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5 편)

(2006` 6, 17 ~ 6, 25)

‘왕유’의 ‘양관의 곡’, 찡해

양관에서는 아직도 뺄 수 없는 이야기꺼리가 남았다. 모래벌판엔 그 유명한 당나라 시인 왕유의 석상을 깎다가 그대로 팽개쳐놓은 조각품이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아마 이 조각품도 언젠간 완성돼 박물관 안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할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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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양관박물관 옆 셋트장 모습. 그 뒤편 왼쪽 산 높은 곳엔 당시 봉화대가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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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봉화대까진 낙타를타고 가야한다. 낙타를 타고픈 마음 가득했다. 시간에 쫓기는 페키지 여행이란 이런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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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양관'이 있었다는 자리에 세워진 관문. 그러나 어디까지 추측일 뿐 옛 흔적은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다. 일행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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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트 장의 전경. 열사의 땅이라 촬영하는 영화가 없을 땐 늘 이렇게 사막에서 이는 모래바람을 맞으며 졸고있다.)

왕유(王維: 699 ~ 759). 그는 성당(盛唐) 때 대시인이며, 그림과 서예에도 뛰어나 남종화(南宗畵)의 원조로 불린다. 이 왕유를 두고 ‘시선’이라 부린 송(宋)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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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화가인 왕유의 석상조각 모습. 석상이 완성되지 않은 채 박물관 뒷 사막공터에서 허황한 몸짓만 하고 있다. 언젠간 박물관 안에 들어와 당당히 손님을 맞을 날이 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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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의 돌조각상이 박물관 옆 공터에 아직 방치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서역 땅 비단길을 연 장건이란 장수의 석상은 당당히 박물관 안 좋은 자리를 잡아 찾는 이들을 맞고있다.)

그와 양관은 무슨 연관을 가질까? 그가 남긴 ‘양관삼첩(陽關三疊)’이라는 시 때문이다. 이 시는 ‘양관의 곡(陽關曲)’ 또는 ‘위성의 곡(渭城曲)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에선 이별시로 이 시를 제일로 꼽고, 송별자리엔 반드시 이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 시는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즉 ‘원이(元二: 원가(元家)의 둘째 아들)가 안서(安西)의 사절이 돼 감을 보냄'에 나온다.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는 신강성 고창(高昌)에 있다가 그 뒤 쿠차(龜玆)로 옮겼다.


“위성조우읍경진(渭城朝雨浥輕塵: 위성 땅, 아침 비가 흙먼지 적시니)

객사청청유색신(客舍靑靑柳色新: 객사 밖 푸른 버들 더욱 산뜻하구나)

권군갱진일배주(勸君更盡一盃酒: 그대에게 권하노니 다시 한 잔 더 마시게나.)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 저 서쪽 양관 땅에 가면 친구도 없으리니 ~~~)"


위성(渭城)은 위수(渭水)의 북안에 있는 함양(咸陽)을 일컫는다. 당대(唐代)엔 서방으로 여행을 하거나, 관리가 되어 떠나거나, 출정할 땐 친척이나 지우들이 이 위성 객사까지 와서 송별연을 벌였다고 한다. 이 시에서 느끼듯 양관이 얼마나 변방인지를 짐작케 한다.


‘돈황고성’에선 먼지잼 만나

일행은 돈황으로 돌아오다 돈황고성(敦惶古城)에 들렀다.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1907 ~ 1991)의 소설 ‘돈황’을 중 일 합작영화로 만들기 위해 일본인들이 만든 세트장이다. 송대(宋代)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원본으로 해서 사주(沙州: 돈황의 옛 이름)고성을 재현시켜놓은 것이다. 성안에는 동 서 남 세 개의 성문과 뒤쪽에 높은 성루가 우뚝 솟아있다. 성내는 고창, 돈황, 감주, 홍경, 변량 등 5개 고을 도로를 조성했다. 도로 양편엔 송 대의 불당과 주점 전당포 창고 주택 등을 재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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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일 합작영화 '돈황'을 촬영하기 위해 지은 셋트장 '돈황고성'의 정문. 옛 무사 모습을 한 문지기의 복장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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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고성' 안은 송 대의 옛 거리를 재현해 놓은 갖가지 풍물들을 볼 수 있다.여러 그룹의 관광객이 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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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고성' 안 조그마한 밭에 피고있는 접시꽃. 접시꽃은 그곳이나 여기것이나 마찬가지다.)

중국 영화도 이곳에서 촬영을 많이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용문객잔’이란 영화도 마찬가지다. 최인호 원작인 ‘해신’이란 우리 드라마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그저 한 번 둘러볼만 하다고 느꼈다.

우린 이곳에서 참으로 귀한 먼지잼을 만났다. 겨우 먼지가 날리지 않을 정도로 후드득 뿌리는 비 말이다. 성 뒤쪽 높은 망루에서 사막의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그만 일행들을 놓쳤다. 후드득 다시 여우비가 또 뿌린다. 주위를 둘러보니 송정화씨가 양산을 쓰고 성채 귀퉁이 조그마한 망루 근처에 서성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함께 잠시 비를 피했다. 망루 아래 정원엔 눈에 익은 접시꽃과 원추리 꽃이 피었다. 얼마나 정겨웠던지~~~. 계절은 이곳이나 내가 사는 곳이나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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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고성' 안의 거리 풍경. 최인호 원작인 우리의 드라마 '해신'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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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론 명사산 능선이 이어지고 있다. '돈황고성'의 뒷쪽 성벽. 정장을 한 분이 우리들의 현지 가이드인 조선족이다.)

아무튼 연간강수량이 32.9mm라는 이곳에서 비록 2 ~ 3mm에 불과한 먼지잼이지만 그를 만난다는 건 어쩜 아주 큰 행운인지? 모를 일이다. 가이드도 이렇게 말했다. “참 귀한 손님들입니다. 이곳에 비를 몰고 오시다니요.”라고.

돈황 시내로 돌아왔다. 바로 단체 발마사지를 받았다. 중국 여러 곳에서 받아봤지만 이곳에서 받은 서비스는 퍽 이색적이었다. 발마사지인데도 한 시간 가량 전신을 주물러 피로가 확 풀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누구고, 너는 누구인지

숙소 돈황산장에서 특식이라고 불리는 ‘낙타 발바닥’ 요리로 저녁을 먹었다. 이날 밤은 그런대로 여유가 있다. 일행 10명은 식사 후 야시장 구경에 나섰다. 우리의 재래시장과 흡사하게 점포건물과 건물 사이 노상엔 노점상들이 갖가지 물건을 리어카에 얹어놓고 팔았다. 마른과일, 마른약초, 여러 가지 수공예품 등이 주된 상품이다. 물론 옷가지도 있었지만. 점포에 진열된 물건들도 수공예품과 옷가지 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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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에서 묵은 '돈황산장'이란 현판이 걸린 호텔. 우리 팀 중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주선' 구자일 사장(왼쪽)과 장준환 이사가 일찍 나와 담배를 찾고있다.)

시장 골목마다 양 꼬치 굽는 음식점에서 일으키는 연기와 특유의 노린내가 자욱이 퍼진다. 또 양고기를 부위별로 파는 점포도 있다. 군 양 꼬치 가게엔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시장판에 퍼질러 앉아 꼬치를 싫건 먹고 싶었다. 그러나 배가 너무 불러 더 먹을 수 없다. 홍 단장도 양 꼬치 못 먹은 게 영영 걸리는 듯 했다. 난 시장을 돌면서 6위안을 주고 양가죽으로 된 모자 하나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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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시내 야시장 구경에 나섰다. 시장 옆 양 꼬치 구이를 파는 식당가의 저녁 한 때의 모습. 많은 사람들이 몰려 양 꼬치를 즐긴다.)

호텔로 돌아왔다. 구내 한 쪽 귀퉁이에 양 꼬치를 굽는 코너에 연기가 피어오른다. 홍 단장은 열댓 번의 중국 여행을 통해 양 꼬치 맛을 제대로 익혔던 것이다. 그대로 룸으로 들어갈리 만무다. 종내 6 ~ 7명을 끌고 그만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머지는 월드 컵 프랑스와 토고의 경기를 봐야한다면서 방으로 들어갔고. 배가 너무 불러 꼬치도 제 맛이 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맥주와 소주 몇 잔씩을 마시며 양 꼬치 상당량을 먹지 못한 채 룸으로 돌아왔다.

우리 호텔은 명사산(鳴沙山)을 바로 뒤쪽에 두었다. ‘모래가 우는 산(울 명鳴, 모래 사沙)’이라는 이 명사산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건물이다. 기분이 거나해졌기에 오늘 밤에는 ‘모래 우는 소리’를 꼭 들어야겠다고 마음 다잡았다. 또 저녁에 보면 붉디붉은 핏빛으로 빛난다는 그 모래 더미를 보아야한다고. 룸에서 들을 수 없고 볼 수도 없으니 호텔 밖을 나와서 말이다. 정한용의 시 ‘사강(沙江)을 건너며’를 외가면서.


‘沙江을 건너며’


그대, 사강을 아는가!

명사산 모래바람이 내는 슬픈 소리처럼

고비사막의 차고 검은 겨울하늘처럼

꿈같은, 아니 서해바다 가까이

사강은 흑백사진 속에 고요히 누워있다

밟으면 소리대신 자국이 인다.

얇은 햇살 속에 포르르 날아오른 먼지 알갱이들이

흔들흔들 가라앉는 것처럼

사강은 고요 속에 움직임을 갖는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또 누구인지

세상과 이어진 끈들이 사강에 이르면 모두 끊어진다.

끈적끈적한 시간의 경계를 넘으면서 사라진다.

그대 향해 가는 이 길

아득하다

어쩌면 지워진 것은 우리 몸이거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영원히 묻어버린 현재

과거 틈일지 모른다.

모래도 없고 강도 없다

39번 국도를 따라가다 남양 쪽 306번 지방도로 접어

우음도/ 마산포와 대부도/ 제부도 갈림길

소금기둥처럼 그대 서있다.”

그래, “명사산 모래바람이 내는 슬픈 소리처럼/ 고비사막의 차고 검은 겨울하늘처럼/ ....../ 나는 누구이고/ 너는 또 누구인지/ ......//”.

샤워하고 나갈 참이다. 웬걸.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나오니깐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노곤함에 잠이 밀려온다. 눈까풀을 뜨려도 뜰 수가 없다. 어제 밤 열차를 타고 오면서 마신 술과 피로가 함께 겹친 것 같다. 그래, 침대에 누워서라도 모래가 우는 슬픈 소리를 듣고야 말지, 이렇게 다짐했건만 누워선 그만 나도 몰래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57억년 뒤 올 미륵 기다리듯

윤제림의 ‘사랑을 놓치다’라는 시처럼 인연이 어디 한 생의 것뿐이랴. 내속리면 법주사 밤 뜨락에 앉아 둥 둥 둥 울리는 쇠북소리 들으며 57억년 후에 올 미륵을 기다리듯 다음 생애에서도 그대를 기다리리라. 우우우 모래 우는 명사산, 외로움에 푹 빠져들 것 같지만 그대 위해 초승달 하나 부려놓은 오아시스, 월아천. 그 옛날 선녀의 눈물로 이뤄졌다는 전설도 있다고 했지. 또 해가 솟으면 서로 갈길 각각 떠나가겠지만 끊임없이 솟아나는 월아천 샘물처럼 저 생에서의 만남을 기다리리라~~~.


‘사랑을 놓치다’,


내 한 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명사산 오르는 날, 새벽 먼동 튼다. 인연, 삶, 이들이 준 회한이 물밀듯 몰려온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지. 어젯밤 못 다한 일이 켕기고 켕긴다. 그러나 어쩌랴. 지난 일인걸. 몸을 추슬러 일어난다. 오늘은 아침도 일찍 먹어야 하루 일정을 소화해낼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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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인 '돈황산장' 후원의 과일밭. 이 과일밭은 1천여 평이 넘을 듯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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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밭엔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익어가고 있다. 8월쯤엔 이 사과도 투루판의 포도와 함께 영글겠지.)

돈황산장 호텔 식당은 룸이 있는 건물에서 한참 떨어졌다. 명사산 쪽으로 3분가량 가야만 된다. 즉 후원을 지나 자리했다. 그곳에서 아침녘 명사산을 올려다본다. 아직은 햇살 받기도 전이지만 고운 모래는 황금빛으로 천천히 물들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후원엔 주렁주렁 푸른 열매를 단 사과나무가 줄지어 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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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4 편)

(2006` 6, 17 ~ 6, 25)

‘계속 달린다. 끝없는 사막 위를~’

하밀을 지났다. 고비사막 중 바람이 가장 무섭기로 이름난 ‘막하연적(莫賀延磧)’을 통과했다. ‘막하연적’도 아침이라선지, 아니면 열차 안이라선지, 험난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현장법사도 이곳을 지난 후 “인적은 물론 날짐승도 없는 황량한 천지”라고 했다던가. 그는 이곳을 거쳐 온 뒤 “밤에는 도깨비불이 별처럼 환하고, 낮에는 모래바람이 소나기처럼 퍼붓는데, 닷새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입과 배가 말라붙어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고 썼다. 또 “여윈 말에 몸을 싣고 가다 모래 위에 엎드려 관음을 염한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고 했었다.

아침 9시에 열차는 유원(리우위앤) 역에 닿았다. 이 역은 돈황을 열차 편으로 이어주는 유일한 곳이다. 돈황시 북쪽 130km의 거리에 위치했다. 행정구역으론 감숙성(甘肅省) 안서현(安西縣)에 속한다. 이 역은 북경 상해 서안 서역 성도 란주 우루무치 등 10여개 대도시와 연결된 철로가 놓여있는 교통의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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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 전도. 돈황(敦煌:둔황)은 신장에 가깝게 치우쳐 있다. 보라색 선 안이 감숙성이다.)


남자들, 사막 한가운데서 소변도

유원에서 돈황까지는 육로로 두 시간이 걸린다. 성(省)이 바뀌었으니 감숙성의 현지 가이드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곤 버스를 타고 또 사막을 가로 질러 달렸다. 높고 낮은 모래언덕이 이어졌고, 때론 평지 같은 모래와 자갈이 섞인 곳도 있다. 사막 가운덴 점점이 허연 게 드러나 있다. “저게 뭐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다. 소금이 지표면 위에 떠올라온 것이라고 했다. 그 사이 사이로 낙타풀이 드문드문 나있다. 지평선 끝엔 높은 산봉우리들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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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역에서 돈황까지는 이렇게 이어진 사막길을 두 시간 달려야닿을 수 있다. 자갈반, 굵은 모래 반으로 이뤄진 사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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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가로지르는 포장도로다. 마치 고무판 같다. 잠시 정차해 볼 일 보고 사진도 찍었다.)

사막을 가로지른 포장도로는 마치고무판 같았다. 지반이 약해서가 아니라면 부실공사 탓일 것이다. 버스나 트럭등 하중이 무거운 차가 지나가면 울렁인다. 그러니 제대로 속력을 낼 수 없다. 승용차는 가볍기 때문에 그래도 잘 달렸다. 이 도로엔 차량통행이 많지 않았다.

1시간여를 달리곤 버스를 세웠다. 남자들은 노천에서 소변을 봤다. 그리고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기도 했다. 오아시스도 중간 중간 자리했다.

오아시스엔 크던 작던 촌락이 있다. 오아시스 가까운 도로변엔 묘지도 눈에 들어왔다. 묘는 모래나 자갈로 쌓아 바람에 허물어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물론 묘엔 잔디나 풀이 없는 맨살 돋음 무덤이다. 마치 삿갓을 놓아둔 형태의 원추형이다. 도로의 진행방향엔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일망무애의 사막이 이어졌다.

오전 11시 30분쯤 돈황에 도착해 명사산(鳴沙山)을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돈황산장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돈황(둔황)이 어떤 곳인지? 잠시 짚어본다.

돈황을 설명하려면 내륙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 동서통상로(東西通商路) 즉 실크로드(Silk Road)를 먼저 일독해야 한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인 상품이 바로 비단(Silk)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길을 ‘비단길’로 불렀던 것이다. 서방의 비단은 직물 옥 보석 등 서방의 산물로 되돌아왔다. 뿐만 아니다. 불교 이슬람교 등 종교도 이 길을 통해 동아시아에 전파됐다.

이 통상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변을 가로지르는 서역북도(西域北道)와 타클라마칸 사막 남변을 지나는 서역남도(西域南道)로 나뉜다. 두 길 다 같이 파미르고원(Pamir Plat.)을 넘어 서(西)투르키스탄의 시장에 이어지며, 동방으로는 간쑤성(甘肅省) 돈황에서 합쳐져 황하유역에 이른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타림분지(Tarim Basin)의 중앙에 자리했다. 타림분지는 면적이 70만 ㎢로 한반도의 3배를 넘는다. 서쪽은 파미르 고원, 북쪽은 톈산산맥, 남쪽은 쿤룬산맥(崑崙山脈)에 둘러싸인 동서 길이 1500km, 남북 길이 500km, 평균해발 800 ~ 2000m의 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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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에 흩어진 오아시스 나라들의 대상(隊商)들에 의해 이어졌다. 대상을 통한 무역의 이윤은 동방에선 중국인을, 북방에선 유목민을, 남방에서는 티베트인을 끌어들이게 됐고, 점차 확대돼 갔다. 이윤이 남았기에 이 길을 독점하려는 싸움이 여러 종족 사이에 잦았음은 물론이다.

이 길이 열린 것은 BC 1세기경의 한(漢) 무제(武帝) 때라고 하지만 그 이전부터 동서교섭이 이뤄진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 ~221)부터 한 대 초기에 걸쳐 간쑤성 서부를 점거하고 있던 월지(月氏 : 禺氏)가 비단의 중계무역을 해왔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서역의 옥이 월지를 통해 중국에 많이 수입되었다. 그 옥의 대가로 비단수출이 이뤄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 무제 때 서역과 교역의 중요성이 일깨워 지면서 역대 왕조들도 동서무역을 위해 실크로드를 통과하는 주변 오아시스의 나라들을 지배하려고 몸부림쳤다. 7세기 중엽 당나라가 타림분지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했을 때가 실크로드의 최성기였다.

돈황은 이처럼 동방 실크로드의 관문이다. 중국 간쑤성 서부 주취안지구(酒泉地區) 허시저우랑(河西走廊) 서쪽 끝 당허(黨河)강 유역 사막지대에 위치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도시로 고대 동서무역은 물론 문화교류, 중국 서역경영의 거점도시다. 간쑤성 성도 란주(蘭州)와는 1.137km 떨어져있다.

BC 1세기 전한(前漢) 7대 황제 무제(武帝: BC 156 ~ BC 87)는 돈황을 서역진출의 전진기지로 삼고, 둔전병과 한인을 이주시켜 거점도시로 키워냈다. 그리곤 옥문관(玉門關: 위먼관)과 양관(陽關)의 두 관문을 설치해 이곳을 한의 영향력 아래 두며 국제무역도시로 키웠다.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에서 시작된 서역(西域) 길은 약 1.800km를 걸어 이곳 돈황에 이르러 숨을 고른다. 대부분의 교역품은 이곳에서 거래된다. 비단으로 바꾼 유라시아 대상들은 북쪽 옥문관을 거쳐 하미 → 투루판 → 우루무치 → 이닝 →카자흐스탄을 지나 터키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천산북로를 거쳤다. 아니면 돈황에서 투루판 또는 누란을 거쳐 쿠얼러 → 쿠차 → 카슈가르를 지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이란에서 터키로 빠지는 톈산남로를 거친다. 또 남쪽 양관을 통해 타림분지의 남쪽 기슭의 미란 → 체모 → 아르칸트를 지나 카슈가르에서 합류하는 서역남로를 택해 서쪽으로 가기도 했다.

그 뒤 5호 16국 시대엔 한족이 세운 서량(西涼: 400 ~ 421)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4세기 중엽 이곳은 그 지방 특유의 문화가 발전했고, 불교도 융성해 그 유명한 첸포동(천불동: 千佛洞) 석굴사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366년 전진(前秦)의 승려 낙준(樂僔)이 시작한 석굴사원의 조영(造營)사업은 북위(北魏),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隨), 당(唐), 5대(五代), 송(宋), 원(元)에 이르는 13세기까지 이어졌다.

서량이 망하고 북량(北涼) 북위(北魏)의 지배를 거쳐 수나라와 당나라의 영향아래 들었다. 8세기 말엔 토번(吐蕃)이 차지했고, 9세기 중엽이후는 당나라의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의 지방정권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 뒤 한 때는 금산국(金山國)으로 독립했으나 11세기 초 서하(西夏)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돈황은 후이족(회족: 回族)의 이슬람교도들이 많이 살며, 석굴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생업을 이어간다. 관광명소로는 돈황석굴, 명사산과 웨야천(月牙泉), 위먼관, 양관 등이 꼽힌다.)


‘서통누란’ 새긴 ‘양관박물관’

1시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이 시간에 우린 샤워를 했다. 점심을 먹곤 양관(陽關)으로 이동했다.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물론 사막 속을 달린 것이다. 포장길을 달리다가 비포장 길도 나왔다. 포장길은 아극새(阿克塞)로 이어진다. 아극새로 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톈산남로가, 곧장 남쪽으로 가면 티베트로 가는 청해성의 거얼무라는 도시에 이른다. 비포장 길을 조금 가다가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키 큰 백양나무가 울타리를 한 밭엔 포도가 한창 여물고 있다.

이 촌락을 지나 다다른 곳이 바로 양관박물관(陽關博物館)이라고 쓴 편액을 단 누각과 성채가 앞을 떡 막고 버티었다. 아래층은 벽돌의 성채이며, 누각은 성채 위에 세워졌다. 누각 처마엔 ‘서통누란(西通樓蘭)’이라는 조그마한 편액이 걸렸다. 아마 ‘서쪽으로 통하는 군사 누각’이라는 뜻일 게다. ‘란(蘭)’은 ‘병가(兵架)’라는 뜻도 있으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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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박물관 입구 성문이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옛 것들을 잘도 꾸며놓고 돈벌이를 한다.)

그 옛날 양관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단지 그곳 주위에 이렇게 억지 이름 붙인 박물관과 영화촬영 세트장을 만들어 옛날 그 흔적이라도 보여주려고 애쓴듯하다. 박물관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유물이라곤 볼게 없다. 화살촉과 동전 따위다. 박물관 안쪽으로 들어가면 한 무제 때 중국 사상 처음으로 서역통상로를 개척한 장건(張騫: ? ~ BC 114)의 말 탄 석상이 높게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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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의 옛 성채를 재현해 놓았다. 기중기와 사다리 등 전쟁에 쓰이는 군수물자들도 새로 만들어 뒀다.)

박물관을 벗어나면 옛 양관처럼 세워 논 허물어진 토성의 성채와 누각이 나타난다. 그 누각을 지나면 뒤쪽 모래언덕에 옛 봉화대가 아련히 눈에 들어온다. 낙타를 이용하면 봉화대까지 갈 수 있다. 우린 봉화대까진 가지 않았다. 영화 세트장을 돌아 이곳 관광을 끝냈다. 모래벌판 언덕바지엔 포도를 말리는 건조장이 여기저기 몇 동씩 늘려져있어 눈길을 끌었다. 아쉽다. 낙타 타고 옛 대상(隊商)처럼 열사의 땅 밟아 서역지방으로 내닫고 싶은 충동, 나 혼자만이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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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실크로드 - 둔황 下, 푼돈에 팔려나간 세돌의 보물들

■ 수탈의 표적이 된 막고굴

유물을 찾아 험한 길을 찾아 서양에서 온 학자들, 탐험가들과 왕도사의 교환 장부를 보면 이제까지 막고굴의 유물들이 겪어야 했던 비참함에 굴욕감마저 더해진다.
왕도사는 막고굴의 유물을 탐내는 표독스런 서양의 이방인들을 고개 숙여 정중히 맞이하고 배웅했다. 이방인들이 쥐어준, 생전 손에 가져보지 못한 약간의 은화와 서양 물건들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방인들이 왕도사를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승들의 발자취를 쫓아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경을 가지러 왔다”는 단순한 거짓말 한 마디에 왕도사는 앞장 서 이방인들을 환대했다. 미래에 대한 긴장과 두려움 속에 만 리 길을 달려 온 그들을 맞이한 것은 고작 촌스러운 왕도사 한 사람뿐이었다.

1905년 러시아인 오브르체프는 러시아 물건 몇 개를 가지고 경전 한 무더기와 교환했다. 1907년 헝가리인 오렐 스타인은 은화로 스물 네 상자의 경전과 다섯 상자의 견직물, 회화작품을 교환했다. 1908년 7월 프랑스인 폴 펠리오 역시 은화로 6천여 권의 사본과 화첩을 트럭 열 대에 나누어 싣고 자국으로 돌아갔다.

1911년 10월 요시가와와 타바라는 3백여 권의 사본, 두 점의 당대 조각을 푼돈으로 사들였다. 1914년 두 번째 둔황을 방문한 스타인은 다시 은화로 6천여 권의 경서 다섯 상자를 사들였다. 1924년 예일대에서 온 워너 일행은 불상 몇 구와 벽화 20여점을 뜯어 갔다. 이렇게 실크로드의 모든 중요한 보물들은 대부분 약탈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찬란한 문명을 증거 하는 둔황 막고굴의 뛰어난 고고학적 유물은 모두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기메 박물관 등 유럽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는 ‘중앙아시아에서의 3년’이란 책에서 막고굴의 유물들과 최초로 조우하던 순간을 다음과 같이 썼다.

“그(왕도사)는 고문서가 무진장 쌓여 있다는 작은 동굴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방이 3m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공간 안에 두세 겹으로 쌓인 고문서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순간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는 지금도 형언하기 힘들다.”

한자에 능했던 폴 펠리오는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진귀한 문서들을 가려 낼 수 있었다. 그는 3주 동안 이곳에 머물며 고문서들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만 5천개의 두루마리로 된 문서 중에서 1만개를 챙겼다. 약탈이라 하기에는 너무 수월하고 싱겁게 끝나버린 도굴이었다. 왕도사는 폴 펠리오로부터 받은 몇 개의 은화를 손에 들고 친절히 그의 작업을 도왔다.

나중에 폴 펠리오는 “막고굴에는 구텐베르크보다 5세기나 7세기 앞선 8세기와 10세기의 목판 인쇄물들도 몇 점 있었다. 그것은 세계 최초의 인쇄물이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왕오천축국전’도 1908년 폴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었다. 왕오천축국전은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으로 책명도 저자명도 떨어져 없어진 총 227행의 잔간(殘簡)이다. 잔간이란 일부분 또는 대부분이 흩어지고 남은 문서이다. 이 잔간의 실체를 밝혀내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폴 펠리오다.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고 이것이 신라의 승려 혜초가 쓴 것이라는 것을 밝혀낸 펠리오는 뛰어난 고고학 학자이자 모험가였지만 동시에 그는 야만적인 도굴꾼이었다.

훗날 중국의 학자들은 막고 동굴의 연구를 위해 거꾸로 프랑스와 미국에서 막고굴 유물에 대한 마이크로필름을 사들여 와야만 했다. 대개의 소중한 문헌들을 모두 도굴 당한 후였으므로 중국 내에서 막고굴 문헌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동굴에서 뜯겨진 벽화의 필름을 도굴꾼의 후예에게서 사들여 고작 확대경 앞에서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굴욕감과 비애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굴 당시 유물의 가치를 아는 누군가가 펠리오의 트럭 행렬을 막아섰다면 막고굴 유물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아무런 보존 대책이 없었던 그 당시 가난했던 중국의 현실에서 현재와 같은 막고굴 문헌의 보존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손쉬운 가정은 분명한 도굴꾼인 그들에게 끊임없이 면죄부를 들이민다.

둔황 막고굴에 배어 있는 실크로드의 슬픈 역사, 사막 한 가운데서 누군가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듯하다.


■ 서역의 관문 양관

양관은 한나라 시대에 서쪽으로 가는 대상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외적의 침입을 알려주는 봉화대가 있던 자리로 둔황에서 남서쪽으로 약 62km 떨어져 있다.
양관 너머 펼쳐져 있는 삭막하지만 광활한 대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 보았다. 2천여 년 전에도 저 붉은 평원은 제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이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지금과 같은 설레는 유혹을 던졌을 것이다.

그대여
다시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게나.
서쪽으로 양관을 넘으면
다시 그대 못 볼 것을

당대의 시인 왕유는 객사 창밖으로 늘어진 푸른 버드나무를 힐끗 쳐다보고는 이윽고 행낭을 다 꾸린 친구를 바라보며 술잔을 들었다. 왕유는 눈물을 흘리며 비탄에 잠겨 떠나는 친구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두 눈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그들은 인생의 향로가 드넓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별은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떠나는 이의 발걸음 또한 활달했다.

왕유는 친구를 그렇게 보냈지만 기자는 양관 주변을 걸으면서 망망한 대해의 암초에 홀로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어붙은 파도 같은 주변 풍광 때문이었을까. 변방의 국경 역할을 해야 했던 메마른 역사가 상기되기 때문일까. 얼마나 많은 죽음이 이곳에 드리워져 있는지 모른다. 모두가 한 무더기 모래 무덤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명사에서 만난 모래바람

둔황 중심가에서 6km 떨어진 명사산은 거대한 모래산이다. 이곳의 극히 이국적인 풍경은 관광객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장소로 이곳에 있는 웨야취안(월아천)은 오아시스와 사막이 만나는 지점이다.
능선을 향해 수직으로 놓여있는 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밟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기를 10여분, 마침내 능선에 올랐다. 주변 사람들의 환호. 능선 너머의 풍경은 장대하고 막막한 모래산 그 자체였다.

능선에 올랐다는 환호는 채 얼마 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거센 모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집어 삼킬 듯 거칠게 몰아 쳐대는 모래알들, 엄습하는 두려움은 사나웠다. 모래알이 얼굴을 때리는 소리를 난생 처음 들었다. 셔츠로 얼굴을 가린 채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낮추었다.

명사산 입구에서 웨야취안까지 낙타를 타고 오면서 사막의 풍경에 어울리지 않은 너무 많은 관광객들로 느끼기 어려웠던 명사산의 실체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관광객들이 능선 중턱에서 아래까지 타고 나무썰매라는 인공물이 주는 작위적인 풍경을 일시에 덮어 버리는 세찬 모래바람, 그제야 내가 거대한 모래산 능선에 서있음을 절감했다.


둔황 글=박준 객원기자 tibetian@freechal.com
취재협조=웰빙 차이나 항공 02-771-8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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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 둔황 上

돈황 2006. 8. 6. 20:19

[현지취재] 실크로드 - 둔황 上

도굴의 역사, 둔황 막고굴의 슬픈 그림자

실크로드는 종종 서역으로 가는 경유지로만 간주되었다. 문명도, 고유한 역사도 없는 유목민의 땅이란 규정 속에 서구의 연구자들은 실크로드를 중앙아시아라는 문명세계의 경계 바깥에 위치시켰다. 그러나 지난 100년에 걸쳐 발굴된 증거들은 전혀 다른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문명은 러시아와 영국 이 두 제국이 이 지역의 사막과 산악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겨룬 19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세계사에 편입됐다. 서구 각국은 앞 다투어 군사적, 외교적 사절을 중앙아시아에 파견했고 흙더미의 폐허가 된 도시에서 엄청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이끌린 고고학자, 탐험가들이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선양의 따리엔(대련)에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 둔황(돈황)이란 굵은 황금색 글자가 인상적인 작지만 깨끗하게 신축된 둔황 공항에 도착했다. 꿈에 그리던 여행지. 그러나 실크로드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의 짐을 가득 실은 낙타 행렬의 그림자가 붉은 노을에 길게 드리우는 곳만은 아니다. 로맨틱한 상상의 대상이기에 서역의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다. 아름다우면서도 차갑기 그지없는 중앙아시아의 이국적 풍광과 함께 전쟁과 모험, 도굴 등 이 모든 것이 서역의 대지 속에 현재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1900년 왕도사라는 막고굴의 관리인은 16동을 수리하다가 모래로 막은 벽 너머로 새로운 굴인 17동을 발견했다. 가로 2.8m, 세로 2.7m, 높이 3m, 후대에 장경동으로 불리게 될 이 동굴 안에는 불경을 비롯한 많은 경전 사본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도사는 중세 동서양 문명 교류의 흔적을 이 담고 있는 이 귀중한 유물의 가치를 전혀 알아 볼 수 없었던 촌로에 불과했다. 막고굴이 맞이하게 될 비극적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왕도사는 기근을 피해 간쑤성에 왔다가 막고굴에 정착한 후베이 출신의 농민이었다. 그는 어두컴컴한 굴 안 벽화들의 흐릿한 색채가 싫어 벽화 위에 제 멋대로 회칠을 하기 시작했다. 회칠을 한 동굴 안은 오통 희뿌연 석회석으로 변해버렸다. 천년의 시간을 지닌 막고 유물 일부는 이렇게 어이없게 파괴되었다. 왕도사는 회칠만으로는 성에 안찼던지 자신이 원하는 조악한 보살을 놓을 자리를 위해 쇠망치로 석굴안의 조각상을 부셔 버리기도 했다.

막고굴이 이렇게 방치된 데는 지역의 관리들도 한몫했다. 유물이 너무 대량인데다 성으로 운반할 돈이 없다는 것이 관리들의 변명이었다. 왕도사가 <왕오천축국전> 두루마리를 땔감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 막고굴의 탄생

366년 악준(樂樽)이란 한 승려가 천하를 주유하던 중 금빛으로 빛나는 삼위산의 위용에 반해 석장을 땅위에 꽂아 두고 소리 높여 발원했다. 삼위산의 금빛은 상서로운 징조였다.
서쪽과는 정반대의 위치인 삼위산이 석양빛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 그 금빛 기운의 정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악준이 삼위산에 취해 있는 사이 이윽고 사방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내 악준은 첫 번째 석굴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악준을 이어 왕족에서 평민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과 염원을 담아 석굴을 파기 시작했다. 신비하고 안온하며 예술적 재능이 빛나는 막고굴은 이렇게 세상에 태어나기 시작했다.

막고굴은 무엇보다도 중세 문명 교류에 대한 진귀한 보고서다. 막고굴의 유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둔황 문서’로 한자,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쿠차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다. 도합 3만 여점의 돈황 문서의 작성 연대는 368년에서 1032년까지로 불교관련 내용이 단연 우세하다.

박 준 객원기자 tibetian@freechal.com
취재협조=웰빙 차이나 02-771-8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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