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젠 완연한 혼자다. 1호차 백구만 하미의 숙소를 나섰다. '자유롭다'고 말하기엔 외롭고 우울한 정도가 깊다. 2호차는 정비소에 묶여 잘하면 오늘 늦게, 어쩌면 내일이나 수리가 될 것 같다. 2호차의 팀장이신 에릭님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1호차 먼저 출발하라고. 투루판에서의 일정이 2박3일이니 기다리고 있으면 곧 합류하겠노라고, 모든 이들에 이곳에 묶여 있을 이유가 없다고. 원래부터 1호차에 탑승하고 있던 나와 아내 그리고 교수님과 안내원 철봉씨는 투루판을 향해 출발하고 2호차에 탑승해 있던 에릭님과 자포님, 나리님은 하미에 남았다. 이들을 두고 떠나는데 마음 한 켠이 이상하다. 어차피 잠시 후엔 만날 텐데 하며 자위해 보지만 이 헤어짐이 장기화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가시질 않는다. 습관적으로 켜 두었던 무전기를 끈다. 아, 이젠 혼자지…. 침묵하는 무전기가 어색하다. 무거운 마음과는 다르게 어제 가다 만 익숙한 길이어서 차는 수월하게 움직였다. 길은 곧게 뻗은 일직선. 아스팔트의 까만 선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다. 길 가의 표지판 '녹색통로(綠色通路)'는 이 길을 이르는 말이리라. 길은 평탄한데 강풍이 분다. 차가 좌우로 심하게 쏠린다. 흡사 바람 부는 날 영종대교를 주행하는 느낌. 불안을 느낀 아내가 운전대를 내게 넘긴다. 시속 80~90Km를 유지하며 저속운전하는 방법밖엔 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투루판, 우루무치를 비롯한 이 일대가 풍력발전소가 많은 곳이다. 드넓은 똥밭, 엔돌핀의 미이라들 갓길 없이 일 자로 곧은 도로에 모처럼 정차할 만한 공간이 나타난다. 차 안에 있은 지 벌써 3시간, 이제 신호가 올 때도 됐다. 차를 세우고 각자 위치를 잡는데 아무리 노상방뇨가 익숙해졌어도(후안무치라 욕하지 마시길. 만일 화장실을 찾아 소변을 봐야 한다면 하루에 두 번, 혹은 한 번도 어렵다) 바로 옆에 차가 지나는 마당에 좀 민망하다 싶어 도로 아래로 내려섰다가 깜짝 놀란다. 오! 드넓은 똥밭이여. 전후좌우 간격 1m, 혹은 50cm간격으로 배설물이 가득하다. 똥의 미이라들. 이미 다 말라 바삭바삭해 본연의 향도 색도 잃은 과거의 자취들. 설사 어제 나온 신선한 것이라 해도 신장의 태양 아래선 금세 이 모양으로 변하리라.
'기분 좋게 차를 타고 가는데 살살 신호가 온다. 한 시간을 참아 봤는데 이젠 안 될 것 같다. 염치 불구하고 아무데라도 서서 일을 치르고 싶은데 갓길이 없는 상황에서 도로를 막고 차를 세웠다간 사고로 이어질 터. 다시 한 시간을 참고 자리를 찾아 운전을 계속한다. 드디어 괄약근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고 식은땀이 이마와 뺨을 흠뻑 적실 때 저만치 정차할 만한 공간이 나타난다. 미친듯 뛰어내려 아직 잠식되지 않은 터를 찾아 시원하게 흔적 하나를 남긴다'. 뭐 이런 과정의 부산물이 아니겠나. 이 많은 똥미이라들은 고통받던 중생의 시원한 흔적이 되는 셈. 굳어진 엔돌핀이야. 그리 생각하니 똥밭에서 오줌을 누는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 배설 앞에 부자도 가난한 이도 모두 공평했으리라. 다시 길을 간다. 둔황 이후의 길에선 운전이 즐겁다. 갈림길에 대한 고뇌도 없고 혼돈 그 자체인 중국의 교통상황에 대한 우려도 없다. 눈은 항상 지평선 쪽에 닿아 있고 발은 그냥 가속패달 위에 얻은 채 그대로다. 추월 때마다 방향지시등을 켜고 주행하는 승합차 한 대를 발견하고 마음이 밝아진다. 중국에도 방향지시등을 켜는 차가 있다! 운전자가 보고 싶어 일부러 그 차를 추월해 본다. 가족들인 것 같은 일군의 사람들이 승합차 안에 있다. 외국인 차량임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준다. 우리도 답례. 보닛 위에 한글로 된 역사탐험 부착물을 붙인 게 잘 한 것 같다. 한류의 영향인지 한글을 보고 반가워 할 때가 많다. 싼싼(善善)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승합차와 함께 왔다. 서로 추월할 때마다 인사를 나눴으니 열 번도 넘게 눈인사를 나눴으리라. 신장 따판지
그러나 빨리 먹고 일어나자던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신장 따판지(大盤鷄)를 시켰더니 닭 한 마리가 더디게, 푸짐하게 요리되어 나온다. 식당 옆 좌판에서 파는 과일들, 이보탕 (1위안), 홍성쉐이 (1.2위안), 하미과 (1.8위안)를 사다가 잘라 달래서 곁들이니 이만한 만찬이 없다. 결국 푸짐한 음식을 다 비우지도 못하고 젓가락을 놓으려니 하미에 남겨진 2호차 분들이 눈에 밟힌다. 왜 같이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르는 것일까. 친절하게 메뉴를 점검하고 음식을 선정해 주던 에릭님, 맛있게 드시며 개개의 음식에 대해 품평하고 식사를 풍성하게 한 자포님 그리고 시끌벅적 한껏 흥 나는 분위기를 연출하던 나리님. 음식을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지. 그렇담 이 여행에서 그리고 이 순간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2호차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선다. 이제는 정말 혼자다. 그러나 다행히도 여럿이 함께하는 혼자다. 사실 신장에 들어서며 은근 음식에 대한 걱정을 했더랬다. 소문에 듣자하니 신장에 가면 온통 '낭(위구르족의 전통 밀가루빵)'과 '양고기'로만 매 끼를 채울 줄 알았다. 누구의 표현대로 '양기름에 비빈 밥… 아니면 밥에 양기름을 비빈 것'들만 먹을 줄 알았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없어도 그 외의 음식은 선택할 만하다. 따판지 요리를 해준 주인 사내는 흡사 역도 선수같이 우락부락한데 살갑고 싹싹하기는 여자보다 더하다. 흰모자를 쓰고 있어 회족이냐 물으니 맞단다. 옆 식당의 위구르족 여인과 아는 체를 한다. 몸은 갸날펐으나 눈이 크고 예쁜 호리호리한 얼굴이다. 여러 인종의 땅, 이곳은 신장인 것이다. 이제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위구르인 중심이겠지만 톈진에서 여기까지의 인종 변화로도 신기하기만 하다. 불의 땅, 투루판
투루판 진입 32Km 전 베제클리크 천불동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계곡으로 진입 5.5Km를 더 가니 천불동. 또 약탈 운운하며 벽화 없는 빈자리 앞에서 열 올릴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아 이 석굴은 내부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베제클릭이 위치한 실제 지형만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베제클릭을 나와 큰 길에서 8km정도 진입해야 고창고성이 나오는데 그 바로 직전 좌측에 아스타나 고분군이 있다. 중국어로는 어쓰타나(阿斯塔那) 구펀췬이지만 이 역시 음차이니 내겐 그냥 '아스타나(Astana)'다. 위구르 어로 "영원한 휴식"이란 뜻인데, 고창성에 살다간 귀족들의 공동묘지다.
묘역에 들어섰는데 투루판 더위의 악명을 증명하려는 듯 태양은 한층 가열차다. 살도 따갑고 숨도 가쁘다. 몇 분이라도 양지에 서 있으려면 까뭇거리는 정신을 여러 차례 추스러야 할 지경이다. 굳이 이런 상황을 해명이라도 하려는 듯 입구 옆에 투루판 기후표가 크게 걸려있기는 했다.
잠들지 못하는 희망, 아스타나 고분군
부부 미이라 한 쌍이 좌우로 전시되어 있다. 그 을씨년스러움의 근원은 이들 때문이었을까. 진짜 무덤에서 만나는 미이라는 박물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곳의 건조한 기후가 시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일을 막는다. 덕분에 영혼이 떠난 육신은 '전시물'로 무덤을 지킨다. '영원한 휴식'의 장소에서 '휴식'하지 못하는 그들이 안타깝다. 경망스럽게도 죽음은 늘 내 주변 한 발치께서 서성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명주실만큼이나 미약하고 가볍다. 이런 저런 이유로 겪은 혈육친지와 지인과의 이별. 안타깝게도 죽음엔 서열이 없었다. 열 일곱, 스물 여덟, 마흔 아홉, 일흔 여섯. 교통사고 후 대수술을 마친 아버지는 "빚이 많은데…." 한 마디를 마치고 긴 잠에 빠지셨다. 회복불가능이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구급차 안에서 굳어가는 아버지의 몸을 느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열흘 사이의 이별, '몸'이 '물체'로 변하던 때의 느낌. 그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7년 넘게 산소에 들를 적마다 눈물을 보였더랬다.
참 집요한 내 꾐에 넘어가 혼인하게 된 지 겨우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설거지를 하던 아내가 운다. 왠지 자기가 나보다 오래 살 것 같아 슬퍼졌단다. 늙고 힘없어, 그저 사방에 켜켜이 쌓인 옛 추억이나 갉아먹으며 살아야 할 때 그 때 자신의 옆에 내가 없으면 어찌해야 하냐고, 그래서 울음이 나왔단다. 어이없는 기우라며 웃음으로 일축했지만 내심 내 가슴도 울었더랬다. 항상 죽음은 현실의 문제였으므로. 그래서였을까? 연애 시절의 종지부를 찍고 부부로 살자고 보낸 서신도 이런 짧은 글이었다. "不求同年同月同日生 但願同年同月同日死(한 날 한 시에 나기를 구하진 못하였으나, 다만 바라옵기는 한 날 한 시에 죽는 것이라)" <삼국지> 도원결의 서약 중 한 글귀다. 그리 될까? 우린 어느 한 쪽이 불행하지 않도록 같은 날 같은 시에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죽어서도 함께 있는 저들이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아내와 저렇게 한 곳에 묻힐 수 있을까? 이런 상념으로 앞에 있는 아내의 어깨를 가만히 쥔다. "꺄악!" 돌아온 대답은 외마디 비명. 으스스한 묘실 기운에 긴장해 있던 아내가 비명으로 화답한다. 동상이몽이다. 참 분위기 깨짐이다.
무덤 두어 개를 더 보고 밖으로 나왔다. 교수님은 예외 없이 이 부근 전설과 신화, 지역정보에 관한 책이 없는지 확인하느라 바쁘시고 아내는 언제나처럼 장신구 판매대 앞에서 안광을 밝힌다. 나는 공원 내 설치된 십이지상 앞에 서성인다. 교수님은 책 한 권을 사시고, 아내는 더위에 질렸는지 매점 아가씨가 쓰고 있는 두건을 샀다. 나는 같은 띠인 쥐 석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잠들지 못하는 희망, 아스타나의 상념을 뒤로 하고 우린 제각각 여행의 일상으로 돌아선 것이다.
|
'실크로드(2005)..........'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31] 투루판 자오허 고성과 아이딩 호 (0) | 2007.04.15 |
---|---|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30] 투루판 가오창 고성과 카레즈 (0) | 2007.04.08 |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8] 둔황에서 투루판 가는 길... 2호차의 좌절 (0) | 2007.04.08 |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7] 옥문관을 나서 사막으로 (0) | 2007.04.08 |
[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6] 둔황 양관에서 (0) | 2007.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