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오모 성당이 위치한밀라노광장과 명품가게들이 즐비한 갤러리아란 거리의 중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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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로마·독일-역사도시 로마에서 하이델베르크로 역사도시 로마에서 하이델베르크로 =====사색하는 자 하이델베르크로 가라===== 이번 여행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여행지마다 발품을 팔았던 터라 숲속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그간의 추억을 곱씹어 보는 여유가 생긴다. 자연은 그렇게 인간에게 생각할 시간과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 도시가 학문의 도시라는 선입견을 버리더라도 기차역부터 구시가까지 가는 길은 파리의 발랄함, 로마의 북적거림과는 달리 고즈넉하기만 하다. 그 고요함속에는 환경을 생각하는 독일인의 생각이 엿보인다. 기차역앞 광장을 가득 메운 자전거, 자전거를 위한 신호등까지 이 도시를 조용하고 환경친화적인 학문의 도시로 가꾸기 위한 작은 실천들이다.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PACE, PAIX’(평화)’라고 쓰여진 무지개 깃발이 도시를 장식하고 있었다. 하이델베르크의 비스마르크 광장에 와서는 자신의 이름을 새긴 나무토막을 꽂은 조형물이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세계를 주도하는 ‘평화’라는 거대한 흐름이 이 곳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다. 비스마르크 광장을 지나 중앙로를 따라가면 하이델베르크 성이 나온다. 성을 오르는 계단은 평소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힘들다. 계단 숫자가 하얀색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밟히고 지워져서 전체가 몇계단인지는 알 수 없다. 힘겹게 계단을 올라 성에서 즐기는 소풍과 하이델베르크 전경만으로도 하이델베르크를 찾을 가치가 있다.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은 무너진 성벽과 조화를 이루고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하이델베르크 시내는 온통 붉은 색 지붕이다. 표를 끊고 다리를 건너 성안으로 들어가면 무너진 성벽과는 달리 벽면을 조각상으로 장식한 프리드리히 궁이 맞이한다. 학생은 할인이 되니 여행전에 꼭 국제 학생증을 만들어 두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궁의 왼쪽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큰 와인통이 있고 바에서 와인을 마시면 기념품으로 컵도 같이 준다. 궁의 오른쪽으로는 독일약제 박물관이라는 조그만 박물관이 있다. 중세의 약제사들이 약을 재조하던 도구와 각종 약재, 허브창고 등이 마치 한약방에 온 느낌을 준다. 유럽에서의 인상은 관광지라도 그들이 관광객의 시계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일정에 따라 산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칼같이 쉬는 가게, 공공기관, 오후가 될 때까지 문을 열지 않는 관광명소가 된 맥주집 등은 그들이 삶에 쫓기지 않을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뜻도 되지만 그만큼 마음이 여유롭다는 뜻일 것이다. 일정에 쫓기는 여행자도 그 분위기에 젖어 아쉬움은 넥카강에 훌훌 털고 녹음속에서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도시들을 돌아보면 그대로 위안이 된다. 도시 전체가 노천 박물관 포로로마노 배낭 초보자의 ‘유럽 박물관 기행’ 끝 로마에 비가 내렸다. 오후에 로마를 떠나기로 되어 있는 날이라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떼르미니역 지하에 있는 물품 보관소는 우리처럼 낮시간에 관광을 다니려고 짐을 맡기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시간 반정도를 기다려 겨우 짐을 맡겼다. 바티칸이 기독교 로마를 상징한다면, 로마제국을 대표하는 건물은 ‘콜로세움’일 것이다. 로마제국의 화려한 영광과 그 내면의 잔인성을 대변하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그 콜로세움에서 로마 시민들은 환호했고 노예와 죄수들은 사자와, 혹은 서로 싸우다 죽어갔다. 비를 맞으며 베네치아 광장에서 왼쪽으로 난 황제의 길을 따라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무솔로니가 군사 퍼레이드용으로 유적을 가로질러 만든 길이라 길 양쪽으로는 로마시대의 유적이 펼쳐져 있다. 콜로세움의 크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4층 건물의 높이는 48m, 둘레는 527m로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긴 줄이 늘어섰다. 8유로를 내고 들어가면 콜로세움의 내부를 볼 수 있지만 시간도 짧고 보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콜로세움을 밖으로 한바퀴 돌며 둥글게 쌓아 올려진 원형극장의 건축학에 경탄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콜로세움 옆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이 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본래 비잔티움이라고 불렸는데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옮겼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이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가 경쟁자인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315년에 세워진 것으로 파리 개선문의 모델이라고 한다. 싸움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정하고 박해를 중단하라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다. 로마제국 번영의 원동력은 로마가 다른 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하면서 공존해온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는 그런 로마에서 이교도 취급을 받다 그의 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종교로 인정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종교간의 평화를 통해 제국의 안정된 통치를 꾀한 것이다. 로마에 간다면 꼭 ‘포로로마노’를 걸을 것을 권한다. 폐허처럼 남은 기둥과 벽돌 사이를 걷노라면 수도 로마의 화려함을 가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원로원에서는 정치와 철학이 논의되고 광장에는 저마다 바쁜 시민들이 오가고 있다. 캄피톨리오 언덕 아래 있는 싸투르누스 신전은 산업의 신인 싸투르누스를 기리는 곳이다. 이곳에 새겨진 ‘SENATUS POPOLVS QVE ROMANANVS’는 말은 ‘로마의 원로원과 서민들’이라는 뜻이다. 로마를 여행하는 동안 흔히 보이는 ‘SPQR’은 바로 이 글의 첫글자를 딴 것으로 로마 시청을 상징한다. 포로로마노는 완전히 흙속에 묻혀있던 유적이다. 최초의 발견당시 세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선문의 지붕만 보였다고 한다. 그것을 유적이 다칠까 붓으로 파내려가며 오늘날의 유적이 발굴되었다고 하니 고고학자들의 정성과 고생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포로로마노를 지나 캄피톨리오 언덕에 서면 포로 로마노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사진 찍기 가장 좋은 곳이다. 더 잘 볼 수 있는 팔라티노 언덕은 6유로를 내야 한다. 하지만 로마에 갈 때는 사진기보다 가슴을 열고 가야한다. 모퉁이를 돌면 눈앞을 막아서는 유적,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거대함은 성능좋은 사진기보다 가슴에 담아두는 것이 좋다. 로마/독일 글·사진=송옥진 객원기자 oakjin@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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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로마 바티칸 박물관
神의 대리인 바티칸 시국
배낭 초보자의 ‘유럽 박물관 기행’ ④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로마’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기로 돈을 버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에 살면서 문화강국을 이루었던 팍스 로마나의 시대에 대한 동경이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또 전 세계인들이 평화를 갈구할 때 먼저 바라보는 곳이 이곳 로마 바티칸이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박물관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떼르미니 기차역에 내리는 순간, 이미 로마라는 박물관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 로마의 중심에 있는 신의 도시 바티칸 시국으로 가려면 테르미니 역에서 64번 버스를 탄다. 제국의 후예들이 소매치기로 활동하기로 유명한 버스다. 일행 중 한명은 가방을, 다른 한명은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로마의 소매치기는 허명이 아니다.
로마에 있는 사람의 반절은 관광객이고 그 중 반절은 바티칸박물관에 온 듯 아침 일찍 서둘러 가도 줄을 서야 한다. 안내 데스크에는 한국어로 된 ‘바티칸’이라는 제목의 박물관 안내 책자를 판다. 엄청난 소장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동선을 따라 주요한 작품을 설명해 놓은 이 안내 책자가 유용하다. 다만 입구보다 ‘지도의 방’ 앞에서 더 싸게 판다. 조각상들에 대한 설명을 포기한다면 2유로정도 절약할 수 있지만 설명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다.
넘치는 수장품, 복사품도 작품
바티칸 박물관 관람은 이집트관에서 시작된다. 기독교인들의 성지인 바티칸 한복판에서 이집트 석상을 만나는 것은 뜻밖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하기 이전, 로마가 이집트까지 지배한 대제국이었으며 역대 교황들이 미술품과 유물 수집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그곳에서 람세스의 어머니와 아내의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동물의 조각상을 모아놓은 동물의 방, 흉상을 모아놓은 흉상의 방, 조각의 방, 뮤즈의 방 등을 둘러보노라면 너무 많은 소장품을 놓아둘 곳이 없어 늘어놓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그 중 팔각형의 안뜰에는 낯익은 작품이 있다. ‘라오콘’ 군상이다. 1506년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발견된 이 작품은 본래 청동작품을 로마인들이 대리석으로 복사한 것인데 미켈란젤로가 가장 아꼈던 작품이라고 한다.
지도의 방을 지날 때까지는 바티칸박물관에서 종교를 느낄 수 없다. 방대한 수장품을 자랑하는 여느 박물관의 느낌이다. 그러나 지도의 화랑에 들어서면서부터 느낌은 달라진다. 천정을 가득 메운 그림들에 압도되면서 무엇을 감상해야 하는지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내책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예술이 신을 불러들인 곳
벽과 천정을 채운 프레스코화를 대하면서 드디어 속의 세계를 벗어나 성스러운 종교의 세계로 들어서는 느낌을 갖게 된다. 프레스코화로 가득한 이 방들은 교황들의 거쳐였지만 라파엘의 작품이 있는 방들은 교황의 방이 아니라 ‘라파엘의 방’이라 불린다. 이 중 ‘아테네 학당’에는 라파엘이 플라톤을 레오나르도의 얼굴로 그렸고 자신의 자화상도 그려넣었다.
바티칸박물관 감상의 절정은 시스틴 소성당이다. 라파엘,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등 한두번쯤 들어본 적 있는 화가들의 프레스코화가 벽면을 채우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다. 1508년 천지창조를 그리기 시작한 미켈란젤로는 작품을 미리 보고 싶어하는 교황과의 다툼으로 작업을 중단했다. 교황의 사과를 받고야 다시 그린 것을 보면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교황의 권위를 이기는 시대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잠깐동안의 휴지기를 거치면서 표현의 차이를 가져왔다. 작업을 다시 시작하면서 작품을 올려다본 미켈란젤로는 섬세하게 그린 작품들이 천정을 올려다보는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닿고 작품을 단순화했다.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아담의 창조’다.
성당의 앞마당에는 각국 언어의 가이드들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안내를 시작한다. 성당안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고 예배당에 대한 예의로 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에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지창조를 완성한 20년 후 1534년 미켈란젤로는 다시 최후의 심판을 제작하게 된다. 지금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천조각을 하나씩 걸치고 있지만 본래 다 나체로 그려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제작당시 교황의 의전담당관인 비아지오 다 체세나는 이 작품을 목욕탕이나 식당 같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그가 얄미웠던 미켈란젤로는 오른쪽 아래 구석에 뱀에 감겨 고통스러워하는 미노스의 얼굴에 그의 얼굴을 그려넣었다고 한다. 자신의 얼굴도 순교자가 들고 있는 살가죽에 그려넣었다고 한다. 그 표정을 보면 미켈란젤로의 생도 꽤나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신의 나라, 바티칸
시스틴 성당을 나와 햇살이 내리꽂히는 앞마당에 서면 신을 예술로 찬양한 자들에 대한 감동으로 몸을 떨게 된다. 승자였던 로마제국의 수집품으로부터 시작한 관람이 라파엘과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로 마무리 될 때는 그 곳이 신의 나라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 신의 대리인이 사는 곳 산 삐에뜨로 성당은 교황의 높은 권위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교회는 건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발행하고, 예술가들을 착출했으며, 로마의 유적을 뜯어 건축자재를 마련했다. 어쨌든 또다른 위대한 작품으로 탄생한 삐에뜨로 성당에서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24세의 청년 미켈란젤로가 만든 피에타다. 젊고 아름답게 표현된 마리아는 피렌체에 있는 미켈란젤로 최후의 피에타와 비교가 된다.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피에타의 마리아는 슬픔에 눈물이 짓무르고 힘겨운 삶을 살아온 흔적을 담은 듯 거칠다. 바티칸의 피에타는 슬픈 표정이지만 작가가 젊은 만큼 힘이 넘친다. 그 피에타에서 젊은 수사와 수녀는 신을 보았을까?
부활절, 교황이 주재하는 미사에 참석하려고 전세계의 사제와 수녀들이 64번 버스를 타고 도착하고 있었다.
로마 글·사진=송옥진 객원기자 oak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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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낭만, 역사, 신앙의 3중주 - 이탈리아 로마 세계 4위 관광수입국이라는 꽃은 맨땅 위에서 피어난 게 아니다. 녹록하지만 녹슬지 않은 옛 제국의 영광이, 문화와 예술이 낳은 찐득거리는 낭만성이, 신이 내린 영속의 축복이 그 거름이 됐다. 세계은행이 발표한 '세계개발지표 2001'에 따르면 이탈리아는 지난 99년 283억5,700만달러의 관광수입을 올려 미국, 스페인, 프랑스에 이은 세계 4위 관광대국의 자리에 올랐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더니 아마 그 길을 따라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이 이탈리아로 모여드는가 보다. 그래도 너무 안심하지는 말지어다. 요긴한 대목에 철도 노동자들은 느닷없이 일손을 놓아버리곤 하니까 말이다. 근로자 10인 이상이면 노조결성이 자유롭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겠다. 그저 수굿하게 '로마법'을 따를 수밖에. 로마법상의 로마 관광코스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돼 있다. 분류 기준은 낭만, 역사, 신앙. 낭만을 주제로 한 코스는 '스페인 광장-트레비 분수-판테온-나보나 광장'으로 이어지며 넉넉한 여유와 한갓진 낭만을 선사한다. '콜로세오-포로로마노-베네치아 광장'으로 이어지는 역사코스에는 고대 로마 제국의 화려했던 영광의 자취가 아로 새겨있다. 바티칸 박물관과 성 베드로 성당을 중심으로 이뤄진 신앙코스에서는 신이 로마에 내린 축복에 감탄하게 된다. romance 낭만코스는 부담 없이, 하릴 없이, 어영부영 즐기면 그만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로 단박에 세계적인 명소로 부상한 스페인 광장과 계단, 등 뒤 분수에 동전 한 개를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오게 된다는 전설이 있는 트레비 분수, 기원전 25년에 신전으로 건축돼 지금까지 고대 로마 유적 중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판테온 등을 차례로 거치면서 로마의 여유와 낭만을 만끽하면 된다. 저녁엔 나보나 광장의 노천카페에 들러 은은한 황색 가로등 불빛과 좔좔대는 분수 소리, 그리고 차가운 생맥주의 3중창 낭만연주곡을 즐겨볼 일이다. history 콜로세오에서 포로로마노를 거쳐 베네치아 광장까지 이어지는 역사코스에는 인간을 스르르 빨아들이고 마는 옛 로마 제국의 그 처처한 영광의 흔적에 주목해야 한다. 2,750여년 동안 로마 제국이 밟은 흥망성쇠의 흐름이 여울여울 불타오르며 시간 개념을 혼란시킨다. 예상보다 규모가 훨씬 큰 콜로세오. 하긴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 중에서 가장 컸기 때문에 그 명칭도 '거대하다'는 뜻을 지닌 '콜로살레'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그 놀라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게다. 일부는 무너져 내렸고 또 일부는 위태위태해 보이지만 수용인원 9만명 규모가 뿜어내는 당당한 위풍은 여전하다. 그 감동은 현재의 것이 아닌 1,900년도 더 된 과거의 것이다. 그 느낌은 솔직히 감동보다는 연민에 더 가깝다. 기둥만 앙상하게 남은 운동장 위로 완공을 기념해 백일동안 진행됐다는 5,000마리의 맹수를 죽이는 대혈투 광경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검투사끼리 혹은 인간과 야수가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이며 선연한 핏빛을 토해낸다. 흥분한 로마 시민들의 함성 소리가 시간을 거스르는 메아리 되어 울린다. 피의 잔인함으로 시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려야 했을 만큼 로마 제국은 지키고 숨겨야할 엄청난 야심과 권력과 영화를 지녔던 것이다. 성난 군중의 함성을 뒤로 하고 콜로세오 앞에 자리 잡은 포로로마노로 발길을 돌린다. '로마 공회장'이라는 말 뜻 그대로 이 곳은 고대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중심지였다. 원로원과 공회당, 신전, 상가, 감옥 등 로마를 움직이는 중추 시설이 이곳에 밀집해 있었고 로마인들의 만남과 토론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비록 지금은 세월의 풍파에 닳아빠진 주춧돌이며 기둥, 허물어진 벽 등이 웅장했던 과거를 허허로이 증명하고 있을 뿐이지만 2,100여년의 장고한 세월이 풍기는 장중함과 엄숙함은 유한의 인간을 압도하고 만다. 바라보고 있노라니 잘려나간 기둥은 하늘을 향해 다시 솟아오르고 이곳저곳 나뒹구는 벽돌은 다시 벽을 쌓고 길을 만든다. 폐허 속에 옛 제국의 위용이 용솟음친다. 존재하는 것의 유한성 끝자락에 존재했던 것의 무한성은 시작되는 법. 스산하지만 절대 스러지지 않는 그 영속의 감동이 거침없이 밀려온다. 콜로세오에서 시작된 고대 로마의 거리는 좌우로 포로로마노와 옛 로마 황제들의 공회장 등을 끼고 일직선으로 달리다가 베네치아 광장에 이르러 멈춘다. 베네치아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시대도 근대로 향한다. 로마 시내의 중심 좌표 중 하나로 쓰이는 베네치아 광장은 이탈리아 통일의 상징인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안고 있어 의미도 각별하다. 지난 1870년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1885년에 건립을 시작, 1911년에 완공됐다. 통일의 상징적 의미도 의미지만 건물 자체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으로도 명성이 높다. 기념관 앞 광장이 바로 베네치아 광장인데 이곳은 무솔리니가 파시즘 주창의 대중선동 장소로 활용한 곳이기도 하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그가 대중을 선동하고 그예 2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포했던 기념관 발코니에는 이제 로마 시내를 조망하는 관광객들의 느긋한 시선만이 가득할 뿐이다. 당시의 긴박함과 집단흥분의 상태는 온 데 간 데 없다. 그저 씁쓸함만이 가슴 속에 일렁일 뿐이다. religion 무솔리니가 남긴 것은 비단 덧없음 뿐만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도시국가지만 종교적으로는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바티칸 시국'은 바로 그의 '작품'이다. 1929년 무력으로 이탈리아 통일왕국을 무너뜨린 무솔리니는 평화와 자유의 상징인 교황청과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에 놓이게 된다. 무솔리니는 이 문제를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의 자치와 독립을 인정함으로써 해결한다. 이 때 교황청 쪽과 맺은 조약이 바로 '라테란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교황을 국가원수로 하고 0.44평방미터의 영토에 약 900명의 국민이 거주하는 바티칸 시국이 탄생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도시국가지만 교황이 거주하는 가톨릭의 총본산인 만큼 막강한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바티칸 시국의 중심은 성 베드로 성당과 바티칸 미술관.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의 무덤 위에 건립된 성 베드로 성당은 4세기 초에 최초 건립되고 1503년에 재건축됐다는 역사적 측면에서나 그 웅장함에서 단연 세계 최고의 성당이라 할 수 있다. 로마 이전 시대의 유적들을 비롯해 로마시대, 중세, 르네상스, 현대 미술품까지 폭넓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바티칸 미술관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으로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바티칸 시국 관광에만 최소 하루를 투자할 정도로 이곳은 로마가 아니면서도 로마를 대표하는 로마관광의 중심지다. 신이 내린 축복의 증거다. 김선주 기자 vagrant@traveltime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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