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그대는 우리들의 빛나는 속살
신령스런 봉래산 2박3일 여행기
고성혁(ko3661) 기자
산을 '스윽' 다녀왔다, 2박3일의 일정(7월 26일~28일)으로.

민족의 강고한 기운이 펄펄 넘치는 금강산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으리오. 다만 그 향내, 장쾌한 기운, 아름다운 품위를 장님 코끼리 만지듯 느끼고 왔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금강산은 참으로 귀하고 거룩한 영산이었다고, 그리하여 늘 내 머리 안에 담긴 금강산을 어루만지며 삶의 고통을 줄일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내 삶은 풍요로워졌다고.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이라 불린다는 금강산. 그래서 우리는 봉래산을 다녀온 셈이다. 전라도 촌사람들의 금강산행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새벽 5시에 출발한 버스가 북측사무소를 거쳐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반. 출입국에 대한 부담감과, 경비병의 눈초리로 인해 아무래도 경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들에게 온정각 주차장의 넓은 마당 안에 울려 퍼지는 노래 '반갑습니다'의 감미로움은 다시금 평안을 되찾아주기에 충분했다.

객실에 여장을 풀자마자 서둘러 온천을 향했다. 온정리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50도가 넘는 뜨거운 물이 솟구쳐 임금들도 찾았다는 온천물은 질감이나 피부가 느끼는 감촉에서 과연 최고였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홀랑 벗어부친 채 노천탕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금강산의 풍치는 남아있던 긴장감을 말끔히 없애주었을 뿐 아니라 평상에 누워 비를 맞는 호기마저 부리게 했다.

늦은 저녁 북측이 운영하고 있다는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북측공연을 아내와 나란히 앉아서 구경했다. 오래 전 우리의 가요가 그랬을 것이다. 정제된 아름다운 목소리의 가수들과 구슬땀을 흘리며 연주에 몰입하는 연주자들. 특히 우리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코디언 소리를 들으며 잠시 회상에 젖기도 했다. 악단은 온통 아름다운 여인들로만 구성되었으며 그로 인해 신비스러움은 더해졌다.

▲ 아코디언 연주자의 모습
ⓒ 고성혁
이튿날은 구룡폭포와 상팔담을 올랐다. 그 기개와 장쾌함을 생각하면 언감생심 '올랐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비가 흩뿌리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며 바라보는 금강산의 운치는 과연 선(仙의) 경지였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물줄기와 바위틈새를 파고 뻗어 내린 아름드리 거목들. 가까이 있는 산세의 풍광에 감탄하다가 문득 바라다 보이는 건넛산 기암괴석의 기괴한 형용들에 더 큰 놀라움이 솟구쳤다. 비경에 대한 경외감이 가슴 가득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오, 산이여, 풍경이여, 금강산이여.

▲ 상팔담 광경
ⓒ 고성혁
▲ 바위틈의 금강송
ⓒ 고성혁
▲ 구룡폭포
ⓒ 고성혁
비와 땀에 흠뻑 젖은 얼굴로 아내와 함께 구룡폭포를 사진에 담고 나서 상팔담을 향했다.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담긴 상팔담. 8개의 옥빛 보석처럼 빛나는 소(沼)가 빗속에서 둥두렷이 떠있고 그런 소를 중심으로 사방의 산세가 우리를 압박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운무는 산머리를 휘감아 유유자적 흐르고 눈과 코를 찌르는 청량감이 만산(滿山)에 가득했다. 산의 정기와 신령스러운 기운이 문득 몸 안을 휘돌아 묵고 낡은 폐기를 씻어내 이윽고 내 몸은 환골탈태되었다. 정말이다. 고백컨대 최소한 그런 변화의 느낌을 가졌다고 얘기할 수 있다.

▲ 상팔담의 아름다운 운무
ⓒ 고성혁
내려오는 길에 작은 복숭아 4개를 우리 돈 4,000원에 사서 나누어 먹었다. 작고 볼품은 없었지만 맛은 있었다. 북측 식당 목란각에서 비빔밥을 먹었다. 북측 안내원 아가씨들이 입구에 서서 무언가를 얘기하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아, 꽃다운 방년에는 풀잎 스치는 소리에도 웃는다더니, 그렇구나. 이곳 또한 조국의 강산이 분명하구나.

식당 유리문 한 편을 막고 '고정문'이라고 붙여 놓았기에 문득 내 성(姓)과 관련한 한 생각이 떠올라 안내원 아가씨에게 싱거운 유머를 건넸다.

"이 곳에 왜 제 동생이 이렇게 서 있습니까?"

영문을 모르는 아가씨들이 의아한 모습으로 재미있다는 듯 주위로 몰려들었다.

"아니, 제 동생 정문이가 왜 이렇게 종일 서있어야만 하냐고요."

그때까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던 안내원들에게 이름표를 보여주며 재차 말했다.

"제가 고성혁입니다. 그러니 고정문이는 제 동생이지요. 제 동생을 이렇게 세워만 놓으니 제 기분이 좋지 않단 말입네다."

아가씨들이 발간 볼이 되며 웃어줬다. 그러면서 아무런 낯가림 없는 얼굴이 되어 남쪽의 내 조카들처럼 내 옆에서 재재거렸다. 나 또한 행복해졌고 이 모습을 본 일행들도 즐거운 낯빛이 되었다. 6.15 공동선언 이후 6년의 세월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오후에는 바다가 막혀 호수가 되었다는 삼일포를 돌아봤다. 삼일포의 모습도 괜찮았지만 훼손이나 병충해의 피해가 전혀 없는 소나무들이 촉촉이 내리는 비와 함께 가뿐한 모습으로 서있어 더욱 좋았다.

금강산의 소나무들은 거개가 몸체에 엄격히 절제된 모양의 붉은 홍조를 띄고 있을 뿐 아니라 수령 또한 오랜 것들이어서 쉬이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온 몸에 은은히 서려있다. 그래서인지 금강산의 소나무만을 '금강송'이라 하여 따로 부른다고 한다.

붉고 고귀한 모양의 소나무들에게서 넘쳐나는 높은 품격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이를 황송(皇松)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몇 번이고 속삭였다.

"저 모양을 봐, 저건 임금님의 품격이야! 너무나 눈이 부셔!"

삼일포 관광에 이어진 교예공연의 관람은 그들의 기막힌 기예에 대한 감탄과 더불어 그들이 살아왔을 삶의 고통에 대한 유추로 눈시울이 젖어 들게 했다. 얼마나 많은 훈련이 있었을까.

어린 시절 그들이 가졌을 고통과 번민에 대해 동시대 부모로서의 짠한 마음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눈시울을 붉히다가 얼핏 아내를 돌아보니 그녀 또한 같은 생각이었던지 나를 돌아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교예공연은 환상적이었다. 더러는 명쾌하고 씩씩하게, 그리고 더러는 우아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그들의 주장처럼 세계 최고수준이 틀림없었다. 특히 칼끝을 물고 하늘을 날며 온갖 재주를 보여주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저녁 전에 어제의 멋진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온천을 향했다. 그리고 고성항(장전항)에서 바다를 보며 저녁식사를 했다. 식후에는 일행들과 함께 온정각에 자리 잡은 노래방에서 제각기의 짝꿍들과 남측노래를 마음껏 불러댔다..

이튿날 오전 만물상을 올랐다. 만 가지 형상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만물상이다. 북측 안내원이 귀엽고 아름다운 억양으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설명을 해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 만물상을 오르는 길
ⓒ 고성혁
절부암, 곰, 도마뱀, 멧돼지의 군상들. 거의 직각에 가까운 낭떠러지를 타고 신선대를 올랐다.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절경이었다.

어찌하여 이런 광경이 있는 것인가. 사방을 둘러싼 기암괴석과 흩날리는 구름들. 요요한 신비로움이 가슴을 훑고 나면 금강의 그윽한 향취가 스치듯 지나가고 이어지는 높고 낮음의 낯선 공간감각. 구름 안에 갇힌 것인가. 아니면 내가 구름인 것인가. 사방이 짙은 푸르름으로 넘실대 나는 이미 말을 잃었다. 그랬다. 금강산의 절경은 내게 있어 이미 감상의 대상이 아닌 경배의 신역(神域)이었다.

▲ 금강이여.
ⓒ 고성혁
▲ 금강이여.
ⓒ 고성혁
▲ 금강이여.
ⓒ 고성혁
이른 점심을 끝으로 짧은 일정을 마치고 금강산을 출발했다. 올 때처럼 갈 때도 양 옆으로 넓은 벌판과 습지가 이어졌다. 왜 북한은 이곳을 개발하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넓은 곳을 개발한다면 식량난도 얼마간 덜 수 있지 않을까. 개발 장비 부족 등의 이유가 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지만 어쨌든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 온정각에서
ⓒ 고성혁
올 때와 마찬가지로 드문드문 서 관광버스를 내려다보는 북측 군인들의 경직된 모습은 다시금 긴장감을 일깨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더운 날씨임에도 제복을 입고 무언가를 감시해야하는 모습에서 안타까움과 함께 곧 닥쳐올 내 아들의 군 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 너희도 내 아이들이다. 아들들아, 아무쪼록 탈없이 건강하게 군복무를 마치렴.'

남측사무실에서 검색대를 통과하고 나니 오후 2시가 가까웠다. 버스에 올라 타 휴대폰을 켜니 익숙한 소리로 그동안에 쌓인 문자메시지가 떨어졌다. 그랬구나. 휴대폰이 없는 2박3일을 보냈구나. 아내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런 후 우리들의 여정을 궁금해 할 큰 아이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첫 대면의 금강산과 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금강의 목소리와 숨결을, 그 장쾌한 기개와 품격을.

오, 금강이여, 그대의 속살을 파고들어 영원으로 달리고 싶구나. 부디 잘 있으라.
금강을 어찌 필설로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경외할 뿐이지요. 짧은 글로서 금강산을 현혹했다고 너무 나무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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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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