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연정(洗然亭)

우리나라 조경유적중 특이한 곳으로, 고산의 기발한 착상이 잘 나타난다. 개울에 보를(판석보, 일명 굴뚝다리)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된 세연지는 산중에 은둔하는 선비의 원림으로서 화려하고 규모가 크다. 어부사시사는 주로 이곳에서 창작되었다.
세연정에 편액을 달았는데, 중앙에는 세연정, 남쪽에는 낙기란(樂飢欄), 서쪽에는 동하각(同何閣), 동쪽에는 호광루(呼光樓)라 하였다.
세연정은 1992년 12월 복원 되었다.(청별선착장에서 도보로 20분,차량소요시간 5분).민박시설 잘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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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방법
청별선착장에서 3분,도보 15분 자전거 5분

숙박 및 먹거리

어부사시사 민박·식당·편의점

욕실완비(단체식사 가능)

☎ 553-5019

황원포 민박·식당(보길개인택시사)

관광가이드 전광록

hp: 011-641-6353

열녀각 민박

열녀각 옆

☎ 553-6964

▲ 세연정(洗然亭) 그림지도

판석보(板石洑·굴뚝다리)

우리나라 조원 유적중 유일한 석조보로 세연지의 저수위 조절을 위해 만들었다. 평소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수면이 일정량을 유지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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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재(樂書齋)

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집터이다.
초가로 집을 지었다가 나라에서 송금령(松禁令)으로 소나무를 못베게 하자 잡목은 베어 세간집을 지었다. 낙서재는 사방으로 퇴를 달아 매우 컸다. 낙서재 남쪽에 잠을 자는 무민당(無悶當)이라는 집을 짓고 편액도 달았다.

무민당 옆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으며, 낙서재와 무민당 사이에 동와(東窩)와 西窩의 각한칸집을 지었다. 낙서재 뒷편에 소은병(小隱屛)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고산 윤선도는 엄동설한에도 사색에 잠겼다고 한다.
지금은 낙서재, 무민당, 동와, 서와의 흔적만 남아 있고 귀암(龜岩)의 자리에 민묘 2기만 자리잡고 있다.

가는방법

청별선착장에서 10분,도보40분,자전거 20분

민박 및 먹거리

세연정 쪽 식당 숙박 이용

▲ 낙서재 명당지도

곡수당(曲水堂)

고산 윤선도의 자제 학관이 기거했던 곳이다.
지금은 논밭으로 변해버려 옛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세연정보다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정자였다고 한다. 곡수(谷水)를 중심으로 초당(草堂), 석정(石井), 석가산(石伽山), 평대(坪臺), 연지(蓮池), 다리, 화계(花階)등이 좌우로 조성되어 있었다고 한다.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바로 위에 낙서재 터가 남아 있다.

(도보 청별선착장에서 50분,차량소요시간 10분)

가는방법

청별선착장에서 10분,도보37분,자전거 20분

민박 및 먹거리

동천석실민박

동천석실(洞天石室)

동천이라는 뜻은 산천이 두루 경치 좋은 곳이란 의미도 되고, 신선이 사는 곳도 되며, 하늘로 통한다는 뜻도 된다. 석실은 석조로 된 거실임은 물론이지만 산중에 은거하는 방이나 책을 잘 보존해 둔 곳이란 뜻도 된다.

1000여평되는 공간에 석제(石悌)와 석문(石門), 석담(石潭), 석천(石泉), 석폭(石瀑), 석대(石臺) 및 희황교(羲皇僑)유적이 있다. 고산 윤선도는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했다. 그리고 해 저물녘에 차를 끊이는 연기가 선경 처럼 보였다하여 석실모연(石室募烟)이라하고, 부용동 8경이라 했다.

가는방법

청별선착장에서 8분(도보15분,등산))

,도보50분(10분등산 제함),
자전거 20분(도보15분,등산)

민박 및 먹거리

세연정 쪽 식당 숙박 이용

금거북이 경전을 싣고 오는 영구암
여수 향일암의 그 새로운 해석
정근영(wondam) 기자
태풍이 온다는데 여행이라니 간이 배 밖에라도 나왔다는 말인가. 일기예보는 태풍을 예고하고 있다. 혹시라도 여행을 취소한다는 통보가 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다. 서둘러서 집결장소인 세양병원 앞으로 가기는 했지만 병원에 전할 것이 있어 잠간 전하고 나오니 출발예정시간인 8시를 넘어섰다. 13인승 봉고 차는 벌써 손님으로 꽉 찼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태풍의 낌새도 보이지 않고 빗방울도 보이지 않는다. 차는 여수 향일암을 목표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휴대전화로 전해오는 소식으로는 부산에서는 비가 내린다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비가 안 오는 대신에 시원한 바람이 창으로 들어왔다. 모두들 여행 날씨로는 짱이라며 만족한 얼굴이다.

▲ 향일암은 금거북이 등에 경전을 싣고 가는 모습이다. 대웅전 뒤 바위는 경전바위다.
ⓒ 정근영
향일암. 여러 번 가 본 곳이긴 하지만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이다. 사하문학회 문학기행으로 남해를 간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향일암을 가는 줄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향일암을 다시 가게 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남해안 고속도로를 힘차게 달렸다.

부산에서 여덟시를 조금 넘어서 출발했는데 향일암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1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대략 네 시간 가량은 달려온 셈이다. 전에 향일암에 갔을 적에는 절까지 차로 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넓은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고 차는 주차장에 대놓고 셔틀버스로 가도록 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걸어가자니 시간은 좀 걸리지만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갯바람, 갯내음을 맡으며 문우들과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자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느새 향일암 아랫마을에 도착했다. 향일암 가는 길을 모르는 선두에 선 사람이 길을 잘못 들어서자 길거리 가게 주인이 바르게 일러 주어서 바른 길을 찾아갔다.

▲ 일주문의 용 무늬
ⓒ 정근영

▲ 향일암의 바위, 갑골문자를 보는 듯 하다
ⓒ 정근영

석재로 계단을 다듬어 놓았다. 돈을 아끼기 위해 콘크리트 계단에다 돌을 덮어 놓거나 박아 놓는 것을 많이 보는데 향일암은 석재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일주문의 육중한 돌기둥은 용무늬가 하늘로 오르고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바윗돌이 뒤엉켜 굴을 이룬 그 굴속으로 들어간다. 바위틈새에 난 작은 길을 따라 굴속을 헤치고 들어단다. 바위틈새 그 길에서 사진을 찍어 보지만 너무 가까워서 그 모습을 제대로 담아 낼 수가 없음이 안타깝다. 몇 장의 사진을 찍어보지만 향일암의 전모를 담기는 역부족이다.

향일암,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여기서 수도하는 도중에 관세음보살을 만났다고 한다. 도대체 이 나라 고찰 가운데 원효, 아니면 의상대사가 짓지 않은 절이 몇이나 있을까. 원효대사는 의상대사와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도중에 묘지에서 해골의 물을 마시고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 향일암은 숲과 바위속에 숨어 있다.
ⓒ 정근영

▲ 관음전(용왕전)의 불상(용왕과 남순동자가 보처불이다.)
ⓒ 정근영

▲ 향일암은 바위들이 서로 기대며 굴을 만들고 그 굴속으로 길이 나있다.
ⓒ 정근영

원효대사는 요석공주를 만나 파계를 한 뒤 스스로 소성거사로 일컬으면서 절로는 돌아가지 않고 서민 대중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힘썼다고 하는데 이 나라 방방곡곡의 그 많은 절이 원효대사가 지은 것으로 믿어지지가 않는다. 절 직원에게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라는 믿을 만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모르겠다는 대답만 돌아온다. 우리는 너무 쉽게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절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절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고승을 그 절의 창건주로 근거 없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고 하면 실제 그 절을 짓기 위해 땀 흘린 이름 없는 승려의 공덕이 고승의 공덕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않는가.

믿거나 말거나 향일암에서 내 놓은 쪽지에 따르면 향일암은 1300년 전 신라 선덕왕 8년(659) 원효대사가 원통암으로 창건한 절이다. 고려 4대 광종 9년(958) 윤필대사가 금오암이라고 그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윤필대사는 낯선 인물인데 남해 보리암 좌선대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윤필거사가 좌선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거사는 출가한 승려가 아닌 재가 신자다. 윤필이란 이름이 동일인 같아 보이는 데 향일암에서는 대사로 보리암에서는 거사로 부르는 것은 모순이다.

향일암의 영구암이란 편액은 경봉 스님이 이곳에 주석할 적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경봉스님은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던 암자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절 근처의 기암괴석들이 거북이 등의 욱각문형으로 새겨진 신기한 모습을 보고 영구암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오해를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향일암은 경봉스님이 중수 또는 만든 것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 관음전,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다가 관세음보살을 만났다고 한다.
ⓒ 정근영

▲ 삼성각
ⓒ 정근영

산 이름 금오산은 금거북이란 뜻으로 산의 형상이 거북이가 경전을 등에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세상이 말세가 되어 불법이 망하게 되면 거북이가 불경을 짊어지고 용궁으로 옮겨 놓는다는 전설이 전한다. 왜 하필 불법이 망하게 된다는 것을 예상한 것일까. 이 역시 아름답게만 볼 수 없는 전설이다. 용궁에 간직해 놓았던 경전을 말법세 중생을 위하여 가져 나오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까.

향일암에는 대웅전, 관음전, 또 다른 용왕전으로 불려지기도 하는 관음전, 삼성각, 해수관세음보살, 경전 바위 등의 볼거리가 있다. 용왕전이나 해수 관세음보살은 몇 해 전에는 없던 시설이다. 향일암은 원효가 창건한 고찰로서의 모습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그 모습이 더욱 갸륵해 보이는 절이다.

▲ 바위틈새에 제비집처럼 지어 놓은 향일암
ⓒ 정근영
여수 향일암, 신라의 고승 원효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향일암은 말세가 되어 금거북이가 경전을 싣고 용궁으오 옮겨 온전하게 보전하는 모습이라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말세가 되어 도덕이 희미해진 지금 용궁에 보관한 경전을 가지고 나와 중생을 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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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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