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답사여행 #1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과 보길도(甫吉島)

오랫동안 남도여행을 꿈꾸다가 마음을 다잡고 제대로 돌아보리라 길을 나섰다.

전국을 휩쓸던 단풍이야기도 끝이 나고, 날은 추워지는 이때가남쪽여행에는 안성맞춤이 아닌가?

때로는 쓸쓸한 길을... 때로는 흥미 가득한 발길로... 그렇게 돌아본 남도 이야기.

그 첫 출발지는 해남 땅끝 마을로 잡았다.

이 땅의 가장 끝이라는 땅끝으로 내려가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남도 답사여행...

여느 땅과 같지만... 그곳에 서있는것 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해남 땅끝~

서울에서 서둘러 출발해도 해남까지는 5시간은 족히 걸리다보니

중간에서 점심을 해결하던가 해남읍에서 늦은 점심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기왕에 나선 남도 여행이니 첫 먹거리도 남도식 상차림이어야 하지 않을까?

해남읍 '천일식당'에서 불고기와 떡갈비로 점심상을 받았다.

<천일식당한정식 상차림....>

맛있는 식사와 반주 한잔으로 먼길을 달려온 피곤함을 내려놓고

다시 해남읍을 벗어나 3~40분을달려가니 비로소 땅끝이 나타난다.

이제 더는 갈 수 없다. 아니 갈 곳이 없다.

더 가려면 배를 타야하는데.... 그 유명한보길도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할때 삼천리는 이곳 땅끝에서 한양까지 천리...

한양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2천리로 하여 3천리라고 한다. (육당 최남선 '조선상식문답')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우리 땅의 마지막 봉우리인 해발156.2m의 갈두산 사자봉 정상에 서있는 땅끝전망대는

원래 있던 클래식(?)한 전망대를 헐어내고 그 자리에 다시 세운것인데 (2001년)

9층 높이의 횃불 모양을 디자인한 상징조형물 성격의 건물이다.

<땅끝 전망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땅끝 마을...>

전망대에서 다도해를 내려다보고는 보길도를 들어가기 위하여 선착장으로 내려왔다.

땅끝마을 부두에서 연락선을 타는곳 바로 앞바다에는맴섬과형제바위라 부르는2개의 바위 섬이 있는데

특히나 맴섬은 1년중 10월 27 ~ 30일 사이에 맴섬의 작은 틈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의 일출이 장관을 연출하기에

전국에서 수많은 사진 작가들이 이를 촬영하기 위해 모여든다고 한다.

<맴섬....>

<형제바위....>

<보길도 가는 여객선 장보고호.....>

땅끝마을에서 보길도까지는 배편으로 약 50분 ~ 1시간거리인데

중간에 넙도와 노화도를 들렸다가 보길도로 들어가며 나올때는 역순으로 들렸다가 나온다.

가는길에 보니 섬 사이사이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농사짓는 밭이었으며 그 대부분은 전복이라 하였다.

<농사짓는 바다... 전복 양식 현장~>

보길도(甫吉島)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보길도(甫吉島)는 전남 완도군에 속하는 도서로서 완도에서는 32Km 떨어져있고, 해남 땅끝에서는 12Km 떨어져 있다.

섬의 크기는 동서 12Km, 남북 8Km이고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지역이다. (주민 약 3,700명/96년 2월기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는 이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었으며 85세를 일기로 보길도에서 눈을 감았다.

보길도에서 윤석도 유적지는 부용동과 세연정, 낙서재, 곳수당, 동천석실등이 있는데 시간관계로 세연정만 둘러보았다.

세연정은 보길도에서 배를 내려 섬에 7대가 있다는 갤로퍼 택시를 타고 불과 10분이내의 거리에 있었으며

돌아보고 나올때까지 기다려달라하고 이십여분을 대기시켰다가 다시 선착장까지 타고 나올수 있었다.

세연정(洗然亭)은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라고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 조경유적중 특이한 곳으로, 고산의 기발한 착상이 잘 나타나는 바

개울에 보(판석보, 일명 굴뚝다리)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한 인공연못이며 이곳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세연(洗然)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세연정의 전경사진....>

ㅇ 매표소 입구에서 들어가며 본 전경.... 즉, 남쪽에서 본 전경이다...

ㅇ 입구의 반대쪽... 보길 초등학교쪽에서 바라본 전경 (즉, 북쪽에서 바라본 전경)

ㅇ 연못 건너편에서 바라본 전경... (즉, 서쪽에서 바라본 전경).... 이 연못이 인공으로 만든 연못이다.

즉, 논에 물을 대듯이 물을 끌어들여서 채운 연못이다.

ㅇ 정자의 동쪽에 있는 연못의 모습.... 이 연못도 인공이기는 하나 흐르는 개울물을 자연스레 모아서 만들었다.

아래사진은 세연정에서 보아오른쪽이 동대(東臺) 왼쪽이 서대(西臺)로써 단을 쌓아놓았던 곳으로서

기녀들이 춤을 추던곳이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많이 허물어져 보수중에 있었으니 지금은 마무리 되었으리라...

ㅇ 동대(東臺) = 가로 6.7m 세로 7.5m의 장방형으로 높이 1.5m로 자연석을 쌓아올렸다.

ㅇ 서대(西臺) =7.5m정방형으로 높이 2.2m로 자연석을 쌓아올렸다.

세연정 한쪽켠... 그러니까 보길초등학교 쪽으로는 어부사시사를 돌에 새겨놓았다.

<어부사시사 조각탑>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조선 중기 문신·시조작가.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본관은 해남(海南). 서울 출생.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惟深)의 아들로 숙부 유기(惟幾)의 양자가 되었다. 남인으로 1612년(광해군 4) 진사초시에 합격하였고, 14년 승보시(陞補試)에서 장원하였다. 16년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贍)·박승종(朴承宗)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가, 이로 인하여 함경북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등 시조 6수를 지었고, 이듬해 경상남도 기장(機張)으로 이배되었다가 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이때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간 뒤 찰방(察訪)·병조좌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博)가 되었고, 이듬해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등을 지냈다. 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으나, 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35년 파직되었다. 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경상도의 수군을 거느리고 강화도(江華島)에 이르렀으나 이미 함락된 후였으므로 되돌아갔다. 38년 난이 평정된 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盈德)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나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과 금쇄동(金鎖洞)에서 은거하였다. 51년(효종 2)에는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고 다음해에 양주(楊州)의 고산(孤山)에서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夢天謠)》를 지었다. 57년 다시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시무팔조소(時務八條疏)> 등을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여 서인 송시열(宋時烈) 일파와 맞서다가 삭직되었다. 59년 효종이 죽자 산릉간심관(山陵看審官)이 되어 예론문제(禮論問題)로 또다시 서인과 맞서다가 패하여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 67년(현종 8) 풀려나 부용동에 은거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20여 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면서 많은 시조를 지었다. 그 중 경원에서 지은 것과 영덕에서 풀려나 고향에서 지은 <오우가(五友歌)>가 수록된 《산중신곡》과 《산중속신곡》, 그리고 노후에 은퇴하여 지은 《어부사시사》 등의 시가는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여 활용한 뛰어난 서정적 작품이다. 그는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리는데,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짓지 않고 75수의 단가와 시조만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며, 작품에 나타난 자연은 엄격한 유교적 윤리세계와 관련을 가진다. 그러나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지 생활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을 누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관직에서 물러난 후 보길도의 수려한 경관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 그 일대를 부용동이라 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칭하고 십이정각·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겼다. 특히 세연정(洗然亭) 부근은 인공미와 자연미를 잘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정원의 복원을 위해 1989년 발굴조사를 실시, 세연정 부근과 동천석실(洞天石室)이 복원되었다. 저서로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헌(忠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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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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