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2006)'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06.11.29 개골산에 다녀왔습니다(1)
  2. 2006.10.11 금강산 일만이천봉
  3. 2006.10.08 금강산 기행 6
  4. 2006.10.08 금강산 기행 5

그들의 모습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개골산에 다녀왔습니다(1)
최경필(ckp920) 기자
겨울에는 금강산을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부른다. 낙엽 진 수목과 암석들이 뼈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인가. 소설(小雪)도 지난 초겨울의 금강산, 그 개골산을 다녀왔다.

▲ 동해선출입사무소에서 통관절차를 마치고 관광버스를 갈아탄다.
ⓒ 최경필
금강산이 개방된 지도 벌써 8년째. 그동안 외국여행도 몇 차례 다녀왔으면서 한반도 내 땅 금강산에는 처음이니 참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북측의 핵실험 사태로 금강산 관광은 침체기를 맞고 있어 시민사회단체가 나서서 ‘금강산 찾아가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얼마 전까지도 미국은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었으니 우리 땅 명산을 찾아가는 것조차도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 약속민족의 비애인 것 같다.

올해 칠순을 훨씬 넘으신 고향어른이 함께 갔다. 이번 관광이 벌써 세 번째인데, 왜 자꾸 연로한 몸으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금강산을 찾는지 그 답은 직접 다녀와서야 알 수 있었다. 24일 저녁 8시 담양에서 출발한 관광버스는 어둠을 뚫고 북으로 달렸다. 눈이 내려 지체될지도 모른다며 예정된 시간보다 2시간 더 빨리 출발했다. 따스한 남쪽나라에서 살았던 내가 남북으로 갈린 이 땅에서 가장 먼 길, 북쪽 땅을 밟는 설렘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다시 중부고속도로로 접어들더니 어느새 영동고속도로 위를 내달렸다. 긴 대관령터널을 지나 다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마지막 현남IC를 빠져나와 양양, 속초시내를 지나도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다행히 눈은 내리지 않았고 새벽하늘에는 별만 총총 떠있었다. 일찍 출발한 탓에 시간이 많이 남아 사우나에서 금강산으로 향하기 전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할 수 있었다. 신성한 민족의 영산에 오르기 전 심신을 깨끗이 하여 몸과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몸을 씻고 10여분을 달려 화진포휴게소에 도착, 가져갈 수 없는 휴대폰 등 제한된 소지품을 버스에 맡겨놓고 관광출입증을 받아 다시 가까운 동해선도로남북출입사무소로 이동했다. 전국에서 달려온 관광버스들이 집결하여 동시에 세관통과 절차를 마치고 금강산 통행이 가능한 관광버스로 갈아탄다. 금강산으로 향할 관광버스는 번호판이 가려져있고 운전석 앞쪽에 빨간 깃발을 달고 있다. 출입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1박2일 동안 우리 일행을 안내할 안내가이드가 버스에 올라 관광일정과 주의할 점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휴대폰, 일정규격이상의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 등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고 허가된 곳 이외의 장소에서 사진촬영 금지 등 그 절차는 꽤 까다롭다. 관광안내원의 명칭도 ‘조장’이라고 부른단다. 용어까지도 서로 정해놓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갈리면서 말도 달라 그런 절차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서로가 정해놓은 규칙이 있으니 어떡하랴. 북핵사태 이후 관광객이 줄어들어 이미 상당수의 관광안내원이 무급휴가에 들어갔고 휴업에 들어간 호텔 등도 있다고 한다. 하루 수백 명씩 오가던 관광객과 수행여행단 등이 북핵사태 직후부터 관광을 취소하면서 하루 평균 70여명 정도로 감소했다고 한다. 정부지원금도 없어 상당히 어려운 것은 사실인가 보다.

▲ 저 문을 통과하여 우측 길로 달려야 금강산을 만나게 된다.
ⓒ 최경필
남측출입사무소를 출발, 드디어 생전 처음 북쪽 땅으로 향했다. 처음 만나게 될 북측사람들, 그리고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았던 금강산의 절경 등 그 설렘과 긴장이 갑자기 고조되었다.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어 이른 시간에 출발하는 것 같다. 잘 닦여진 2차선도로를 따라 금강통문을 지나니 비무장지대(DMZ), 청색 가로등이 남측 땅임을 입증하는 것이고 군사분계선(MDL)을 지나니 회색 가로등이 나왔다.

군사분계선(MDL)을 표시하는 것은 약 1m 크기로 박혀있는 콘크리트 말뚝뿐이다. 휴전선에는 총 1292개의 말뚝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저 말뚝이 56년 동안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것이라니, 언젠가는 저 볼품없는 말뚝도 박물관으로 옮겨질 날이 올 것이다.

사진 촬영은 절대 금물. 북측경비초소를 지나니 500m 간격으로 서있는 북측 경비병들이 빨간 깃대를 들고 서있다. 여기서 사진촬영을 했다가는 모두 몰수되고 벌금도 물어야 한다. 손가락질을 해서도 안 된다. 북측에서는 총질하는 것이라고 해서 손등을 아래로 보이게 해서 가리켜야 한다. 카키색 군복의 무뚝뚝한 경비병들은 손을 흔들어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지나가는 버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남측이나 북측이나 주어진 임무가 있는 군인들이 한가롭게 손을 흔들 이유는 없을 것이지만, 무표정한 모습이 더욱 긴장되게 만든다. 차창가로 자세히 보니 나이가 17~18세 정도로 보인다. 검게 그을린 얼굴, 날씨 탓인지 양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투철한 사상교육으로 무장되었겠지만, 저들에게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드디어 허름한 천막으로 지어진 북측출입사무소(CIQ)에 도착했다. 뒤편에 건축 중인 건물이 완공되기 전까지 임시로 사용 중이다. 남측출입사무소에서 여기까지 겨우 10여분 걸렸다. 이 짧은 거리를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로 노려보며 살았던 것일까. 너무 허탈했다.

버스에서 내려 우리 조장의 지시에 따라 통관절차를 밝았다. 가까이서 처음 접하는 북측사람이다.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 눈도 2개고 코도 1개다. 70년대 도덕시간에 배웠던 뿔 달린 이상한 동물(?)도 전혀 아니다. 출입증 사진과 대조하고 도장을 찍어준다.

검시대를 통과할 때는 렌즈가 부착된 내 카메라를 자세히 살피더니 160mm이하인 것을 확인하고 통과시켜 준다. 긴장 속에 통관절차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산은 온통 벌거숭이 산이다. 숲이 전혀 없는 산과 암석뿐이다.

군사분계선 이후 계속된 벌거숭이산들의 전경이 궁금했다. 북측에서 시야확보를 위해 숲을 제거해버렸거나, 땔감이 부족해서 나무 베어버렸다는 예상도 있지만, 나무 밑동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풀도 안 보이는 것이 한국전쟁 때 심한 폭격으로 땅이 오염되어 마사토로 변해 나무가 자라지 않다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다시 버스에 올라 북측출입사무소를 벗어나니 우측에 자연호수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金絿) ·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렀던 봉래 양사언이 살았다는 감호, 그리고 그 위에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인 구선봉(九仙峯,180m)이다.

감호 위에는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로 유명한 시를 남긴 양사언의 신필(神筆) 전설로 유명한 비래정(飛來亭)터가 있다고 한다.(최남선의 금강예찬) 감호를 지나 동해선 철로와 나란히 달린다. 한국전쟁이후 방치되어 철로는 남북협력사업으로 다시 복구되었지만, 아직 개통하지 못하고 있다. 북핵문제와 6자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철마를 타고 금강산에 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남북분단의 상징이었던 녹슨 철마와 철도는 이제 역사유물로 남아도 좋을 것 같다.

드넓은 고성평야가 시야에 들어오고 남강이 보인다. 남쪽을 향해 흐른다는 남강은 삼일포로 흘러가 동해 그리고 더 먼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들판에는 소쟁기중인 농부의 모습도 보였다. 너무 오랜 만에 본 정겨운 농촌 모습이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둑판처럼 붙여진 회색주택과 마을이 보인다. 금촌리 마을이란다. 우리가 지원한 비닐하우스와 트랙터도 보였다.

눈이 쌓이면 개장한다는 눈썰매장과 리프트가 설치되지 않은 스키장도 나란히 만들어져 있다. 다른 편의시설은 전혀 없고 그냥 산등성이를 깎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건축 중 중단된 이산가족면회소 건물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고 그 너머 금강산과 온정리가 반갑게 기다리고 있다. 산 중턱까지 하얗게 쌓인 금강산의 절경이 고조된 긴장감을 환희로 바꿔주고 있었다.

“야! 금강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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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금강산 '일만이천봉'은 누가 세어 봤을까?
정현순(jhs3376) 기자
ⓒ 정현순

1.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의 동요 '금강산'의 가사이다.

노래 가사에서도 나왔듯이 금강산 일만이천봉은 누가 세어봤을까? 금강산의 봉우리들을 보면서 걷다가 그 점이 문득 궁금해졌다. 누가 세어보긴 세어본 걸까?

ⓒ 정현순
ⓒ 정현순

금강산은 높고 험한 곳이 많지만 나무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높은 산꼭대기에도 소나무가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했다. 산꼭대기마다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한결같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은 보는 사람이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도 좋다고 한다. 그만큼 이름없는 산봉우리가 많다는 뜻도 될 것이다.

ⓒ 정현순
ⓒ 정현순
ⓒ 정현순

금강산에서 높은 곳을 올라가니 운무가 그림처럼 내려 앉아있었다. 하늘과 그만큼 가까워진 거리이기도 할 것이다. 깎아지를 듯이 가파르게 높은 산, 산 위에 사뿐히 앉아있는 돌. 세찬 바람이라도 불면 떨어질 것만 같은 쓸데없는 걱정도 된다. 하지만 아름답다.

금강산에서 제일 유명하고 큰 봉우리는 비로봉이다. 그외에도 옥녀봉, 상등봉, 선창산, 금수봉, 월출봉, 차이봉, 백마봉 등 셀 수도 없다. 가르쳐주어도 한두 번 들어서는 어떤 것이 무슨 봉우리인지 정말 알 수 없는 봉우리들이다.

ⓒ 정현순
ⓒ 정현순
ⓒ 정현순
ⓒ 정현순

구룡폭포를 오르면서, 상팔당을 오르면서, 만물상을 오르면서, 호텔에서 보이는 금강산의 산봉우리들을 보고 또 봤다.

그럼 일만이천봉의 봉우리들은 어떻게 나온 숫자일까? 여행을 하면서 같이 산에 올라가게 된 친구에게 난 "이쪽 끝과 저쪽 끝에서 세면서 중간에서 만났을까? 아님 네 부분으로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서 만났을까?" 물었다.

그 친구는 "그 옛날에 지도도 만들었는데 이 정도도 무슨 방법을 써서 알아냈겠지요"라고 답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산봉우리를 다시 보니 가히 '일만이천봉'이란 말이 틀린 말은 아니 듯했다.

2. 금강산 보고 싶다 다시 또 한 번
맑은 물 굽이쳐 폭포 이루고
갖가지 옛이야기 가득 지닌 산
이름도 찬란하여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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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기행 6

금강산(2006) 2006. 10. 8. 19:25

극락에서 보낸 사흘 (6)-마지막회
금강산 기행
박도(parkdo45) 기자
▲ 만물상
ⓒ 박도
만물상으로 가는 길

셋째 날 이틀 밤을 묵은 숙소 해금강호텔에서 아침밥을 먹은 다음 체크아웃하고는 셔틀버스에 올랐다. 숙소는 바다 위의 호텔로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오늘 여정은 오전 만물상 코스요, 온정각으로 돌아와서는 남녘으로 돌아간다.

아침 8시 10분, 오늘도 온정각 마당에서 현대아산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산행에 올랐다. 만물상 코스는 구룡연 코스보다 훨씬 가파르고 멀었다. 미인송 지대를 지나자 달리는 버스 양 옆으로 산봉우리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병풍처럼 이어진 봉우리들이 한 폭의 산수화로 길잡이(조장)는 관음연봉이라고 했다. 멧부리가 형형색색으로 그 모양조차도 다기다양하다. 길잡이가 나에게 관음연봉의 한 멧부리를 가리키며 무슨 동물 모양이냐고 물었다.

내가 얼른 보기에 '토기모양'이라고 했더니, 그는 정답이라고 했다. 만물상 계곡에서는 딱히 정해진 답이 없고, 보는 이의 느낌이 바로 정답이라고 했다. 만물상 계곡에는 그야말로 삼라만상의 형상이 다 있다고 한다.

▲ 삼선암
ⓒ 박도
▲ 귀면암
ⓒ 박도
만물상 주차장까지는 온정각에서 26㎞로 106굽이 고갯길이라고 했다. 버스에서 내려 만물상으로 오르는 들머리에 들어서자 곧 세 신선이 돌로 굳어졌다는 삼선암이 절의 수호신 사천왕상처럼 버텨 서 있고, 귀면암이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귀면암은 둥근 바위를 이고 있는 모습이 허수아비 같지만, 어둑한 조명에서는 험상궂은 귀신의 모양을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그곳 어귀를 지키는 해설원이 말했다. 계곡을 따라 조금 더 오르자 오른편에는 절부암이, 왼편에는 칠층암이 빼어난 자태를 뽐내면서 반겨 맞았다. 그 자리를 지키는 북녘 해설원이 절부암의 유래를 들려주었다.

▲ 칠층암(왼편 바위의 파진 곳은 절부암의 아랫부분)
ⓒ 박도
절부암의 유래

절부암(折斧巖)은 바위 중턱에 도끼로 찍은 듯한 깊은 자국이 있기에 붙어진 이름으로, 하늘에서 금강산으로 내려와 노는 선녀들의 모습에 매혹된 나무꾼이 자신의 사랑을 하소연할 길이 없어서 도끼로 바위를 내리찍었다.

▲ 절부암
ⓒ 박도
그런 중 어느 날, 나무꾼이 포수의 화살을 맞은 사슴을 살려주자, 목숨을 건진 그 사슴이 나무꾼에게 구룡연 상팔담 연못에 둥근 보름달이 뜰 때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는데 옷을 한 벌 감추라고 일러주었다.

나무꾼은 사슴이 이른 대로 상팔담 연못으로 가서 선녀의 옷을 한 벌 감춰 마침내 옷 임자 선녀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두 아이를 낳은 뒤 나무꾼은 사슴이 세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아내에게 절대로 옷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사슴의 말을 듣지 않고, 그만 자기가 선녀의 옷을 감췄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선녀는 그 옷을 몹시 입어보고 싶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나무꾼은 그 옷을 주었다. 선녀는 잃었던 그 옷을 입자마자 두 아이를 안고서 하늘나라로 날아갔다.


북녘의 여성 해설원 김아무개는 이어서 절부암 부리는 두더지의 모양으로, 거기에 따른 전설도 재미나게 이야기했는데, 미처 녹음도 메모도 하지 못해 노쇠한 내 머리는 끝내 되새겨지지 않았다. 다음 금강산 기행 때 다시 들어야 할까 보다.

만물상 계곡을 오르면서 전후좌우 사방을 둘러봐도 기암괴석에 아름다운 경치로 하늘의 극락도 이보다 아름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절부암 맞은편 쉼터에서 천선대와 만물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되돌렸다. 여태껏 본 경치로만도 체할 것 같은데 더 보았다가는 아무래도 용량초과로 과부하가 될 것 같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무궁무진한 조물주의 솜씨를 보면서 '나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반도 한라에서 백두까지 명승지는 거의 다 둘러보고, 유럽대륙도 중국대륙도 미주대륙도, 일본열도도 두어 차례나 누벼보았으니, 세상구경은 웬만큼 한 셈이다. 이만하면 복된 인생이 아닌가.

하늘이 언제 불러도 나는 억울해 하지 않으련다. 남은 인생 덤으로 생각하며 그동안 보고 들은 것들 글로 엮어서 다른 이에게 들려주는 소임으로 살아야 할까 보다.

▲ 천선대
ⓒ 박도
남행 길

온정각에서 더덕구이 백반으로 점심을 든 뒤 낮 12시 30분 남행 버스에 올랐다. 남행 셔틀버스는 올 때의 역순으로 남녘땅을 향했다. 금강산 특구를 벗어나자 다시 벌거숭이 민둥산이, 곡식이나 채소보다 들풀이 더 많은 집단농장이 펼쳐졌다. 이런 치산과 영농으로는 인민들이 춥고 배고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만물상 가는 길섶의 칠층암
ⓒ 박도
고교와 대학시절 경제를 배우면서 자본주의 다음은 공산주의가 온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그 사회주의 공산주의 지표가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던가.

그야말로 인류의 이상사회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일부 경제학자들의 이론에 불과한 느낌이다. 이미 1990년대 동구 공산권이 무너지고, 공산주의 종주국 러시아도 무너졌다. 중국도 문을 활짝 열어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사유재산을 점차 허용함으로써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가 무너지기 전에 한 여행가가 들려준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배추가 다 자란 집단농장에 눈이 내린데도 노동자들이 걷지를 않아서 여행가가 농부에게 물었더니 당에서 지시가 없기에 걷을 수 없다는 거다. 만일 그게 개인 농장이었다면 이미 추수가 끝났거나, 전날 일기 예보를 듣고 비닐로 덮었거나, 눈이 내리더라도 추수하였을 것이다.

담임교사가 학생들에게 교실 청소를 시킬 때도 제 몫을 정해주지 않고 집단으로 시키면 대부분 학생들은 태만하고 청소 시간도 오래 걸리며 날마다 열심히 청소하는 몇 녀석만 한다. 그러다가 열심히 청소하는 녀석도 자기만 억울해서 태만해 지게 마련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그 능력에 따라 제 몫을 챙기는, 자본주의 속성인 무한 이윤추구에 따른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도 큰 문제를 안고 있지만, 농작물보다 들풀이 더 많은 집단농장과 같은 생산성의 저하로 대부분 인민들이 굶주리는 사회가 더 큰 문제가 아닐까.

모든 백성들이 사람답게 골고루 다 잘 살고, 백성들이 자유를 누리면서 도덕이 살아있는 그런 사회는 없을까? 앞으로 통일된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망상을 하는 새 셔틀버스는 군사분계선을 통과하여 남측출입사무소에 이르렀다.

▲ 만물상 계곡의 경관
ⓒ 박도
현대아산 휴게소에서 내 집 차를 타고 남행하는데 갑자기 도로에는 차들이 붐비고 들판에는 벼들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다. 자꾸만 북녘에서 본 땔감을 실은 달구지와 들풀이 무성한 집단농장이 오버랩 되었다.

금강산에서 보낸 사흘, 금강산은 내 기대 이상 천하절경으로 그 경관은 지상 극락이었다. 하지만 거기로 가는 길은 아직도 철조망이 두 겹 세 겹으로 쳐져있고, 북녘의 인민들과 남녘동포는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은 우리나라 한반도를 금수강산으로 만들었다. 자연 경치만이 아니라 한반도에 사는 모든 백성들의 삶조차도 진정한 지상 극락이 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면서 2박3일 금강 기행의 나래를 접었다.

▲ 만물상 계곡의 절경
ⓒ 박도
▲ 가을빛에 젖어드는 만물상 계곡의 기암괴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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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기행 5

금강산(2006) 2006. 10. 8. 07:06

극락에서 보낸 사흘 (5)
금강산 기행
박도(parkdo45) 기자
▲ 구룔연 계곡으로 멀리 가물가물 보이는 봉우리가 '옥녀봉'이다.
ⓒ 박도
옥녀봉

이번 등반길에 나는 두 대의 카메라를 가져갔다. 나의 답사 경험으로는 중요한 곳을 갈 때는 예비카메라가 있어야 했다. 백두산 1차 등반 때 갑자기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아서 무척 속을 끓였다. 출판사에서는 디지털보다 슬라이드 필름을 더 좋아한다.

디지털카메라와 필름카메라로 그 무게가 다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열심히 찍어두면 기록도 보완해 주고, 두고두고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욕심을 부려 망원렌즈까지 가져갔는데, 통관할 수 없다고 하여 차에 두고 내렸기에 그나마 부담이 줄었다. 구룡연 계곡에서 쉬엄쉬엄 경관을 완상하면서 사진촬영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었다.

▲ 북녘 관리인이 옥녀봉을 가리키고 있다.
ⓒ 박도
우리 내외가 마지막인 듯, 북녘 금강산 관리인과 동행케 되었다. 관리인은 나에게 북조선 방문이 처음이냐고 묻기에, 두 번째로 지난해는 평양 묘향산 백두산을 다녀왔다고 하자, 매우 반색하였다.

자신을 최아무개로 소개하고는 금강산에 대한 여러 유래담과 전설을 들려주었다. 내가 멀리 보이는 가물가물한 산봉우리를 묻자, 최씨는 '옥녀봉'이라고 했다. '옥녀'라는 이름이 귀에 익어 기억을 더듬자, 바로 최초의 항일전을 승리로 이끈, 봉오동의 전설적인 영웅 홍범도 장군의 첫 부인 이름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홍범도가 배우지도 못하고 공장에 가서 일곱 달이나 일을 해도 공장주가 품삯을 주지 않고 오히려 먹고 잠잔 값을 내놓으라는 말에 몹시 화가 났다. 홍범도는 공장주를 냅다 꽂고는 금강산 신계사로 들어와서 중이 되고자 불도를 닦았다. 홍범도는 수도생활 중 옥녀라는 여승과 그만 눈이 맞았다는데, 그 여승의 이름은 옥녀봉에서 따왔던가.

▲ 중창한 신계사 대웅전
ⓒ 박도
'옥에 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내려오는데, 여성관리인과 합류케 되었다. 김아무개라는 명찰을 달았는데, 매우 곱상하였다. 인사말로 결혼 여부를 묻자, "통일되면 남조선 총각과 결혼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지난해 평양에서도 수행 간호사에게서도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아마도 남측 인사가 물으면 그렇게 대답하라고 교육을 받은 모양이었다.

중간 지점에서 그들 두 사람은 쳐지고 우리 내외만 쉬엄쉬엄 내려오는데, 다시 보아도 언저리 자연 풍물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다만 한 가지 '옥에 티'로 몹시 눈에 거슬린 것은 바위에 새긴 이름들과 글씨였다.

▲ 바위에 이름을 새긴 낙서들
ⓒ 박도
▲ 김 주석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
ⓒ 박도
경성(京城) 평양(平壤) 대정(大正) 등으로 미루어 봐서 일본강점기로도 짐작이 가고, 관찰사(觀察使)라는 글로 봐서는 조선시대로도 짐작이 갔다. 거기다가 눈에 자주 띌만한 바위에는 어김없이 붉은 구호나 혁명가, 김 주석 가족 찬양문구로 자연을 훼손해서 유감스러웠다.

김 주석이 이런 유치한 일을 지시했을까. 아랫사람들이 과잉충성으로 새긴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역사를 보면 늘 아랫사람들의 과잉충성이 문제였다. 결자해지(結者解之)로 새긴 사람들이 원상 복구는 힘들더라도 말끔히 지우는 게 주군을 욕되게 하지 않고, 후손들에게도 흉잡히지 않을 것이다.

온정리로 가는 길에 신계사에서 잠시 머물렀다. 한국전쟁 때 불탄 것을 남북 불교계가 손을 잡고 요즘 한창 중창 중이었다. 신계사에서 바라보는 집선봉의 경치가 천하일품이라고 하나, 상봉의 구름으로 보지 못해 아쉬웠다. 아마도 금강산 산신님이 우리 내외를 다시 오라고 보여주지 않았나 보다.

▲ 신계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집선봉
ⓒ 박도
삼일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오후 삼일포 여정에 앞서 온정리 옥류관으로 가서 평양냉면을 들고는 2차 삼일포 행 오후 2시 30분 버스에 올랐다. 삼일포 가는 길은 관광전용도로에서 벗어나는 구간이 많아서 북녘 동포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모두 그만그만한 살림집에서 소박하게 사는 듯했다. 행복지수는 국민소득수준과 비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네들의 소박한 삶을 자본주의식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민족 화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핏줄을 나눈 형제라면 서로 어려움을 슬그머니 도와주는 게 진정한 형제애이리라.

▲ 삼일포
ⓒ 박도
고셩을란 뎌만 두고 삼일포 차자가니
단서는 완연하되 사션은 어대 가니
예 사흘 머믄 후의 어대 가 또 머믈고

(고성을 저 만큼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그 남쪽 봉우리 벼랑에 '영랑도 남석행'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으나, 이 글을 쓴 사선은 어디 갔는가? 여기서 사흘 동안 머무른 뒤에 어디 가서 또 머물렀던고?)


<관동별곡> 중 삼일포 여정 부분이다. 신라의 국선(國仙)인 술랑, 남랑, 영랑, 안상 등 사선이 경치가 좋아 사흘 동안 머물렀다는 삼일포는 온정리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나 같은 속인도 한 열흘 머물고 싶은 담수호였다.

온정리로 돌아온 뒤 저녁밥을 먹고는 곧장 온천장으로 갔다. 오늘 산행의 여독도 풀고 여기 아니면 즐기기 힘든 천연온천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서였다. 노천탕에서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둘러보는데, 지상 극락에서 둘째 날이 쉬엄쉬엄 저물어갔다.

▲ 구룡연 계곡의 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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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구룡연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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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류동에서 바라본 외금강 멧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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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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