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 둔황 上

돈황 2006. 8. 6. 20:19

[현지취재] 실크로드 - 둔황 上

도굴의 역사, 둔황 막고굴의 슬픈 그림자

실크로드는 종종 서역으로 가는 경유지로만 간주되었다. 문명도, 고유한 역사도 없는 유목민의 땅이란 규정 속에 서구의 연구자들은 실크로드를 중앙아시아라는 문명세계의 경계 바깥에 위치시켰다. 그러나 지난 100년에 걸쳐 발굴된 증거들은 전혀 다른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문명은 러시아와 영국 이 두 제국이 이 지역의 사막과 산악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겨룬 19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세계사에 편입됐다. 서구 각국은 앞 다투어 군사적, 외교적 사절을 중앙아시아에 파견했고 흙더미의 폐허가 된 도시에서 엄청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이끌린 고고학자, 탐험가들이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선양의 따리엔(대련)에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 둔황(돈황)이란 굵은 황금색 글자가 인상적인 작지만 깨끗하게 신축된 둔황 공항에 도착했다. 꿈에 그리던 여행지. 그러나 실크로드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의 짐을 가득 실은 낙타 행렬의 그림자가 붉은 노을에 길게 드리우는 곳만은 아니다. 로맨틱한 상상의 대상이기에 서역의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다. 아름다우면서도 차갑기 그지없는 중앙아시아의 이국적 풍광과 함께 전쟁과 모험, 도굴 등 이 모든 것이 서역의 대지 속에 현재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1900년 왕도사라는 막고굴의 관리인은 16동을 수리하다가 모래로 막은 벽 너머로 새로운 굴인 17동을 발견했다. 가로 2.8m, 세로 2.7m, 높이 3m, 후대에 장경동으로 불리게 될 이 동굴 안에는 불경을 비롯한 많은 경전 사본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도사는 중세 동서양 문명 교류의 흔적을 이 담고 있는 이 귀중한 유물의 가치를 전혀 알아 볼 수 없었던 촌로에 불과했다. 막고굴이 맞이하게 될 비극적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왕도사는 기근을 피해 간쑤성에 왔다가 막고굴에 정착한 후베이 출신의 농민이었다. 그는 어두컴컴한 굴 안 벽화들의 흐릿한 색채가 싫어 벽화 위에 제 멋대로 회칠을 하기 시작했다. 회칠을 한 동굴 안은 오통 희뿌연 석회석으로 변해버렸다. 천년의 시간을 지닌 막고 유물 일부는 이렇게 어이없게 파괴되었다. 왕도사는 회칠만으로는 성에 안찼던지 자신이 원하는 조악한 보살을 놓을 자리를 위해 쇠망치로 석굴안의 조각상을 부셔 버리기도 했다.

막고굴이 이렇게 방치된 데는 지역의 관리들도 한몫했다. 유물이 너무 대량인데다 성으로 운반할 돈이 없다는 것이 관리들의 변명이었다. 왕도사가 <왕오천축국전> 두루마리를 땔감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 막고굴의 탄생

366년 악준(樂樽)이란 한 승려가 천하를 주유하던 중 금빛으로 빛나는 삼위산의 위용에 반해 석장을 땅위에 꽂아 두고 소리 높여 발원했다. 삼위산의 금빛은 상서로운 징조였다.
서쪽과는 정반대의 위치인 삼위산이 석양빛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 그 금빛 기운의 정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악준이 삼위산에 취해 있는 사이 이윽고 사방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내 악준은 첫 번째 석굴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악준을 이어 왕족에서 평민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과 염원을 담아 석굴을 파기 시작했다. 신비하고 안온하며 예술적 재능이 빛나는 막고굴은 이렇게 세상에 태어나기 시작했다.

막고굴은 무엇보다도 중세 문명 교류에 대한 진귀한 보고서다. 막고굴의 유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둔황 문서’로 한자,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쿠차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다. 도합 3만 여점의 돈황 문서의 작성 연대는 368년에서 1032년까지로 불교관련 내용이 단연 우세하다.

박 준 객원기자 tibetian@freechal.com
취재협조=웰빙 차이나 02-771-8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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