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모습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개골산에 다녀왔습니다(1)
최경필(ckp920) 기자
겨울에는 금강산을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부른다. 낙엽 진 수목과 암석들이 뼈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인가. 소설(小雪)도 지난 초겨울의 금강산, 그 개골산을 다녀왔다.

▲ 동해선출입사무소에서 통관절차를 마치고 관광버스를 갈아탄다.
ⓒ 최경필
금강산이 개방된 지도 벌써 8년째. 그동안 외국여행도 몇 차례 다녀왔으면서 한반도 내 땅 금강산에는 처음이니 참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북측의 핵실험 사태로 금강산 관광은 침체기를 맞고 있어 시민사회단체가 나서서 ‘금강산 찾아가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얼마 전까지도 미국은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었으니 우리 땅 명산을 찾아가는 것조차도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 약속민족의 비애인 것 같다.

올해 칠순을 훨씬 넘으신 고향어른이 함께 갔다. 이번 관광이 벌써 세 번째인데, 왜 자꾸 연로한 몸으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금강산을 찾는지 그 답은 직접 다녀와서야 알 수 있었다. 24일 저녁 8시 담양에서 출발한 관광버스는 어둠을 뚫고 북으로 달렸다. 눈이 내려 지체될지도 모른다며 예정된 시간보다 2시간 더 빨리 출발했다. 따스한 남쪽나라에서 살았던 내가 남북으로 갈린 이 땅에서 가장 먼 길, 북쪽 땅을 밟는 설렘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다시 중부고속도로로 접어들더니 어느새 영동고속도로 위를 내달렸다. 긴 대관령터널을 지나 다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마지막 현남IC를 빠져나와 양양, 속초시내를 지나도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다행히 눈은 내리지 않았고 새벽하늘에는 별만 총총 떠있었다. 일찍 출발한 탓에 시간이 많이 남아 사우나에서 금강산으로 향하기 전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할 수 있었다. 신성한 민족의 영산에 오르기 전 심신을 깨끗이 하여 몸과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몸을 씻고 10여분을 달려 화진포휴게소에 도착, 가져갈 수 없는 휴대폰 등 제한된 소지품을 버스에 맡겨놓고 관광출입증을 받아 다시 가까운 동해선도로남북출입사무소로 이동했다. 전국에서 달려온 관광버스들이 집결하여 동시에 세관통과 절차를 마치고 금강산 통행이 가능한 관광버스로 갈아탄다. 금강산으로 향할 관광버스는 번호판이 가려져있고 운전석 앞쪽에 빨간 깃발을 달고 있다. 출입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1박2일 동안 우리 일행을 안내할 안내가이드가 버스에 올라 관광일정과 주의할 점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휴대폰, 일정규격이상의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 등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고 허가된 곳 이외의 장소에서 사진촬영 금지 등 그 절차는 꽤 까다롭다. 관광안내원의 명칭도 ‘조장’이라고 부른단다. 용어까지도 서로 정해놓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갈리면서 말도 달라 그런 절차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서로가 정해놓은 규칙이 있으니 어떡하랴. 북핵사태 이후 관광객이 줄어들어 이미 상당수의 관광안내원이 무급휴가에 들어갔고 휴업에 들어간 호텔 등도 있다고 한다. 하루 수백 명씩 오가던 관광객과 수행여행단 등이 북핵사태 직후부터 관광을 취소하면서 하루 평균 70여명 정도로 감소했다고 한다. 정부지원금도 없어 상당히 어려운 것은 사실인가 보다.

▲ 저 문을 통과하여 우측 길로 달려야 금강산을 만나게 된다.
ⓒ 최경필
남측출입사무소를 출발, 드디어 생전 처음 북쪽 땅으로 향했다. 처음 만나게 될 북측사람들, 그리고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았던 금강산의 절경 등 그 설렘과 긴장이 갑자기 고조되었다.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어 이른 시간에 출발하는 것 같다. 잘 닦여진 2차선도로를 따라 금강통문을 지나니 비무장지대(DMZ), 청색 가로등이 남측 땅임을 입증하는 것이고 군사분계선(MDL)을 지나니 회색 가로등이 나왔다.

군사분계선(MDL)을 표시하는 것은 약 1m 크기로 박혀있는 콘크리트 말뚝뿐이다. 휴전선에는 총 1292개의 말뚝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저 말뚝이 56년 동안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것이라니, 언젠가는 저 볼품없는 말뚝도 박물관으로 옮겨질 날이 올 것이다.

사진 촬영은 절대 금물. 북측경비초소를 지나니 500m 간격으로 서있는 북측 경비병들이 빨간 깃대를 들고 서있다. 여기서 사진촬영을 했다가는 모두 몰수되고 벌금도 물어야 한다. 손가락질을 해서도 안 된다. 북측에서는 총질하는 것이라고 해서 손등을 아래로 보이게 해서 가리켜야 한다. 카키색 군복의 무뚝뚝한 경비병들은 손을 흔들어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지나가는 버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남측이나 북측이나 주어진 임무가 있는 군인들이 한가롭게 손을 흔들 이유는 없을 것이지만, 무표정한 모습이 더욱 긴장되게 만든다. 차창가로 자세히 보니 나이가 17~18세 정도로 보인다. 검게 그을린 얼굴, 날씨 탓인지 양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투철한 사상교육으로 무장되었겠지만, 저들에게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드디어 허름한 천막으로 지어진 북측출입사무소(CIQ)에 도착했다. 뒤편에 건축 중인 건물이 완공되기 전까지 임시로 사용 중이다. 남측출입사무소에서 여기까지 겨우 10여분 걸렸다. 이 짧은 거리를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로 노려보며 살았던 것일까. 너무 허탈했다.

버스에서 내려 우리 조장의 지시에 따라 통관절차를 밝았다. 가까이서 처음 접하는 북측사람이다.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 눈도 2개고 코도 1개다. 70년대 도덕시간에 배웠던 뿔 달린 이상한 동물(?)도 전혀 아니다. 출입증 사진과 대조하고 도장을 찍어준다.

검시대를 통과할 때는 렌즈가 부착된 내 카메라를 자세히 살피더니 160mm이하인 것을 확인하고 통과시켜 준다. 긴장 속에 통관절차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산은 온통 벌거숭이 산이다. 숲이 전혀 없는 산과 암석뿐이다.

군사분계선 이후 계속된 벌거숭이산들의 전경이 궁금했다. 북측에서 시야확보를 위해 숲을 제거해버렸거나, 땔감이 부족해서 나무 베어버렸다는 예상도 있지만, 나무 밑동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풀도 안 보이는 것이 한국전쟁 때 심한 폭격으로 땅이 오염되어 마사토로 변해 나무가 자라지 않다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다시 버스에 올라 북측출입사무소를 벗어나니 우측에 자연호수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金絿) ·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렀던 봉래 양사언이 살았다는 감호, 그리고 그 위에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인 구선봉(九仙峯,180m)이다.

감호 위에는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로 유명한 시를 남긴 양사언의 신필(神筆) 전설로 유명한 비래정(飛來亭)터가 있다고 한다.(최남선의 금강예찬) 감호를 지나 동해선 철로와 나란히 달린다. 한국전쟁이후 방치되어 철로는 남북협력사업으로 다시 복구되었지만, 아직 개통하지 못하고 있다. 북핵문제와 6자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철마를 타고 금강산에 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남북분단의 상징이었던 녹슨 철마와 철도는 이제 역사유물로 남아도 좋을 것 같다.

드넓은 고성평야가 시야에 들어오고 남강이 보인다. 남쪽을 향해 흐른다는 남강은 삼일포로 흘러가 동해 그리고 더 먼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들판에는 소쟁기중인 농부의 모습도 보였다. 너무 오랜 만에 본 정겨운 농촌 모습이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둑판처럼 붙여진 회색주택과 마을이 보인다. 금촌리 마을이란다. 우리가 지원한 비닐하우스와 트랙터도 보였다.

눈이 쌓이면 개장한다는 눈썰매장과 리프트가 설치되지 않은 스키장도 나란히 만들어져 있다. 다른 편의시설은 전혀 없고 그냥 산등성이를 깎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건축 중 중단된 이산가족면회소 건물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고 그 너머 금강산과 온정리가 반갑게 기다리고 있다. 산 중턱까지 하얗게 쌓인 금강산의 절경이 고조된 긴장감을 환희로 바꿔주고 있었다.

“야! 금강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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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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