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뻐요, 동백꽃이 장미꽃보다 더 예뻐요"
동백꽃 활짝 핀 여수 오동도
조찬현(choch1104) 기자
▲ 난생 처음 본 동백꽃이 장미꽃보다 더 예쁘다는 김진주 양
ⓒ 조찬현
동백섬 오동도 방파제에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온다. 여수 수정동에 위치한 오동도 섬은 768m의 방파제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지난 2월 20일 찾은 오동도엔 봄맞이 나온 사람들의 물결이 섬까지 이어진다. 일부 상춘객들은 동백열차를 기다리기도 한다.

갯바위에는 강태공 부부가 봄을 낚아 올리고 있다. 순천에서 아내와 함께 낚시를 왔다는 김금봉(57)씨는 점심을 라면으로 때웠다. 오후 4시께가 다 됐는데도 입질을 않는다며 그냥 오는 봄이나 낚아 올려야 할 모양이라고 허허 웃는다.

"아이고, 하루 종일 입질한번 못 받아 봤습니다. 아침 7시에 왔는데 여태껏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손맛 한번 볼라고요. 아내는 그냥 도우미에요."

지금 여수는 '2012여수엑스포' 붐 조성을 위한 열기로 대단하다. 자전거사랑 전국연합회 여수지부 임용식(62)회장과 회원 20여명의 여수엑스포 홍보를 위한 자전거 행렬이 지나간다. 잠시 후 행락객을 가득 태운 동백열차가 지나간다.

▲ 봄을 낚아 올리고 있는 강태공 부부
ⓒ 조찬현

▲ 동백열차
ⓒ 조찬현
떨어진 꽃송이가 더 아름다운 빛깔 고운 동백꽃

동백 숲이다. 직박구리 녀석이 제철을 만났다는 듯 '끼익~ 끽' 괴성을 지르며 온 숲을 휘젓고 다닌다. 쪽빛 바다에는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린다. 은빛으로 금빛으로 일렁인다.

동백은 톡톡 꽃망울을 터트리며 방긋 웃는다. 봄볕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른다. 봉긋 솟은 붉은 꽃망울에서 발그레한 꽃잎이 나와 노란 꽃술을 감싸 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봄 햇살을 한껏 머금은 동백의 자태가 아름답다. 그 빛깔이 너무 곱다. 동백꽃은 꽃이 진 뒤에도 아름답다. 솔잎에 아픔으로 떨어진 꽃송이가 차라리 더 아름답다. 동백 숲 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비춘다.

▲ 솔잎에 아픔으로 떨어진 꽃송이
ⓒ 조찬현

▲ 떨어진 꽃송이가 차라리 더 아름답다.
ⓒ 조찬현
오솔길을 걷다보면 길 가운데서 기다렸다는 듯, 간간히 마주치는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길손에게 손을 내민다.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 하늘로 길게 쭉 뻗은 소나무, 푸른 하늘과 온 세상에는 봄볕이 가득하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유모차를 타고 가는 아기의 얼굴에도 지나가는 나들이객들의 얼굴에도 봄꽃이 활짝 피었다. 노부부는 한잔 술에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간다. 동백 숲에서 아름다운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여인의 붉은 순정 동백꽃으로 피어나다

▲ 여인의 붉은 순정 동백꽃
ⓒ 조찬현
용굴로 이어지는 나무계단이 인상적이다. 나무계단에 기댄 소녀가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바다에는 모터보트가 성난 독사의 머리를 하고 내달린다. 여객선은 미끄러지듯 뒤를 따른다. 갯바위에서 아낙이 굴을 따고 있다. 나들이 나온 여인은 맨발로 살금살금 갯바위로 다가가 파래를 뜯는다.

소녀가 예쁘게 핀 동백꽃 향기를 맡고 있다. 친구와 함께 여행 왔다는 김진주(21.전북 군산)양이다.

"예뻐요. 동백꽃이 장미꽃보다 더 예뻐요. 노란 꽃술과 빨간 잎이 어우러져 너무 예쁜 것 같아요."

▲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소녀
ⓒ 조찬현

▲ 용굴 근처 갯바위의 나들이객들
ⓒ 조찬현
동백섬 오동도에는 예부터 동백꽃으로 피어난 여인의 순정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먼 옛날 오동도에 아리따운 여인과 어부가 살았다. 어느 날 도적떼에게 쫓기던 여인이 낭떠러지 벼랑에서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바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지아비는 여인의 시신을 보고 소리소리 슬피 울었다. 어부는 양지(지금의 등대 부근) 기슭에 무덤을 지었는데 북풍한설 내리치는 그해 겨울 하얀 눈이 쌓인 무덤가에 여인의 붉은 순정이 동백꽃으로 피어났다고 한다.

여인의 붉은 순정 동백꽃이 올해도 예쁘게 피었다. 장미보다 더 예쁘고 아름답게 활짝 피었다. 봄볕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동백이 이번 주말쯤이면 절정을 이룰 듯하다.

▲ 활짝 핀 동백꽃
ⓒ 조찬현

▲ 장미보다 더 예쁘게 핀 동백꽃
ⓒ 조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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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답사여행 #1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과 보길도(甫吉島)

오랫동안 남도여행을 꿈꾸다가 마음을 다잡고 제대로 돌아보리라 길을 나섰다.

전국을 휩쓸던 단풍이야기도 끝이 나고, 날은 추워지는 이때가남쪽여행에는 안성맞춤이 아닌가?

때로는 쓸쓸한 길을... 때로는 흥미 가득한 발길로... 그렇게 돌아본 남도 이야기.

그 첫 출발지는 해남 땅끝 마을로 잡았다.

이 땅의 가장 끝이라는 땅끝으로 내려가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남도 답사여행...

여느 땅과 같지만... 그곳에 서있는것 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해남 땅끝~

서울에서 서둘러 출발해도 해남까지는 5시간은 족히 걸리다보니

중간에서 점심을 해결하던가 해남읍에서 늦은 점심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기왕에 나선 남도 여행이니 첫 먹거리도 남도식 상차림이어야 하지 않을까?

해남읍 '천일식당'에서 불고기와 떡갈비로 점심상을 받았다.

<천일식당한정식 상차림....>

맛있는 식사와 반주 한잔으로 먼길을 달려온 피곤함을 내려놓고

다시 해남읍을 벗어나 3~40분을달려가니 비로소 땅끝이 나타난다.

이제 더는 갈 수 없다. 아니 갈 곳이 없다.

더 가려면 배를 타야하는데.... 그 유명한보길도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할때 삼천리는 이곳 땅끝에서 한양까지 천리...

한양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2천리로 하여 3천리라고 한다. (육당 최남선 '조선상식문답')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우리 땅의 마지막 봉우리인 해발156.2m의 갈두산 사자봉 정상에 서있는 땅끝전망대는

원래 있던 클래식(?)한 전망대를 헐어내고 그 자리에 다시 세운것인데 (2001년)

9층 높이의 횃불 모양을 디자인한 상징조형물 성격의 건물이다.

<땅끝 전망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땅끝 마을...>

전망대에서 다도해를 내려다보고는 보길도를 들어가기 위하여 선착장으로 내려왔다.

땅끝마을 부두에서 연락선을 타는곳 바로 앞바다에는맴섬과형제바위라 부르는2개의 바위 섬이 있는데

특히나 맴섬은 1년중 10월 27 ~ 30일 사이에 맴섬의 작은 틈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의 일출이 장관을 연출하기에

전국에서 수많은 사진 작가들이 이를 촬영하기 위해 모여든다고 한다.

<맴섬....>

<형제바위....>

<보길도 가는 여객선 장보고호.....>

땅끝마을에서 보길도까지는 배편으로 약 50분 ~ 1시간거리인데

중간에 넙도와 노화도를 들렸다가 보길도로 들어가며 나올때는 역순으로 들렸다가 나온다.

가는길에 보니 섬 사이사이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농사짓는 밭이었으며 그 대부분은 전복이라 하였다.

<농사짓는 바다... 전복 양식 현장~>

보길도(甫吉島)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보길도(甫吉島)는 전남 완도군에 속하는 도서로서 완도에서는 32Km 떨어져있고, 해남 땅끝에서는 12Km 떨어져 있다.

섬의 크기는 동서 12Km, 남북 8Km이고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지역이다. (주민 약 3,700명/96년 2월기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는 이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었으며 85세를 일기로 보길도에서 눈을 감았다.

보길도에서 윤석도 유적지는 부용동과 세연정, 낙서재, 곳수당, 동천석실등이 있는데 시간관계로 세연정만 둘러보았다.

세연정은 보길도에서 배를 내려 섬에 7대가 있다는 갤로퍼 택시를 타고 불과 10분이내의 거리에 있었으며

돌아보고 나올때까지 기다려달라하고 이십여분을 대기시켰다가 다시 선착장까지 타고 나올수 있었다.

세연정(洗然亭)은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라고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 조경유적중 특이한 곳으로, 고산의 기발한 착상이 잘 나타나는 바

개울에 보(판석보, 일명 굴뚝다리)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한 인공연못이며 이곳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세연(洗然)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세연정의 전경사진....>

ㅇ 매표소 입구에서 들어가며 본 전경.... 즉, 남쪽에서 본 전경이다...

ㅇ 입구의 반대쪽... 보길 초등학교쪽에서 바라본 전경 (즉, 북쪽에서 바라본 전경)

ㅇ 연못 건너편에서 바라본 전경... (즉, 서쪽에서 바라본 전경).... 이 연못이 인공으로 만든 연못이다.

즉, 논에 물을 대듯이 물을 끌어들여서 채운 연못이다.

ㅇ 정자의 동쪽에 있는 연못의 모습.... 이 연못도 인공이기는 하나 흐르는 개울물을 자연스레 모아서 만들었다.

아래사진은 세연정에서 보아오른쪽이 동대(東臺) 왼쪽이 서대(西臺)로써 단을 쌓아놓았던 곳으로서

기녀들이 춤을 추던곳이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많이 허물어져 보수중에 있었으니 지금은 마무리 되었으리라...

ㅇ 동대(東臺) = 가로 6.7m 세로 7.5m의 장방형으로 높이 1.5m로 자연석을 쌓아올렸다.

ㅇ 서대(西臺) =7.5m정방형으로 높이 2.2m로 자연석을 쌓아올렸다.

세연정 한쪽켠... 그러니까 보길초등학교 쪽으로는 어부사시사를 돌에 새겨놓았다.

<어부사시사 조각탑>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조선 중기 문신·시조작가.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본관은 해남(海南). 서울 출생.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惟深)의 아들로 숙부 유기(惟幾)의 양자가 되었다. 남인으로 1612년(광해군 4) 진사초시에 합격하였고, 14년 승보시(陞補試)에서 장원하였다. 16년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贍)·박승종(朴承宗)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가, 이로 인하여 함경북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등 시조 6수를 지었고, 이듬해 경상남도 기장(機張)으로 이배되었다가 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이때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간 뒤 찰방(察訪)·병조좌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博)가 되었고, 이듬해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등을 지냈다. 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으나, 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35년 파직되었다. 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경상도의 수군을 거느리고 강화도(江華島)에 이르렀으나 이미 함락된 후였으므로 되돌아갔다. 38년 난이 평정된 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盈德)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나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과 금쇄동(金鎖洞)에서 은거하였다. 51년(효종 2)에는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고 다음해에 양주(楊州)의 고산(孤山)에서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夢天謠)》를 지었다. 57년 다시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시무팔조소(時務八條疏)> 등을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여 서인 송시열(宋時烈) 일파와 맞서다가 삭직되었다. 59년 효종이 죽자 산릉간심관(山陵看審官)이 되어 예론문제(禮論問題)로 또다시 서인과 맞서다가 패하여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 67년(현종 8) 풀려나 부용동에 은거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20여 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면서 많은 시조를 지었다. 그 중 경원에서 지은 것과 영덕에서 풀려나 고향에서 지은 <오우가(五友歌)>가 수록된 《산중신곡》과 《산중속신곡》, 그리고 노후에 은퇴하여 지은 《어부사시사》 등의 시가는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여 활용한 뛰어난 서정적 작품이다. 그는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리는데,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짓지 않고 75수의 단가와 시조만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며, 작품에 나타난 자연은 엄격한 유교적 윤리세계와 관련을 가진다. 그러나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지 생활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을 누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관직에서 물러난 후 보길도의 수려한 경관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 그 일대를 부용동이라 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칭하고 십이정각·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겼다. 특히 세연정(洗然亭) 부근은 인공미와 자연미를 잘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정원의 복원을 위해 1989년 발굴조사를 실시, 세연정 부근과 동천석실(洞天石室)이 복원되었다. 저서로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헌(忠患).

☞ 필자 홈-페이지 : http://club.nate.com/100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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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을 넘어선 아름다움의 재발견
[영남지방 둘러보기] 영주 부석사를 다녀와서
이희동(all31) 기자
▲ 추억 속 부석사의 바로 그 풍경.
ⓒ 이희동
추억의 고향 부석사

혹자는 말했다. 20대를 훌쩍 넘기고 난 후 영동고속도로를 다시 타는 것은 결코 동해를 가기 위함이 아니라 추억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흘러간 시간 속에 묻힌 아련한 추억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주 들리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기회가 되어 자꾸 가게 되는 그곳. 그러나 그 발걸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낯익은 그곳에는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 있으며, 우리는 그때를 기억하며 현실의 상처를 치유하곤 한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는 내게 그런 곳이다. 어머니 고향이 영주인 터라 처음 맺었던 부석사와의 인연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 이제 부석사는 내게 아련한 추억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부석사 그곳에 가면 나의 학창 시절과 그 시절을 관물대에 고이 간직했던 군대에서의 생활, 그리고 사랑했던 이와 함께 했던 시간 등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많은 이들이 칭찬해 마지않는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이나 안양루 너머 펼쳐진 소백산맥의 장쾌한 모습이 가끔 사무치게 그리운 이유는 결코 위대한 문화재에 대한 가치나 화려한 수식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부석사의 그 모든 것들이 아직 그대로 그 모습을 간직한 채, 나의 흘러간 시간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 부석사의 유래 뜬돌.
ⓒ 이희동
부석사 초입의 동네 순흥면

8월의 마지막 주, 나의 발걸음은 또다시 부석사로 향하고 있었다. 주말에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고 했음에도 동강 래프팅을 강행하기로 한 우리 팀은 영월로 가는 도중 들를 만한 한 곳을 찾았고, 난 강력하게 부석사를 추천했다.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을 나서니 순흥면이라는 표지가 보인다. 우리나라 대부분 '안씨'를 차지하는 '순흥 안씨'의 본적이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부석사 표지판. 비록 10년 전의 호젓한 길은 확장되어 그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길가로 보이는 풍기의 자랑 사과나무의 과수들은 이제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과밭 너머 고즈넉한 산세와 평화로운 마을. 그러나 순흥면의 역사는 결코 보기와 같이 평탄치 않다. 조선시대 세조의 아우이자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이었던 금성대군은 형에게 반대하다가 이곳 순흥까지 유배되어 왔고, 이후 순흥 부사 이보험과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조정은 사건 이후 역모의 땅에서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순흥 30리 안에 있는 백성을 거의 도륙했는데, 이때 죽계(竹溪)를 타고 흐른 피는 10여 리를 흘러 안정면 동촌리에서 끊어졌다 하여 지금도 이 마을을 ‘피끝 마을’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 주변의 소수서원이나 최근 조성된 선비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마도 이 지역은 죽령 바로 밑의 고장으로서 많은 선비가 기거하고 있었을 것이고, 때문에 중앙 정부에서는 그 세를 꺾기 위해서라도 좀 더 많은 피를 봤을 것이다.

▲ 조용한 산사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입구.
ⓒ 이희동
부석사 들어가는 길

드디어 부석사 입구. 역시 예나 지금이나 부석사 입구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끄러워지고 화려해지는 그곳. 조용한 산사를 기대하고 처음 갔던 사람이라면 실망하기 딱 좋은 모양새다.

그러나 3년 전보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부자연스러운 인공미가 아닌 부석사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나지막한 산세들의 색깔이었다.

비록 늦여름, 초가을이었지만 계절과 상관없이 푸르러야 할 소나무의 색깔들이 누리끼리 우중충하게 변해 있었다. 소위 소나무의 에이즈라 불리는 재선충이 이곳 부석사에까지 퍼졌기 때문일까? 재선충을 인간 욕망의 결과라 해야 할지, 아님 자연의 반격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재선충이 재앙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특히 소나무를 단순한 나무를 넘어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격상시키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민중들에게 현재 재선충의 발흥은 국가적인 중대사일 수밖에 없다. 소나무 한 그루 없는 산을 어디 상상하기 쉽겠는가. 혹자의 말대로 당장 애국가 가사부터 바꿔야 할 노릇 아닌가. 당장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확산 속도가 최대한 늦춰지길 바랄 뿐이다.

▲ 부석사 오르는 길가, 재선충을 피해 꿋꿋이 서있는 소나무 한 그루.
ⓒ 이희동
표를 끊고 드디어 극락의 여정에 들어선다. '태백산 부석사'가 적혀 있는 일주문을 넘어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까지.

부석사에 오르는 길은 내소사나 월정사같이 장엄한 맛은 없지만 사람 냄새가 나서 좋다. 길옆으로 펼쳐진, 향기가 오를 대로 오른 사과밭과 그 밭에서 방금 딴 사과를 파는 사람들. 어쩌면 부석사가 아직 많은 이들에게 회자하는 이유는 그 소박함 속에 묻어나는 향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하나의 종교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경건함이나 엄숙함만으로는 한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사찰 건축의 교과서 부석사

천왕문에 도달하니 그 앞으로 급한 계단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불교의 백팔번뇌를 형상화했을 그 계단들. 사찰건축의 교과서로까지 거론되는 부석사의 명성에 걸맞게 계단은 인간의 고뇌를 현실적으로 나타내려는 듯 결코 만만치 않다.

▲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나면 펼쳐지는 화엄의 세계.
ⓒ 이희동
▲ 부석사 범종루.
ⓒ 이희동
계단의 끝. 저 멀리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보인다. 학의 날개처럼 펼쳐진 가람들. 10년 전에도 이렇게 많은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던가.

자꾸만 서울 지하철 광고판에서 봤던 영주 부석사 풍경이 떠오른다. 고즈넉한 산세 밑으로 화엄 세계를 나란히 펼치고 있는 부석사의 사진. 그러나 그 멋있는 사진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광고판을 보고 부석사를 꿈꾸었겠지만, 오히려 관념은 독이 되어 부석사를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방해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십몇 년 전에 읽었던 유홍준의 부석사가 그렇듯이.

사실 같은 맥락으로 부석사에 관한 여행기를 쓰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미 너무 많은 글과 사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호사가의 구수한 입담과 고건축가들의 예리한 분석들. 따라서 그 선험적 지식을 버리고 내 생각을 싣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무엇이 경험이고 무엇이 편견인지도 헷갈리는 경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과연 온전한 나의 시각인지마저도 자신 없는 상태. 그건 바로 대상이 부석사이기 때문이다.

▲ 부석사 안양루, 극락까지의 마지막 여정.
ⓒ 이희동
고개를 깊이 수그리고 안양루를 통과하니 그 자리 그대로 무량수전이 있었다. 비록 일부 공사 중이라 끝 부분의 파란 천막이 조금 눈에 거슬렸지만, 어쨌든 그 모습, 그 위용은 그대로였다. 비록 역사가들은 봉정사의 극락보전과 비교하며 최고(最古)를 논하지만 무량수전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아름다울 뿐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풍경. 그곳엔 유홍준이 국보 0호라고 일컫던, 삿갓 시인 김시습도 차마 그냥 보내지 못하고 시 한 수 읊었던 그 장쾌한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어느새 이만큼 올라왔던가'라고 자문할 만큼 아스라이 펼쳐진 백두대간의 구릉들. 그것들은 부석사의 터가 왜 명당인지, 부석사의 앞마당이 우리나라에서 왜 가장 넓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호연지기. 불가의 앞마당에서 맹자의 덕목을 떠올린다면 실례일까?

▲ 학의 날개처럼 펼쳐지는 부석사의 가람.
ⓒ 이희동
▲ 저 멀리 보이는 동네들만이 그나마 이곳이 속세와 멀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 이희동
▲ 안양루에서 바라본 그 유명한 부석사의 앞마당.
ⓒ 이희동
다시 발길을 돌려 삼층석탑을 지나 호젓한 오솔길에 올라선다.

보통 다른 사찰에 들르면 시간에 쫓기어 본전 뒷산 중턱에 있는 전각들은 지나쳐 버리기 일쑤이지만 부석사는 다르다. 그 아름다운 산길에 묻은 개인적인 추억도 추억이거니와 무량수전까지만 보고 부석사를 내려가기에는 못내 아쉬움이 크기 때문에 난 꼭 이곳까지 오른다.

산길의 오른쪽 끝에는 조사당이 있었다. 그곳에는 부석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의상대사가 모셔져 있었으며, 전각 앞 흉물스러운 철장 속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선비화가 피어 있었다. 그 잎을 달여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아늑한 산사에 무식하니 서 있는 철장에 기분 좋을 리 없다.

어차피 그 시작부터 기복을 흡수한 불교라면 차라리 그 철장을 없애고 전설을 이어나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물론 선비화가 수난을 당하겠지만 전설을 전설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성불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몫인 터.

산길 끝의 자인당, 웅진전을 둘러본 뒤 산에서 내려온다. 다른 일행들은 무량수전까지만 보고 난 뒤 부석사의 모든 것을 본 양, 내게 빨리 서둘러 내려오라고 재촉 전화를 해댄다.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구구단 외우듯이 외운 우리에게 그 이상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추슬러 부석사를 나온다. 안양루를 지나 범종루를 지나 다시 들어서는 그 길. 하지만 이젠 속세로 향한 길이다. 비록 같은 길일지라도 그 방향에 따라 속세의 길과 극락의 길은 엄연히 다르다. 극락의 길에서는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리지만, 속세의 길에서는 다가오는 현실에 무언가 채우기에 급급하다고나 할까.

결국 나는 또다시 미련만을 한껏 안은 채 부석사를 나선다. 꼭 다시 찾아오리라는 못난 기약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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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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