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문관에서 왕유의 시를 떠올리다
[실크로드 여행기 10]
최성수(borisogol) 기자
▲ 옥문관. 옛 관문은 없어지고, 새로 지은 관문이 사막에 뎅그마니 서 있다.
ⓒ 최성수
돈황에는 큰 관문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양관(陽關)이고 다른 하나는 옥문관(玉門關)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양관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이고 옥문관은 북쪽이다. 난주, 주천, 가욕관을 거쳐 이어온 실크로드는 돈황을 지나면 옥문관 쪽과 양관 쪽으로 갈라진다. 타클라마칸 사막 길을 지나는 실크로드를 천산남로라고 한다. 천산남로는 세 갈래의 길로 나뉜다. 서역북로, 서역중로, 서역남로가 그것이다.

옥문관을 나서면 길은 누란, 쿠처를 거쳐 카슈카르로 이어진다. 이 길이 천산 남로의 서역 중로에 해당된다. 돈황에서 바로 북쪽으로 길을 잡으면 하미, 선선, 트루판, 우루무치로 이어져 천산산맥의 남쪽 기슭을 따라가는 서역 북로다. 양관을 지나면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을 따라 차말, 호전을 거쳐 카슈카르로 이어진다. 이 길은 서역 남로다. 그동안 내가 여행한 길은 옛 실크로드의 길로 치면 서역 중로에 북로의 일부가 섞인 길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출발점인 돈황에 지금 서 있다. 숱한 옛 사람들이 돈황 이 길에 서서 가야할 막막한 사막에 대한 노래를 읊었다. 그 노래들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 양관이고 옥문관인 것은 그런 때문이다.

지난 여행 때 양관을 갔다 왔으므로, 이번 여행길은 옥문관을 택한다. 말 그대로 옥이 들어오고 나가는 문이라는 뜻의 옥문관은 돈황에서 세 시간 가까이 사막 길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황무지 사막과 낙타풀을 다시 지난다. 햇살은 어김없이 쨍쨍하다. 바라보면 눈이 시린 하늘이 사막의 끝에 닿아 있다. 한참 그런 풍경 속을 달리는데, 지평선 저 끝에 넘실넘실 물살이 출렁이는 거대한 호수가 나타난다. 분명 호수다. 물살이 출렁이는 모습도 선하다. 그런데 그것이 신기루란다. 쨍쨍한 햇살과 끝없는 지평선, 아지랑이들이 뒤엉키면서 만들어낸 신기루를 보고 달려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사막에 쓰러져 모래의 일부분이 되었을까?

▲ 돈황 시내 과일가게 아저씨들. 사막의 과일을 한 아름 사 들고, 우리는 옥문관으로 갔다.
ⓒ 최성수
그런 막막한 기분으로 옥문관 가는 길을 달린다. 시안에서 출발한 실크로드의 길이 이제 본격적인 사막의 아득함 속으로 뻗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혜초의 길이고 삼장법사의 길이며 동시에 실크로드의 개척자인 장건의 길이기도 하다.

장건, 은하수 끝을 보고 온 사람

장건은 한나라 무제 때의 사람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은하수의 끝을 보러 갔다 왔다고 한다. 위나라 때 장화가 쓴 <박물지>에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은하수 끝을 보러 갔다 온 사나이가 있는데, 이 전설이 후세에 재창작되면서, 황제는 한무제로, 사나이는 장건으로 바뀐다. 전설의 사나이가 장건이라는 실제 인물로 바뀌는 것은, 장건의 삶이 그만큼 독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장건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기 위해 장안을 떠난 것은 기원전 139년의 일이다. 당시의 황제는 한무제였다. 한무제는 늘 북방 흉노의 강성한 세력에 위협을 느꼈다.

몽골 고원의 지배자는 원래 월지(月氏)라는 나라였다. 기원전 3세기까지도 몽골 고원은 월지의 세력하에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210년 무렵을 전후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흉노가 월지를 몰아내고 몽골 고원을 차지했다. 한 무제는 이러한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흉노의 지배권 밖으로 쫒겨난 월지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고 흉노를 견제할 계책을 세운다.

문제는 월지를 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야하고, 그 사막 곳곳에 있는 흉노의 세력권을 무사히 빠져나가야 한다는 데 있었다.

▲ 옥문관 봉화대. 밑둥만 남아 세월을 지키고 있다.
ⓒ 최성수
한무제는 그 일을 맡아 할 사람을 모집했는데, 이에 응모하여 뽑힌 사람이 바로 장건이었다. 그러니 장건은 서역으로 가는 첫 번째 외교사절인 셈이다. 한무제는 떠나는 장건을 위해 백 명의 부하를 딸려 보냈다. 그 중에는 흉노 출신의 감보라는 충직한 부하도 끼어 있었다.

장안을 떠난 장건 일행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농서(隴西)에서 흉노에 체포되고 만다. 그 후 10년 동안, 장건은 흉노의 포로로 흉노 여자와 결혼해 아이도 낳고 완전히 흉노 사람이 된 것처럼 살았다.

기원전 130년, 장건은 감보를 비롯한 일행들과, 흉노의 정세가 불안해진 틈을 타 탈출하여 다시 월지로 향한다. 10년이 다되도록 무제의 신표를 몸에 지니고 살아온 장건은 대원국(大宛國, 지금의 우즈벡 공화국 부근)을 거쳐 드디어 대월지(大月氏:우즈벡 공화국 부근)에 도착한다. 그러나 대월지는 이미 흉노에 대한 반감을 지우고, 반농반목축의 윤택한 생활에 젖어있어, 한나라와의 동맹을 거부한다.

장건 일행은 더 서쪽으로 가 대하국(大夏國:아프가니스탄 북부)으로 갔다가 귀국하게 되는데, 돌아오는 도중에 다시 흉노에 잡혀 1년 더 억류되어 있다가 다시 탈출, 기원전 126년에 장안으로 돌아온다. 13년에 걸친 서역 방랑길이었다. 이때 함께 돌아온 사람은 떠난 백 명 중 감보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비록 동맹 외교 수립에는 실패했지만, 장건의 이 업적은 한무제에게 서역 경략이라는 포부를 더 굳게 심어주었다. 무제는 장건을 태중대부(太中大夫:황제의 고문)로 임명하고, 서역에 대한 온갖 정보를 듣게 된다.

▲ 옥문관 밖에는 제법 물이 고여있다. 이 물이 어쩌면 사막길로 나서는 사람들의 마지막 샘이 아니었을까?
ⓒ 김희년
기원전 123년에는 장군 위청의 흉노 공격에 교위로 참여하여 서역 외교 길에 얻은 경험을 전투에 활용하여 큰 공을 세우고, 박망후(博望侯)로 임명된다. 말 그대로 세상을 넓게 볼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뒤 장건은 굴곡의 삶을 이어가다 기원전 114년 장안에서 사망한다. 장건의 서역 원정은 외교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때까지 중국인의 의식 밖에 존재했던 서역을 비로소 인식 안으로 끌어들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장건의 이 원정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사막을 건너 오아시스 국가들을 찾아 외교 사절로 출발했고, 그 길을 따라 온갖 교역들이 이루어졌으니, 장건이야말로 실크로드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옥문관 너머 사막길은 사라지고

차가 옥문관 앞에 멎는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관문은 없다. 그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 조잡스럽게 보이는 현대판 문이 하나 생뚱맞게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사방은 사막이다. 멀찌감치 흙벽이 덩그마니 놓여있다. 얼른 달려가 보니, 옥문관이라는 빗돌이 놓여있다. 관문은 없어지고, 옛날 자취만 이렇게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봉화대였다는데, 봉화대인지, 관문의 아랫부분인지조차 분간이 안 간다.

옥문관은 한나라 무제 때 이광리의 페르가나 원정 때, 돈황이 군사 기지인 둔전으로 개발되면서 설치된 관문이다. 그 뒤 오랜 세월 옥문관은 양관과 함께 서역으로 나가는 중국의 국경 역할을 해 왔다. 허텐의 옥이 이 문을 통해 중국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옥문관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 웅덩이에 풀도 꽤 돋아있는 옥문관 밖의 한 곳. 적은 물도 반갑다.
ⓒ 김희년
흔적만 남은 옥문관, 몇 해 전 갔을 때 역시 흔적만 남아있던 양관, 두 관문을 거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막 길로 나섰을까? 그들은 어떤 꿈을 꾸며 그 아득한 모랫길을 건너 또 다른 세계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일까?

옥문관 주변은 제법 풀도 자라고 물도 흥건히 고여 있다. 이 관문을 나서면 다시는 저런 풀과 물이 흐르는 땅을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간절함에 목메었을 옛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문득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시 <원이를 안서로 보내며(送元二使安西)를 떠올린다. 시의 무대가 양관이고, 내가 거쳐 온 트루판, 쿠처 같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위성 아침 비
장안의 먼지 씻어내니
여관 앞 푸릇푸릇
버들빛 새로워라
그대여, 이 술 한잔
다시 받으시게나
서쪽 양관 밖에는
나 같은 친구도 없으리니.
(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盡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


장안에서 아득한 거리의 안서로 사신가는 친구에게 밤새 취하도록 술 마시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랜 시인은, 아침 싱그러운 장안 풍경에 마음이 더 슬퍼진다. 말고삐 풀며 떠나는 친구를 붙잡고, 다시 한 잔 술을 더 권하며, ‘양관 밖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나가면, 이제 다시 못볼 지도 모르네, 친구여.’ 하고 말을 건넨다. 시인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그 아득한 거리라 바로 아쉬움의 뿌리이고, 그 거리 이쪽에 양관이 있고 옥문관이 있다.

▲ 한나라 때 쌓은 장성. 성도 오랜 세월을 견디다 모래처럼 가라앉고 있다.
ⓒ 최성수
문득 왕유의 마음이 되어, 옥문관에 엉기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는데, 옥문관 너머 아득하게 이어진 사막 저편으로 다른 한 편의 시가 떠돌고 있다.

야광배에 가득 담긴 향기로운 포도주
마시려니 비파 소리 말을 재촉하네
그대여, 내 취해 사막에 쓰러져도 비웃지 말게
예전부터 원정 떠나 돌아온 이 몇이나 되나.
(葡萄美酒夜光杯/欲飮琵琶馬上催/醉臥沙場君莫笑/古來征戰幾人回)


역시 당나라 시인 왕한의 <양주사(涼州詞)>다. 그렇다, 이곳 옥문관을 거쳐 돈황에 온 옥으로 만든 야광배에, 사막의 과일 포도주를 마시며, 술 보다도 사막의 막막함에 취한단들 누가 무어라고 하겠는가?

나는 옥문관 너머 아득하게 이어진 사막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옥문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한나라의 장성도 역시 사막 속에 스러져가고 있다. 그저 길게 이어진 성의 아랫도리만 남아있을 뿐, 사막의 햇살과 바람 속에 성은 이미 사막이 되고 있다.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그 긴 세월을 조금씩 조금씩 스러지며 견뎌낸 저 장성의 아득한 시간을 생각해 본다.

그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날 밤 명사산 아래의 호텔 옆 술집에서 나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장건이나 왕한처럼 잠이 들고 말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진 것은 원정을 떠나 돌아오지 못한 숱한 사람들의 넋이 이곳 사막에 깃들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취한 잠 속으로 밤새도록 내 귓전을 소곤댄 것은 어쩌면 명사산 가는 모래 쓸리는 소리는 아니었을까?

▲ 한장성. 하늘과 아득한 사막 사이에 금을 그어놓은 것 같은….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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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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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우는 산이 있는 곳, 돈황
실크로드 여행기 9
최성수(borisogol) 기자
▲ 꽃 곱게 핀 명사산 풍경. 모래와 꽃이 대조되어 풍경은 아름답고 쓸쓸하다.
ⓒ 최성수

모든 여행은 해피엔드

저녁을 먹고 트루판 역을 향해 출발한다. 돈황으로 가는 길이다. 버스를 타고 역으로 가는 내내 나는 몇 해 전 트루판 역에서 시내로 오던 길을 생각한다. 어스름한 새벽,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는 마치 우주의 어느 귀퉁이를 유영하는 것 같았다. 조금씩 밝아오는 지평선의 모습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어지고 있었다. 역이 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트루판 시내는 해발이 마이너스이니, 차는 조금씩 휘어지며 그런 풍경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는 그런 풍경을 감상할 틈이 없다. 아니 그런 풍경을 조금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마음이 다급해지니, 풍경이 풍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실 트루판 시내에서 출발한 시간은 역에 도착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문제는 역 가까이에 다 와서 일어났다.

역을 한 오 분 남짓 남겨둔 거리에서, 갑자기 도로가 막혔다. 앞에 공사를 하니 돌아가란다. 아니, 길이 막혔으면 들어오는 입구 갈림길에서 안내를 하던지 해야지, 이게 무슨 일이야, 차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모두들 어이없어 하는 사이, 위구르인 기사는 얼른 차를 돌린다.

온 길을 한참 되 달리는데, 역으로 가는 길은 나타나지 않는다. 기사가 길을 알고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차 시간은 이제 이십 분도 채 남지 않았다. 기사도 다급해졌는지, 가이드인 조선족 친구에게 자꾸 표지판을 읽어보라고 손짓이다. 알고 보니 기사는 중국어를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표지판을 보고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니 길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 중국에서 만난 가장 친절한 사람. 그는 진심을 다해 승객의 편의를 살펴주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 문정애
마음은 자꾸 다급해진다. 비포장에 길도 없을 것 같은 곳을 버스는 마구 달린다. 이제 십오 분 남았다. 마음속으로 아예 돈황 행을 포기한다. 할 수 없지, 오늘 트루판에서 하루 더 자고, 내일 일찍 가는 방법을 의논해 봐야겠다, 하는 사이 버스가 역 앞에 도착한다. 열차 출발 십 분 전이다.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단거리 선수처럼 달려 역사 안으로 들어선다. 이미 사람들이 개찰을 거의 다 한 상태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상겼다. 기차표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타야 할 열차 편으로 우루무치에서 여행사 직원이 표를 가지고 오기로 했는데, 어디 있는지 만날 수가 없다는 거다. 가이드가 역무원에서 사정을 설명하는데, 마치 싸우는 것 같다. 차는 곧 출발할 것처럼 시동 소리를 높여댄다.

어떻게 사정을 했는지, 개찰 업무를 담당하는 역무원이 가이드의 신분증명서를 빼앗고 우리를 입장시킨다. 뒤쳐진 가이드는 우리에게 “12호차로 가세요.” 하며 소리를 지른다. 전화 통화로 겨우 우리의 호차만 알게 된 모양이다.

앞 뒤 잴 것도 없이 모두들 정신없이 달린다. 평소 걸음이 느리던 진형이 녀석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가장 앞서 달려가며 연신 뒤돌아 우리가 따라 오나 확인한다. 겨우겨우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서서히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한다. 한숨을 내쉬며 그제야 방을 찾지만, 표가 없으니 우리가 들어가야 할 호실을 알 수가 없다. 모두들 통로에 늘어서 긴장한 표정이다.

급히 가이드를 찾는데, 제일 나중에 탄 일행이 가이드가 기차를 타지 못했다고 말한다. 신분증을 찾아야하는데, 기차는 떠나버려 타지 못했다는 것이다. 표도 없고, 가이드도 없으니 그야말로 난감하다.

기차 복도에서 우왕좌왕하는데, 훤칠하게 생긴 역무원이 다가와 무어라고 묻는다. 알아들을 수 없다. 일행 중 다행히 중국 유학을 한 송희가 나서서 통역을 한다. 우리 사정을 설명하자 그 친구는 당황한 우리를 안심시키고, 표가 없더라도 방은 이미 배정되었으니 걱정 말라며, 우리에게 방을 하나하나 알려주고, 또 가이드에게 전화까지 해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나중에는 가이드가 새벽 세 시쯤이면 이 기차로 옮겨 탈 수 있을 거라며, 바로 뒤에 출발하는 기차가 하미 역 근처에서 이 기차를 앞지를 것이라고 설명까지 해 주었다.

일을 처리하는 과정 내내 그는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고, 걱정스런 우리 마음을 다독일 줄도 아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다. 여러 차례 중국 여행을 한 중에 만난 가장 친절한 중국인이었다.

일행 모두들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웃음이 터진다. 별 일을 다 겪어본다는 사람에, 이런 재미 때문에 여행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생각해보면 모든 여행은 해피엔드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여행의 맛을 제대로 보는 사람이리라. 그리고 문제 때문에 또 다른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그 새로움이 여행의 다른 맛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니, 모든 여행은 해피 엔드일 수밖에.

마사지 도로를 지나 돈황 시내로

유원 역에서 돈황 시내 가는 길은 여전하다. 몇 해 전 찾아왔을 때의 그 괴롭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포장된 도로이기는 하지만, 포장한 것이 더 문제다. 지반을 제대로 다지지 않고 포장을 했는지, 곳곳의 도로가 굴곡으로 이어져 있다. 운전기사의 몸이 순간적으로 천정에 닿을 듯 솟구쳤다 떨어진다. 그걸 바라보는 우리 마음이 아찔하다. 저러다 운전대라도 놓치면 어떻게 될까, 걱정이 앞선다.

▲ 월아천 옆 새로 만든 호수 앞에 한 중국인이 앉아 상념에 잠겨있다. 그의 생각이 곧 사막의 사상일까?
ⓒ 최성수

승객도 마찬가지다. 버스가 굴곡을 넘어설 때마다 몸이 붕 떴다 떨어진다. 제법 쿠션이 있는 버스지만, 엉덩이가 얼얼하다. 몇 해 전의 길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길을 달리다보니, 내가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런 길이 두어 시간 이어진다. 몇 차례 공중에 떴다 떨어지던 진형이 녀석이 불쑥 한마디 한다.

“이건 마사지 도로야.”

그 바람에 모두들 크게 웃는다. 아이딩호 가는 길보다 더 심한 굴곡이다. 그래도 길 가로는 아득하게 고비 사막이 이어지고, 낙타풀이 자라고, 모래 먼지가 인다. 전형적인 사막이다.

그렇게 두 시간 넘게 달리자, 서서히 물길이 나타나고, 홍류가 자라고, 풀숲이 이어진다. 그 끝에 오아시스의 전형적인 풍경인 이열 종대의 백양나무 가로수길이 나온다. 드디어 돈황이다.

돈황, 모래의 땅인 사주(沙州)라고 불리는 곳. 당나라 때까지도 이곳이 중국의 국경이었다. 이곳에서 관문을 나서면, 작은 오아시스 국가들이 이어지고, 본격적인 실크로드의 아득한 사막 길이 시작된다. 나는 돈황으로 들어서며 문득 선선, 누란, 구자, 고창, 소륵, 미란 그런 이름들을 떠올려본다. 그 오아시스의 작은 나라들로 가는 길목이 바로 여기, 돈황이기 때문이다. 그 돈황에 온 것이다.

명사산, 모래가 울어 아름다운 곳

저녁 무렵, 명사산(鳴沙山)을 오른다. 이름 그대로 고운 모래가 큰 산을 이루고 있다. 북적대는 사람들로 산 아래는 도떼기시장 같지만, 산 위는 그대로 적막강산이다. 그 적막감을 느끼기 위해 몰아치는 모래 먼지를 헤치며 산을 오른다. 모래 산으로 오르는 길에 나무 사다리를 놓아두어 그래도 힘이 덜 든다. 오르면서 바라보는 산 아래의 풍경이 그림 같다.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풍경이 달라진다. 시야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 나무 너머로 한없이 가는 모래들로 만들어진 명사산. 그 산길을 낙타를 타고 다시 가고싶다.
ⓒ 최성수

산꼭대기에 오르자 더 큰 모래 산이 이어져 있다. 내려다보니 월아천(月牙泉)이 곱게 모래산 사이에 놓여있다. 그렇다. 월아천은 모래산 사이에 있어 아름다운 것이다. 온통 흐릿한 모래의 풍경 사이 그토록 눈부신 샘과 풀과 나무들이 있기에 월아천은 더 돋보인다. 대조의 아름다움이 명사산과 월아천에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계속 이어져 있는 명사산의 더 높은 봉우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늦둥이 진형이가 나를 잡아끈다. 녀석이 가리키는 곳에 샌드 바이크가 보인다. 사람을 태우고 더 높은 명사산 꼭대기까지 안내해 준다는데, 워낙 탈것을 좋아하는 녀석이 그것을 타보고 싶은가보다. 혼자서는 태우기 힘들 것 같다는 핑계로 나도 녀석과 함께 샌드 바이크를 탄다.

넘어질 듯 기우뚱대던 샌드 바이크는 이내 자세를 잡더니, 모래 산을 내려갔다 올라갔다를 반복하며 점점 높은 산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몇 개의 작은 산을 넘은 오토바이는 마침내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 단숨에 내달린다.

그 산꼭대기는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하는 세상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부는 바람이 부드러운 모래를 자꾸 날려 모래 물결을 만들어낸다. 마치 바닷가 백사장에 쉬지 않고 밀려오는 물결처럼, 바람은 밀려왔다 밀려가며 모래의 물살을 만들어내고, 모래들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또 다른 자리를 찾아 헤맨다. 어쩌면 몇 년 후에는 저 모래들이 또 다른 산 하나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명사산 상상봉에서 만난 모래물결. 바람에 모래들이 작은 무늬를 끝없이 만들어 놓는다.
ⓒ 최성수

▲ 명사산에서 내려다본 월아천. 치롄산맥의 물이 아득한 거리를 흘러와 이곳에서 솟아나, 저렇게 예쁜 풍경을 그려낸다.
ⓒ 최성수

아득히 멀리 오아시스 마을인 돈황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다른 쪽에는 첩첩 모래 산이 이어져 있다. 그리고 사방은 저녁 어스름과 함께 모래 먼지가 날려 흐릿하다. 미음이 괜히 쓸쓸해진다. 마치 스러져가는 한 시대를 보는 것 같은 아득함이 밀려온다. 천지 적막 속에 오직 바람 소리와 모래 쓸리는 소리만 들려오는 명사산.

그 명사산의 느낌은 다시 모래 산을 내려오고, 월아천의 어둠 속에서 행피수(杏皮水:살구 쥬스)를 마시는 동안에도 내내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런 느낌은, 월아천의 냇물이 아득한 거리 저쪽의 치롄산(祁連山:칭하이성에서 간쑤성까지 이어진 산맥.)에서 땅 속으로 흘러와 이곳에서 솟구친 것이라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자연의 조화 때문에 더 든 것인지도 모른다.

▲ 명사산 상상봉 너머 첩첩 이어진 모래 산. 그 막막함이 전해져 온다.
ⓒ 최성수

막고굴, 세월의 흔적

돈황 여행자들이 반드시 들리는 두 코스가 있다. 하나가 명사산이고 다른 하나가 막고굴이다. 막고굴은 천불동의 하나다. 명사산의 한 자락에 수많은 굴을 파고, 굴 속에 벽화와 불상등을 조성해 놓았다.

막고굴은 동진(東晋) 때인 서기 366년 락준(樂樽)이라는 스님이 조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명사산과 삼위산 사이에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찾아갔더니, 빛은 천 개의 불상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스님은 그것이 부처님의 계시라고 생각하여 굴을 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뒤 원나라 때까지 약 천 년에 걸쳐 숱한 사람들이 굴을 파고, 벽화를 그리고, 불상을 조성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 지금의 막고굴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 막고굴 입구. 돈황학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졌을만큼 막고굴은 문화의 보고다.
ⓒ 최성수

첫 번째 방문 때도 그랬지만, 이번 여행에서도 막고굴은 신비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특히 이번에 우리에게 설명을 해 준 한족인 막고굴 연구원은 우리말을 분명하게 구사하며, 역사적 지식도 해박해 막고굴과 우리 역사, 문화를 연결 지어 이야기해 주는 덕에 이해가 더 깊어질 수 있었다.

▲ 바스러지는 벽에 굴을 파고 만든 막고굴. 어쩌면 저 굴도 사막의 모래 한 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 최성수

두어 개의 굴을 보고 났는데,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더위를 먹었는지 더는 못 가겠다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린다. 속이 좋지 않은지 아침도 걸렀는데, 더위가 기승을 부리니 어린 아이가 지칠 만도 하다.

그냥 밖으로 나가 나무 그늘 밑에서 기다리자고 하니, 녀석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17번 굴은 꼭 봐야겠다는 것이다. 여행 떠나기 전 읽은 책에 막고굴에 가면 혜초 스님의 유물이 나온 17번 굴을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는 거다.

지친 녀석을 끌고 제일 끝에 17번 굴을 본다. 녀석은 그제야 기운을 좀 차렸는지, 종알종알 장경동이 어떻고, 왕오천축국전이 어떻고 하며 떠든다. 녀석은 아마도 평생 17번 막고굴과 혜초 스님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그 한가지만으로도 늦둥이를 데리고 한 이번 여행의 이미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 나오는 막고굴은 천년 풍파를 고스란히 견뎌낸 사막의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크로드를 건너기 위해 이 돈황에 왔을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 막고굴에 들러 실크로드의 역사와 삶을 생각했을까? 그 오래 전, 변변한 교통 수단도 없이 이곳까지 목숨을 걸고 찾아왔을 막고굴 벽화 속의 주인공인 신라 왕자를 떠올리며, 나는 새삼 사막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어쩌면 막고굴의 저 소중한 유물도 오랜 세월 뒤에는 명사산의 고운 모래처럼 한 알의 점으로 남지 않을까? 사막에서는 영원한 것이 없으며, 사막에서의 삶 또한 그런 것이리라. 모래 위에 새겨진 화려한 미술품을 보는 것 같은 허전함이 막고굴을 나오며 든 것은, 사막에서 보낸 나의 밤이 점점 길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막고굴은 락준이 처음 팠다고 한다. 천 여 년을 만든 그 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 김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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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7 편)

(2006` 6, 17 ~ 6, 25)

주머니 마다 황금빛 모래가

모래 썰매 코스 중간 중간에 관리원이 지키고 있다가 사고나 불상사에 대비했다. 한 사람이 출발하면 뒤따라 다음 사람이 내려오니깐 코스에서 어정대다간 충돌사고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관리원이 모자와 선글라스를 주어 가져다 줬다. 우리 일행은 뒤집히거나 곤두박질치지 않고 잘 내려왔다. 곽청언 사장이 코스 중간에서 선로를 이탈했지만 아무런 일 없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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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나무 그림자가 황금빛 모래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원취리가 만발한 들꽃 밭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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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에 그늘을 남긴 백양나무 그림자가 잔잔한 물웅덩이에도 길게 드리우며 어른거린다.)

낙타를 둔 곳까지 걸었다. 중간에 작은 물웅덩이가 주위를 푸르게 만들어 냈다. 웅덩이 가엔 갈대가 자랐고, 모래언덕 쪽으론 백양나무와 포플러나무가 드문드문 서서 긴 그림자를 황금빛 모래 위에 드리웠다. 퍽 한가롭고 정겨운 시골풍경이라고나 할까? 잔잔한 물웅덩이에도 백양나무와 포플러나무 그림자가 길게 어른거린다. 발걸음 떨어지지 않는다. 앞서 가던 일행들이 뒤를 자꾸만 되돌아보면서 빨리 오라고 채근하는 눈짓이다. 떼어놓기 싫은 발걸음 옮기니깐 물기 젖은 황토밭엔 원추리와 패랭이꽃이 피었고, 잡초가 무성했다. 다시 낙타를 타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대문 근처엔 낙타를 탄 모습들을 찍어놓고 사진을 사가라고 성화다. 기념으로 3위안 주고 한 장 사올 수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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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들이 피어있는 밭에는 패랭이꽃도 피었다. 며칠만 물을 주지 않아도 땅은 거북등 처럼 쩍쩍 벌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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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웅덩이 가엔 갈대가 자란다. 삭막한 모래땅을 찾는이들의 마음을 달래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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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산장 호텔 로비 벽에 걸어둔 고대 실크로드 전경도다.)

호텔로 돌아왔다. 모래를 씻어내는 시간을 주었다. 어떤 이는 주머니마다 명사산 황금빛 모래가 들어있었다고 즐거워했다. 체크아웃하곤 ‘돈황 예술의 꽃’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불교 유적지 ‘막고굴(莫高窟: Magaos Caves: 모아까오쿠)’로 가야했다. 중간에 점심을 먹었다. 막고굴은 돈황 시내 동남쪽 25km 거리라고 한다. 즉 명사산 동쪽 절벽에 남북으로 약 1.8km에 걸쳐 만들어진 석굴이다. 1천여 개의 석굴이 있어 일명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린다. 막고굴 주변엔 이와 비슷한 석굴들이 몇 개 흩어져있다. 일러 서천불동굴(西千佛洞窟), 동천불동굴(東千佛洞窟), 유림굴(楡林窟), 오개묘석굴(五個廟石窟) 등이다. 그 중에서 막고굴이 대표적인 것이다.


‘석실보장’ 등 현판이 기 꺾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막고굴은 천여 개(735개 또는 812개 등 여러 설이 있음)의 굴 중 2006년 6월 현재 492개만 발굴돼 그 중 일부를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있다. 돈황 시내에서 30여분 걸려 막고굴 주차장에 닿았다. 온통 주위는 황량한 모래언덕과 그 뒤로 붉은 바위산이 삐쭉 삐쭉 솟아있다. 주차장 부근에서 굴 가는 길목에는 버드나무와 자작나무 푸른 띠가 둘러쳤다. 또 길목엔 사암으로 만든 붉은 원추형 탑들이 드문드문 서있어 눈길을 잡았다. 멀리 사막 모래언덕에도 이 원추형 탑은 흩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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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 주차장에 바라본 산. 앞쪽엔 모래언덕으로 이뤄진 야트막한 산이 있고, 그 뒤쪽엔 붉은 사암의 뽀족한 높은 산이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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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을 찾아드는 길엔 붉은 원추형 탑들이 관광객들을 맞아 들인다. 햇볕은 강하진 않았지만 찜통 속을 걸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같은 땡볕 길을 한참이나 걸어가다가 탕천하(宕泉河)라는 개울을 가로지른 시멘트다리를 건넌다. 탕천하는 물이 마른 건천. 강바닥엔 자갈들만 드러났다. 다리 건너 바로 날아갈 듯한 2층으로 된 목조 건물의 대문이 가로 막는다. 1층 위쪽엔 가로로 된 청색바탕 커다란 현판엔 ‘石室寶藏(석실보장)’이라고 새긴 금색 글씨가 사람의 기를 꺾어놓았다. 그 위 2층엔 가로로 ‘莫高窟(막고굴)’이라는 편액이 걸렸다. 이 문 오른쪽엔 키 큰 자작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었고, 왼쪽으로는 버드나무 숲이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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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으로 새긴 '석실보장'이라는 편액이 관광객의 기를 꺾어놓고 만다. 그 위쪽엔 '막고굴'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렸다.)

이 숲길을 조금 걸어 들어가면 청색바탕에 ‘莫高窟(막고굴)’이라는 금색 글을 쓴 솟을대문이 반긴다. 그 뒤로는 1.8km에 이르는 절벽에 수많은 굴들이 다섯 층에 걸쳐 연이어 뚫렸다. 마치 옛날 짚으로 인 농가의 두툼한 처마 아래위로 연이어 숭숭 뚫려진 참새 구멍 집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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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입구엔 '막고굴'이란 현판을 단 솟을대문이 반긴다. 늘 사진촬영을 하는 곳이라관광객들이 빈 틈을 주지 않는다.)

이 굴은 당(唐)나라 중종 때(698년) 이극양(李克讓)이 수찬한 ‘막고굴불감비(莫高窟佛龕碑)’를 보면 “서기 366년 승려 낙준이 수행 중 홀연 금빛으로 반짝이는 1000여 개의 부처 형상을 목격하고 굴을 파 감실(龕室)을 구성한 것이 시초”라고 적혔다. 366년은 전진(前秦) 때다. 이 후 석굴을 만드는 작업은 13세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즉 북위(北魏),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隨), 당(唐), 오대(五代), 송(宋), 원(元)나라까지 이어졌다.


중국인 리신씨, 우리말 해설

전체 석굴 안에는 모두 4.400여 점의 소조불상(흙으로 빚은 불상)이 있으며, 연면적 4.500㎡의 벽화가 있다. 이 벽화들을 1m 폭으로 만든다면 그 길이가 45km 에 달할 정도로 엄청 난 량이다. 이들 벽화의 내용은 초기에는 민간신화가 주제였으며, 그 뒤 불교가 전해지고서는 석가의 선행, 열반상, 그리고 사후의 극락세계를 묘사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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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의 대표적인 북대굴 모습. 저 사원 안엔 엄청난 부처가 모셔져 있다. 일행은 겉만 봤을 뿐 그곳은 들리지 못했다.)

이 굴에 대한 해설은 막고굴 전속 중국인 해설사의 몫이다. 우리 일행은 두 팀으로 나뉘었다. 우리 팀의 해설은 한족(漢族)인 막고굴 고급강해사(高級講解師) 리신(李新)씨가 맡았다. 그는 ‘한국돈황학연구회’ 회원이기도 했다. 우리말로 해설할 수 있는 한족 고급강해사는 3명뿐이라고 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리 씨는 열성을 다했다. 그러나 나는 서툰 그의 우리말 발음을 거의 이해하기 힘들어 애를 먹었다. 그런 나에게 우리말 통역은 홍 단장이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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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 단면을 몇 층으로 뚫어 1000여개의 사원을 만들었다. 아래 위를 다니면서 지정된 굴 열 곳 정도를 볼 수 있었다.)

우리 팀은 172굴, 173굴, 174굴을 거쳐 148굴, 259굴, 437굴, 428굴, 427굴, 그리고 328굴을 보고 마지막으로 16굴과 그 굴 안에 있는 유명한 장경동굴(藏經洞窟)이라 불리는 17굴을 봤다. 그리곤 돈황 장경동굴전시관을 둘러보고 책과 민속품을 파는 가게를 거쳐 주차장으로 돌아 나왔다.

굴은 어두웠다. 해설사가 비추어준 손전등불빛으로 겨우 굴 내부를 볼 수 있다. 그는 손전등불빛을 피사체인 불상이나 벽화에 비추면서 설명해나갔다. 좁은 공간에 15명이라는 인원이 들어찬 데다 해설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제대로 해설을 들을 수가 없다. 또 보고 나가는 팀과 새로 들어오는 팀이 엇갈리면서 일어나는 소음이 이어져 정신이 집중되지 않는 분위기다.

이처럼 굴 안은 지금도 어두웠다. 그러면 굴을 파 불상을 만들고 벽화를 그릴 당시엔 화가들이 어떻게 했을까? 청동거울로 바깥의 햇볕을 굴 안으로 비춰 작업을 했다고 한다. 또 촛불을 이용하기도 했다. 어느 굴에선가 당시 떨어진 촛농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비천도’, 에밀레종 것과 흡사

처음 들어간 172굴은 투시화법을 사용한 ‘관무량수경변상도’가 벽면 가득히 그려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궁전 각 사이에 그려진 비천도(飛天圖)가 눈길을 끌었다. 경주 에밀레종에 그려진 비천도와 흡사한 모양이라고 느껴졌다. 173 ․ 174굴은 들어가긴 했는데, 부처와 천장과 벽면에 빼곡한 벽화만 보았다는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148굴은 거대한 ‘열반경변상도(涅槃經變相圖)’가 후면 벽을 가득 메웠다. 그 앞에 열반한 큰 와불(臥佛)이 있고, 그 주위엔 조그마한 조각상들이 부처의 운명을 슬퍼하는 모습으로 서있다. 남쪽 벽엔 ‘미륵하생경변(彌勒下生經變)’이란 유명한 그림이 그려졌다.

259굴은 가장 오래된 굴이라고 했다. 즉 북위(北魏)시대에 조영해 1.500여년을 견뎌왔다. 동양의 모나리자상이라고 불리는 ‘선정불’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참선하는 듯 보였다. 이 ‘선정불’ 또한 나무와 갈대로 만든 모형에 흙을 발라 광을 낸 소조불(塑造佛)이다. 손의 일부가 파손돼 그 속에 갈대가 드러나기도 했다. 천정과 벽면 일부는 보수한 흔적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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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집 보이는 곳이 송대에 만들어진 437굴의 겉모습이다. 목조 난간절집은 천 년세월을 느끈이 이겨냈다.)

437굴은 굴 입구에 송대(宋代)에 만든 목조 난간절집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물론 상당히 훼손되긴 했지만 1천여 년을 버텨온 희미한 연륜이 보는 이의 가슴을 물컹하게 했다. 428굴은 최대의 동굴이라고 했다. 1.400여 년 전 북조 때 시주에 의해 만들어졌다. 현란한 벽화로 가득 찼다. ‘열반경변’, ‘석가열반도’, ‘설법도’ 등이다. 이곳에 있는 비천상도 유명하다.

427굴은 수(隨)나라 때 만든 것으로 추정했다. 삼존입상이 중앙을 자리 잡았다. 벽면엔 108체의 비천상, 그리고 여러 가지 악기가 그려졌다. 비파, 수금, 횡적, 공후 등등. 이 굴은 1921년 페르시아 군대가 주둔하면서 많이 허물어버렸다고 한다.


‘왕오천축국전’ 발견된 장경동

328굴은 불교문화가 가장 꽃을 피운 성당(盛唐) 때 만들어진 굴이다. 이 굴의 벽화와 불상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연구원만 출입이 가능한 굴이라고 덧붙였다. 해설사 리신 씨는 “이 굴은 곧 밀봉할 계획”이라며 “특별히 관람시켜줬다.”고 생색을 냈다.

난 어느 굴에선지 모르지만 벽화 중에 해설사가 손전등을 밝혀 비춰준 고구려와 신라인이 즐겼던 조우관(鳥羽冠) 쓴 사람의 모습과 우리의 장고를 닮은 악기를 든 악사의 모습, 그리고 고구려 벽화와 비슷한 비천상(飛天像)이 그려진 벽화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린 중국문화의 전성기라 일컫는 당(唐)나라 때 불상 중 걸작으로 손꼽히는 45굴의 ‘칠존상’을 비롯해 57굴의 보살벽화, 158굴의 열반상, 285굴의 비천도 등 예술품은 보지 못해 아쉬웠다.

우린 마지막으로 ‘돈황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 17호굴 즉 장경동(藏經洞)과 그의 모굴인 16호굴을 봤다. 16호굴 입구에서 2m가량 떨어진 통로 오른쪽에 감춰진 밀실이 발견됐다. 청(淸) 광서(光緖) 26년(1900년) 일이다. 이 밀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 3m에 불과한 조그마한 방이다. 이 방안에 4 ~11세기에 이르는 희귀문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불교경전과 문서, 자수, 회화, 부처의 존상이 그려진 명주기, 탁본 등 5만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신라 승 혜초가 쓴 유명한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됐다. 이들 희귀문물 대부분은 한문으로 쓰여 진 사본이다. 각인본도 소량이 나왔다. 사본의 90%이상이 불교경전이며, 그 외 역사서, 시문집, 문서 등이다. 한문 외엔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쿠처 어, 호탄 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소수민족의 문자도 있었다. 이들 문물은 중국과 중앙아시아, 유럽 등지의 역사, 지리, 종교, 경제, 문학, 예술, 과학기술 등의 연구에 사료적 가치가 무척 큰 것으로 평가됐다. 따라서 이 문물을 ‘중국고대 백과전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국 탐사대, 문화재 약탈행위

이 희귀문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탐사대라는 미명을 붙인 강국의 문화재 약탈 단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국인 약탈자 스테인(M Aurel Stein)은 1907년 두 번이나 들락거리면서 석굴 주지 왕원록 도사를 꾀어 중국은화 마제은(馬蹄銀: 말굽모양의 은화) 40닢을 주고 사경류(寫經類) 20상자와 회화 직물류 5상자 등 10.000여 점을 영국으로 빼돌렸다. 이들 유물은 지금도 대영박물관에 소장돼있다.

이어 프랑스인 페리오(Paul Peliot)도 2년 뒤인 1909년 이곳에서 1.500점을 가져갔다. 그 중에는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됐다. 이 유물은 지금도 파리국립도서관인 리슐리외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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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 주면에 자라고 있는 백양나무라 숲.)

이들 약탈 유물 중 일부는 우리 국립중앙박물관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들어온 것이다. 일본 승려 오타니 고즈이(1876 ~ 1948)와 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유물 수백 점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오타니 개인이 200점을 소유했고, 249점은 경도박물관에 위탁했다. 오타니는 이 탐험 뒤 살림살이가 퍽 궁핍해졌다. 그래서 나머지는 거부(巨富) ‘구하라’라는 상인에게 넘겼다. 구하라는 그 후 조선의 채광권을 얻기 위해 1916년 이 유물을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껏 소장하고 있는 막고굴 유물과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천불동 등지의 유물이다.

그 외도 러시아의 올덴부르크, 미국의 워너도 이 소식을 듣고 불같이 달려와 벽화 10장과 20장을 각각 오려갔다.

이같이 외국인에게 앗기고 남은 유물 6.000여 점은 북경으로 옮겨 중앙정부 내 학부에 보관했다. 1929년 북경에서 이 막고굴 유물을 국립 북경도서관에 전시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불교미술 까막눈, 자괴감 일어

해설사 리신 씨는 외국인들의 문화재약탈과정을 설명하면서 흥분했다. “도적놈들!”이라며 치를 떨었다. 이 말은 우리말 발언도 분명했다. 그러나 이들이 약탈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도 왕모라는 중국인이었으니깐 말이다. 왕모라는 도사가 헐값을 받고 팔아 넘겼고, 청나라 관리들도 국외 밀반출을 묵시적으로 인정을 해줬기에 약탈(?)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속으로 웃음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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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앞 백양나무와 자작나무 숲은 굴을 둘러보고 나온 관광객들이 다리쉼을 하기에 안성맞춤인그늘을 만들어줬다.)

이 막고굴 중 11개굴을 둘러보고 나와 키 큰 자작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면서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왜 진작 불교미술에 관심을 갖지 않았느냐?’는 자괴감으로 가슴을 쳤다. 유홍준, 그는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랬다. 불교미술에 까막눈이니깐 동굴 벽화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어 무척 안타까웠다. 모르니깐 비교분석은 더 할 수 없고.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부처의 얼굴 모양이나 표정 등을 살피는 게 고작이었다. 천장과 벽면을 가득 메운 불화는 모두 그게 그것으로 보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여행 다니면서 익히지 못한 영어 때문에 늘 후회했지만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일로 속이 뒤집히는 건 처음이다. 진정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때 늦은 일이니 어쩔 수도 없고. 하긴 모르는 게 어디 이것뿐일까? 마는.

우린 이로써 돈황 관광을 마치고 서둘러 유원 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두 시간 버스를 타고 유원에 닿아 저녁을 먹었다. 그리곤 밤 9시 40분 하밀(哈密)행 기차를 타야했다. 유원 역에는 포터들이 안보였다. 가방은 모두 각자가 옮겨야했다. 송정화씨의 가방은 대형이다. 혼자서 옮기도록 두고 볼 수가 없다. 작은 내 가방과 바꿨다. 대합실까지는 계단을 몇 차례 거쳐야하기에 힘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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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6 편)

(2006` 6, 17 ~ 6, 25)

칼날 모래능선 마음 옥 죄

일행은 명사산 오를 준비를 갖추고 버스에 올랐다. 명사산 입구까진 2 ~ 3분 만에 닿았다. ‘鳴沙山月牙泉(명사산월아천)’이란 편액을 단 멋스런 기와지붕을 인 대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입장권을 가지고 대문을 통과했다. 거창한 황금빛 모래언덕(沙丘)이 눈앞을 꽉 메워버린다. 바람에 따라 모래언덕이 모양을 바꾸기 때문에 높이란 아예 의미가 없다. 간밤에 불던 바람에 꾸겨진 칼등 같은 모래능선이 비단 폭을 접었다 막 펴 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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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산 입구 기와지붕을 인 멋진 대문. '명사산 월아천'이란 현판을 내건 대문이관광객의 앞길을 가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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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모래구릉 칼날 같이 날카로운 능선이 꾸불꾸불 이어져마치 춤추는듯 살아 움직인다. 탄성이 절로 터졌다.)

황금빛 모래구릉 칼날 같은 능선은 굽이굽이 휘몰아쳐 들면서 마음마저 옥죈다. 참 장관이다. 그 날카로운 칼등성이가 마치 뱀이 기어가듯 꾸불꾸불 이어져 움직이는 듯하다. 칼등성이 좌우 경사면 황금빛 모래벌판은 마치 빗자루로 쓴 듯, 아니 비단을 펴 놓은 듯 아름답다. 모래알도 비단처럼 곱다. 이 고운 모래가 바람에 날리면서 울음을 내뱉는다.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올밖에. 이 칼등성이가 뻗어나가면서 명사산이란 명물을 만들어냈다.

탐험가 오렐 스타인은 이 칼등 같은 모래능선을 두고 “파도 같은 사구가 넘실거리는 바다와 같다”고 표현했다. 참 멋진 표현이다. 난 도저히 글로 형용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에 사진만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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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같은 고운 모래가 바람에 날리면서 칼능선의 모양을 바꾼다. 이 모래가 바람에 날리면서 울음소리를 낸다.)

이곳에서 낙타를 탔다. 난 샌들을 준비하지 않아 모래가 신발에 들어오지 않도록 덧버선을 빌렸다. 5위안을 줬다. 덧버선은 종아리까지 감싸주었다. 낙타대열은 4명 일조다. 일조를 한 명의 마부가 끌었다. 이곳은 쌍봉낙타로 덩치가 작아 이집트사막에서의 타기체험보담 위험하지 않았다. 낙타가 앉고 설 때의 흔들림이 훨씬 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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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들어서면 월아천까지 가는 길은 이 낙타를 타고 간다. 쌍봉낙타는 이집트의 사막에 자라는 낙타보담 덩치가 작아 탈 때와 내릴 때 흔들림이 적었다.)

낙타 타기는 한 5분 내외에 불과했다. 월아천 가기 전에 다른 오아시스가 자리했다. 그 아래까지 타고가선 내렸다. 오아시스를 건너 멀지 않은 월아천까지 7 ~ 8분은 그 부드러운 감촉의 황금빛 모래구릉을 밟고 걸어가야 했다. 발이 푹푹 빠져 걷기가 힘들다. 또 단단한 곳도 있어 수월하게 지나갔다. 아름다운 사막속의 오아시스 월아천을 향해서.


‘월아천 사라진다.’, 중 총리 발끈

월아천(月牙泉: Crescent Moon Lake). 사막 구릉 속 폭 꺼진 곳에 마치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물웅덩이를 말했다. 돈황의 남쪽을 두르고 있는 곤륜산맥(崑崙山脈)의 눈 녹은 물이 저지대인 이곳으로 흘러 솟아 일궈진 웅덩이다. 수천 년 동안 물 마른 적이 없다고 했다. 또 매년 여러 차례 광풍(狂風)이 휘몰아치지만 이곳만은 모래가 덮어 웅덩이를 묻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참 신기했다. 웅덩이와 주위에 자라는 식물들이 죽지 않아 만천(萬泉)이라고 불렸다. 그래서 이 물웅덩이를 ‘돈황의 눈동자’라고 불렀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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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에 내려서 월아천까지 7 ~ 8분은 도보로 고운 모래를 밟고 가야한다. 우리 그룹이 월아천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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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아천 위쪽에 있는 3층 팔각 지붕을 가진 누각. 여덟 각지붕이 마치 학이 하늘로 날기 위해 춤추듯 하다.)

초승달 모양의 물웅덩이는 남북 길이가 100m, 넓은 곳 폭이 25m, 수심은 깊은 곳이 2m라고 했다. 호수 주변엔 갈대를 비롯해 이름 모를 야생화가 한창 꽃을 피워냈다. 물색이 상당히 맑았다. 웅덩이를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3층 8각 지붕 여덟모서리가 하늘로 치솟는 날아갈듯 한 누각을 세웠다. 참 주위경관과 잘 어울리는 멋진 건물이다. 누각 옆 팔작지붕을 인 건물들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도교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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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산 기슭에서 내려보면서 찍은 월아천 전경. 모래 언덕과 그 주름들, 그리고 푸른 식물, 또 호수의 맑은 물이 한데 멋지게 어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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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산 정상에서 찍은 월아천 모습. 모래 산 뒤론 멀리 푸른 나무가 자라는 돈황 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이번 여정 두어 달 전 한 신문에선 이런 기사가 나왔다. “중국 원자바오(溫家寶)총리가 화를 냈다. 좀처럼 없던 일이다. 인민일보가 보도한 ‘월아천이 사라진다.’라는 르포기사를 읽고 난 뒤다. 중국총리가 화를 낼 만큼 ‘월아천’은 중국의 명승지다.”. 이어 “호수가 사라지는 이유는 극심한 사막화로 인해 수량유입이 급격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 때 4.000평가량의 수면면적을 자랑했던 호수는 지금은 고작 1.500평정도 남았다. 10m 넘었던 수심도 이젠 1.2m로 얕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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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아천 호수 주변엔 이름모를 들꽃들이 흐드러졌다. 푸른 나무도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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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산을 관광객들이 오르고 있다. 모래 언덕에 나무로 만들어 깔아놓은 사다리 같은 계단을 밟고 힘들게 올라야 정상에 설 수 있다.)

호수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붉은 버드나무도 이젠 고목더미가 돼 호수 주변을 뒹굴고 있을 뿐이다. 둔황시 당국은 중앙정부로부터 전문 인력을 지원받아 원인규명에 착수했다. 사막화 현상이 주요원인이지만 호수의 수원인 당강(黨江)이 말라버린 것을 큰 원인으로 판단하고, 당강 상류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환경복구사업에 착수했다.”는 내용이다.


고작 70 ~ 80 삶, 무슨 의미가?

그렇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부처님은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했던가?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因緣)에 따라 생긴 가상(假相)이며, 영구불멸의 실체(實體)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수천 년 동안 마르지 않았다던 그 웅덩이 물도 마르려고 하지 않는가? 고작 70 ~ 80인 우리 삶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점점 수량이 줄어드는 웅덩이를 밑으로 내려다보면서 잠시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빨리 갑시다.”라는 재촉에 정신 차리고 대열의 꽁무니를 이룬다. 이젠 명사산을 오를 차례다. 한참을 왼쪽으로 꺾어 모래 산을 걸어 오르는 길에 닿았다. 샌들을 신었거나 덧버선을 신은 일행은 그냥 모래언덕에 나무로 만들어 모래위에 깔아놓은 긴 사다리 계단을 밟고 오르면 됐다. 그러나 이런 준비를 갖추지 않은 분들은 부득이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오를 수밖에 없다. 송정화씨는 맨발차림으로 칼날 능선 오르기에 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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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만든 긴 사다리 모양의 계단 두개가 눈에 들어왔다.나무 계단을 통하지 않고 올라간 사람들의 발자국도 찾아볼 수 있다.)

만약 나무로 된 긴 사다리 모양의 계단을 모래언덕에 깔아두지 않았다면 능선까지 오르기는 참 힘이 들 것 같았다. 나무 계단이 없는 모래 오르막은 한 걸음 떼어놓으면 두 걸음 미끄러지고 마니깐. 이 사다리 같은 나무 계단을 만들어 놓고는 돈을 받는다. ‘비단 장사! 왕 서방’임에 틀림이 없다. 가는 곳마다 돈을 우려내니깐.

칼날 능선까지는 아마 100m가 조금 넘을 것 같았다. 룸 방장(方丈) 권정웅 부장이 걱정이다. 오르면서 아래를 뒤돌아본다. 혹시 오르기를 중도 포기할까봐서. 우리 일행 모두는 “권 부장, 파이팅!!!”을 외쳐댄다. 방장께선 온힘을 다 쏟아 오르신다. 맨 꼴찌지만 드디어 칼날 능선에 올랐다.


황금 모래 산 능선, 눈부셔

능선에선 사방에 가득히 퍼진 명사산 전경이 들어왔다, 그리고 저 아래 펼쳐지는 풍광들. 참으로 아름다웠다. 명사산은 동서 길이 40km, 남북이 20km라고 했던가? 칼날 능선은 뱀이 기어가듯 구불구불 한 없이 이어졌다. 또 중간 중간 가지치기를 하면서 뻗어갔다. 그 경사면은 비단을 편 듯 말쑥하게 퍼지기도 하고, 때론 분화구 같은 멋진 모래웅덩이를 만들어 내기도했다. 눈이 부셨다. 햇살을 받은 모래는 말처럼 황금빛 색깔 그대로다. 이 모래산은 오늘밤 부는 바람에 따라 세파에 더렵혀진 인간의 발자국을 모두 지우내고, 그 모양을 또 새롭게 말끔히 바꾸고 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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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정상 능선에 올라 숨을 고른다. 깊은 상념에 젖은 듯한 일행의 모습도 보인다. 아래쪽 멀리 도로 왼쪽엔 우리가 묵었던 '돈황산장' 호텔의 건물도 조그맣게 보인다.)

모두는 칼날 능선에 앉아 숨을 고르면서 주위 풍광에 넋을 빼앗겼거나 아니면 상념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저 아래쪽엔 너무나 아름다운 월아천이 자리했다. 그야말로 초승달처럼 생긴 물웅덩이다. 멋진 8각 누각과 사원, 그리고 웅덩이 주변의 녹색과 초원의 풀밭이 한 폭의 그림이다. 또 월아천을 통하는 작은 오아시스와 백양나무 숲에 가린 건물들, 멀리는 돈황이라는 큰 도시 오아시스가 펼쳐져 한 눈에 가득히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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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산에서 돈황 시내쪽을 보고 찍었다. 월아천 가기 전 나타난 조그마한 인공호수가 내려다 보인다. 그 뒤론 푸른 숲에 쌓여있는 돈황 시가지가 아련하게 다가온다.)

비경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오래 머물 시간은 없다. 능선에서 반쯤 내려오면 모래 썰매가 기다린다. 썰매 장까진 나무 사다리 계단을 밟지 않고 그냥 경사진 모래언덕을 내달렸다. 발목이 푹푹 빠지면서 내딛는 내리막 걸음이 참 기분 좋았다. 발자국이 없는 곳을 쫓아 마구 내려온다. 썰매 장에 닿아 차례를 기다린다. 썰매는 직사각형 나무로 짠 상자다. 바닥은 대나무 조각을 붙였다. 사람이 발을 얹고, 엉덩이를 붙이고, 등과 어깨까지 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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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산 7부 능선 쯤엔 모래설매를 타는 곳이 기다린다. 4각형의 모래설매는 바닥이 대나무로 엮어져 있어 모래에 잘 미끄러진다. 두 팔과 손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내려가야 한다.)

사람이 썰매에 누우면 아래 모래비탈로 밀어버린다. 바닥이 대나무라 썰매는 모래 위에 미끄럼틀처럼 잘도 미끄러져 내리꽂힌다. 이 때 두 손으로 방향을 잡아 줘야한다. 방향이 삐뚤어지면 곤두박질치거나 아니면 뒤집혀져 모래에 뒹굴 수밖에 없다. 난 방향을 잘 잡았으나 내려오는 속도 때문에 창 넓은 야자수 잎 모자와 선글라스를 날려버렸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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