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 수 없는 사막, 타클라마칸을 지나다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13] 투루판
조수영(sy0707) 기자
돈황에서 투루판으로 가는 길은 항공편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여행자들이 기차를 탄다. 그러나 돈황에는 기차역이 없어 버스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유원(柳圓)역으로 가야 한다.

돌아올 수 없는 사막, 타클라마칸

이제부터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난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한반도 넓이의 1.5배가 넘는 37만㎢의 면적으로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브루노 바우만이 스벤 헤딘의 여정을 그대로 체험하고 쓴 <돌아올 수 없는 사막, 타클라마칸>이란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버스로 2시간을 달리는 동안 산자락은커녕 구릉 하나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하늘과 자갈뿐이다. 아스팔트 도로 위를 모래가 기어 다닌다. 이곳은 모래가 바람에 밀려 이동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교통의 큰 장애가 되었다. 이런 길을 낙타로 오갈 때, 그 공포감은 오죽했을까.

이 사막의 험로에 대해 <삼장법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인적은 물론 하늘을 나는 날짐승도 없는 망망한 천지가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밤에는 요괴의 불이 별처럼 휘황하고 낮에는 죽음의 바람이 모래를 휘몰아와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 두려운 줄 몰랐다.

다만 물이 없어 심한 갈증 때문에 걸을 수조차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5일 동안 물 한 방울 먹지 못하여 입과 배가 말라붙고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아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여윈 말에 몸을 신고 가다 모래위에 엎드려 관음을 염한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


지금도 이곳은 신기루가 곧잘 나타나는 지역이다. 지평선 끝으로 오아시스가 펼쳐지면 기갈이 들린 대상들은 미친 듯이 낙타를 몰았을 것이다. 기차로 휙휙 지나가는 오늘날 나그네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다.

신기루[蜃氣樓, mirage] 가 일어나는 까닭


뜨거운 여름 자동차를 타고 가다 보면 아스팔트 위에 물웅덩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신기루 현상은 빛의 굴절 때문이다.

아스팔트가 햇빛을 받아 뜨거워지면 그 주위의 공기 역시 위의 공기에 비해 뜨거워진다. 뜨거운 공기는 차가운 공기에 비해 밀도가 낮은데 이러한 밀도차이에 의해 빛이 굴절한다.

위의 그림에서와 같이 지면에 있는 공기로 빛이 들어오면 올수록 그 빛은 위쪽으로 휘게 되어 반대편 물체(그림에서 파란색의 하늘)가 지면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즉 이것이 사막의 오아시스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이 사막의 험로에 대해 현장은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인적은 물론 하늘을 나는 날짐승도 없는 망망한 천지가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 조수영

▲ 돈황에서 투루판으로 가는 길은 열차를 타야 한다. 유원역은 돈황에서 가까운 이유로 돈황의 역이 되었다.
ⓒ 조수영
서쪽으로 서쪽으로... 천산북로를 지나다

1950년 러시아 자본으로 세워진 유원역은 돈황에서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돈황의 역이 되었다. 1970년대만 해도 유원역은 티베트의 라사로 통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인구는 6천명이며 철도 노동자가 대부분이다. 유원에 가까워질수록 검은 산은 더 가까워 보이고 땅의 색도 검게 나타났다. 이렇게 천지가 검은 것은 이 곳이 중국 내의 최대 석유산지이기 때문이다.

유원역에서도 X-ray 검사대를 통과하여 대합실로 들어갔다. 기차편명이 LED를 통해 빽빽하게 소개되는데 꼭 공항 같은 기분이다. 4인 1실의 침대칸 루안워를 탔다. 열차가 가는 방향은 계속 서쪽이다. 따라서 뉘엿뉘엿 지는 석양을 오랜 동안 감상할 수 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검고 누런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실크로드 중에서 천산북로(天山北路)를 가고 있는 셈이다.

저녁 9시 반에 돈황을 출발한 기차는 밤새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 다음날 새벽 6시 30분 투루판역에 도착했다. 우루무치까지 가는 열차라 중간에 내리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더니 역무원이 30분이나 정차하니 걱정하지 말라 한다.

이른 새벽인데도 역 앞은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과 그들을 기다리는 여행사 직원과 차들로 복잡하다.

▲ 돈황을 출발한 열차는 서쪽으로 달려 다음날 새벽 투루판역에 도착했다.
ⓒ 조수영

▲ 새벽이지만 역 앞은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과 그들을 기다리는 여행사 직원들로 북적인다.
ⓒ 조수영
아시아의 우물, 투루판(한자어로 吐魯番)

투루판은 위구르어로 '파인 땅', '분지'란 뜻이다. 사방이 높은 산들로 에워싸인 동서 120㎞, 남북 60㎞의 타림분지 속 분지 오아시스다. 지각변동으로 주변의 천산산맥이 융기했을 때 부분적으로 함몰하여 투루판분지가 생긴 것이다.

시내에서 50km떨어져 있는 해발 800m의 기차역에서 시내 호텔에 이르는 길은 내내 내리막길을 가는 기분이다. 투루판 중심부가 해면보다 60m나 낮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투루판의 총면적 5만㎢ 중에서 80%인 4만㎢가 해면보다 낮다.

가장 낮은 곳은 한가운데의 아이딩호(艾丁湖)인데, 수면이 해발 -154m로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사해(-395m) 다음으로 낮은 지역이다. 예로부터 이곳은 '아시아의 우물'이라 불리었다.

강우량도 16.6㎜밖에 되지 않고(우리나라 평균 강우량은 1400㎜이다), 평균 기온이 여름은 45℃의 혹서, 겨울은 영하 20℃의 혹한이라는 가혹한 기후조건이다. 특히 여름철의 체감온도가 60℃에 달해서 살인적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아주 작은 바람이라도 불어오는 것을 차단할 뿐만 아니라, 고도마저 낮으니 태양열이 주위로 발산되지 않는 것이다.

위구르인들은 투루판을 가리켜 최열, 최저, 최조, 최감의 도시라고 설명한다. 기온이 땅 위에 놓은 계란이 익어버릴 정도라 최열이고, 지면이 해면보다 낮아 최저이고, 건조해서 최조이지만, 일교차가 크고 햇빛이 강해 포도의 단맛이 뛰어나서 최감인 것이다.

▲ 시내 곳곳에 있는 포도넝쿨은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고 있다.
ⓒ 조수영

▲ 투루판의 포도는 통풍이 잘되는 집을 지어 말리고 있었다.
ⓒ 조수영
이러한 기후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예로부터 북서쪽은 우루무치, 남서쪽은 카슈가르, 남동쪽은 감숙성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도시의 북서쪽에 있는 야르호토에는 차사국의 교하성이 있었고, 남동쪽의 카라호토에는 고창국의 수도였던 고창성이 지어졌다. 그 때문에 청대 이전까지는 분지 전체를 고창 또는 호토라고 불렀다. 오늘날 50만 인구 중에서 위구르족과 회족, 한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달빛 아래서 빛을 낸다는 야광잔

돈황과 투루판 근처에는 어렵지 않게 야광잔을 파는 상점을 볼 수 있었다. 기련산맥에서 나는 야광옥은 순수 수작업으로 다양한 모양으로 가공되고 있다. 야광이라고 하지만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은 아니고, 이 잔에 포도주를 따라 달빛에 비추면 곳곳에 있는 반투명한 부분이 비치는 것이다.

당나라 시인 왕한(王翰)은 야광잔으로 마시는 포도주와 변방의 군인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葡萄美酒夜光杯
欲飮琵琶馬上在催
酒臥沙場君莫笑
古來征戰幾人回

감미로운 포도주를 야광잔에 담아
마시려는데 말 위의 비파는 재촉하네
취하여 모래밭에 누웠다고 웃지 마시오
예로부터 전쟁에 나간 사람이 몇이나 돌아왔는가


▲ (왼쪽)야광잔에 포도주를 따라 달빛에 비추면 빛을 낸다고 한다. (오른쪽) 야광잔은 순수 수작업으로 만들어 진다.
ⓒ 조수영

▲ (왼쪽) 낙타발 요리. 낙타의 발에는 관절이 3개나 있어 관절염에 좋다고 한다. 그러나 고기는 무지 질기다. (오른쪽) 당나귀고기 요리. 퍽퍽한 살코기 맛이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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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11 편)

(2006` 6, 17 ~ 6, 25)

아스타나 고분군 세 분묘 봐

아스타나 고분군으로 들어가는 입구 광장엔 12지신을 형상화한 석상과 ‘복희여와도’를 조각한 석탑이 세워져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반신이 뱀인 복희와 여와는 마주 바라보는 형상이다. 1914년 영국탐험대가 발견한 이 지하무덤 군에서는 문서 외에도 묘표, 토우, 견직물, 그리고 미라가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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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된 아스타나 고분군 일대. 담장 밖엔 '복희와 여와'를 상징한 석조물이 서있다. 뒷 편엔 화염산맥이 둘렀다.)

일행은 발굴을 끝내고 공개하고 있는 분묘 세 곳을 들어가 봤다. 216호분 정면엔 6첩 병풍이 그려졌다. 바로 유교의 윤리적인 지침이 그 내용이다. 그 중 4첩은 성인도로 앞가슴이나 등에 ‘옥인(玉人)’, ‘금인(金人)’, ‘석인(石人)’, ‘목인(木人)’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즉 공자묘의 네 성인을 말하는 것이다. 흰옷 입은 ‘옥인’은 청렴결백을, 입을 삼중으로 막은 ‘금인’은 언행의 신중함을, ‘석인’은 돌처럼 흔들리지 않는 결심부동을, ‘목인’은 거짓이 없고 올바른 무위정직(無爲正直)을 뜻한다.

나머지 두 굴도 지하로 비스듬히 뚫려있는 널길을 따라 들어가면 널방이 나오고, 널방엔 각종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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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나 고분군 입구 전경. 12지 상과 '복희와 여와'를 조각한 작품들이 묘지를 지키고 있다.)

이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중 몇 점이 서울국립중앙박물관 ‘오타니 컬렉션’에 전시 중이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묘표, 무덤을 지켜주는 진묘수, 직조유물 등 여러 가지 부장품들이다. 이중 특히 주목을 끄는 유물은 복희와 여와를 그린 삼베그림이다. 이 그림은 채색이나 구도 등이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강행군이다. 이어 시내에서 45km나 떨어진 화염산 동편 무르투크강(木頭江) 왼쪽기슭 낭떠러지에 판 백자극리극(柏孜克里克 : 베제클리크: Bezekliq) 천불동을 찾았다. 화염산이 그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 다른 산봉우리와 달리 이 산만은 온통 붉은 2층 모래 산이다. 너무 아름다웠다. 주차장 위쪽 붉은 모래밭엔 낙타가 몇 마리가 관광객을 기다린다. 불같은 더위가 온 몸을 벌겋게 불태워 버려도 낙타를 타고 저 아름다운 붉은 모래 산을 오르고 싶어졌다. 그러나 어쩌랴! 패키지여행이라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없으니깐. 충동을 억지로 참으면서 굴 입구로 들어간다.


서원화 가득 찬 백자극리극

굴 입구를 통해 이 산 기슭을 가로 질러 계곡에 이르면 강물이 흐르고, 톈산산맥의 눈 덮인 고봉준령이 한 눈 가득히 다가오는 풍경을 만난다. 또 놀란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눈 덮인 하얀 높은 봉우리들이 연이어졌으니~~~. 힘이 부쳐 쓰러지더라도 오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입구 광장에서 계단을 타고 10m를 내려간다. 깎아지른 듯한 협곡, 초승달 모양의 벼랑에 굴이 숭숭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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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산맥 중엔 이렇게 아름다운 봉우리도 있어 깜짝 놀랐다. 명사산이나 진 배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붉은 모래로 이뤄진 산이다. 불같은 더위가 온몸을 불살라 버려도 낙타를 타고 이 산을 오르고 싶었다.)

‘백자극리극’이란 말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란 뜻을 가진다. 이 굴 사원은 모두 83개의 굴이 있었으나 지금은 57개굴만 남아있다. 그 중 훼손됐지만 남은 벽화가 있는 곳은 40여 개 굴이다. 굴은 사암을 뚫어서 만든 것도 있고, 흙벽돌을 쌓아 전실과 본실의 일부 또는 전부를 만든 것도 상당수에 달했다.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 420 ~ 589) 후기다. 국씨 고창국 시대부터 그 후 당(唐)과 오대(五代), 송(宋), 원(元) 등 7세기에 걸쳐 이룩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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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을 숭숭 뚫어 만든 백자극리극 천불동 모습. 사암을 뚫은 굴과 벽돌을 쌓아 전 후실을 만들기도 한 굴들을 볼 수 있다. 굴 내부 사진 촬영은 할 수 없다. 굴 안 벽화와 부처는 철저히 훼손되었다.)

전성기는 10세기를 전후한 회골(回鶻) 칸국 시대다. 이 때 이 동굴사원은 왕실 전속사원이었다고 전한다. 칸국 시대의 공양상과 경변도(經變圖) 보살도 등은 장엄하다는 평을 듣는다. 투루판의 석굴 중 가장 크고, 벽화의 내용도 풍부하다. 벽화의 내용은 주로 서원화(誓願畵)다. 전생의 석가부처가 과거 불에게 공양을 올려 미래 성불을 보장받는다는 줄거리를 다채롭게 윤색해 그린 것들이다. 벽화를 통해 불법을 전파하려던 노력의 흔적이다.

우린 몇 개의 굴을 둘러봤다. 17호 굴은 불상은 사라지고 광배만 남았다. 천정의 벽화도 거의 뜯겼다. 남은 벽화 중 불상의 눈이란 눈은 몽땅 예리한 칼로 도려내버렸다.

20호 굴은 회골 칸국 시대의 공양도로 유명하다. 굴에 들어서면 중앙에 정방형의 중당이 있고, 그 주위에는 좁은 회랑이 둘렀다. 중당의 좌 우 벽엔 서원을 주제로 한 왕이나 귀족들의 공양도가 그려졌다. 이 벽화는 거의 뜯겨졌다. 독일인 그륀베델의 소행이란다.


문명 파괴행위 극명한 현장

또 33굴 뒷벽에는 석가의 열반을 그린 벽화가 있다. 이 벽화도 아랫부분은 없어지고 윗부분만 남아있다. 벽화의 오른쪽에는 석가열반을 애도하기 위해 각국에서 온 100여명의 왕자들이 도열해 있고, 왼쪽에는 보살과 천룡팔부(天龍八部) 등 호법신이 그려졌다. 왕자들의 눈은 거의 훼손되지 않고 온전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문명파괴행위의 극명한 현장이다. 벽화와 불상 등은 이곳 주민들이 대부분 파괴했다. 주민들이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들 유물을 우상숭배라고 여겨 난도질을 하는 등 크게 훼손해 버렸다. 남은 벽화도 더 뜯어가지 못하도록 흙으로 덧칠을 해놓았다. 훼손된 벽화는 20세기 초까지 그대로 남아있었으나 외국인들이 불상은 물론 벽화까지 그대로 뜯어 가져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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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름다운 화염산의 한 장면이라 다시 올려봤다. 붉은 모래산 뒷편엔 사암의 산봉우리가 보인다. 머리에 흰 눈을 인 천산산맥이 손에 잡힐 듯 한 그 모습은 역광이라 사진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독일인 그륀베델(Grunwedel, Albert : 1856 ~ 1935)을 비롯해 영국인, 러시아인, 그리고 일본 승려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 1876 ~ 1948)와 그의 탐험대 등이 이곳 불상과 뜯어낸 벽화를 가져가 버렸다.

그륀베델은 가져간 유물을 베를린 박물관에 넘겨 진열까지 했으나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한편 일본 오타니 탐험대가 가져간 벽화 4점이 조선총독부에 기증되면서 서울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지금 이 벽화를 복원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들 유적을 도굴하려는 각축전이 열강 사이에 벌어졌다. 독일과 러시아는 무력충돌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유물의 수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60 ~ 1970년 중국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홍위병의 난동도 유물 수난사에 한 수 거들었다. 이처럼 종교에 의해, 도굴꾼들에 의해, 이념에 의해 삼중으로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현장법사 ‘81난’ 그림으로

굴 입구 광장 상점에 제동식 사장이 냉동시킨 수박을 잘라놓고 우리 팀을 기다렸다. 하긴 목이 컬컬했다. 물을 마셔봐야 갈증이 해소될 리 없다. 얼린 생맥주 한 잔이 제격이련만 어찌 그것을 이곳에서 구한단 말인가. 수박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엄청나게 시원했다. 번쩍 정신이 났다. 가이드도 하는 수 없이 일행에게 수박을 샀다. 그러나 그 수박은 그렇게 시원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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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산맥 전경을 축소한 조감도. '신강대막토예관'의 실내이기 때문에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발길은 또 쉼 없이 이어진다. 소설 ‘서유기(西遊記)’의 주인공 손오공(孫悟空)이 등장하는 무대, 즉 화염산(火焰山 : Flaming Mountain)을 찾았다. 화염산 앞엔 신강대막토예관(新疆大漠土藝館 : Xinjiang Great Desert Local Art Gallery)이라는 지하건물이 있고, 건물밖엔 현장법사 일행의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특히 파초선(芭蕉扇)을 든 손오공의 모습이 확 띄었다. 또 그 옆엔 낙타가 관광객을 기다린다.

건물 안에는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가는 동안 만나는 81난(難)의 과정, 그리고 손오공이 72반(般) 변술(變術)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근두운(觔斗雲 )을 타고 10만 8천리를 단숨에 나는 그림을 재미있게 그렸다. 칠선공주에게 파초선을 빌려 마흔아홉 번 부채질해 화염산 불길을 잡고 비를 내리게 해 무사히 건너는 과정은 물론 하이라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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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산, 이글대는 햇볕과 타오를 듯한붉은 모래밭에 두 발을 딛고섰기에 이렇게 올려봤다. 대문사진이 바로 이것을 축소한 것이다. 너무 더워 사진을 찍을 수 조차 없었다. 다른 사진이 없어 안타까웠다.)

또 화염산맥 전경 조감도를 만들어 전시했다. 붉은 사암(紅砂巖)으로 이뤄진 화염산은 동서길이가 100km, 남북이 9km에 이른다. 최고봉은 851m의 승금구(勝金口)다. 우리나라로 치면 당연히 화염산을 화염산맥으로 대접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맥에 비해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광대한 영토를 가진 이곳에선 누구도 ‘화염산맥’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단지 조선족 가이드만 ‘화염산맥’이라고 표현해 주목을 받았다. 또 전시관 안엔 세계에서 가장 큰 온도계를 만들어 두기도 했다. 온도계는 천장을 뚫고 땅 위에 머리를 내놓고 있다. 당시 온도는 섭씨 41도를 가리켰다.


이슬람 상징물 소공탑 들러

전시관을 돌아나가면 화염산이 뒤를 두르고 있다. 바로 ‘火焰山(화염산)’이란 표지 석을 세워둔 곳이다. 이를 배경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촬영하는 곳이다. 우리 팀도 물론 단체사진과 독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듯한 지열과 햇볕으로 온몸은 찜통에 들어간 것처럼 흠뻑 젖어버린다. 나는 글로서 도저히 화염산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참 안타까운 마음 가득 안고 버스에 올랐다.

호텔로 돌아와 샤워하고 저녁을 먹는 뒤 위구르족 민속 쇼를 관람하는 것으로 오늘의 일정이 마감된다고 했다. 간편한 차림으로 로비에 모였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줄 알았더니만 시간이 일어서인지 이슬람사원의 하나인 소공탑(蘇公塔 : Emin Minatet) 주차장에 버스가 닿았다. 바로 시내 변두리 포도밭에 둘러싸인 곳에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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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탑에서 바라본 투루판의 한 농촌지역. 포풀러와 포도밭이 푸름을 더해준다. 여기가 과연 사막 속일까? 하는 의문이 일 정도다.)

이슬람교는 8세기 전반 신강의 서부지역인 카슈가르 등지에 전파됐다. 그 뒤 10세기에 들어 이 지역을 통치했던 카라한 왕조(Karakhanid dynasty : 999 ~ 1233)가 이슬람교를 수용했던 것이다. 이어 13세기 초 이슬람교가 투루판까지 전파된다. 16세기 말쯤에는 투루판을 비롯한 신강전지역에 이슬람교가 휩쓸면서 다른 종교는 이 지역에서 사라져버린다. 사막의 등대 노릇도 해주는 소공탑은 이러한 이슬람교 상징물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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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탑이다. 흙벽돌로 쌓은 높은 탑이지만 외관만 봐도 얼마나 공을 들인 축조물인지?를 단 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흙벽돌로 쌓은 이 탑은 높이 37m, 밑지름이 10m에 달한다. 신장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첫 투루판 군왕이 된 애민호자(額敏和卓 : Emin Hoja)를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술라이만이 1777년 세운 탑이다. 당시 7천량이란 거액이 공사비가 들어갔다고 한다. 흙벽돌로 지었지만 외관은 아름다운 문양을 새겼다. 채색된 타일로 모자이크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흙으로 체크무늬, 꽃무늬, 파도무늬 등을 수놓았다. 소공탑 아래의 모스크에는 지금도 예배를 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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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10 편)

(2006` 6, 17~ 6, 25)

토욕구 천불동의 해프닝

투루판에서의 첫 관광지 토욕구 천불동을 찾았다. 시가지 중심에서 동쪽으로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수바스 강을 낀 ‘토욕구’라는 계곡이 나타났다. 그 계곡 동 . 서 양쪽 언덕에 올망졸망한 굴들이 뚫려있다. 동굴 수는 모두 94개다. 주차장에서 굴까지는 아마 2km 가까운 거리로 여겨진다. 이 동굴군은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1879년 이 동굴 군(群)이 발견됐으나 2005년 10월에서야 공식적으로 공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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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욕구 천불동 가는 길에있는 회족 마을. 포도 건조장이 건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기서 일행 중 한분과 우리 팀 사이에 말썽이 일어났다. 주차장에 있는 화장실을 간 홍 단장이 늦었다. 그동안 일행들은 굴을 향해 떠나버렸다. 굴은 조그마한 회족마을을 거쳐 강둑을 따라 올라가야했다. 팀 7명이 홍 단장을 기다렸다가 늦게 뒤따라 나섰다. 이미 일행들은 마을을 거쳐 강둑으로 가 버린 뒤다.

마을에 들어서자 삼거리가 나타났다. 7명은 우왕좌왕했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몰라 헤맨 것이다. 마을 주민들에게 손짓 발짓으로 물어물어 강둑길에 들어섰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친김이라 강둑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천불동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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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그마한 마을에도 모스크가 있다. 모스크 앞엔 기도를 드리고 나온 회족 주민들이 보인다. 우린 이 지점에서 토욕구 천불동을 가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매었다.)

일행들은 이미 굴 몇 개를 거친 뒤다. 또 다른 굴에서 가이드의 해설은 이어지고 있었다. 난 현지 가이드와 서울 한진관광 장진경양을 불렀다. “30여명의 많은 식구들이 이동하는데, 일부가 보이지 않으면 가이드 중 한사람은 남아서 뒤따라오는 사람을 챙겨야하지 않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게 화근이었다. “늦게 온 사람들이 잘못이지? 왜 가이드에게 화를 내느냐?”고 어느 분이 큰소리로 되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소릴 직접 들었다면 당장 시끄러웠을 터인데, 직접 듣지 못해 지나쳤다.


불교 마니교 공존 동굴

가이드 두 명 모두 “잘못했습니다.”고 사과했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해설해야하지 않느냐?”고 하자 “남은 굴 다 보고, 못 본 굴은 다시 설명하겠습니다.”고 해 말썽이 어느 정도 수습됐다. 그러나 우리 팀 7명 중 4 ~ 5명은 어이가 없는 듯 굴에도 들어오지 않고 굴 밖에서 서성였다. 이들에게 큰 소리로 되받았던 분은 자기부인의 성화에 못 견뎌서 인지는 몰라도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이해해주세요.”라고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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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바스 강가엔 이렇게 식물들이 푸름을 자랑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편엔이글대는 화염산맥 줄기가 뻗어있다.)

관광객이 크게 붐비는 로마나 파리 루브르박물관 등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전체 관광 일정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을 터인데. 장진경양은 물론 현지가이드도 조용한 실크로드에서의 관광안내만을 했기에 경험부족에서 이 같은 실수를 했던 것으로 여기고 넘겨야했다. 그러나 큰소리로 되받은 분의 행위는 ‘불쑥 뱉은 실언’이라고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그 분이 한 얘기를 뒤늦게 다 듣곤 저녁에 단단히 따지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그 분 부인께서 점심식사가 끝나자마자 찾아와 “제 남편이 잘못했습니다. 이해해주세요.”라고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없었던 일로 치부할 수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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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욕구 천불동도 사진을 못 찍게 했다. 천불동을 보고 나무로 만든 사다리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일행들 모습.)

이 동굴사원은 참 특이했다. 불교와 마니교가 공존하는 사원이란 점이다. 마니교 동굴사원이라고 말하는 42굴을 보면 동 서벽에는 불교의 관상(觀想)에 관한 벽화가 남아있다. 후일 마니교가 들어오면서 중앙 벽에는 나뭇가지마다 금박장식을 한 ‘생명의 나무’ 49개를 비롯해 온통 마니교 관련 그림들이 들어차버렸다. 또 이 굴에서는 마니교 경전도 발견됐다고 한다.

공개한 다른 굴들도 이와 비슷한 벽화들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 동굴들의 유물도 도굴의 대상이었음은 말할 나위없다. 독일 영국 러시아 일본의 탐험대란 미명의 도굴꾼들이 불상 등 유물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 물론 벽화도 오려내 가져갔고.


고창고성 입구 시장 통 같아

‘토욕구’ 천불동은 사실 제대로 보지 못했다. 뒤늦게 굴에 닿았고, 거기다가 해프닝까지 일었으니 굴 몇 개를 봤는지도 확실하게 기억할 수 없다. 단지 남아있는 벽화도 크게 훼손되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천불동을 가는 길에 위치한 조그마한 회족마을에도 모스크가 자리했고, 예배를 보고 나오는 주민들을 본 게 퍽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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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건조장이 있으면 포도밭이 있기 마련. 회족 마을 야트막한 언덕 밭, 포도나무 무성한 잎이 태양을 받아 더욱 푸른 빛을 냈다.)

그 마을 언덕엔 영국인 도굴꾼 스테인이 거주했던 주택도 아직 남아있었다. 또 주차장을 지나 좀 큰 빈터 나무그늘엔 좌판에 수박과 멜론, 그리고 오디를 내어놓은 상인들이 자리하기도 했다. 상인들은 일행에게 과일을 사라고 권하지도 않고, 그저 덤덤하게 자리만 지켰다.


(마니교 摩尼敎 Manichaeism : 3세기 페르시아왕국의 ‘마니’가 창시한 이란 고유의 종교.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拜火敎)에서 분파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여러 요소를 가미한 종교다. 이 교리에는 육식과 음주를 엄금하고, 악행을 삼가고, 정욕을 멀리해야 한다고 돼있다. 마니교는 당시 교세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중앙아시아는 물론 로마제국까지, 그리고 인도 중국까지 전파됐으나 13 ~ 14세기에 소멸됐다. 이 종교는 동 서양을 문화적으로 연결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일행은 토욕구 천불동에서 15km 떨어진 고창고성(高昌故城)을 찾았다. 고성 주차장부터 출입구까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큰 차일 아래 갖가지 민예품을 파는 점포들이 즐비했다. 노인 아이 가릴 수 없는 수많은 상인들이 손에 손에 물건을 들고 나와 사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상인들 사이를 뚫고 출입구까지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입구를 들어서니 황량한 붉은 벌판엔 무너진 흙더미들만 가득 펼쳐졌다. 햇볕은 벌써 이글댔다. 붉어스럼한 땅바닥은 아지랑이가 일듯 복사열을 내뿜었다. 먼지구덩이였다. 물 한 방울 떨어뜨리면 미세한 먼지가 마치 춤을 추듯 했다. 이런 곳에서도 잡초는 듬성듬성 자랐다. 끈질긴 생명력에 경외감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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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고성. 폐허의 흙더미 속에 난 도로를 따라 관관객 한 그룹이 햇볕을 피하기 위해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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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만 폴삭이는 황량한 땅이지만 잡초는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끈질긴 생명력에 경외감마저 일었다.)

장방형인 성 둘레가 5.4km다. 수나라의 장안성과 흡사하게 만들었단다. 뜨거운 햇볕아래 먼지구덩이 속 긴 길을 걸을 수가 없다. 당나귀가 끄는 수레가 관광객을 태워 서남쪽의 큰 사찰과 궁성 터 등지에 내려다준다. 당나귀수레가 다니는 길은 발목이 푹푹 빠질 정도의 먼지가 가득 쌓인 길이다. 폴싹거리면 먼지를 뒤집어 설 수밖에 없었다.


늙은 악사 현 퉁긴 소리 가득

‘츄~, 츄~’, ‘워~, 워~’. 당나귀수레 마부는 신이 나 목청을 돋웠다. 일거리가 생겼으니깐. ‘츄~, 츄~’를 외쳤지만 나귀가 빨리 달리지 않는다고 엉덩이에 채찍질을 해댔다. 마부는 젊은이에서부터 늙은이들까지 섞였다. 그들은 노소에 관계없이 맞담배질했다. 나귀수레엔 보통 6 ~ 7명이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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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가 관광객을 실고 발목이 푹푹 빠지는 먼지구덩이를 달리고 있다. 그 놈의 엉덩이엔 '츄~, 츄~'라는 마부의 고함과 함께 채찍질이 가해지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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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을 태워놓고 잠시 땡볕 아래서지만 쉬고 있는 당나귀, 마차와 마부들. 마차 바닥엔 붉은 카페트가 깔려있어 이채롭다.)

내가 탄 수레의 마부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이다. 나에게 “한국 담배~”라면서 손을 내민다. 우리 담배를 달라는 얘기다. “에잇! 버릇없는 놈”이라고 호통 쳤다. 그러나 마부가 알아들을 턱이 없음은 물론이다. 목적지에 닿아 담배를 피우는 장준환 이사에게 담배 한 가비를 얻어뒀다. 돌아갈 때 주니깐 ‘고맙다’는 인사는 고사하고, 한 갑 통째로 주지 않는다고 얼굴이 부었다.

허물어진 왕성과 사찰 내엔 위구르족과 회족 처녀들이 각각의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췄다. 늙은 악사가 현을 튕기는 이름 모를 악기소리에 맞춰 흥겨운 듯 너울댔다. 그들을 보면서 까닭 모를 슬픔이 살며시 고였다. 그들의 고된 삶이 애처로워서일까? 아니면 폐허더미에서 피어난 몇 송이의 꽃들 때문이었을까? 그리곤 함께 사진을 찍자고 팔을 끈다. 물론 사진모텔이 돼주곤 팁을 받기 위함이다. 처녀들은 땡볕아래 늘 노출되어있어 얼굴은 가무잡잡했지만 윤곽이 뚜렷한 미녀타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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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의 의상을 입은 처녀들이 춤을 추곤 관광객들에게 모델이 되어줄 것을 자청하고 있다.붉은 색의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궁성과 사찰 등 모든 건축물은 분토나 흙벽돌로 지어졌다. 물론 불에 구운 것이 아니라 햇볕에 말린 벽돌이다. 사찰과 불탑은 그래도 잘 보존된 셈이다. 사찰 안에 들어갈 수도 있다. 벽돌 위에 흙칠을 입히기도 했다. 현장법사가 설법했다던 절 안을 둘러봤다. 인도식 복발(覆鉢 : 탑의 노반 위에 주발을 엎어놓은 것처럼 만든 장식)과 방형 탑 형태가 보였다. 바로 인도에서 동전(東傳)된 불교유적과 유물이란 걸 알 수 있다.


‘츄~', 귓전 맴돈 고함소리만

벽돌로 쌓은 높은 벽채와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졌다. 비가 오지 않으니깐 1천 5백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래도 잘도 버텨내었다. 허물어진 벽채 옆 그늘에서 당나귀수레가 오기를 기다린다. 장구한 세월의 흐름, 그리고 한 때 융성했다가 폐허더미로 변해버린 잔해에서 그 무상함을 느껴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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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속에서 남아있는 유적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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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은 흙으로 만든 벽돌로 쌓아올려 세운 건물임을 당장에알 수 있게 해주었다.)

고창국(高昌國) 시절인 629년 당나라 고승 현장(玄奘: 602 ~ 664)법사는 불교경전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가다가 중간에 이 나라에 들렸다. 국왕 국문태(麴文泰)는 법사를 귀하게 대접해 한 달간 머물도록 하면서 설법을 듣기도 했다. 그는 법사가 인도까지 거치는 여러 나라(도시소국)에 “편의를 봐주라”는 친서를 쓰서 들려주는 등 융숭하게 대접했다. 또 귀국길에 꼭 다시 들릴 것을 부탁했다. 641년 법사가 많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다시 찾았을 땐 이미 고창국은 당나라에 멸망해 버린 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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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법사가 고창국 국왕에게 설법을 했다는 큰 사원의 전경. 이 사원만은 비교적 보존이 잘되어 있었다.)

이 고창국성은 13세기에 몽고가 휩쓸었고, 이슬람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끝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츄~, 츄~'라는 젊은 마부의 귓전을 맴도는 고함소리를 뒤로 하고 고성을 빠져나왔다. 그 고함소리 영영 지울 수가 없다.

이곳을 오가는 도중 회족 집단거주지를 봤다. 이들은 그들 특유의 빵모자를 즐겨 썼다. 양을 잡아 생고기를 부위 채로 삼륜오토바이에 걸어놓고 길거리에서 팔았다. 그들의 주거상황이나 시장 등 생활상은 우리의 60년대 후반과 비슷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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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족 집단거주지의 거리 모습. 음식점엔 점심 때가 가까워 오자 음식을 만들어 내면서 연기를 피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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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잡아 오토바이 짐차에 고기를 부위별로 걸어놓고 파는 상인이 돈을 센다. 그들은 어른이면 한결같이 다 전통적인 모자를 쓴다.)

버스에 올라 아스타나 고분군을 향했다. 고창국과 당나라 때 무덤 군(群)이다. 발굴된 무덤이 456기나 된다. 이들 무덤에서 2.700여 건의 문서가 출토됐다. 그 중 300여 건은 위구르어 등 소수민족 언어로 쓰인 불교 ․ 마니교 등의 종교문서다. 또 중국 신화에 인류 시조로 전하는 ‘복희여와도’도 출토돼 주목을 끌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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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9 편)

(2006` 6, 17 ~ 6, 25)

이글대는 화염산맥과 해 내림

쿠무타크 사막에서 홍 단장과 제(諸) 사장 두 분은 모래구릉을 달리는 특수차량을 탔다. 구릉을 오르내릴 때 얼마나 속력을 내는지 간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스릴 만점이었다고 자랑했다. 홍 단장은 차량이 일으키는 바람으로 쓴 모자를 사막에 날려버렸다.

사구(砂丘)의 칼 능선에선 모래바람이 불어 지형을 자꾸만 바꾸어 가는 모습을 육안으로도 볼 수 있었다. 참 신기했다. 그만큼 모래 입자가 잘고 보드라웠다. 일행은 이곳에서도 ‘하미과’를 사먹었다. 더위에 지쳤는데, ‘하미과’의 독특한 맛은 곧 열을 식혀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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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으로 가는 도로 아랫쪽 강가의 포도밭. 오아시스 주변엔 이런 포도밭들이 수도 없이 많다.)

다시 버스에 올랐다. 투루판(吐魯蕃: 토로번)으로 향했다. 두 시간을 달려야 투루판에 닿을 수 있단다. 한 시간 이상을 달렸을까? 서유기(西遊記)에 등장하는 화염산맥(火焰山脈)의 끝자락인 듯한 벌거숭이 붉은빛 바위산 봉우리들이 연이어져 나타났다. 벌써 시간은 오후 8시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막과 화염산엔 아직 노염이 이글거렸다. 붉은 빛깔을 띤 산은 이글거리는 햇살을 받아 더욱 붉게 타오르는 듯 보였다.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참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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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만난 해넘이 장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찍은 것이라 신통치 않다.)

도로는 이 불타오르면서 이어진 화염산맥 연봉의 능선을 바라보면서 계곡으로 이어졌다. 그 계곡엔 시원한 물줄기가 보였다. 양떼와 소떼가 강가에 싱싱하게 자란 풀을 뜯는 모습이 생경스럽게 느껴졌다. 또 포도밭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어느 모롱이를 돌아들자 화염산 연봉이 반대쪽으로 돌았고, 그 기슭으로부터는 또 넓은 사막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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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 시내에 있는 한 농가. 아랫층엔 주거지역이고 2층은 포도를 말리는 건조장이다.)

모래벌판엔 석유를 퍼 올리는 펌프가 연신 끄덕 끄덕 고갯짓을 해댔다. 펌프 수가 엄청났다. 이들 펌프는 곧바로 떨어지는 해를 등졌다. 사막에서 장엄한 해넘이가 시작됐다. 해는 화염산 건너 더 먼 천산산맥의 높은 봉우리의 허리에 걸리면서 붉은 빛을 토해냈다. 붉디붉은 빛이다. 산도 모래도 함께 붉게 물들어갔다. 단지 모래땅 위에 돋아난 소금기만은 더욱 하얀 빛을 발하면서 붉음 속에서 너울너울 춤추듯 했다. 마치 강모래 위를 쓸고 지나간 물줄기가 남긴 흰 거품처럼. 이때가 아마 저녁 9시 30분에 가까웠다. 붉은 빛을 토해내던 해가 빛을 머금고 서서히 산마루로 자취를 감추면서 땅거미가 찾아든 시간은 9시 50분쯤이었다.


‘3-3-7’로 자정 넘긴 술판

이즈음 버스는 투루판 시가지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시가지엔 가로등 불빛이 켜지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시가지 복판도로변 한 공원엔 인파가 북적댔다. 장사꾼들도 과일과 다른 물건을 리어카에 실고 나와 가스 불을 밝혔다. 여장을 풀곤 바로 이 공원을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투루판 빈관(賓館)에 닿아 버스에 내려서자 그만 숨이 꽉 막혀버린다. 해가 떨어졌지만 낮 동안 바짝 단 지열은 낯선 객의 호흡조차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곳을 두고 원(元) 명(明) 때 ‘화주(火州)’라고 부른 것이 과연 허명(虛名)이 아님을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공원을 가봐야겠다”는 마음은 천리만리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빨리 룸으로 가 시원 물로 샤워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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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돋아난 소금이 낙조를 받아 마치 물거품처럼 보인다.)

배정된 방을 찾아선 바로 샤워를 했다. 권 방장(方丈)께선 선순위를 양보해주었다. 방장이 샤워할 동안 목이 컬컬하게 탔다. 시원한 맥주 한 컵 쭉 들이켰으면 하는 마음 급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홍 단장 룸으로 집합!”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얼마나 반가운 명령이 이었을까. 단장 룸엔 이미 술상이 차려져있었다. 들어오는 이에겐 맥주 컵이 안겨졌다. 호텔 바에 찬 맥주를 배달시켰던 것이다.

여성을 뺀 여덟 명이 다 모이는 덴 채 5분이 안 걸렸다. 모두가 컬컬한 참이라 술잔 돌아가는 속도가 빨랐다. 한 박스가 게눈 감춰지듯 사라졌다. 또 열병을 시켜서는 폭탄주를 만들어 돌렸다. 나는 일어서서 폭탄 컵을 들고 또 “전 3-3-7로 하겠습니다.”고 했다. ‘3-3-7’ 박수를 칠 동안 컵을 다 비우지 못하면 벌주로 한 컵을 더 마시겠다는 서약이다. 다른 친구들은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짝짝짝짝!’, 이렇게 손뼉을 쳐준다. 컵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어떤 친구가 또 ‘3-3-7’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이렇게 몇 순배 돈 후 얼큰해지면 ‘3-3-7’이 ‘3-3’으로 바뀌고 만다. 어느 듯 자정을 넘겼다.

투루판, 새벽도 후덥지근해

벌써 여행도 절반을 훌쩍 지났다. 투루판은 새벽기온도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 6시. 그 때도 후덥지근했다. 이정길 사장은 벌써 호텔주변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그와 함께 다시 호텔주변 산책에 나섰다. 많은 주민들은 더위 때문에 가로수 밑에 평상을 내놓고 잠을 잤다. 담요 한 장을 덮었지만 다 걷어차 버린 지 오래로 보였다. 그래도 새벽나절이라 시원하니깐 단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부지런한 상인도 보였다. 빵을 구워 파는 아저씨는 언제 일어났는지 페치카 벽에 붙여 잘 구워진 빵을 꺼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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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 시내 어느 도로변의 새벽녘 모습. 집 앞엔 평상들이 놓여있다. 더운 날씨로 사람들이 평상에서 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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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인데도 화덕에서 빵을 구워내 접씨에 담아 진열하고 있다. 화덕 일부를 비닐로 덮어 진열대로도 이용했다.)

투루판. 북쪽은 천산산맥, 동북쪽엔 보고타산맥이, 남서쪽으로는 크루카다크산맥이 둘러싼 동서 120km, 남북 60km 크기의 사막 분지다. 투루판의 중심부는 해면보다 60m가 낮다. 또 총면적 5만㎢ 중 80%인 4만㎢가 해면보다 낮은 지역이다. 이 분지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낮은 아이딩 호수(愛丁湖)가 있다. 이 호수는 해발 -154m다. 따라서 이 분지를 ‘아시아의 우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름철 기온은 섭씨 40 ~ 50°가 보통일 정도로 무척 덥다. 한 여름 낮 기온 50°에 지열까지 합하면 80°를 넘은 적도 있단다. 연간 강우량은 20 ~ 40mm에 불과한데, 증발양은 3.000mm가 넘는다. 그러니 사막화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만년설 덮인 주변 고산지대는 차기 때문에 봄에는 강풍이 몰아친다.

이곳 지세는 고온, 건조, 강풍의 세 가지지로 특징지어 진다. 그래서 화주(火州 : 불의 땅), 사주(沙州 : 모래의 땅) 풍주(風州 : 바람의 땅)라고 불려졌다. 북서쪽은 우루무치, 남서쪽은 카슈가르, 남동쪽은 돈황 등 감숙성으로 연결되는 교통 요지라 예부터 뺏고 뺏기는 이민족간 전쟁이 잦았던 곳이다.

동 서 문명교류의 십자로’인 이 오아시스 고도(古都) 투루판 역사의 뒤안길에는 쉼 없는 전란과 학살이 이어진‘분쟁의 터’라는 그늘이 서려있다. 하서회랑의 서쪽 끝 돈황이 서역문화를 걸러 중국으로 받아들이는 병목이었다면 서역 타림분지 위쪽의 투루판은 톈산북로와 남로로 들어온 서역 이민족의 문화와 서쪽으로 뻗어가려는 중국문화가 한자리에 질펀하게 부려져 뒤섞인 후 융합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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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 빈관 앞 도로를 덮은포도넝쿨. 대형버스도 통행하는 도로를 이렇게 포도넝쿨로 완전히 덮어 '포도고장'이라는 정취를 물씬 풍기게했다.)

이 도시의 북서쪽에 있는 야르호토는 한대(漢代)의 사서에 차사국(車師國)이라고 기록된 교하성(交河城)이고, 남서쪽의 카라호토는 고창국(高昌國)의 수도 고창성(高昌城)이다. 청대(淸代) 이전까지는 분지 전체를 고창 또는 ‘호토’라고 불렀다. 이 지역이 중국역사에 등장한 것은 BC 2세기경인 전한(前漢)시대부터다.

차사국(車師國)이 바로 이 때 투루판지역을 통치했던 국가다. 차사국의 주민은 이란계로 알려져 있으며, 우루무치까지 방대한 지역에 세력을 뻗쳤다. 이 때 차사국은 흉노에게 조공을 받치고 있었다. 흉노는 서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에 둔전병 4.000여 명을 주둔시키면서 차사국을 조종할 정도로 중요시했다.

한(漢)은 이 흉노와 끊임없이 다투었다. 소제(昭帝: BC 94 ~ 74)때 군사 20만 명을 출동시키자 흉노군은 피해 달아나고 차사국은 하는 수 없이 한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 때 차사국의 수도가 교하성이다.

한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흉노가 다시 들어와 분탕질을 쳤다. 한은 BC 68년 정길을 대장으로 한 원정군을 또 파견해 흉노를 물리치곤 주민들은 한나라 군사기지가 있는 곳으로 옮기고 철수하는 바람에 결국 이 지역이 다시 흉노 세력권에 들어가 버렸다.

그 뒤 위 진 남북조시대에는 태수를 두어 직접 통치했고, 이어 후량, 북량 등의 세력이 부침했다. 497년에 한족인 국(麴)씨 고창국이 세워져 140여 년간 번성했다. 고창국의 수도가 바로 고창고성이다. 이 시기가 이곳 역사상 가장 안온했던 때다. 고창국은 당(唐)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당은 고창성 대신 교하성에 도독부를 설치해 통치했다.

그러나 중국이 투루판을 지배한 것은 짧은 시기에 불과했고, 흉노(훈)와 돌궐(투르크)과 위구르민족이 이곳의 주인이었다. 당 이전에 이미 위구르족이 이곳에 살고 있었으며, 이들을 고차라고 불렀다.

위구르족은 당나라 말 당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이미 독립 국가를 세워 송(宋) 말까지 번성했다. 이 나라가 바로 이드쿠트 위구르 왕조(860 ~ 1270)다. 이 국가를 통해 서역문화가 대부분 동으로 전달됐다. 불교와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등 종교도 이 나라 수도 투루판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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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 토욕구 천불동 가는 길에 난전을 벌였다. '하미과'를 탁자에 얹어놓고 팔았다. 알미늄 그릇에는 오디를 담아뒀다.)

13세기 이후엔 몽골군이 교하고성 고창고성 등 고도(古都)를 폐허로 만들었다. 몽골의 원(元)을 멸망시키고 들어선 명(明) 대엔 돈황 동쪽 관문인 가욕관 요새를 보루로 해 급속히 밀려든 무슬림과 이곳을 중심으로 해 하미 일대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거듭했다.

청(淸) 건륭제가 18세기 이곳을 정복하면서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뿐 19세기 들어 독립을 쟁취하려던 토착 위구르인의 유혈반란이 쉼 없이 이어졌다.

20세기 초에는 중국의 소 군벌들이 이곳에 들어와 50여 년 동안 서로 다투느라 야만적인 혈투와 주민 학살을 일삼았다. 1950년대 초 중국 인민해방군이 이곳을 접수할 때까지 소 군벌들의 싸움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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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맞는 사진이 없어 쿠무타크 사막에서 찍은 것을 올려봤다. 뒷편엔 파라솔 밑에서 모래뜸질을 하는 이곳 주민들.)

이 같은 장기간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투루판은 혈통을 달리하는 다민족지방으로 변해갔다. 50만 인구 중 위구르족과 회족, 한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종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늘 변할 수밖에 없다. 1950년부터 지금까지 위구르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90%에서 70%로, 회족은 9.6%에서 7.6%로 낮아진 반면 한족은 1%에서 20% 이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나는 현상을 보인다. 그 외 소수민족의 분포도 늘 변화한다고 한다.

모래와 바람, 그리고 불은 투루판 문화의 용광로다. 모래는 바로 건조한 기후를 말하며, 그래서 카레즈 같은 세계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지하 관개시설을 발달시켰다. 또 건조한 기후는 유물들을 잘 보존시켜주었다. 바람 즉 기류는 문명소통을 가능케 했고, 근래엔 에너지원으로 각광을 받게 했다. 불, 고온은 포도나 면화 등 특산물 산지로 이름나게 했던 것이다. 불과 모래, 그리고 바람, 이 삼박자의 선율은 투루판의 유구한 문화를 만들어 왔고, 다양한 문화가 합류하면서 용광로에 녹여 이곳 독창적인 문화를 창출해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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