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나로티 미케란젤로와 다비드상이 있는 피렌체....
작성자 : 안병현작성일 : 2006.06.06조회수 : 50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곳, 비싼 도시진입료를 물어야만 이도시를 볼 수있다는데,
오늘도 나는 많은 인원의 고객들을 모시고 이곳에 섰다.
우린 과연무엇을 보러왔단 말인가!아니 무엇을 느껴야 한단말인가!
아니면 현지 가이드의 우스개소리인 토스카나주의 특산품인 가죽제품 쇼핑을 위한 도시관광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뭏튼피렌체시를 올때마다 항상 내자신 한테 물어보는 질문이다.
여행지를 안내하는 막중한 책임을 가진나만이라도이도시의 중요한 이유를 제대로 알아야 하지않을까.

피렌체는 두 개의도시로 구분할수있다 .종교적인 두오모 성당과 정치적인시뇨리아광장을 들수있다.
정치적인 곳인 시뇨리아 광장에는 많은 조각작품이 서있다.
그중에서도 피렌체의 대표적인 아이콘이 된 '다비드상'에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난 피렌체가 좋다.왜 좋냐하면 작은 골목 들에서 예전의 많은 명사들의 숨결을 느낄수가 있으니 말이다.
이탈리아의 세종대왕이신 '단테'가 슬픈 베아뜨라체를 노래했던,피노키오의 작가인'콜로디'가 불우한 어리시절을 보냈던 피렌체의 뒷골목엔그들만의 숨결을 느낄수 있어서 좋다.

시뇨리아광장에 우뚝선 다비드상이 탄생하기까지에 대해서 애기해보자.
1500년의 성당 작업소 기록에는 이 미완의 조각품에 대해 '다비드'라는 제목의 대리석 형상,계획에 차질이 생겨 방치중'이라고 적혀있다.이 위대한 작업, 오직 이 어려운 일을 할수있는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안드레아 산소비노만이 물망에 올랐다지만,결국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미켈란젤로가 자기만이 적임자라고 위원회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처음 두오모 성당의버팀벽에 쓰여질 요량으로 만들어지게 된다.두오모 성당에 통돌로 방치되있는지 25년만에 화려하게 부활하게된다.고대로마시대부터 조각상에 쓰이는 대리석은 피렌체 북서쪽1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카라라 지역에서 운반해왔는데,그리스의 파로 채석장보다 그품질이우수하다고 알려져있다. 지금도 카라라와 마사는 현재에도 이탈리아 대리석 산지로 유명하다.흰색 대리석이 거의 모든 대형조각의 재료로 받아드려지게 된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평생을 바쳐 대리석의 가능성을 발굴해 낸 사람이 바로 미켈란젤로이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카프라세의 언덕마을에서 그래도 좀 괜찮은 가문이었던,아버지가 토스카나지방의 작은 두마을의시장을 맡고 있었기에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낼수있었다.예나 지금이나 화가나,조각가는 훌륭한 가문의 직업은 아닌가보다.미켈란젤로 자신은 그당시 교황이나 군주들과 동등한 지위에 있다고 생각했다고한다.
크기나 솜씨에있어서 보는 이를 압도하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고대 이후로 나체의 남자 조각상 가운데 가장 커다란 작품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영웅을 기리려는 의도에서 제작된 작품이지만,승산없는 싸움에서의 승리를 암시하는 이 조각상은 메디치가문을 위시한 정적들과 투쟁중이던 피렌체의 공화파에게는 매우 적절한 상징물로 여겨졌다.종교적 인것,세속적인 것,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그리고 도도함과 소박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조각상은 제작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초월하여 믿음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피렌체도시 기념품점에 가면 다비드상이 새겨진 모든 물건을 만나보게된다.그러나 시뇨리아광장에 서있는 조각상이 진품이아니고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알리가 없고,오늘도 계속 시뇨리아광장에서 카메라의 모델이 된다.다비드상의진품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나 가야 만나볼수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휭하니 스치며 지나간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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