 천정에 붙였던 중국 신화의 창조신 복희와 여와의 삼베 그림이 있는데 채색이나 구도 등이 뛰어난 걸작이다.

하지만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는 투루판 유물들 또한 반달리즘의 악몽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유물들 대부분은 오타니 탐험대가 마치 보물찾기하듯 털어온 것들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술적으론 중요한 자료일지 모르겠지만 벽화가 그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때 다시 생명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왕오천축국전>을 되돌려주지 않는 프랑스를 탓하기 전에….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 무모한 도굴꾼들과 파괴자들에 의해 뜯기고 찢기어 텅 빈 헛간처럼 변한 현실 앞에서 허탈감과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고창고성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천불도의 단편
ⓒ 조수영

▲ 무르툭 계곡과 베제클릭 천불동 전경
ⓒ 조수영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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