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3구간 / 점봉산] 르포
조침령~북암령~단목령~점봉산~망대암산~한계령 구간

숲이 다비식(茶毘式)을 하는 계절이다. 단풍은 지난 몇 달 동안 모아둔 여름 햇볕을 사르고 있다. 단풍의 불길이 지나가는 숲길에 도토리가 뒹군다. 나는 그것을 ‘빛의 사리’라 불러 본다.

숲의 다비식에서 사리 수습 따위의 번다한 절차는 필요치 않다. 더러는 다람쥐의 살이 될 것이고, 나머지 것들은 다시 빛으로 돌아가거나 저마다의 우주를 탄생시킬 것이다.

이번 구간은 조침령에서 한계령까지로 실거리 약 24km. 느긋한 하루 산행 거리로는 부담스럽지만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기 때문에 10시간 정도면 느긋한 산행을 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산행의 클라이맥스인 점봉산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 가운데 하나고, 점봉산에서 한계령까지는 골산의 진수를 눈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 잎 내려놓은 나무, 붉게 물든 단풍. 사철 푸른 나무들이 이루어 내는 상생의 만다라. 점봉산 정상에서 망대암산을 바라본 풍광이다.

이번 산행 전체를 파도에 비유하지면, 큰 파도가 두 번 솟구친다고 보면 된다. 조침령에서부부터 느긋하게 일어서는 파도는 1333m봉에서 정점을 이룬 다음, 북암령(920m)을 지나 단목령(750m)에 이르기까지 허리를 낮춘다. 단목령에서부터 다시 허리를 세워 점봉산(1,424m)을 일으킨 다음, 서서히 키를 낮추었다가 망대암산(1,236m)에서 불끈 힘을 한번 준 다음 암릉지대를 지나 한계령에 이른다. 물론 1333m봉과 점봉산을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작은 기복이 있긴 하지만 야박스러운 경사를 이룬 곳은 거의 없다.


긴 가을장마 탓에 계곡물 말라

이내가 흐르는 아침 산색이 푸르다. 안개에 걸러진 햇살은 단풍 색마저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다. 관목 숲을 뚫고 서서히 키를 높여 900.2m봉에서 살짝 키를 낮추며 한숨을 돌린다. 다시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진다. 943m봉 일대의 진달래와 철쭉들은 이미 잎을 다 내려놓고 긴 휴식에 든 상태다. 나무들도 사람들처럼 일찍 깨어나면 일찍 잠드는 모양이다. 산허리는 절정의 단풍을 펼쳐 놓고 있지만, 1,000m 가까운 지대의 큰키나무들은 동면에 든 상태다.

▲ 여름 내내 모아두었던 햇빛을 사르고 있는 단풍나무. 버려야 할 때 버릴 줄 아는 자의 아름다운 뒷모습.

943m봉에서 살짝 솟구쳤다 내려서면 962m봉. 이 봉우리 아래로 양양 양수발전소의 터널이 지난다. 이곳 상부댐에서 하부댐까지의 터널 길이는 6km. 상부댐과 하부댐의 낙차는 819m. 동쪽으로 경사가 급한 백두대간의 지세 덕분에 양수발전소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발전소가 들어선 것이다. 발전 용량은 100만kw로 원자력 1기와 맞먹는다고 한다. 96년 9월5일 첫 삽을 뜬 지 10년만인 지난 달 12일에 준공했다.

양수발전소에서 1시간쯤 서서히 오르자 1136m봉이다. 점봉산과 설악산의 위용을 한눈에 넣을 수 있는 곳이지만, 오늘 그것은 구름의 몫이다. 가까이에 있는 점봉산은 옅은 안개를 뚫고 순후한 모습을 보여준다.

북암령 일대에서부터 원시림의 분위기가 짙어진다. 이곳에서부터 점봉산 정상까지의 서쪽 기슭 2,049ha는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된 숲이다.

긴 가을장마 탓에 등성이에 가까운 계곡은 물이 다 말랐지만, 갓 떨어진 낙엽들은 바스러질 정도로 바스락거리지는 않는다. 발바닥과 귀에 닿는 느낌이 폭신하다. 잎사귀들이 말라갈 때 풍기는 감미로는 냄새는 감지되지 않는다.


부부 싸움하고 깎았나?

북암령에서 1시간쯤 지나자 단목령이다. 백두대장군과 백두여장군이라고 쓰인 장성이 서 있다. 장성이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유난히 울퉁불퉁한 표정이다. 이정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모습도 썩 사이 좋아 보이진 않는다. 웃는 데 인색한 분이 장승을 깎았을까, 아니면 부부 싸움을 한 다음 깎았든지, 하는 웃기는 생각을 해 본다.

단목령에서 점봉산을 향하는 초입은 그림자마저 붉게 보일 정도로 단풍이 곱다. 설악산 조망이 좋지 않은 데 따른 아쉬움도 일거에 날아가 버린다. 왼쪽(남쪽) 기슭은 선홍빛 일색인데 오른쪽은 드문드문 노란 단풍도 섞였다. 일조량 차이인 것 같다.

사실 숲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려고 단풍을 들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생물보다도 빛에 민감한 그들은 태양의 미세한 변화에도 기민하게 반응한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일조량이 줄고 기온이 낮아지기 시작하면 다이어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잎자루와 연결된 세포층이 활동을 멈추면서 수분공급을 중단하는 것이다. 얼마나 비장하고 놀라운 절제력인가? 한때 푸르렀던 시절에도 그들은 자신이 일한 대가의 40%만을 취한다.

▲ 암릉 위에서 낙조를 감상하고 있는 취재팀.

낮 동안 생산한 산소의 60%는 세상에 내놓고 나머지 40%를 밤에 쓰는 것이다. 얼마나 위엄 넘치는 삶인가? 물론 나무들이 의식적으로 이런 삶을 사는 것을 아닐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 성선설 성악설을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인간의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비인간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러면 어떨까. 국세청이나 국회의 작동 원리를 나무가 사는 방식에 맞춘다면? 물론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유능한 식물학자가 역사책에 이름을 올린 인간이나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다분한 인간의 자질을 나무에 빗대어 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간디 500살 느티나무, 세종 임금 500년 소나무, 테레사 수녀 500살 은행나무 식으로. 만약 이렇게 된다면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인간들이 함부로 하는 일들은 없어지지 않을까.

역사책이야 아무리 두꺼워도 좀이 슬게 마련이고, 때로는 불에 태워버릴 수도 있겠지만, 나무야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다음에야 영원할 테니 도처에 자신을 비추는 거울 투성인데 어떻게 막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일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히틀러 같은 인간에 빗될 나무는 지구 어디에도 없을 것이니까. 그것은 나무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모독이 될 테니까.

(독자 여러분, 엉뚱한 소리가 좀 길어서 죄송합니다. 흔히 나무의 공익적 기능을 돈으로 환산하는 등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자기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 아닌 만큼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상을 한 번 해 본 겁니다. 어쨌든, 나무가 없는 세상이 인류의 종말이라는 사실만큼은 항상 가슴에 새기고 살면 좋겠습니다.)

▲ 점봉산 정상부. 키 작은 철쭉들이 바람의 몸짓을 화석처럼 새겨 놓고 있다.

단목령에서 점봉산까지는 꾸준한 오름길이지만 가파르지는 않다. 정상 전 1km 정도를 제외하고는 하이킹을 즐긴다고 생각해도 좋다. 드디어 점봉산이다. 단목령에서 출발한 지 3시간 남짓이다.

점봉산(1,424.2m)의 정상은 두루뭉술하다.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21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숲으로 선정된 곳입니다’ 하고 세긴 비석 글이 실감될 만큼 수림이 울창한 것도 아니다. 북서풍을 받는 서쪽 기슭의 철쭉은 바람에 굽은 등을 한 채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그러나 기슭은 울창한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는 높이와 온도에도 아주 민감하다.

푸른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숲바다

▲ 점봉산 오름길. 원시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숲길이다. 캡션
점봉산 정상에서 그 동안 대간 종주를 하면서 늘 소원(?)해 왔던 일 한 가지를 해결한다. 일요일에 유명산을 지날 때마다 하루 산행객들의 푸짐한 도시락이 늘 부러웠었는데, 드디어 그걸 해본 것이다. 사실 중간에 하루 야영 계획을 세웠지만 산행을 시작하기 전날 계획을 바꾸었다. 도시락을 준비하고 짐을 가볍게 하면 어둑해질 무렵에는 산행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춥지도 덮지도 않은 산정에서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으며 먹는 오찬은 식도락 이상이었다. 원래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은 법. 취재팀 중 몇몇은 따듯한 햇살 아래 잠깐 눈을 붙인다.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리느라 자투리 잠의 명수가 된 사진기자는 그 짧은 시간에도 연하게 코를 곤다. 딱 풀벌레 울음소리 정도로. 이 대단한 몰입의 경지에 경의를.

점봉산에서 한계령 쪽을 향한 풍광은 이번 산행 전 구간 중 최고다. 설악산은 구름에 가려 귀떼기청봉만 살짝 보인다. 설사 날씨가 좋아서 설악산이 잔주름까지 다 보여준다 해도 이 모습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정상에서 망대암산까지는 푸른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숲바다를 어떻게 냉큼 한달음에 지날 것인가. 보고 또 보며 가슴에 새긴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서자 숲 바다의 느낌은 금방 사라진다. 눈에 넣어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대상일수록 가끔씩은 먼눈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망대암산으로 내려서는 숲길의 색 스펙트럼도 근사하다. 조릿대와 단풍, 서어나무의 삼색이 이루어내는 조화. 일년 중 이맘때만 볼 수 있는 절경일 것이다. 숲길 걷기는 시간 예술이다.

망대암산을 가볍게 올랐다 내리면 암릉지대가 나타난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곳이다. 위험한 곳에는 줄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운행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일부 줄이 부실한 고사목에 묶여 있는 것이 더 위험해 보였다. 이런 구간에서는 가급적 줄에 의지하지 말거나, 잡더라고 체중을 싣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좀더 사실에 가깝게 상황을 설명하자면, 비가 오는 날이나 밤이 아니라면 리지나 암벽등반 기술을 배우지 않는 사람도 줄에 의지하지 않고 넘을 수 있는 구간이다. 중요한 건 방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암릉지대는 수고에 비해 과분한 눈맛을 안겨준다. 암릉이 끝나기 직전 조망처에서 서쪽 기슭으로 열린 풍광도 한참이나 발길을 묶어둔다. 침봉과 소나무, 단풍, 마침 이우는 저녁 햇살이 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모습은 동양화폭의 선경 그대로다. 그러나 나는 조금 전 점봉산 정상에서 한계령 쪽을 바라본 풍광이 최고라고 느낀 바를 수정할 생각이 없다. 비교의 의미가 없지만, 사실 이런 풍광은 설악산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점봉산 정상에서 얻은 것은 고유성이 짙다. 그곳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구름이 한계령으로 오르는 찻길을 지웠다 살리기를 반복한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면서 자동차 소리가 들릴 즈음, 군사시설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오른쪽으로 난 길로 내려서야 한다. 양양에서 한계령(1,003.6m)으로 오르는 찻길을 만나는 길이다. 대간 주능선을 포기하고 찻길로 우회하는 셈인데, 한계령으로 오르는 44번 국도에서 인제군 기린면으로 갈라지는 포장도로가 대간을 관통하면서 생긴 절개지 때문이다.

도로에 내려서자 어둠과 안개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코앞을 분간하기 힘들게 만든다. 이곳에서 한계령 정상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10분 정도. 택리지나 대동여지도에는 오색령이라 한 고개였는데, 지금은 아무 색도 분간할 수 없다. ‘나’라는 색도 그렇게 지워졌으면 좋겠다.

▲ 망대암산을 지나 암릉 지대에서 바라본 남설악의 선경.

# 백두대간 고샅의 명소
주전골

남설악으로도 불리는 점봉산이 북쪽 기슭에 베풀어 놓은 절승지가 바로 주전골이다. 여름 녹음, 가을 단풍, 겨울 설경 등 설악산 산수미의 절정을 사철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주전골의 단풍은 선홍색과 노란 색의 조화가 일품이어서 설악 단풍 제1경으로 꼽힌다.

주전골은 조선시대에 승려를 가장한 도적떼들이 엽전을 만든 곳이고, 점봉산 아래 망대암산은 도적떼들이 망을 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전설로만 전하던 주전동굴이 올 태풍 때 앞을 가리고 있던 바위와 나무가 쓸려 내려가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주전골의 또 다른 매력은 접근이 쉽다는 것이다. 오색약수까지 차로 접근하여 성국사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그곳부터 하늘에 닿을 듯한 계곡의 절벽 이쪽저쪽을 오가며 선녀탕, 용소폭포, 십이폭포 같은 절경을 즐길 수 있다. 가족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단풍 여행지로 이보다 좋은 곳도 드물 것이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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