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4 편)

(2006` 6, 17 ~ 6, 25)

‘계속 달린다. 끝없는 사막 위를~’

하밀을 지났다. 고비사막 중 바람이 가장 무섭기로 이름난 ‘막하연적(莫賀延磧)’을 통과했다. ‘막하연적’도 아침이라선지, 아니면 열차 안이라선지, 험난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현장법사도 이곳을 지난 후 “인적은 물론 날짐승도 없는 황량한 천지”라고 했다던가. 그는 이곳을 거쳐 온 뒤 “밤에는 도깨비불이 별처럼 환하고, 낮에는 모래바람이 소나기처럼 퍼붓는데, 닷새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입과 배가 말라붙어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고 썼다. 또 “여윈 말에 몸을 싣고 가다 모래 위에 엎드려 관음을 염한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고 했었다.

아침 9시에 열차는 유원(리우위앤) 역에 닿았다. 이 역은 돈황을 열차 편으로 이어주는 유일한 곳이다. 돈황시 북쪽 130km의 거리에 위치했다. 행정구역으론 감숙성(甘肅省) 안서현(安西縣)에 속한다. 이 역은 북경 상해 서안 서역 성도 란주 우루무치 등 10여개 대도시와 연결된 철로가 놓여있는 교통의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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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 전도. 돈황(敦煌:둔황)은 신장에 가깝게 치우쳐 있다. 보라색 선 안이 감숙성이다.)


남자들, 사막 한가운데서 소변도

유원에서 돈황까지는 육로로 두 시간이 걸린다. 성(省)이 바뀌었으니 감숙성의 현지 가이드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곤 버스를 타고 또 사막을 가로 질러 달렸다. 높고 낮은 모래언덕이 이어졌고, 때론 평지 같은 모래와 자갈이 섞인 곳도 있다. 사막 가운덴 점점이 허연 게 드러나 있다. “저게 뭐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다. 소금이 지표면 위에 떠올라온 것이라고 했다. 그 사이 사이로 낙타풀이 드문드문 나있다. 지평선 끝엔 높은 산봉우리들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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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역에서 돈황까지는 이렇게 이어진 사막길을 두 시간 달려야닿을 수 있다. 자갈반, 굵은 모래 반으로 이뤄진 사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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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가로지르는 포장도로다. 마치 고무판 같다. 잠시 정차해 볼 일 보고 사진도 찍었다.)

사막을 가로지른 포장도로는 마치고무판 같았다. 지반이 약해서가 아니라면 부실공사 탓일 것이다. 버스나 트럭등 하중이 무거운 차가 지나가면 울렁인다. 그러니 제대로 속력을 낼 수 없다. 승용차는 가볍기 때문에 그래도 잘 달렸다. 이 도로엔 차량통행이 많지 않았다.

1시간여를 달리곤 버스를 세웠다. 남자들은 노천에서 소변을 봤다. 그리고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기도 했다. 오아시스도 중간 중간 자리했다.

오아시스엔 크던 작던 촌락이 있다. 오아시스 가까운 도로변엔 묘지도 눈에 들어왔다. 묘는 모래나 자갈로 쌓아 바람에 허물어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물론 묘엔 잔디나 풀이 없는 맨살 돋음 무덤이다. 마치 삿갓을 놓아둔 형태의 원추형이다. 도로의 진행방향엔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일망무애의 사막이 이어졌다.

오전 11시 30분쯤 돈황에 도착해 명사산(鳴沙山)을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돈황산장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돈황(둔황)이 어떤 곳인지? 잠시 짚어본다.

돈황을 설명하려면 내륙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 동서통상로(東西通商路) 즉 실크로드(Silk Road)를 먼저 일독해야 한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인 상품이 바로 비단(Silk)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길을 ‘비단길’로 불렀던 것이다. 서방의 비단은 직물 옥 보석 등 서방의 산물로 되돌아왔다. 뿐만 아니다. 불교 이슬람교 등 종교도 이 길을 통해 동아시아에 전파됐다.

이 통상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변을 가로지르는 서역북도(西域北道)와 타클라마칸 사막 남변을 지나는 서역남도(西域南道)로 나뉜다. 두 길 다 같이 파미르고원(Pamir Plat.)을 넘어 서(西)투르키스탄의 시장에 이어지며, 동방으로는 간쑤성(甘肅省) 돈황에서 합쳐져 황하유역에 이른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타림분지(Tarim Basin)의 중앙에 자리했다. 타림분지는 면적이 70만 ㎢로 한반도의 3배를 넘는다. 서쪽은 파미르 고원, 북쪽은 톈산산맥, 남쪽은 쿤룬산맥(崑崙山脈)에 둘러싸인 동서 길이 1500km, 남북 길이 500km, 평균해발 800 ~ 2000m의 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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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에 흩어진 오아시스 나라들의 대상(隊商)들에 의해 이어졌다. 대상을 통한 무역의 이윤은 동방에선 중국인을, 북방에선 유목민을, 남방에서는 티베트인을 끌어들이게 됐고, 점차 확대돼 갔다. 이윤이 남았기에 이 길을 독점하려는 싸움이 여러 종족 사이에 잦았음은 물론이다.

이 길이 열린 것은 BC 1세기경의 한(漢) 무제(武帝) 때라고 하지만 그 이전부터 동서교섭이 이뤄진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 ~221)부터 한 대 초기에 걸쳐 간쑤성 서부를 점거하고 있던 월지(月氏 : 禺氏)가 비단의 중계무역을 해왔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서역의 옥이 월지를 통해 중국에 많이 수입되었다. 그 옥의 대가로 비단수출이 이뤄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 무제 때 서역과 교역의 중요성이 일깨워 지면서 역대 왕조들도 동서무역을 위해 실크로드를 통과하는 주변 오아시스의 나라들을 지배하려고 몸부림쳤다. 7세기 중엽 당나라가 타림분지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했을 때가 실크로드의 최성기였다.

돈황은 이처럼 동방 실크로드의 관문이다. 중국 간쑤성 서부 주취안지구(酒泉地區) 허시저우랑(河西走廊) 서쪽 끝 당허(黨河)강 유역 사막지대에 위치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도시로 고대 동서무역은 물론 문화교류, 중국 서역경영의 거점도시다. 간쑤성 성도 란주(蘭州)와는 1.137km 떨어져있다.

BC 1세기 전한(前漢) 7대 황제 무제(武帝: BC 156 ~ BC 87)는 돈황을 서역진출의 전진기지로 삼고, 둔전병과 한인을 이주시켜 거점도시로 키워냈다. 그리곤 옥문관(玉門關: 위먼관)과 양관(陽關)의 두 관문을 설치해 이곳을 한의 영향력 아래 두며 국제무역도시로 키웠다.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에서 시작된 서역(西域) 길은 약 1.800km를 걸어 이곳 돈황에 이르러 숨을 고른다. 대부분의 교역품은 이곳에서 거래된다. 비단으로 바꾼 유라시아 대상들은 북쪽 옥문관을 거쳐 하미 → 투루판 → 우루무치 → 이닝 →카자흐스탄을 지나 터키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천산북로를 거쳤다. 아니면 돈황에서 투루판 또는 누란을 거쳐 쿠얼러 → 쿠차 → 카슈가르를 지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이란에서 터키로 빠지는 톈산남로를 거친다. 또 남쪽 양관을 통해 타림분지의 남쪽 기슭의 미란 → 체모 → 아르칸트를 지나 카슈가르에서 합류하는 서역남로를 택해 서쪽으로 가기도 했다.

그 뒤 5호 16국 시대엔 한족이 세운 서량(西涼: 400 ~ 421)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4세기 중엽 이곳은 그 지방 특유의 문화가 발전했고, 불교도 융성해 그 유명한 첸포동(천불동: 千佛洞) 석굴사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366년 전진(前秦)의 승려 낙준(樂僔)이 시작한 석굴사원의 조영(造營)사업은 북위(北魏),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隨), 당(唐), 5대(五代), 송(宋), 원(元)에 이르는 13세기까지 이어졌다.

서량이 망하고 북량(北涼) 북위(北魏)의 지배를 거쳐 수나라와 당나라의 영향아래 들었다. 8세기 말엔 토번(吐蕃)이 차지했고, 9세기 중엽이후는 당나라의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의 지방정권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 뒤 한 때는 금산국(金山國)으로 독립했으나 11세기 초 서하(西夏)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돈황은 후이족(회족: 回族)의 이슬람교도들이 많이 살며, 석굴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생업을 이어간다. 관광명소로는 돈황석굴, 명사산과 웨야천(月牙泉), 위먼관, 양관 등이 꼽힌다.)


‘서통누란’ 새긴 ‘양관박물관’

1시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이 시간에 우린 샤워를 했다. 점심을 먹곤 양관(陽關)으로 이동했다.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물론 사막 속을 달린 것이다. 포장길을 달리다가 비포장 길도 나왔다. 포장길은 아극새(阿克塞)로 이어진다. 아극새로 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톈산남로가, 곧장 남쪽으로 가면 티베트로 가는 청해성의 거얼무라는 도시에 이른다. 비포장 길을 조금 가다가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키 큰 백양나무가 울타리를 한 밭엔 포도가 한창 여물고 있다.

이 촌락을 지나 다다른 곳이 바로 양관박물관(陽關博物館)이라고 쓴 편액을 단 누각과 성채가 앞을 떡 막고 버티었다. 아래층은 벽돌의 성채이며, 누각은 성채 위에 세워졌다. 누각 처마엔 ‘서통누란(西通樓蘭)’이라는 조그마한 편액이 걸렸다. 아마 ‘서쪽으로 통하는 군사 누각’이라는 뜻일 게다. ‘란(蘭)’은 ‘병가(兵架)’라는 뜻도 있으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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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박물관 입구 성문이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옛 것들을 잘도 꾸며놓고 돈벌이를 한다.)

그 옛날 양관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단지 그곳 주위에 이렇게 억지 이름 붙인 박물관과 영화촬영 세트장을 만들어 옛날 그 흔적이라도 보여주려고 애쓴듯하다. 박물관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유물이라곤 볼게 없다. 화살촉과 동전 따위다. 박물관 안쪽으로 들어가면 한 무제 때 중국 사상 처음으로 서역통상로를 개척한 장건(張騫: ? ~ BC 114)의 말 탄 석상이 높게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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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의 옛 성채를 재현해 놓았다. 기중기와 사다리 등 전쟁에 쓰이는 군수물자들도 새로 만들어 뒀다.)

박물관을 벗어나면 옛 양관처럼 세워 논 허물어진 토성의 성채와 누각이 나타난다. 그 누각을 지나면 뒤쪽 모래언덕에 옛 봉화대가 아련히 눈에 들어온다. 낙타를 이용하면 봉화대까지 갈 수 있다. 우린 봉화대까진 가지 않았다. 영화 세트장을 돌아 이곳 관광을 끝냈다. 모래벌판 언덕바지엔 포도를 말리는 건조장이 여기저기 몇 동씩 늘려져있어 눈길을 끌었다. 아쉽다. 낙타 타고 옛 대상(隊商)처럼 열사의 땅 밟아 서역지방으로 내닫고 싶은 충동, 나 혼자만이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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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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