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취재] 실크로드 - 둔황 下, 푼돈에 팔려나간 세돌의 보물들

■ 수탈의 표적이 된 막고굴

유물을 찾아 험한 길을 찾아 서양에서 온 학자들, 탐험가들과 왕도사의 교환 장부를 보면 이제까지 막고굴의 유물들이 겪어야 했던 비참함에 굴욕감마저 더해진다.
왕도사는 막고굴의 유물을 탐내는 표독스런 서양의 이방인들을 고개 숙여 정중히 맞이하고 배웅했다. 이방인들이 쥐어준, 생전 손에 가져보지 못한 약간의 은화와 서양 물건들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방인들이 왕도사를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승들의 발자취를 쫓아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경을 가지러 왔다”는 단순한 거짓말 한 마디에 왕도사는 앞장 서 이방인들을 환대했다. 미래에 대한 긴장과 두려움 속에 만 리 길을 달려 온 그들을 맞이한 것은 고작 촌스러운 왕도사 한 사람뿐이었다.

1905년 러시아인 오브르체프는 러시아 물건 몇 개를 가지고 경전 한 무더기와 교환했다. 1907년 헝가리인 오렐 스타인은 은화로 스물 네 상자의 경전과 다섯 상자의 견직물, 회화작품을 교환했다. 1908년 7월 프랑스인 폴 펠리오 역시 은화로 6천여 권의 사본과 화첩을 트럭 열 대에 나누어 싣고 자국으로 돌아갔다.

1911년 10월 요시가와와 타바라는 3백여 권의 사본, 두 점의 당대 조각을 푼돈으로 사들였다. 1914년 두 번째 둔황을 방문한 스타인은 다시 은화로 6천여 권의 경서 다섯 상자를 사들였다. 1924년 예일대에서 온 워너 일행은 불상 몇 구와 벽화 20여점을 뜯어 갔다. 이렇게 실크로드의 모든 중요한 보물들은 대부분 약탈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찬란한 문명을 증거 하는 둔황 막고굴의 뛰어난 고고학적 유물은 모두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기메 박물관 등 유럽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는 ‘중앙아시아에서의 3년’이란 책에서 막고굴의 유물들과 최초로 조우하던 순간을 다음과 같이 썼다.

“그(왕도사)는 고문서가 무진장 쌓여 있다는 작은 동굴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방이 3m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공간 안에 두세 겹으로 쌓인 고문서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순간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는 지금도 형언하기 힘들다.”

한자에 능했던 폴 펠리오는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진귀한 문서들을 가려 낼 수 있었다. 그는 3주 동안 이곳에 머물며 고문서들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만 5천개의 두루마리로 된 문서 중에서 1만개를 챙겼다. 약탈이라 하기에는 너무 수월하고 싱겁게 끝나버린 도굴이었다. 왕도사는 폴 펠리오로부터 받은 몇 개의 은화를 손에 들고 친절히 그의 작업을 도왔다.

나중에 폴 펠리오는 “막고굴에는 구텐베르크보다 5세기나 7세기 앞선 8세기와 10세기의 목판 인쇄물들도 몇 점 있었다. 그것은 세계 최초의 인쇄물이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왕오천축국전’도 1908년 폴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었다. 왕오천축국전은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으로 책명도 저자명도 떨어져 없어진 총 227행의 잔간(殘簡)이다. 잔간이란 일부분 또는 대부분이 흩어지고 남은 문서이다. 이 잔간의 실체를 밝혀내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폴 펠리오다.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고 이것이 신라의 승려 혜초가 쓴 것이라는 것을 밝혀낸 펠리오는 뛰어난 고고학 학자이자 모험가였지만 동시에 그는 야만적인 도굴꾼이었다.

훗날 중국의 학자들은 막고 동굴의 연구를 위해 거꾸로 프랑스와 미국에서 막고굴 유물에 대한 마이크로필름을 사들여 와야만 했다. 대개의 소중한 문헌들을 모두 도굴 당한 후였으므로 중국 내에서 막고굴 문헌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동굴에서 뜯겨진 벽화의 필름을 도굴꾼의 후예에게서 사들여 고작 확대경 앞에서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굴욕감과 비애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굴 당시 유물의 가치를 아는 누군가가 펠리오의 트럭 행렬을 막아섰다면 막고굴 유물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아무런 보존 대책이 없었던 그 당시 가난했던 중국의 현실에서 현재와 같은 막고굴 문헌의 보존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손쉬운 가정은 분명한 도굴꾼인 그들에게 끊임없이 면죄부를 들이민다.

둔황 막고굴에 배어 있는 실크로드의 슬픈 역사, 사막 한 가운데서 누군가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듯하다.


■ 서역의 관문 양관

양관은 한나라 시대에 서쪽으로 가는 대상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외적의 침입을 알려주는 봉화대가 있던 자리로 둔황에서 남서쪽으로 약 62km 떨어져 있다.
양관 너머 펼쳐져 있는 삭막하지만 광활한 대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 보았다. 2천여 년 전에도 저 붉은 평원은 제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이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지금과 같은 설레는 유혹을 던졌을 것이다.

그대여
다시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게나.
서쪽으로 양관을 넘으면
다시 그대 못 볼 것을

당대의 시인 왕유는 객사 창밖으로 늘어진 푸른 버드나무를 힐끗 쳐다보고는 이윽고 행낭을 다 꾸린 친구를 바라보며 술잔을 들었다. 왕유는 눈물을 흘리며 비탄에 잠겨 떠나는 친구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두 눈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그들은 인생의 향로가 드넓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별은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떠나는 이의 발걸음 또한 활달했다.

왕유는 친구를 그렇게 보냈지만 기자는 양관 주변을 걸으면서 망망한 대해의 암초에 홀로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어붙은 파도 같은 주변 풍광 때문이었을까. 변방의 국경 역할을 해야 했던 메마른 역사가 상기되기 때문일까. 얼마나 많은 죽음이 이곳에 드리워져 있는지 모른다. 모두가 한 무더기 모래 무덤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명사에서 만난 모래바람

둔황 중심가에서 6km 떨어진 명사산은 거대한 모래산이다. 이곳의 극히 이국적인 풍경은 관광객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장소로 이곳에 있는 웨야취안(월아천)은 오아시스와 사막이 만나는 지점이다.
능선을 향해 수직으로 놓여있는 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밟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기를 10여분, 마침내 능선에 올랐다. 주변 사람들의 환호. 능선 너머의 풍경은 장대하고 막막한 모래산 그 자체였다.

능선에 올랐다는 환호는 채 얼마 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거센 모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집어 삼킬 듯 거칠게 몰아 쳐대는 모래알들, 엄습하는 두려움은 사나웠다. 모래알이 얼굴을 때리는 소리를 난생 처음 들었다. 셔츠로 얼굴을 가린 채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낮추었다.

명사산 입구에서 웨야취안까지 낙타를 타고 오면서 사막의 풍경에 어울리지 않은 너무 많은 관광객들로 느끼기 어려웠던 명사산의 실체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관광객들이 능선 중턱에서 아래까지 타고 나무썰매라는 인공물이 주는 작위적인 풍경을 일시에 덮어 버리는 세찬 모래바람, 그제야 내가 거대한 모래산 능선에 서있음을 절감했다.


둔황 글=박준 객원기자 tibetian@freechal.com
취재협조=웰빙 차이나 항공 02-771-8600

'돈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돈황고성’에선 먼지잼 만나  (0) 2006.09.23
‘서통누란’ 새긴 ‘양관박물관’  (0) 2006.09.23
실크로드 - 둔황 上  (0) 2006.08.06
막고굴 사진들  (0) 2006.06.30
돈황, 막고굴 사진들...  (2) 2006.06.30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