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7 편)

(2006` 6, 17 ~ 6, 25)

주머니 마다 황금빛 모래가

모래 썰매 코스 중간 중간에 관리원이 지키고 있다가 사고나 불상사에 대비했다. 한 사람이 출발하면 뒤따라 다음 사람이 내려오니깐 코스에서 어정대다간 충돌사고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관리원이 모자와 선글라스를 주어 가져다 줬다. 우리 일행은 뒤집히거나 곤두박질치지 않고 잘 내려왔다. 곽청언 사장이 코스 중간에서 선로를 이탈했지만 아무런 일 없이 내려왔다.

꾸미기_DSCN1213.JPG

(백양나무 그림자가 황금빛 모래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원취리가 만발한 들꽃 밭도 함께 했다.)

꾸미기_DSCN1216.JPG

(모래에 그늘을 남긴 백양나무 그림자가 잔잔한 물웅덩이에도 길게 드리우며 어른거린다.)

낙타를 둔 곳까지 걸었다. 중간에 작은 물웅덩이가 주위를 푸르게 만들어 냈다. 웅덩이 가엔 갈대가 자랐고, 모래언덕 쪽으론 백양나무와 포플러나무가 드문드문 서서 긴 그림자를 황금빛 모래 위에 드리웠다. 퍽 한가롭고 정겨운 시골풍경이라고나 할까? 잔잔한 물웅덩이에도 백양나무와 포플러나무 그림자가 길게 어른거린다. 발걸음 떨어지지 않는다. 앞서 가던 일행들이 뒤를 자꾸만 되돌아보면서 빨리 오라고 채근하는 눈짓이다. 떼어놓기 싫은 발걸음 옮기니깐 물기 젖은 황토밭엔 원추리와 패랭이꽃이 피었고, 잡초가 무성했다. 다시 낙타를 타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대문 근처엔 낙타를 탄 모습들을 찍어놓고 사진을 사가라고 성화다. 기념으로 3위안 주고 한 장 사올 수밖엔.

꾸미기_DSCN1218.JPG

(들꽃들이 피어있는 밭에는 패랭이꽃도 피었다. 며칠만 물을 주지 않아도 땅은 거북등 처럼 쩍쩍 벌어지고 만다.)

꾸미기_DSCN1220.JPG

(물 웅덩이 가엔 갈대가 자란다. 삭막한 모래땅을 찾는이들의 마음을 달래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꾸미기_DSCN1222.JPG

(돈황산장 호텔 로비 벽에 걸어둔 고대 실크로드 전경도다.)

호텔로 돌아왔다. 모래를 씻어내는 시간을 주었다. 어떤 이는 주머니마다 명사산 황금빛 모래가 들어있었다고 즐거워했다. 체크아웃하곤 ‘돈황 예술의 꽃’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불교 유적지 ‘막고굴(莫高窟: Magaos Caves: 모아까오쿠)’로 가야했다. 중간에 점심을 먹었다. 막고굴은 돈황 시내 동남쪽 25km 거리라고 한다. 즉 명사산 동쪽 절벽에 남북으로 약 1.8km에 걸쳐 만들어진 석굴이다. 1천여 개의 석굴이 있어 일명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린다. 막고굴 주변엔 이와 비슷한 석굴들이 몇 개 흩어져있다. 일러 서천불동굴(西千佛洞窟), 동천불동굴(東千佛洞窟), 유림굴(楡林窟), 오개묘석굴(五個廟石窟) 등이다. 그 중에서 막고굴이 대표적인 것이다.


‘석실보장’ 등 현판이 기 꺾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막고굴은 천여 개(735개 또는 812개 등 여러 설이 있음)의 굴 중 2006년 6월 현재 492개만 발굴돼 그 중 일부를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있다. 돈황 시내에서 30여분 걸려 막고굴 주차장에 닿았다. 온통 주위는 황량한 모래언덕과 그 뒤로 붉은 바위산이 삐쭉 삐쭉 솟아있다. 주차장 부근에서 굴 가는 길목에는 버드나무와 자작나무 푸른 띠가 둘러쳤다. 또 길목엔 사암으로 만든 붉은 원추형 탑들이 드문드문 서있어 눈길을 잡았다. 멀리 사막 모래언덕에도 이 원추형 탑은 흩어져있다.

꾸미기_DSCN1225.JPG

(막고굴 주차장에 바라본 산. 앞쪽엔 모래언덕으로 이뤄진 야트막한 산이 있고, 그 뒤쪽엔 붉은 사암의 뽀족한 높은 산이 버틴다.)

꾸미기_DSCN1227.JPG

(막고굴을 찾아드는 길엔 붉은 원추형 탑들이 관광객들을 맞아 들인다. 햇볕은 강하진 않았지만 찜통 속을 걸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같은 땡볕 길을 한참이나 걸어가다가 탕천하(宕泉河)라는 개울을 가로지른 시멘트다리를 건넌다. 탕천하는 물이 마른 건천. 강바닥엔 자갈들만 드러났다. 다리 건너 바로 날아갈 듯한 2층으로 된 목조 건물의 대문이 가로 막는다. 1층 위쪽엔 가로로 된 청색바탕 커다란 현판엔 ‘石室寶藏(석실보장)’이라고 새긴 금색 글씨가 사람의 기를 꺾어놓았다. 그 위 2층엔 가로로 ‘莫高窟(막고굴)’이라는 편액이 걸렸다. 이 문 오른쪽엔 키 큰 자작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었고, 왼쪽으로는 버드나무 숲이 들어찼다.

꾸미기_DSCN1231.JPG

(금색으로 새긴 '석실보장'이라는 편액이 관광객의 기를 꺾어놓고 만다. 그 위쪽엔 '막고굴'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렸다.)

이 숲길을 조금 걸어 들어가면 청색바탕에 ‘莫高窟(막고굴)’이라는 금색 글을 쓴 솟을대문이 반긴다. 그 뒤로는 1.8km에 이르는 절벽에 수많은 굴들이 다섯 층에 걸쳐 연이어 뚫렸다. 마치 옛날 짚으로 인 농가의 두툼한 처마 아래위로 연이어 숭숭 뚫려진 참새 구멍 집처럼 말이다.

꾸미기_DSCN1232.JPG

(굴 입구엔 '막고굴'이란 현판을 단 솟을대문이 반긴다. 늘 사진촬영을 하는 곳이라관광객들이 빈 틈을 주지 않는다.)

이 굴은 당(唐)나라 중종 때(698년) 이극양(李克讓)이 수찬한 ‘막고굴불감비(莫高窟佛龕碑)’를 보면 “서기 366년 승려 낙준이 수행 중 홀연 금빛으로 반짝이는 1000여 개의 부처 형상을 목격하고 굴을 파 감실(龕室)을 구성한 것이 시초”라고 적혔다. 366년은 전진(前秦) 때다. 이 후 석굴을 만드는 작업은 13세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즉 북위(北魏),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隨), 당(唐), 오대(五代), 송(宋), 원(元)나라까지 이어졌다.


중국인 리신씨, 우리말 해설

전체 석굴 안에는 모두 4.400여 점의 소조불상(흙으로 빚은 불상)이 있으며, 연면적 4.500㎡의 벽화가 있다. 이 벽화들을 1m 폭으로 만든다면 그 길이가 45km 에 달할 정도로 엄청 난 량이다. 이들 벽화의 내용은 초기에는 민간신화가 주제였으며, 그 뒤 불교가 전해지고서는 석가의 선행, 열반상, 그리고 사후의 극락세계를 묘사한 것들이다.

꾸미기_DSCN1235.JPG

(막고굴의 대표적인 북대굴 모습. 저 사원 안엔 엄청난 부처가 모셔져 있다. 일행은 겉만 봤을 뿐 그곳은 들리지 못했다.)

이 굴에 대한 해설은 막고굴 전속 중국인 해설사의 몫이다. 우리 일행은 두 팀으로 나뉘었다. 우리 팀의 해설은 한족(漢族)인 막고굴 고급강해사(高級講解師) 리신(李新)씨가 맡았다. 그는 ‘한국돈황학연구회’ 회원이기도 했다. 우리말로 해설할 수 있는 한족 고급강해사는 3명뿐이라고 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리 씨는 열성을 다했다. 그러나 나는 서툰 그의 우리말 발음을 거의 이해하기 힘들어 애를 먹었다. 그런 나에게 우리말 통역은 홍 단장이 해줬다.

꾸미기_DSCN1234.JPG

(암벽 단면을 몇 층으로 뚫어 1000여개의 사원을 만들었다. 아래 위를 다니면서 지정된 굴 열 곳 정도를 볼 수 있었다.)

우리 팀은 172굴, 173굴, 174굴을 거쳐 148굴, 259굴, 437굴, 428굴, 427굴, 그리고 328굴을 보고 마지막으로 16굴과 그 굴 안에 있는 유명한 장경동굴(藏經洞窟)이라 불리는 17굴을 봤다. 그리곤 돈황 장경동굴전시관을 둘러보고 책과 민속품을 파는 가게를 거쳐 주차장으로 돌아 나왔다.

굴은 어두웠다. 해설사가 비추어준 손전등불빛으로 겨우 굴 내부를 볼 수 있다. 그는 손전등불빛을 피사체인 불상이나 벽화에 비추면서 설명해나갔다. 좁은 공간에 15명이라는 인원이 들어찬 데다 해설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제대로 해설을 들을 수가 없다. 또 보고 나가는 팀과 새로 들어오는 팀이 엇갈리면서 일어나는 소음이 이어져 정신이 집중되지 않는 분위기다.

이처럼 굴 안은 지금도 어두웠다. 그러면 굴을 파 불상을 만들고 벽화를 그릴 당시엔 화가들이 어떻게 했을까? 청동거울로 바깥의 햇볕을 굴 안으로 비춰 작업을 했다고 한다. 또 촛불을 이용하기도 했다. 어느 굴에선가 당시 떨어진 촛농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비천도’, 에밀레종 것과 흡사

처음 들어간 172굴은 투시화법을 사용한 ‘관무량수경변상도’가 벽면 가득히 그려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궁전 각 사이에 그려진 비천도(飛天圖)가 눈길을 끌었다. 경주 에밀레종에 그려진 비천도와 흡사한 모양이라고 느껴졌다. 173 ․ 174굴은 들어가긴 했는데, 부처와 천장과 벽면에 빼곡한 벽화만 보았다는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148굴은 거대한 ‘열반경변상도(涅槃經變相圖)’가 후면 벽을 가득 메웠다. 그 앞에 열반한 큰 와불(臥佛)이 있고, 그 주위엔 조그마한 조각상들이 부처의 운명을 슬퍼하는 모습으로 서있다. 남쪽 벽엔 ‘미륵하생경변(彌勒下生經變)’이란 유명한 그림이 그려졌다.

259굴은 가장 오래된 굴이라고 했다. 즉 북위(北魏)시대에 조영해 1.500여년을 견뎌왔다. 동양의 모나리자상이라고 불리는 ‘선정불’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참선하는 듯 보였다. 이 ‘선정불’ 또한 나무와 갈대로 만든 모형에 흙을 발라 광을 낸 소조불(塑造佛)이다. 손의 일부가 파손돼 그 속에 갈대가 드러나기도 했다. 천정과 벽면 일부는 보수한 흔적이 남았다.

꾸미기_DSCN1233[1].JPG

(난간집 보이는 곳이 송대에 만들어진 437굴의 겉모습이다. 목조 난간절집은 천 년세월을 느끈이 이겨냈다.)

437굴은 굴 입구에 송대(宋代)에 만든 목조 난간절집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물론 상당히 훼손되긴 했지만 1천여 년을 버텨온 희미한 연륜이 보는 이의 가슴을 물컹하게 했다. 428굴은 최대의 동굴이라고 했다. 1.400여 년 전 북조 때 시주에 의해 만들어졌다. 현란한 벽화로 가득 찼다. ‘열반경변’, ‘석가열반도’, ‘설법도’ 등이다. 이곳에 있는 비천상도 유명하다.

427굴은 수(隨)나라 때 만든 것으로 추정했다. 삼존입상이 중앙을 자리 잡았다. 벽면엔 108체의 비천상, 그리고 여러 가지 악기가 그려졌다. 비파, 수금, 횡적, 공후 등등. 이 굴은 1921년 페르시아 군대가 주둔하면서 많이 허물어버렸다고 한다.


‘왕오천축국전’ 발견된 장경동

328굴은 불교문화가 가장 꽃을 피운 성당(盛唐) 때 만들어진 굴이다. 이 굴의 벽화와 불상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연구원만 출입이 가능한 굴이라고 덧붙였다. 해설사 리신 씨는 “이 굴은 곧 밀봉할 계획”이라며 “특별히 관람시켜줬다.”고 생색을 냈다.

난 어느 굴에선지 모르지만 벽화 중에 해설사가 손전등을 밝혀 비춰준 고구려와 신라인이 즐겼던 조우관(鳥羽冠) 쓴 사람의 모습과 우리의 장고를 닮은 악기를 든 악사의 모습, 그리고 고구려 벽화와 비슷한 비천상(飛天像)이 그려진 벽화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린 중국문화의 전성기라 일컫는 당(唐)나라 때 불상 중 걸작으로 손꼽히는 45굴의 ‘칠존상’을 비롯해 57굴의 보살벽화, 158굴의 열반상, 285굴의 비천도 등 예술품은 보지 못해 아쉬웠다.

우린 마지막으로 ‘돈황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 17호굴 즉 장경동(藏經洞)과 그의 모굴인 16호굴을 봤다. 16호굴 입구에서 2m가량 떨어진 통로 오른쪽에 감춰진 밀실이 발견됐다. 청(淸) 광서(光緖) 26년(1900년) 일이다. 이 밀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 3m에 불과한 조그마한 방이다. 이 방안에 4 ~11세기에 이르는 희귀문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불교경전과 문서, 자수, 회화, 부처의 존상이 그려진 명주기, 탁본 등 5만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신라 승 혜초가 쓴 유명한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됐다. 이들 희귀문물 대부분은 한문으로 쓰여 진 사본이다. 각인본도 소량이 나왔다. 사본의 90%이상이 불교경전이며, 그 외 역사서, 시문집, 문서 등이다. 한문 외엔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쿠처 어, 호탄 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소수민족의 문자도 있었다. 이들 문물은 중국과 중앙아시아, 유럽 등지의 역사, 지리, 종교, 경제, 문학, 예술, 과학기술 등의 연구에 사료적 가치가 무척 큰 것으로 평가됐다. 따라서 이 문물을 ‘중국고대 백과전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국 탐사대, 문화재 약탈행위

이 희귀문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탐사대라는 미명을 붙인 강국의 문화재 약탈 단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국인 약탈자 스테인(M Aurel Stein)은 1907년 두 번이나 들락거리면서 석굴 주지 왕원록 도사를 꾀어 중국은화 마제은(馬蹄銀: 말굽모양의 은화) 40닢을 주고 사경류(寫經類) 20상자와 회화 직물류 5상자 등 10.000여 점을 영국으로 빼돌렸다. 이들 유물은 지금도 대영박물관에 소장돼있다.

이어 프랑스인 페리오(Paul Peliot)도 2년 뒤인 1909년 이곳에서 1.500점을 가져갔다. 그 중에는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됐다. 이 유물은 지금도 파리국립도서관인 리슐리외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꾸미기_DSCN1240.JPG

(막고굴 주면에 자라고 있는 백양나무라 숲.)

이들 약탈 유물 중 일부는 우리 국립중앙박물관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들어온 것이다. 일본 승려 오타니 고즈이(1876 ~ 1948)와 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유물 수백 점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오타니 개인이 200점을 소유했고, 249점은 경도박물관에 위탁했다. 오타니는 이 탐험 뒤 살림살이가 퍽 궁핍해졌다. 그래서 나머지는 거부(巨富) ‘구하라’라는 상인에게 넘겼다. 구하라는 그 후 조선의 채광권을 얻기 위해 1916년 이 유물을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껏 소장하고 있는 막고굴 유물과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천불동 등지의 유물이다.

그 외도 러시아의 올덴부르크, 미국의 워너도 이 소식을 듣고 불같이 달려와 벽화 10장과 20장을 각각 오려갔다.

이같이 외국인에게 앗기고 남은 유물 6.000여 점은 북경으로 옮겨 중앙정부 내 학부에 보관했다. 1929년 북경에서 이 막고굴 유물을 국립 북경도서관에 전시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불교미술 까막눈, 자괴감 일어

해설사 리신 씨는 외국인들의 문화재약탈과정을 설명하면서 흥분했다. “도적놈들!”이라며 치를 떨었다. 이 말은 우리말 발언도 분명했다. 그러나 이들이 약탈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도 왕모라는 중국인이었으니깐 말이다. 왕모라는 도사가 헐값을 받고 팔아 넘겼고, 청나라 관리들도 국외 밀반출을 묵시적으로 인정을 해줬기에 약탈(?)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속으로 웃음이 일었다.

꾸미기_DSCN1237.JPG

(굴 앞 백양나무와 자작나무 숲은 굴을 둘러보고 나온 관광객들이 다리쉼을 하기에 안성맞춤인그늘을 만들어줬다.)

이 막고굴 중 11개굴을 둘러보고 나와 키 큰 자작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면서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왜 진작 불교미술에 관심을 갖지 않았느냐?’는 자괴감으로 가슴을 쳤다. 유홍준, 그는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랬다. 불교미술에 까막눈이니깐 동굴 벽화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어 무척 안타까웠다. 모르니깐 비교분석은 더 할 수 없고.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부처의 얼굴 모양이나 표정 등을 살피는 게 고작이었다. 천장과 벽면을 가득 메운 불화는 모두 그게 그것으로 보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여행 다니면서 익히지 못한 영어 때문에 늘 후회했지만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일로 속이 뒤집히는 건 처음이다. 진정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때 늦은 일이니 어쩔 수도 없고. 하긴 모르는 게 어디 이것뿐일까? 마는.

우린 이로써 돈황 관광을 마치고 서둘러 유원 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두 시간 버스를 타고 유원에 닿아 저녁을 먹었다. 그리곤 밤 9시 40분 하밀(哈密)행 기차를 타야했다. 유원 역에는 포터들이 안보였다. 가방은 모두 각자가 옮겨야했다. 송정화씨의 가방은 대형이다. 혼자서 옮기도록 두고 볼 수가 없다. 작은 내 가방과 바꿨다. 대합실까지는 계단을 몇 차례 거쳐야하기에 힘이 들었다.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