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4구간 / 설악산] 식생
지금도 북방계 미기록종 발견돼
장백제비꽃·큰잎쓴풀 등 새로 발견되고, 법정보호종 10종 생육

한반도의 가장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 중앙부에 자리 잡은 설악산(1,708m)은 남한에서는 한라산, 지리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속초시, 인제군, 양양군, 고성군 등 4개 시군에 걸쳐 있다. 경관이 빼어나고 동물상과 식물상이 풍부해 1965년 천연기념물 제175호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래, 1970년에는 제5호 국립공원, 1982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생물권보존지구로 지정되기도 했다.

해발 1,708m의 주봉 대청봉을 비롯해 백두대간을 이루며 미시령에서 대청봉까지 뻗어있는 북주릉, 대청봉에서 귀청봉(1,578m)을 거쳐 안산(1,430m)을 잇는 서북릉, 권금성과 화채봉(1320m)이 있는 화채릉, 가리봉(1,519m)을 품은 서릉 등이 설악산의 뼈대 구실을 하며 연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천불동계곡, 백담계곡, 흑선동계곡, 십이선녀탕계곡 등 깊고 긴 계곡들을 빚어내고 있다.

▲ 가는다리장구채. 북부지방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남한에서는 설악산에만 자생하는 희귀식물이다. 대청봉, 중청봉 등 설악산 높은 봉우리의 바위 겉에 붙어 자라서 훼손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꽃은 7월 중순부터 9월 하순까지 핀다.

대간을 경계로 내외 설악 식물상 약간 달라


주봉인 대청봉을 중심으로 인제쪽을 내설악, 동해쪽을 외설악, 그리고 오색과 양양쪽을 남설악으로 편의상 구분하는데, 백두대간이 내외 설악을 가르고 있다. 외설악과 내설악은 그곳에 살고 있는 식물의 종류들도 조금씩 다르다.

식물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설악산만큼 내게 많은 것을 깨우치게 한 산도 없는데, 1996년에는 한 해 동안 10여 차례 이상 설악산 골골을 누비며 식물을 조사한 적이 있다. 그 해 6월, 공룡능선을 거쳐 중청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에 뜻밖의 식물을 만났다.

아침 햇살을 받은 천불동계곡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을 때였는데, 바로 앞의 숲 바닥에서 무리를 지어 꽃을 피운 작은 풀들이 시선을 끌었다. 백합과의 자주솜대였다. 꽃이 필 때는 색깔이 연한 노란 색이지만, 나중에 짙은 자주색으로 변하는 특이한 습성을 가진 식물로, 언뜻 보면 전국에 흔하게 자라는 풀솜대와 비슷하게 생겨서 처음에는 두 식물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당시까지는 지리산에만 생육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서 처음 이 식물을 만나 생김새를 관찰한 이후에 덕유산, 소백산, 방태산, 태백산, 오대산 등지에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라송이풀도 그 해에 발견했다. 그동안 설악산 식물목록에 없었던 이 식물을 서북능선에서 발견하고는 백두산에 자라는 구름송이풀이라 굳게 믿었는데, 몇 년 후 한라산에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한라송이풀을 가야산에서 직접 확인한 이후에 설악산의 이 식물을 다시 조사하게 되었고, 설악산에 자라는 이 식물도 한라송이풀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그 해 9월에는 또 하나의 남한 미기록 식물을 발견했다. 큰잎쓴풀이라는 용담과의 두해살이풀이었는데, 함경북도의 무산, 백두산, 포태산, 개마고원 등지에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북방계 식물로서, 그때까지 남한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식물이었다. 설악산 능선을 하루 종일 혼자서 조사하던 중에 이 식물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에 촬영한 사진이 도감에 실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큰잎쓴풀은 최근에 강원도의 다른 두 곳에서도 발견되었는데, 한 곳은 백두대간 주능선이고, 다른 한 곳은 낙동정맥 능선이다.


1.기생꽃
지리산, 가야산, 태백산, 대암산 등의 해발 1,400m 이상 지역에 드물게 자라는 북방계 식물로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식물 II급이다.
2.난장이붓꽃 설악산 이북의 높은 산 능선 바위지대와 풀밭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5월 중순부터 7월 초순까지 볼 수 있다.
3.눈잣나무 대청봉에 자라는 고산성 침엽수로 설악산이 분포의 남방한계선이다. 고산에서는 땅 위를 기지만, 평지에 심으면 곧추 자란다.
4.닻꽃 남한에서는 한라산과 화악산에서만 자라는 북방계 식물로, 설악산에서는 필자가 1999년에 처음 발견했다. 꽃은 6~8월에 핀다.

북방계 큰잎쓴풀 1996년에 처음 발견


1995년에는 자주솜대와 큰잎쓴풀 외에도 월귤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름도 비슷하고 소속되는 과도 진달래과로서 같은 홍월귤이라는 북방계 식물은 대청봉 일대에 몇몇 개체가 자라는 게 알려져 있었지만, 월귤은 남한에는 자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식물을 포함한 산앵도나무속 식물을 석사 논문 주제로 잡았던 필자지만, 남한에서 채집된 표본은 구경조차 못하였고, 북한에서 채집된 몇몇 표본만을 가지고 석사학위를 마쳤던 경험이 있는 터여서 기쁨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속초에 살고 있는 산악사진가이자 자연다큐멘터리 촬영감독 성동규 선생이 설악산에 변산바람꽃이 자란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너도바람꽃을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갈 뿐,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시는 변산바람꽃이 세상에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여서 이 꽃이 자라는 곳으로서 변산반도 외에 마이산, 돌산도, 제주도 정도만이 알려져 있었다.

지금처럼 동해안을 따라서 경주까지 자란다는 사실도 모를 때였다. 그러니 제주도와 서남부 지방에만 자라는 식물이 설악산에 뚝 떨어져서 살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댕댕이나무
한라산과 강원도 이북의 고산에 자라는 떨기나무로, 설악산에서는 대청봉, 귀떼기청봉 등 높은 봉우리에서 무리를 지어 자란다.
2.만주송이풀 설악산까지만 내려와 자라는 북방계 고산식물이다. 꽃은 5월부터 7월까지 피며, 설악산 능선의 몇몇 곳에서만 발견된다.
3.바람꽃 북부 지방의 높은 산 풀밭에 자라는 여러해살이 고산식물로, 남한에서는 설악산 부근에서만 볼 수 있다. 꽃은 7월 초순부터 8월 중순까지 핀다.
4.산솜다리 설악산과 북부 지방의 높은 산에 자라는 한국특산의 여러해살이풀로 ‘에델바이스’라 부른다. 꽃은 5월 하순부터 7월 초순까지 핀다.

변산바람꽃을 눈 속에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

1999년 3월20일 설악산을 찾았다. 이맘때는 대청봉에 흰 눈이 쌓여 있을 시기여서 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설악산의 동쪽 사면은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성 감독은 설악동 부근의 어떤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곳곳에 잔설이 남아 있어서 새싹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곳에서는 현호색 종류와 노루귀가 이미 꽃봉오리를 달고 있었고, 활짝 핀 변산바람꽃이 있었다.

누군가 옮겨 심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개체수가 많았고, 또 조금 떨어진 다른 곳에도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생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눈 속에 핀 변산바람꽃 사진은 설악산이 아니고서는 어디에서도 찍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설악산에서 필자가 발견한 또 하나의 북방계 식물은 장백제비꽃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백두산 등 북부지방에서 자라는 이 식물을 설악산의 능선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악산을 포함해 남한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북방계 식물이 과연 설악산에서 자랄 수 있을까? 2000년 초여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아쉽게도 꽃이 지고 열매가 달린 상태였다.

콩팥을 닮은 잎 모양만으로도 다른 제비꽃 종류들과 구별할 수는 있지만, 남한에서 처음 발견되는 것이니 꽃까지 확인한 후에 발표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듬해 다시 찾아갔다. 하지만 이듬해에도 너무 일찍 가는 바람에 꽃봉오리밖에 볼 수가 없었다. 2002년 세 번째 찾아간 끝에 드디어 활짝 핀 꽃을 확인하고, 언론 등에 공식적으로 알리게 되었다.

북방계 식물인 닻꽃도 설악산 능선에서 발견했다. 여름철에 닻 모양의 특이한 꽃을 피우는 한해 또는 두해살이풀로 백두산, 만주, 몽골 등지에서는 저지대에서도 흔하게 자라지만, 남한에서는 한라산 아고산대 풀밭과 경기도 화악산 정상 부근 등지에만 매우 드물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설악산 식물목록에는 아직까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1999년 여름에 능선에서 만나서 사진까지 찍은 적이 있는데, 이후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설악산은 여러 종류의 희귀 양치식물과의 인연도 맺게 해주었다. 만년석송, 개석송, 주저리고사리, 좀미역고사리 같은 북방계 희귀 양치식물들은 물론이고, 남한에서 보고는 되어 있었지만 수십 년 동안 찾지 못하고 있던 비늘석송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두산에서만 보았던 비늘석송을 서북능선에서 발견했을 때는 몇 해 전 한여름이었다.

지금까지 식물학자들이 조사한 것에 의하면 설악산에는 950여 종류의 고등식물이 자라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4,000여 종류의 식물 중 25%쯤에 해당하는 것으로, 1,800여 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제주도 한라산이나 1,500여 종류가 자라는 지리산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며, 오대산이나 치악산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희귀식물의 수로 말한다면 설악산은 한라산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가치가 더 높을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설악산에는 그만큼 귀중한 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다는 것인데 그 원인은 여러 가지다.

첫째, 북한에서 자라는 식물이 설악산까지 내려와 자라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북방계 식물이라 부르는 이 식물들은 백두산, 금강산 등 북한 지방에 분포하는 식물들로 남한에서는 설악산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설악산의 높은 위도와 고도가 빙하기 때 남하했던 북방계 식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고, 또 백두대간이 식물의 이동통로 구실을 해줌으로써 많은 북방계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식물로는 비늘석송, 눈잣나무, 두메오리나무, 가는다리장구채, 숲개별꽃, 바람꽃, 흰인가목, 홍월귤, 장백제비꽃, 금강봄맞이, 만주송이풀, 봉래꼬리풀, 난장이붓꽃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설악산은 이들 분포의 남방한계선이 된다.

한편 설악산까지 올라와 자라는 남방계 식물들도 있는데, 설설고사리, 모데미풀, 사람주나무, 때죽나무, 변산바람꽃, 지리대사초 등이 그것이다. 설악산에 분포하는 북방계 식물과 남방계 식물은 모두 한반도 내에서 분포의 가장자리에 자라고 있는 것들로서, 다른 곳에 자라는 같은 종의 식물보다 보존가치가 더욱 크다.


1.자주솜대
환경부가 멸종위기 야생식물 II급으로 지정한 한국특산의 여러해살이풀이다. 꽃은 6월에 피며, 처음에는 연한 황색이지만 점차 자주색으로 바뀐다.
2.장백제비꽃 백두산 등 북한의 고산지대에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여러해살이풀로서, 2000년 필자가 설악산에서 처음 발견했다.
3.큰잎쓴풀 북한에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두해살이풀로, 남한에서는 1996년 필자가 설악산 능선에서 처음 발견한 이래 최근에는 강원도 다른 곳에서도 발견됐다.

고산능선 보전이 설악산 생태계 보전의 지름길

설악산에 희귀식물이 많이 자라는 두 번째 이유는 높은 바위봉우리와 능선이 희귀 고산식물의 보금자리가 되기에 알맞은 환경조건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청봉 일대를 비롯하여 북주릉, 서북릉, 화채릉, 서릉 등이 높은 능선을 이루고 있으며, 더욱이 이들 능선에는 암반이 노출된 곳이 많고 어떤 곳은 고산초원지대를 형성하기도 하는데, 이런 곳에 많은 고산식물이 자라고 있다.

설악산 고산지대에 80여 종류의 고산식물이 자라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주저리고사리, 좀미역고사리, 눈향나무, 사스레나무, 참바위취, 산오이풀, 들쭉나무, 월귤, 만병초, 기생꽃, 등대시호, 한라송이풀, 자주쓴풀, 댕댕이나무, 배암나무, 땃두릅나무, 분홍바늘꽃, 닻꽃, 한라송이풀, 두메잔대, 솔체꽃, 다북떡쑥, 산솜다리, 바위솜나물, 자주솜대, 금강애기나리 등이 설악산을 대표하는 고산식물이라 할 수 있다.

설악산 식물의 중요성은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한국특산식물이 많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특산식물은 407종류로 알려져 있는데, 설악산에는 이 중 65종류가 자란다. 또 우리나라 안에서도 설악산에만 자라는 특산식물도 15종류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설악산의 한국특산식물 숫자는 한라산의 75종류에 다음 가는 것으로, 설악산보다 덩치가 큰 지리산의 42종류보다 많다.

이들 한국특산식물은 세계적으로 가치 있는 식물자원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희귀한 것들이 대부분이므로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사라질 위험이 크다. 우리나라에서의 멸종이 곧 세계적인 멸종으로 뜻하므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특별한 보호조치가 필요하다.

설악산에는 정부가 법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식물들도 많이 자란다. 2005년 제정된 야생동식물보호법에 의해 환경부가 지정해 특별관리하고 있는 64종의 멸종위기 야생식물 가운데 10종류가 자라고 있다. 연잎꿩의다리, 깽깽이풀, 한계령풀, 홍월귤, 기생꽃, 가시오갈피나무, 솜다리, 솔나리, 자주솜대, 털개불알꽃 등이 그것이다. 이 역시 한라산을 포함한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숫자다.

설악산은 북녘 백두대간의 식물들을 어렴풋이 가늠해 볼 수 있는 남한 유일의 산이다. 가서 보지 못하는 북녘 땅의 식물들을 가장 많이 보듬어 키우고 있는 산이라는 점에서도 설악산은 우리나라의 생물다양성 보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설악산의 귀한 북방계 고산식물들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보금자리인 여러 능선을 잘 보전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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