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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기행 4

금강산(2006) 2006. 10. 8. 07:05

극락에서 보낸 사흘 (4)
금강산 기행
박도(parkdo45) 기자
▲ 하늘의 선녀들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 구룡연 옥류동 무대바위
ⓒ 박도
미인송(금강송) 군락지

둘째날 오전 8시 10분, 온정각 마당에서 현대아산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마침내 외금강 구룡연 탐승 길에 올랐다. 도착 후 금강산의 외모만 본 셈인데 이제는 금강산의 진수인 속살의 비경을 완상하리라. 금강의 숲도 보고 나무도 볼 참이다.

▲ 미인(금강)송
ⓒ 박도
온정각을 떠난 버스는 곧 소나무 숲길을 헤집고 올랐다. 여기부터 신계사까지는 6킬로미터나 되는 미인송 군락지로, ‘창터 솔밭’이라고 했다. 길잡이(조장)는 옛날에 곡식을 갈무리하던 창고가 이곳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하늘을 향하여 쭉쭉 곧게 뻗은 품이 예사 소나무와는 그 기품이 달랐다. 수령이 200년이 넘으며 높이가 20~30미터는 된다고 했다. 여기의 소나무는 ‘미인송(美人松)’ 외에 ‘금강송(金剛松)’, ‘홍송(紅松)’으로도 불린다는데, 줄기의 껍질이 붉으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하나같이 용마루나 들보로 쓰일 동량(棟樑)감이었다. 이런 나무를 베다가 대궐(나라)을 지어야 하는데, 서까래감도 안 될 재목들이 대궐의 용마루가 되고 들보가 됐다. 그러니 백성은 안중에 없고, 처자식을 동원하여 제 배 채우기에 바쁘거나, 천재지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골프채를 휘두르거나, 허울 좋은 해외연수라는 이름으로 국고를 탕진하는 수준 이하의 재목들로 몇 차례나 나라가 기우뚱거렸다.

우리 백성들이 두 팔을 걷고 성능 좋은 불도저로 낡은 집을, 휴전선 철조망을 동해바다로 밀어내고 그 허허벌판에다 이곳 금강송을 베어다가 천년대궐을 지을 수는 없을까? 달리는 차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이런저런 망상을 하는 사이, 셔틀버스는 신계사를 지나 어느새 구룡연 들머리 주차장에 멎었다.

▲ 구룡계곡 들머리 목란관
ⓒ 박도
쾌적한 자연을 즐기자면 대가는 치러야

아직 단풍철이 아니기에 등산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난 일부러 꽁무니를 따랐다. 조장은 무리한 산행으로 탈이 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어디까지나 자율등산으로 등산객이 머무는 곳이 정상”이라고 명쾌하게 얘기했다. 맨 뒤에서 사방과 하늘을 쳐다보며 쉬엄쉬엄 올랐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라지는 금강의 속살을 마음껏 즐기면서 마음의 눈과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신계사 앞을 흐른다하여 ‘신계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맑은 개울을 건너자 휴게소 ‘목란관’이 나왔다. 휴게소 쉼터에서 북녘 아가씨가 음료수와 사탕을 늘어놓고 손님을 불렀다. 그 아가씨는 “오가피 한 봉지 쭉 들이키면 목도 마르지 않고, 원기가 돋아 구룡폭포까지 다녀올 수 있다”고 말했다. 동포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한 봉지 따서 그 자리에 마시고 3달러를 주었다.

거기서부터는 옥류동으로 물빛이 맑다 못해 쪽빛이었다. 마치 상류 어디엔가 쪽을 짓이겨 자루에 담아 개울에 던져둔 듯했다. 이태 전 아내가 우리 집 뒤꼍에 쪽을 심은 뒤 가을에 그 쪽을 베어 천연염색을 지켜본 적이 있다. 금강의 계곡 물빛이 그와 흡사했다.

▲ 구룡계곡의 물빛
ⓒ 박도
▲ 쪽을 우려낸 쪽 물감
ⓒ 박도
앞서 가는 등산객이 구룡연 계곡물이 맑음에 경탄하면서 “개울물에 발이라도 담가봤으면…”하고 소망을 밝혔다. 그러나 여기서는 발은커녕 손도 닦을 수 없다. 내가 삼녹수에서 북측 관리인에게 개울물에 입을 대고 마셔도 되느냐고 묻자 관리인은 물병을 주면 자기가 담아주겠다고 했다.

이곳 등산길의 화장실(위생실)마저도 수질오염을 막고자 수세식이 아니라 일일이 사람들이 수거하는 재래식으로 지어졌고 사용료도 무척 비쌌다(작은 것 1달러, 큰 것 2달러). 금강산 물이 맑은 것은 북녘사람들이 보호했기 때문이다.

남녘 지리산 계곡물도, 설악산 시냇물도 금강산 못지않게 맑다. 그런데 남녘사람들은 그 맑은 물을 흐렸다. 어느 해 지리산 뱀사골에 갔더니 계곡이 온통 풀장이었다. 더욱이 사람들은 거기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았다. 남녘에서는 사람들이 이제 개울물을 그대로 마실 수 없게 오염시켰다. 맑고 쾌적한 자연을 즐기자면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 하나 보다.

▲ 금강문
ⓒ 박도

▲ 옥류담
ⓒ 박도
옥류동 무대바위

▲ 비봉폭포
ⓒ 박도
구룡연 계곡 하늘에는 세존봉, 관음연봉 등 기암절벽들이 전후좌우를 가로막는데 모퉁이를 지나면 새로운 기암괴석들이 다시 반겼다. 산삼과 녹용이 녹아 흐른다는 삼녹수(蔘鹿水)를 지나자 만경다리에 이어 곧 자연 돌문인 금강문이 나왔다.

거기서 조금 오르자 선녀들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 옥류동 무대(舞臺)바위가 나왔다. 그 바위에서 바라본 세존봉 줄기 천화대(天花臺)가 장관이었다. 천화대는 매화, 목련 장미 백합뿐 아니라 지상에 없는 천만 가지 꽃 모양이 다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무대바위에서 엎어지면 무릎 닿을 곳이 옥류담(玉流潭)이요, 구슬을 잇달아 꿰어놓은 듯하다는 연주담(連珠潭)이었다. 무대바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오르자 봉황이 춤추듯 하다는 무봉(舞鳳)폭포가 나오고 곧 험준한 바위벽에서 폭포가 쏟아졌다.

금강산 4대 폭포의 하나인 비봉(飛鳳)폭포였다. 봉황이 긴 꼬리를 휘저으며 날아가는 모양이라 해서 붙인 이름이라는데, 폭포의 길이가 166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거기서 조금 더 오르자 두 계곡이 만나는 곳의 물줄기가 실 같다. 은실처럼 곱게 흐른다 하여 ‘은사류(銀絲流)’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거기부터는 옥류동이 아닌 구룡동이라고 한다. 금강 산신에게 홀려 두리번거리며 산길을 걷다가 돌계단 10여 개를 오르자 관폭정이 나오고 마침내 구룡폭포가 펼쳐졌다.

▲ 관폭정
ⓒ 박도
구룡폭포

신라 최치원은 이 구룡폭포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고 한다.

천 길 흰 비단이 드리운 듯하고
만 섬 진주알이 쏟아지는 듯하여라
(千丈白練 萬斛眞珠)


▲ 구룡폭포
ⓒ 박도
또 방랑시인 김삿갓은 “폭포수는 은으로 만든 절구공이가 되어 절벽을 연신 내리찍고, 구름은 옥으로 만든 자가 되어 청산을 재면서 간다(水作銀杆春絶壁 雲爲玉尺度靑山)”고 노래하였다고 한다.

천하 절경 구룡폭포 앞에서 둔한 서생이 무슨 말을 늘어놓겠는가. 그저 말문이 막힌 채 감복하고 찬탄할 수밖에.

이 구룡폭포는 설악산 장수대의 대승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아울러 우리나라 3대 폭포로 불린다. 절벽의 높이가 100여 미터에 달하고 폭포는 높이 74미터, 폭 4미터다. 그곳에서는 새하얀 비단 폭을 드리운 듯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장엄한 대자연의 절경 앞에 말없이 두 손 모아 합장배례하고는 발길을 되돌렸다.

조금 내려오자 상팔담과 연결되는 연담교가 있었지만 그 다리를 건너기에는 다리가 팍팍했다. 오후 여정뿐 아니라 내일 만물상 여정도 있기에 난코스라는 상팔담은 기약 없이 다음으로 미루었다. 미련을 두어야 다음에 또 오게 될 테지.

그동안 살아보니까 조금 부족할 때 만족하면서 그만 두는 게 뒤탈이 없었다. 다른 이는 굶주리는데 내 임기라고 우기다가, 심지어는 임기를 강제로 연장하면서 눌러앉다가 제 명에 못살고 저승에 간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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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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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기행 3

금강산(2006) 2006. 10. 8. 07:04

극락에서 보낸 사흘 (3)
금강산 기행
박도(parkdo45) 기자
▲ 장전(고성)항의 아침
ⓒ 박도

호수처럼 잔잔한 장전항 포구

둘째 날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한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며 즐겨 부르는 노래 제1위가 ‘눈물 젖은 두만강’이요, 제2위가 ‘그리운 금강산’이라고 했다. 이 두 노래는 모두 북녘 산하를 노래한 것으로, 두고 온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이 향수를 달래거나, 통일을 비원하는 이들이 갈 수 없는 내 조국 산하를 그리는 소망으로 즐겨 불렀기에 상위에 올랐던 것 같다.

1992년, 한중수교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백두산 두만강을 찾아 거기서나마 내 조국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하지만 금강산은 고작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나 깨나 그리던 금강산을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언젠가는 외금강 해금강만 아니라, 장안사 명경대 만폭동 등 내금강도 속속들이 완상할 날이 오리라.

▲ 해금강호텔에서 바라본 일출봉의 아침
ⓒ 박도

05:00, 잠이 깼다. 커튼을 젖히자 눈앞에 장전항이 펼쳐지고 외금강 산들이 새배 빛을 받아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으로만 듣던 비로봉 바리봉 일출봉 천불산 촛대바위들이 한 걸음씩 다가서며 인사하는 듯했다. 나는 그 봉우리들을 향해 경배했다.

장전(고성)항 포구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포구의 지형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모양이라서 ‘장전(長箭)’이라고 이름 지어졌다는데, 지난날에는 고래잡이배들로 붐볐다고 한다. 천연적으로도 옴폭 파인 포구에다가 방파제로 바다를 막아서 더욱 안온하고 잔잔해 보였다.

내 보기에는 이 장전항은 지형적으로 이탈리아 나폴리나 소렌토보다 훨씬 더 좋은 천혜의 포구로 개발만 잘 하면 세계적인 미항(美港)에, 언저리 배경이 아름다운 세계 최고의 휴양지로 발돋움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 구룡연 앙지다리에서 바라본 계곡
ⓒ 박도

눈이 시리도록 산과 바다를 바라보다가 일기예보나 들을까 하여 객실의 텔레비전을 켰다. 여기가 관광특구인 탓인지 서울의 공중파 방송을 모두 볼 수 있었다.

KBS 제1 TV 채널을 맞추자 방송시작을 알리는 듯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북녘 땅에서 듣는 애국가는 그 느낌이 달랐다. 더욱 세상 참 많이 변한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북녘 땅에서 공공연히 애국가를 듣다니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이렇게 달라진 세상을 못 보고, 두고 온 고향이 그리워 눈물짓다가 끝내 저 세상에 가신 실향민들이 무척 안쓰럽다.

06:00, 선상 호텔 갑판에서 아침밥을 먹고 카메라를 들고서 산책길에 나섰다. 일출봉 상봉은 구름에 싸여 전모를 볼 수 없었고, 장전항 뒷산 바리봉과 천불산 촛대바위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멀리 가물가물 연무에 싸인 고성읍을 바라보면서 오늘 여정에 따라 온정리 행 셔틀버스에 올랐다.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 1950. 8. 18. 나이 어른 북한 소년병 포로(왼쪽), 가운데는 통역비서, 오른쪽은 유엔군 포로심문관
ⓒ NARA
온정리로 가는 길섶 울타리 너머로 띄엄띄엄 북녘 주민들도 볼 수 있었다. 대부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서 오갔다. 아직도 소달구지가 중요 운반수단으로, 그 달구지를 보자 내 소년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온정리로 오가는 길 중간중간 초소의 북녘병사들도 10대 후반의 청소년들로 보였다. 그들은 수업시간에 만난 제자들 모습으로 무척 앳돼 보였다.

안내를 맡은 조장은 북한의 학제는 유치원 1년 인민학교 4년 고등중학교 6년 과정으로 여기까지는 의무교육인데, 대학진학률은 20퍼센트 미만이라 고등중학교를 마친 청소년들이 대부분 군에 입대해서 나이가 어리다고 했다.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찾은 한국전쟁 사진에서도 10대 어린 소년 병들이 포로로 잡혀 심문을 당하고 있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 만물상 계곡의 7층암
ⓒ 박도
어렸을 때 어른들 말은 어떤 인민군 병사는 어찌나 어린지 AK(아까보)소총을 어깨에 메면 땅에 닿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직도 젖내가 날 듯한 그들이 초소를 지키는 것을 보니 어딘지 모르게 연민의 정이 갔다.

이동 중에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고 더욱이 초소나 군인 촬영은 절대 불가하기에 마음의 눈으로만 담았다.

둘째 날 여정은 오전이 구룡연 코스이고, 오후는 선택 코스로 삼일포 또는 온천 쇼핑인데, 우리 내외는 삼일포 코스를 택했다.

온정리의 온정각은 외금강 해금강 관광의 출발점이자 중심지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온정리 마당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금강산의 멧부리가 병풍처럼 펼쳐진다. 수정봉, 세존봉, 관음봉, 채화봉, 집선봉, 일출봉….

외금강을 찾은 모든 관광객은 아침마다 이곳 온정각 마당에 모여 08:10분에 각 코스별로 출발하였다.

우리를 태운 셔틀버스가 막 온정각 마당에 닿자 스피커에서는 귀에 익은 윤극영의 '반달'이 울려 퍼졌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북녘 땅 온정각 마당에서 듣는 반달은 어딘지 더 구성지고 가슴을 옥죄면서 내 마음을 울렸다.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윤극영이 그 노래를 만들 때는 그 ‘샛별’은 조국해방이었을 테지만, 이제는 조국통일이 아니겠는가. 온정각 마당에 주저앉아 한바탕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우리는 왜 휴전선의 저 철조망을 걷어내지 못할까?

▲ 온정각 마당에서 바라본 외금강 멧부리
ⓒ 박도

▲ 구룡연 계곡의 옥류, 어찌나 물이 맑은지 쪽을 풀어놓은 듯 파랗다
ⓒ 박도

▲ 풍악산의 전령사인 단풍이 물들고 있다
ⓒ 박도

▲ 네 신선이 절경에 취해 사흘을 머물렀다는 삼일포
ⓒ 박도

▲ 만물상 계곡의 기암괴석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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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기행 2

금강산(2006) 2006. 10. 8. 07:02

극락에서 보낸 사흘 (2)
금강산 기행
박도(parkdo45) 기자
▲ 구룡연계곡 앙지다리에서 바라본 세존봉
ⓒ 박도

소 떼가 뚫은 휴전선 철조망

내가 금강산의 비경을 처음 대한 것은 고교 시절 정비석의 금강산 기행문 <산정무한>과 송강 정철의 기행가사 <관동별곡>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교사가 된 후 30여 년 동안 이 두 작품을 수없이 가르쳐서 아직도 전문을 욀듯하다. 이 작품들을 가르칠 때마다 학생들에게 너희들의 신혼여행은 금강산으로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꿈같은 말을 했는데 그 꿈이 현실이 되었다.

1970년대 어느 해 가을, 예비군 동원훈련을 진부령 넘어 고성 00여단으로 갔다. 부대장의 특별배려로, 장교 출신 예비군들에게 그 무렵에는 민간인 출입금지구역 안에 있던 금강산전망대(지금의 통일전망대)에서 육안으로, 포대경으로 금강산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 비경에 감격한 나머지 한편의 글로 쓰고자 상황판의 지명을 메모지에 적는데 상황 장교가 달려와 메모지를 압수하고는 사상의심자로 헌병대로 연행하려 했다. 그 절박한 순간 헌병출신의 대학 선배가 헌병대장에게 변호해 줘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1980년대 말, 나의 첫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에서 주인공 한명훈이 신문사 기자로 신년 특집 머리기사에 실향민 어부가 거진 앞바다에서 멀리 금강산을 바라보면서 망향의 사연을 들려주는 이야기로 설정하였다.

나는 그 부분을 쓰고자 현지 답사로 거진까지 갔다. 거기서 어선을 타고 동해바다로 나가 멀리서나마 금강산을 보려고 하였으나 거진선박출입항통제소에서 승선허가증을 얻지 못해 끝내 바다에는 나가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참고 문헌을 통해 상상으로 해 뜨는 아침의 금강산을 묘사한 바 있다. (소설 속에서는 어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서 취재한 걸로 하였음)

▲ 구룡연 계곡의 옥류담
ⓒ 박도

휴전선 155마일에는 철조망이 두세 겹 철옹성처럼 둘러쳐지고 사슴 한 마리 넘나들 수 없다. 이 비정, 비극, 원한, 단장의 선 DMZ 철조망을 뚫은 것은 한 실향민이 몰고 넘는 소 떼였다. 강원도 통천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시절 죽도록 일해도 콩죽을 면할 길이 없었다. 배고픈 농촌생활이 진저리나게 싫어서 가출했다. 철도 공사판에서 고된 일을 하는데 꼬박 30리를 걸어온 아버지 손에 이끌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배고픈 생활의 연속이라 얼마 후 소 판 돈 70원을 몽땅 훔쳐들고 서울로 튀었다.

그 소년이 기업인으로 성공하여 1998년 6월 16일, 소 일천 마리를 몰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마침내 철옹성 같은 휴전선 철조망도 감동하여 뚫렸다. 소 한 마리를 일천 마리로 만들어 금의환향한 인간승리의 드라마였다. 이는 모든 겨레를 울려 마침내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행 바닷길이 열리고, 2003년 2월 21일 금강산 육로 시범 버스가 휴전선 철조망을 넘었다. 어느 정치인이 못한 일을 그는 해냈다. 그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으로 시대의 영웅이었다.

▲ 만물상 계곡
ⓒ 박도
군사분계선을 넘다

13:30, 현대아산휴게소에서 금강산관광증을 교부받아 목에 걸었다. 타고 온 차는 주차장에 두고 셔틀버스로 민통선을 지나 남측 출입사무소에 이르렀다. 내 나라 내 조국이지만 두 개의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기에 출국수속을 받아야했다.

유럽 기행 중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스위스에서 독일로, 벨기에로, 국경을 넘나들어도 자유롭게 통과하면서 같은 내 나라를 빤히 보고도 마음대로 가지 못한 분단의 현실을 얼마나 슬퍼했던가. 하지만 이나마 금강산을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좀 더 느긋하게 참고 기다리자. 곧 열차로도 갈 테고 내 차를 타고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목에 관광허가증도 달고 다닐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15:00, 현대아산 금강산 전용관광버스를 타고 마침내 북행길에 올랐다. 일제 때 건설하다가 중단한 동해북부선 철길이 이미 완공되어 개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양양~원산 간을 달릴 예정이라고 한다.

15:10, 남측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다. 15:12,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다. 원한의 군사분계선은 정작 요란치도 않고 낡은 시멘트 기둥만 서 있었다. 15:14, 북측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다. 드디어 북녘 땅에 이르렀다.

▲ 구룡연 옥녀봉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은사류로 가느다랗고 긴 은실 같이 고운 물줄기다.
ⓒ 박도
북측 출입사무소 앞에서 수속을 밟고자 차에서 내렸다.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한들한들거렸다. 공기가 상큼 상쾌했다. 이미 지난해 평양공항에서 느낀 바지만 북녘 땅이 남녘땅과 똑 같음에 새삼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 세월 남과 북은 다르다고 얼마나 세뇌교육을 받았던가.

중국 항일유적답사 중 하얼빈에서 만난 한 조선족 역사학자가 말했다. 당신이 고향에 갔더니 손자뻘 되는 녀석이 자기를 뚫어지게 봐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 뿔 안 나셨네”라고 하여 쓴 웃음을 지었다는 일화를 들은 바가 있었다.

우리는 지난 세기 같은 동족끼리 서로 다른 외제의 총을 들고서 미움의 세월을 산 못난이들이었다. 서로 다투어 동족을 ‘괴뢰’라고 헐뜯는 이가 애국자로 나라를 좌지우지하였다. 아직도 그런 극우․극좌 세력이 잠복하고 있다. 언제 다시 활개 치면서 다시금 야만의 시대로 되돌릴지 모른다.

북녘 땅에서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김일성 주석 초상화와 정치구호였다. 아니 북측 출입사무소의 북녘 관리들의 가슴에서부터 김일성 주석은 웃고 있었다. 평양에서도, 두만강 남양에서도, 압록강 신의주에서도, 모든 국경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김 주석 초상이어서 이제는 생소하지 않았다.

여기가 바로 지상 극락이 아니겠는가

금강산 전용관광버스를 탄 뒤부터 조장(관광안내원)이 마이크를 잡고서 알뜰하게 언저리 지형 설명을 했다. 그는 군사분계선 북측의 벌거숭이 민둥산을 이야기하면서 금강산 일대의 산은 토질이 나빠서 나무가 자라지 못해 그렇다고 애써 강조했다. 그렇다면 거기서 부르면 대답할 거리에 있는 금강산도 민둥산이라야 하지 않은가.

▲ 장전항에서 바라본 외금강
ⓒ 박도

조장의 말에 이의를 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관광객들은 북녘의 아픈 곳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헤아림인가 보다. 지난해 묘향산을 갈 때 곁에 앉은 안내원은 벌거숭이 민둥산을 미제 탓으로 돌렸다. 그때 나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50여년이 지나 남녘도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던 게 지금은 삼림이 우거졌다고 해도, 그는 미제 폭격으로 그동안 풀 한 포기 살 수 없어서 아직도 그렇다고 우겼다.

사실은 남녘도 20~30년 전만해도 북녘 이상으로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연탄 전기 가스가 보급되면서 나무를 땔감으로 쓰지 않자 산이 저절로 푸르러진 것이다. 압록강 변에서, 두만강 변에서, 묘향산 가는 길에서 본 북녘의 산은 대부분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어린 시절 벌거숭이 민둥산에서 나무를 해본 나로서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배가 몹시 고픈데도 그렇지 않다고 강변하는 그 자존이 가상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눈물겹다. 몹시 아픈 마음으로 차창 밖 민둥산을 두리번거리는 새 버스는 마침내 금강산 관광특구로 들어섰다.

▲ 금강산 호텔 옥상에서 바라본 외금강 온정령 일대
ⓒ 박도

운무 속에 금강산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 금강산! 그 얼마나 그리던 내 조국 금강인가. 일찍이 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이라고 하며 그 절경을 경탄하였다고, 어느 화가는 “금강산의 경치는 상상을 초월한 산수화로, 내 머리로써는 도저히 구상할 수 없는 한 폭의 산수화”라고 그 신묘한 경치에 넋을 잃었다는 말도 전해 오고 있다.

금강산은 천하명산으로 그 이름도 많다. 봄에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게 빛난다고 하여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녹음이 짙다고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눈 덮인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어 빼만 남은 것 같으므로 개골산(皆骨山)으로 불리며 이밖에도 열반산, 지달산, 중향산 등의 별칭이 있다.

우리 내외의 숙소는 해금강 호텔로 장전항 포구 바다 위에 있었다. 여장을 풀고는 곧장 온정리로 가서 보리밥 저녁을 먹었다. 식후에 금강산호텔 옥상에서 사방의 금강산을 조망하고는 거기서 멀지 않는 금강산온천장으로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노천탕에 몸을 담그자 날아갈 듯 상쾌했다.

외금강 비로봉 세존봉, 채하봉 등 숱한 멧부리가 병풍을 치듯 온천장을 두르고, 하늘에는 별들이 우수수 쏟아질 듯 영롱하다. 따끈따끈 새맑은 무색 무취의 온천수에 몸을 담근 채 사방의 산봉우리를 둘러보다가 밤하늘을 쳐다보는데 상현달이 동녘하늘에서 지긋이 미소를 보낸다.

온천수로 온몸이 따습고, 보리밥으로 배부르며, 공기가 더없이 맑으며, 경치가 못내 좋으니 여기가 바로 지상 극락이 아니겠는가. 극락에서의 첫날밤이 실비처럼 푸른 달빛 속에 스멀스멀 깊어갔다.

▲ 온정리에서 바라본 외금강 멧부리들
ⓒ 박도

▲ 운무에 싸인 고성읍
ⓒ 박도

▲ 구룡연 계곡의 멧부리들
ⓒ 박도

▲ 구룡연 옥류계곡, 유리조각 하나 볼 수 없는 거의 완벽한 청정 골짜기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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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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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기행 1

금강산(2006) 2006. 10. 8. 07:00

극락에서 보낸 사흘 (1)
금강산 기행
박도(parkdo45) 기자
▲ 외금강 만물상 계곡
ⓒ 박도

아름다운 내 조국산하

최근 십수 년 사이에 이런저런 일로 세계 여러 나라를 기행하였다. 다른 나라를 살필수록 내 조국 산하가 아름답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 내 조국 한반도는 산과 들, 바다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비단에 수를 놓듯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으로, 하느님이 만든 최대 걸작품 가운데 하나다.

미국이나 중국은 땅덩어리가 너무 큰 탓인지, 승용차를 타고 시속 100킬로 이상으로 서너 시간 달려도 산 하나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이어져 볼거리가 밋밋하여 지루하기 그지없다. 이웃 일본은 산하가 어딘지 왜소하고 거무튀튀하다. 스위스는 산이 험준하고 호수가 아름다우나 편안하거나 아기자기한 들판이 없다.

네덜란드는 온 나라가 산 하나 보이지 않는 들판이고, 영국은 기후 탓인지 어딘지 음습하다. 그래도 이탈리아가 가장 아름다웠으나 세계 3대 미항인 나폴리 항이나 산타루치아 바닷가도 내 눈에는 우리나라 제주나 동해안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아무튼 여러 나라를 다닐수록, 나이가 들수록, 내 조국 산하를 곰곰 뜯어보면 그 아름다움에 소름이 끼치도록 전율하곤 한다.

나는 역마살이 있는 모양인지 그동안 살아오면서 국토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휴전선 철조망 때문에 가보지 못한 백두산, 묘향산, 평양도 지난해 운 좋게 다녀왔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두루 섭렵한 셈이다. 국토를 기행하면서 이래저래 쓴 글을 모두 모으니 40여 편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 국토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금강산 기행을 여태 못한 터라 팥소 없는 찐빵 같아 한 권의 책으로 묶기 전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 외금강 구룡연 무봉폭포
ⓒ 박도

원한의 38선

첫째 날.

이번 금강산 기행의 일정과 예약은 아내에게 모두 맡겼더니, 단풍의 계절인 10월은 이미 예약이 끝났다고 하면서 9월 26일부터 28일까지 잡았다고 하였다. 이나마도 갈 수 있는 게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가.

화진포 현대아산휴게소 집결시간이 오후 1시였다. 같은 강원도로 안흥 내 집에서는 느지막이 출발해도 되기에 예삿날처럼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른 새벽에 눈이 떠졌다. 금강산을 탐승하러가는 기쁨 때문이었으리라. 옛 선인들은 이름난 산이나 큰절을 찾을 때는 목욕재계한다고 한 바, 나도 온몸을 닦았다. 명산대찰 탐승을 앞두고 목욕재계하는 것은 산행의 무사 안녕과 맑은 날씨로 정상 등반은 물론 산의 속살까지 잘 볼 수 있도록 하늘에 비는 그 첫 몸가짐과 마음자세이리라.

오전9시, 카사(집고양이)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집을 떠났다. 핸들을 잡은 아내 곁에서 차창 밖 백두대간의 멧부리를 경배하는 마음으로 완상했다. 늘 보는 산이지만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 아름다움에 빠졌다. 시원하게 잘 뻗어진 영동고속도로를 한 시간 남짓 달리자 마침내 동해 바다기 펼쳐졌다. 탁 트인 동해바다, 언제 보아도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답다.

▲ 38휴게소의 38선 표지석
ⓒ 박도
10시30분 38휴게소에서 잠시 머물렀다. 원한의, 단장의 38선…. 이 38선으로 얼마나 많은 겨레가 죽고 다치고 생가지 찢기듯 헤어졌던가.

1945년 8월 10일, 미 육군차관보 사무실에서 조 매클로이 육군성차관보 제임스 딘 국무성 차관보 랄프버드 해군성 차관보 등 세 사람이 일본군 항복에 대비할 SWNCC(국무성과 육군성 및 해군성 합동조사위원회)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세 사람이 일본의 항복을 전제로 일본군의 무장해제, 그리고 한반도 점령과 전후 대책에 관한 정책입안을 만든바, 한반도를 38선으로 분할해 그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에게 그 이남의 일본군은 미군에게 항복케 하는 안을 작성하였다. 이 미국 측 안을 소련도 받아들여서 분단의 선으로, 한국전쟁 이후에는 휴전선으로 고착되었다.
-박도 엮음 <지울 수 없는 이미지> 53쪽, 눈빛출판사 발간


아름다운 해안선

이 38선은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진다. 왜 미소 두 강대국은 우리나라를 시루떡 자르듯 두 조각으로 나눴을까? 우리나라는 전범국도, 패전국도 아니지 않는가. 전쟁을 일으킨 일본열도를 두 토막으로 나눴어야 옳지 않은가.

우리나라의 분단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이 원망스럽고, 그런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구한말 임금과 조정 대신이 원망스럽다.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된 것은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고, 또 온전한 우리 힘으로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였기에 찾은 나라가 두 토막이 난 것이다. 해방 60년이 지나도 여태 국토는 두 동강이 난 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38선은 휴전선으로 변해 철조망을 겹겹이 두르고 있다.

강대국을 탓하고 원망하기 전에 우리는 지난 역사를 반성하고 국력을 길러야 이 두 동강난 족쇄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앞으로 또 다른 외침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힘이 약한 채 강대국에게 자비를 바라는 것은 토끼가 호랑이에게 자비를 바라는 것과 같다.

▲ 동해 바다
ⓒ 박도
38 휴게소에서 목을 축인 뒤, 차머리를 북으로 향한 채 달렸다. 양양, 낙산 의상대를 지나 그동안 학생들과 수학여행으로 정이 듬뿍 든 설악산을 뒤로한 채 계속 북상했다.

왼쪽은 태백산맥의 멧줄기가 국토의 남북으로 힘차게 내리뻗었고 오른쪽은 쪽빛 바다가 펼쳐졌다. 여름 휴가철 지난 바닷가 모래톱은 한적하기 짝이 없다. 아름다운 해안선이다. 레저시설만 제대로 갖추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로 각광받을 것이다.

낙산을 지나자 곧 속초가 나오고 거진항이 나왔다. 조금 더 달리자 화진포 해수욕장이 나오고, 금강산 탐승객 집결지인 현대아산 휴게소가 길섶에 자리 잡고 있었다.

▲ 장전항에서 바라본 외금강 일출봉
ⓒ 박도

▲ 외금강 구룡연 계곡
ⓒ 박도

▲ 구룡연 계곡의 천화대 멧부리
ⓒ 박도

▲ 구룡계곡의 연주담
ⓒ 박도

▲ 구룡폭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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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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