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둔황 '모가오굴' 보호에 340억원 투입
1987년 세계문화유산 지정 연 50만명 관람으로 '몸살'
베이징=이명진 특파원 mjlee@chosun.com

중국이 세계적인 불교 유물인 둔황(敦煌)의 모가오(莫高·막고)굴을 보호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관영 신화통신은 14일 중국 정부가 올해부터 모가오굴의 하루 관람객을 2000명 선으로 제한하고 사전 예약제 도입을 검토하기로 한 데 이어 2억6100만 위안(약 340억원)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하는 '모가오굴 보호·이용 프로젝트'를 추진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모가오굴 보호 예산은 인구 18만명인 둔황시의 1년 예산(2006년 1억3200만 위안)의 약 2배다.

중국 서북쪽 간쑤(甘肅)성 둔황시에서 남동쪽으로 25㎞ 떨어진 밍사산(鳴沙山) 비탈에 자리한 모가오굴은 약 1650여 년 전부터 실크로드를 오가던 승려와 화가 및 도공 등이 만들어낸 불교예술의 보고(寶庫)로 현재 735개의 석굴에 2000여 개의 채색 불상, 면적이 4만5000㎡에 달하는 벽화가 남아 있다.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모가오굴은 매년 5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오면서 이들이 뿜어낸 이산화탄소와 습기로 일부 벽화의 채색이 벗겨져 나가는 등 몸살을 앓고 있다. 또 밍사산 일대의 빠른 사막화로 50년 후엔 모가오굴이 모래에 파묻힐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 연간 50만명 이상이 찾아오는 중국 둔황의 모가오굴.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최근 승인한 '모가오굴 보호·이용 프로젝트'에 따르면 첨단 디지털 장비를 동원해 모가오굴 내의 벽화와 불상(佛像) 등 문화재들을 영상으로 재현해 전시하는 데 2억630만 위안이 투입된다. 관람객들이 직접 동굴에 들어가 관람하는 시간을 줄여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일부 훼손 상태가 심한 문화재는 외부 박물관 등으로 옮겨 보관한다. 또 모래폭풍 피해 방지 시설 설치, 약해진 산비탈 지반 보강과 통로 개조, 문화재 도난 방지를 위한 감시카메라 등 첨단 장비 설치가 추진된다.
입력 : 2008.02.15 01:29
Posted by 동봉
,

왕오천축국전은 왜 프랑스에 있을까?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12] 세계문화유산 돈황석굴(막고굴)
조수영(sy0707) 기자
▲ 막고굴은 그리 높지 않은 절벽에 남북으로 1.8km에 걸쳐 만들어진 석굴이다. 하나하나의 굴마다 석불과 벽화가 가득하다.
ⓒ 돈황연구원
돈황석굴은 돈황 시내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그다지 높지 않은 절벽 벽면에 남북으로 1.8km에 걸쳐 만들어진 석굴사원이다. 여러 층으로 뚫린 석굴은 현재 확인된 것만도 492개에 이르고, 2천여 개의 불상과, 총 면적이 4500㎡에 이르는 벽화가 있다. 사막(莫)의 높은 곳(高)에 있는 석굴(窟)이라 하여 막고굴(莫高窟)이라 부른다. 또한 최고 전성기에는 석굴수가 천 개가 넘어서 천불동(千佛洞)이라는 별명도 있다.

천년을 이어진 상인과 순례자의 불심

전진시대 낙준스님은 수행 장소를 구하기 위해 돈황에 들렀다가 절벽 앞의 장엄한 일출 장면이 마치 천불을 보는 것 같아 굴을 뚫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3세기 원대에 이르기까지 천 년에 걸쳐 하나 둘씩 굴이 더 만들어져 동굴 사원이 되고, 벽화가 그려지고, 승려들이 승방으로 사용하면서 막고굴은 돈황주민과 대상들의 신앙의 성지로 변모하였다.

막고굴이 신앙의 성지로 빠르게 유명해진 것은 당시의 불안정한 시대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굴들이 한창 조성되었을 당시는 5호16국 중 하나인 전량(前凉)이 돈황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였다. 소국들이 각축하는 동안 세상이 흉흉했으므로 내세를 제시하는 불교가 더욱 빨리 사람들 마음 속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상인들과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힘든 여행길을 앞두고 부처님께 안전한 귀향을 빌었다. 이들은 돈과 불상을 시주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벽화가 그려진 새로운 석굴이 속속 생겨났다.

석굴군은 남쪽지구의 남굴과 북쪽지구의 북굴로 나눠진다. 남굴은 벽화와 불상들로 내부 장식이 되어 있는 반면, 북굴군의 석굴들은 벽화가 내부에 장식되어 있지 않고 석굴 안에서 바깥으로 이어지는 굴뚝이 만들어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스님들이 기거한 승방과 수행도량의 선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조한 기후 덕분에 유지될 수 있었던 동굴

석굴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석굴암처럼 화강암을 새긴 바위석굴이 아닌 사암층 동굴이다. 벽면에 바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목재로 뼈대를 만든 다음, 진흙과 갈대 잎을 섞은 흙으로 형체를 만들고, 그 위에 벽토와 석회 같은 것으로 곱게 바른 다음, 수채화로 단청을 입혀 놓은 것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것과 달리 섬세한 곡선과 화려한 채색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제작되었지만 그 모양과 색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의 메마른 날씨 덕분이다.

▲ 북굴군의 석굴들은 벽화가 내부에 장식되어 있지 않고 바깥으로 이어지는 굴뚝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들이 기거한 승방과 수행도량의 선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조수영
막고굴의 견학은 모두 가이드투어로 진행된다.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8개 정도의 석굴을 방문한다. 정문에서 가이드를 요청하니 우리나라에 유학 온 경험이 있다는, 한국말을 잘하는 중국인 부개군씨가 나왔다. 요즘은 한국인 방문객이 많아서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의 투어는 진행한다고 한다.

벽화들을 찍을 생각에 배터리의 충전도 짱짱하게 해 왔는데 카메라와 캠코더의 불빛이 벽화를 훼손시키기 때문에 절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입구에 있는 짐보관소에 카메라를 맡기는 심정이 자식을 떼어놓고 가는 마음이다.

어두운 굴의 내부에는 조명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에 손전등을 준비해야 한다. 가이드가 비추는 손전등의 불빛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설명을 듣는다.

▲ 막고굴을 대표하는 제96굴의 누각. 높이 34.5m의 북대불이 있다.
ⓒ 조수영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불이 있는 <제96굴>

제일 먼저 막고굴 최대의 <제96굴>로 들어섰다. 번호는 1945년 중국 정부가 세운 돈황연구소에서 의미 없이 붙인 것이다. 96굴은 돈황에서 제일 큰 대불로 석태니소(石胎泥塑)의 미륵불좌상이다. 석태란 돌을 깎아서 신체의 윤곽을 만들고, 니소란 진흙으로 모양을 만들고 채색을 했다는 뜻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측천무후 원년(695년) 영은선사와 음거사가 만든 것이라 한다. 대불의 높이는 34.5m로 돈황석굴 중에서 가장 크다. 이 불상은 130굴 대불에 비해 북쪽에 있기 때문에 '북대불(北大佛)'이라고도 부른다. 그 크기와 섬세함에 떡하니 입이 벌어진다. 당시 황제가 여성인 탓에 불상은 다소 여성적 모습을 하고 있다. 초파일에는 불상의 뒤편까지 돌면서 불공을 드릴 수 있다고 한다.

대불을 보호하고 있는 건물은 원래는 5층이었으나 장기간 직사광선에 노출되어 보존상태가 극히 나빠졌다가 지역 유지들의 기부로 1936년에 현재의 9층으로 세워졌다. 지금은 막고굴을 대표하는 누각이 되었다.

<제130굴>에는 막고굴에서 두 번째로 큰 26m의 미륵불이 있다. 풍만한 얼굴에 온화한 표정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흘러내리는 듯한 옷 주름이 아름답다. 96굴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북대불의 반대 의미인 남대불(南大佛)이라고 한다. 당대에 이어 송나라 때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섬세한 왼손은 가장 아름다운 부처의 손으로 꼽힌다고 한다.

▲ <제130굴> 섬세한 손이 아름다운 26m 높이의 남대불(南大佛)
ⓒ 돈황연구원
<제259굴>은 북위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공개되는 석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2개의 불상이 있는데 화관 등의 힌두교 양식이 섞여 있다. 아잔타의 석불과 매우 유사하다. 이것들은 모두 목심불이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진흙을 붙여 만든 것이다. 가사를 몸에 두른 다보여래상은 깨달음의 순간 미소를 띠는 모습이 아름다워 '동방의 모나리자'로 불린다.

▲ <제259굴> 깨달음의 순간의 미소를 표현한 동방의 모나리자
ⓒ 돈황연구원
벽이 깨지자 드러난 보물들

돈황이 토번의 지배에서 벗어난 당 선종 때(848년), 당시 돈황의 유력가인 장의조가 그를 도와준 고승 홍변의 자문을 받아 <제16굴>을 만들었다. 16굴의 입구 오른쪽에 있는 작은 동굴이 <제17굴>이다. 이 굴은 홍변의 영굴(影窟), 즉 그를 위한 기념굴이다. 굴의 정면에는 단정하게 앉아 있는 94㎝의 홍변상이 있다.

이 17굴이 바로 왕원록이 5만 여권의 희귀한 서적들을 발견했던 장경동(藏經洞)이다. 1908년 16굴 입구에 쌓여있는 모래와 먼지를 제거하자 벽이 갈라지면서 구멍이 뚫렸다. 벽을 깨뜨리자 길이와 너비가 각각 3미터인 작은 굴 안에는 경서와 문서, 자수, 회화, 탁본 등 5만여 점의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 16굴 입구에 쌓여있는 모래와 먼지를 제거하자 벽이 갈라지면서 구멍이 뚫렸다. <17굴>에는 경서와 문서, 자수, 회화, 탁본 등 5만여 점의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 돈황연구원
그러나 영국의 스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 중 하나인 <금강경>을 비롯한 이곳에 있던 7천여 권의 고서적을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이어 프랑스의 펠리오가 나머지를 약탈해갔는데 우리나라 신라 혜초스님이 남긴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도 주인을 잊은 채 프랑스로 가게 된다.

▲ 여러 층으로 뚫린 석굴은 현재 확인된 것만도 492개에 이르고, 2천여 개의 불상과, 총 면적이 4,500㎡에 이르는 벽화가 있다.
ⓒ 조수영
세계문화유산, 막고굴의 미래는?

굴마다 불상의 형태나 벽화의 내용이 다르다. 불교를 주제로 한 각종 부처, 보살, 불경에서 나오는 그림이야기, 그리고 인도, 중아시아, 중국에서 전해지고 있는 불교전설을 표현함으로써 당시 각 민족의 모습과 사회생활, 복장들을 볼 수 있다.

어두운 동굴의 천장과 벽화를 가득 메우고 있는 그림에는 한결같이 종교적 고행이 느껴진다. 또한 각 굴의 천장화는 매우 정밀하고 기하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교와 예술의 피땀 어린 결정체이기 때문에 막고굴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그러나 장경동이 발견된 후 세계 각국의 탐험가 아니 도굴꾼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사람들이 밀물처럼 모여들어 2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돈황의 경서와 진귀한 벽화, 조각을 훔쳐 갔다. 지금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인도, 독일, 스웨덴, 핀란드, 미국 등 나라에 문물이 흩어져 있다.

둔황연구소 측은 벽화와 불상이 너무 빨리 훼손되고 있어 공개하는 굴을 매년 줄이고 있다. 작년까지 일반 단체 관람객에게 40여 개씩 보여주던 것을 올해부터는 10여 개로 줄인 것이라 한다. 가이드 부개군씨는 머지않아 막고굴에서 일반 공개를 하지 않고 모조굴에서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앞으로 이곳 막고굴을 찾는 사람들은 굴 앞에서 전경 사진하나 찍고, 영상 CD를 구입하는 것으로 관광을 마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돈황의 햇살은 뜨거웠다. 그늘 안은 시원하지만 다음 굴까지 가는 길은 고온 건식 사우나다. 마치 단거리 달리기를 하듯 굴 사이를 후다닥 옮겨 다니는 것이 마치 태양과 두더지 잡기를 하는 것 같다.

Posted by 동봉
,

천사의 눈물이 만든 오아시스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11] 돈황의 명사산, 월아천
조수영(sy0707) 기자
▲ 월아천과 어루러진 모래언덕, 명사산. 바람이 부는 날엔 모래가 우는 소리를 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조수영
가욕관에서 돈황으로 가는 길, 하서주랑의 끝

우리는 지금 난주에서 돈황에 이르는 하서주랑의 서쪽 부분을 지나고 있다. 가욕관과 돈황은 고속도로로 이어져 있는데 공사 중이다. 내년 이맘때나 완공된다고 한다. 4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비포장길로 9시간을 달렸다. 온몸이 진동 맛사지를 한 것 같다.

돈황은 2천년 전부터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정거장 중에 하나였다. 중국의 학자들은 돈황을 '인후'에 비유한다. 마치 입에서 식도와 기도로 통하는 목구멍과 같다는 뜻이다.

고비사막과 기련산맥 사이로 있는 하서주랑을 거쳐 몰려드는 동방 문물이 이곳을 지나면 몇 갈래의 길로 갈라져서 빠져나가며, 반대로 그 길들을 거쳐 밀려오는 서역 문물은 이곳 돈황을 지나서야 동방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비유하면 병목이다.

동서무역의 중계점, 돈황(敦煌: 둔황)

돈황이라는 이름은 '성대하게 변영한다'는 의미이다. 의미 그대로 고비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로서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기원전 111년 한무제는 한반도가 있는 동쪽에는 한사군을 세우면서 돈황에 하서사군의 하나인 돈황군을 세웠다.

이후 한나라가 멸망하고 이 지역은 수백 년 동안 북방 이민족이 지배하게 된다. 티베트, 흉노, 선비 등이 지배 하에 있으면서 그들의 문화가 불상과 벽화의 양식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당대 7세기부터 8세기 중엽에 걸친 시기에는 가장 왕래가 성해 동서무역의 중계지점으로서 문화의 꽃을 피우며 세계적인 '돈황예술'을 창출했다. 이미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막고굴의 천불동이 그 예다.

사막답지 않게 푸르고 싱싱한 면화와 과일밭이 눈길을 끈다. 기련산에서 내려오는 당하가 시내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돈황은 감숙성 최대의 면화와 과일 산지다. 아담한 오아시스 도시, 돈황은 오늘도 예나 다름없는 병목 구실을 한다.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공항과 기차역으로 매일 수천 명씩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 아담한 오아시스 도시, 돈황은 오늘도 예나 다름없는 병목 구실을 한다. 돈황에는 아름다운 모래언덕 명사산과 세계문화유산인 돈황석굴이 있다.
ⓒ 조수영

▲ 명사산은 돈황의 남쪽으로 5㎞ 떨어진 곳에 뾰족하게 솟아있는 모래산이다. 높이 200m의 모래산은 남북으로 20km, 동서로 40km에 이른다.
ⓒ 조수영
바람부는 날엔 우는 소리를 낸다는 명사산(鳴沙山: 밍샤샨), 사실은...

아침 일찍 명사산으로 향했다. 햇빛이 강렬하기 때문에 한낮의 시간을 되도록 피해야 한다. 명사산은 돈황의 남쪽으로 5㎞ 떨어진 곳에 뾰족하게 솟아있는 모래산이다. 높이 200m의 모래산은 남북으로 20km, 동서로 40km에 이른다.

명사산이란 이름은 바람이 부는 날엔 모래가 우는 소리를 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태양열에 달구어진 뜨거운 모래알이 서로 마찰해서 내는 소리다. 정문으로 입장하니 수많은 낙타와 낙타몰이꾼들, 그리고 낙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10위엔짜리 덧신을 빌려 신었더니 나중에 모래를 터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었다.

월아천까지는 걸어서도 갈 수 있지만 낙타를 타기로 했다. 낙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벅지로 낙타 등의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낙타는 앞발과 뒷발을 동시에 움직여서 사람이 타면 몸이 앞뒤로 움직이게 된다.

▲ 천사의 눈물로 생긴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 월아천
ⓒ 조수영
천사의 눈물이 만든 오아시스, 월아천

낙타 등의 움직임에 익숙해질 즈음 월아천(月牙泉)에 도착했다. 정말 초승달처럼 생겼다. 가까운 모래언덕에는 그 반달의 모양을 사진에 담으려는 사람들이 마치 외신기자들처럼 포토라인을 이루고 있다.

월아천은 명사산 안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작은 오아시스로서 남북길이가 약 100m, 폭이 25m 정도다. 서에서 동으로 갈수록 수심이 깊고, 제일 깊은 곳은 5m 정도이다. 물색이 맑고 파래 마치 청동거울을 보는 듯하다.

이곳의 물은 돈황 남쪽에 솟아있는 곤륜산맥의 눈 녹은 물이 지하로 흘러 비교적 저지대인 이곳에서 솟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모래산에 둘러싸인 채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어우러진 모습은 사막 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이다. 월아천 옆에는 누각을 세워 사막의 작은 오아시스가 주는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월아천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있다. 오래 전 돈황이 갑자기 황량한 사막으로 변하자 어여쁜 천사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이 눈물이 샘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후에 천사가 샘 안에 초승달을 던져 빛을 찾게 했다고 한다.

겨울철에는 월아천의 물이 언다고 한다. 모래산과 얼음호수가 어우러진 모습 또한 장관일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월아천은 더 이상 물이 샘솟지 않아 주변의 수돗물을 끌어와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 돈황 사람들은 단오날 명사산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면 한해의 액을 면한다고 믿어오고 있다. 명사산의 정상까지는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 조수영
단오날 미끄럼을 타면 액을 면한다?

명사산의 봉우리에는 사람들이 오르기 쉽도록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지난번 아프리카 나미브사막의 모래언덕을 올랐던 때를 생각하면 시간도 힘도 절반인 것 같다.

돈황 사람들은 단오날 명사산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면 한 해의 액을 면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인지 백 미터 높이의 산 중턱에서는 돈을 받고 대나무로 만든 썰매를 빌려준다.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기니 속도가 빨라진다. 모래바람을 가르고 쏜살같이 내려가는 기분이 최고다. 다시 올라가는 고생만 없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탈 것 같다.

명사산에서 내려오니 기다리고 있던 낙타가 우리를 태워준다. 30위엔을 더 내면 낙타를 타고 언덕의 반대편까지 갈 수 있다. 낙타꾼에 이끌려 여러 마리의 낙타가 꼬리를 물고 가는 모습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으로 가는 대상인의 모습 같다.

▲ 낙타꾼에 이끌려 여러 마리의 낙타가 꼬리를 물고 가는 모습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으로 가는 대상의 모습 같다.
ⓒ 조수영

▲ 수많은 낙타와 낙타몰이꾼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 조수영

▲ 낙타는 앞발과 뒷발을 동시에 움직여서 사람이 타면 몸이 앞뒤로 움직이게 된다.
ⓒ 조수영

▲ 명사산은 중국인들에게도 유명한 관광지이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단체사진.
ⓒ 조수영
1) 한사군 - 기원전 108년에 한의 무제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설치한 네 개의 행정 구역. 낙랑군, 임둔군, 현도군, 진번군을 말한다.

2) 하서사군 - 한무제가 실크로드를 개척하면서 서쪽에 설치한 네 개의 구역. 무위(양주), 장액(감주), 주천(숙주), 돈황(사주)를 말한다.

Posted by 동봉
,

사막의 실크로드 감쑤성 "돈황" 조회(46) / 추천 / 퍼가기
등록일 : 2006-04-20 09:44:07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