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낯선 땅 낯선 공기-영국도착첫날

<여행지에서의 만남> <드디어 영국 히드로공항> <영국땅에 내딛는 첫걸음>

<그리스의 향기에 흠뻑 취하는 대영박물관> <주마간산으로 본 이집트미술>

<런던에서 지하철타기> <영국에 피클은 없다? > <워털루하우스로 돌아오는 길>


<여행지에서의 만남>

여행중의 만남은 짧은 만남이라도 중요한 많은 것을 잃거나 얻게 해주는 것 같다. 시간이든 정이든 힘이든. 미아(?)지영이가 만난 일행은 통신에서 여행 준비하다 의기투합했다는데, 지영이가 그렇게 못만나면 큰일이라고 걱정하던 게 이해될 만큼 활기차고 재미있는 마치 born to travel인 것 같은 남녀였다.

나와 지현이는 지영이에게 어떤 여행동료로 보였을까? 지현이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는 "썰렁한" 사람들이었단다. 나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들을 만나고 보니 우리는 여행지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는 스타일의 여행객은 아닌 것 같다. 여행의 잔재미를 부딪쳐가며 찾는 그들에 비해 안전하고 확실한 것이 아니면 겁을 내고, 미술관 관람을 주로 하러 왔다고 말하는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라도 좀 더 밝고 열린 태도로 여행해야겠다. CHEER UP!


<드디어 영국 히드로 공항>

5월 5일 아침 현지시간 아침 7시 53분. 드디어 영국 히드로공항에 도착했다. 어젯밤에 5일만에 처음으로 좀 잤더니 몸이 한결 좋아지고 정신도 좀 든다. 여행준비를 너무 후반부에 내쳐서 한 게 후회된다. 마지막 일주일은 쉬면서 몸을 좀 만들어서 와야 하는 것을.

짐싸면서 두사람 중 한사람의 배낭이 공항에서 사라져 버리는 사고를 너무 많이 생각했다. 왜 종종 그런 사고가 있다지 않는가. 그래서 약품과 같은 중요한 것들은 양쪽에 한 개씩 넣었는데 무사히 모든 짐이 도착했다.

김포공항에서 짐부치기 직전에 두터운 스카치 테이프로 미라 감듯 감아놓길 잘한 것 같다.곱게 다뤄지지는 못한 듯 여러 번 묶어놓았던 침낭도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여러 번 여며놓지 않았으면 이것저것 분실될 뻔했다.

우리 둘과 지영이네 세 명 해서 모두 다섯 명은 모두 만만치 않은 배낭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추영호라는 사진을 한다는 학생은 사진장비와 100만원 어치나 된다는 각종 필름들로 가득 채워 온 산타할아버지 같은 망태기를 번쩍 들고 앞장을 선다. 우리도 큰 숨을 한번 쉬고 당당히 배낭을 매려는데 휘청, 꽁꽁 눌러싼 배낭의 무게가 주체하기 어렵다. 우리자매보다 더 큰 짐을 짊어맨 자그한 체구의 한혜진이라는 언니는 담담히 지하철을 찾아 가는데, 나와 지현이는 앞으로 이걸 매고 어찌 다니나 앞이 깜깜하다. 뺄 건 다 뺐는데 왜이리 무거운지.

그때 구원군처럼 눈앞에 보이는 공항용 카트. 지하철역까지 얼마나 걸어야 하는 지 모르지만 일단 공항 벗어날 때까지는 싣고 가보기로 했다. 중간에 팜플릿이 잔뜩 꽂혀있는 곳이 있어 버스노선도 등 몇 가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추려 골랐다. 한글이 하나도 없는 팜플릿을 보니, 영국에 온 게 실감난다.

한참을 표지판 따라 걷고 무빙벨트도 타고 해서 지하철표 사는 입구까지 왔다. 요금표를 보니 우리나라 전철의 구역에 해당하는 ZONE이라는게 있나보다. 어떤 표를 사는 게 가장 이익일까. 고심 끝에 출근시간 끝나기를 기다려 버스와 경전철도 탈 수 있는 6존 ONE DAY TICKET을 끊었다.

그런데 지하철 타는 입구를 잘 몰라서 다시 공항방면으로 가는 무빙벨트에 잘못 올라서고 말았다. 한 5미터 정도 실려 가다가 일행이 모두 배낭을 매고 벨트위에서 만화에서처럼 거꾸로 뛰어오는 웃지 못할 장면을 연출하고 말았다.

드디어 민박집이 있는 lambeth north역을 향한 전철에 올랐다. 반대편 줄 사람과 무릎이 거의 닿을 정도로 마주보고 앉게 되는 전철은 얼마간 바깥 풍경도 보이고 참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전철이었다. 회색의 나라 라더니 창 밖으로 동화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날씨도 의외로 맑아 기분까지 따라서 좋아지는 듯 하다.

지하철 안이 밝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찾았다. 손잡이 대신 있는 가로봉과 세로봉이 유치원 교실처럼 파란색과 노란색의 원색이고 좌석의 팔걸이와 창문 손잡이는 빨간색이었다. 좌석 시트도 단색이 아니라 잔 체크무늬가 있었다. 노선도는 어디서나 볼 수 있게 곳곳에 붙어 있었다. 큼지막하게.

우리나라 지하철 안은 왜 회색과 초록 일색인지. 아늑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지하철 관계자들에게 세계 지하철 탐방을 한 번 시켜보면 좋겠다.


<영국 땅에 내딛는 첫걸음>

드디어 빨간 이층버스가 오가는 영국 땅에 첫 발을 내디뎠다. 시원한 바람과 고상한 건물들. 예쁜 성당이 우리를 맞아준다.

성당 옆 커다란 광고전광판에 누드에 가까운 보그 사이트 광고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고 있어 예술의 자유를 우리보다 넓게 인정하고 있는 유럽에 왔다는 게 실감났다.

우리가 예약을 해 두었던 워털루 하우스라는 민박집으로 지영이네 일행도 함께 가기로 했다.

china walk라는 거리에 있는 낡은 아파트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은 생전처음 맡아보는 고양이오줌 냄새로 가득해서 민박집 안 상황까지 염려스러웠는데 다행히 두 명의 유학생 남자분들이 깔끔하게 관리하고 계셨다.

간단히 런던의 볼만한 곳과 길에 대한 안내를 듣고 짐을 푼 뒤 첫 목적지인 대영박물관을 향해 길을 나섰다.


누드광고아래서 수줍은 일행 지영


<그리스의 향기에 흠뻑 취하는 대영박물관>

tottenham court road 전철역에 내려서 샌드위치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1시쯤 대영박물관에 들어섰다. 상설전시관 입장은 무료이지만 특별은 유료였다.

우리가 간 날은 Burma미술특별전을 하고 있었는데 입구의 포스터가 상당히 볼만해 보였고 학생할인도 된다고 해서 2파운드씩 내고 일단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썰렁해도 썰렁해도 이렇게 썰렁 할 수 있을까. 명색이 대영박물관에서하는 특별전이면 규모 면에서나 전시품의 질 면에서나 이래서는 안되는 거였다. 손바닥만한 전시관에 겨우 스물 몇 개의 전시품뿐이고, 서구인들의 눈에는 불상이나 항아리의 문양이 신기했을지 몰라도 우리는 우리나라나 중국의 미술품에서 익히 보던 것들이라 새로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자기네 나라 사람을 닮아 코가 큰 불상과 섬세한 문양의 그릇들은 볼만했고, 온통 황금빛 세공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불단을 보며 어느 나라나 종교가 참뜻을 잃고 변질되면 사치의 극으로 치닫는 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멋진 BURMA특별전 포스터
-속지 말자 화장발!

전시 방법에 있어서 좋았던 점은, 미술품 사이사이 바리를 들고 일렬로 걸어가는 붉은 승복의 승려들 등 그 지방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담은 사진을 걸어두어, 그들의 정서를 더 가까이 느끼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허탈해하며 특별전을 보고 나와 상설 전시물들이나 잘 보자며 미술관 안내 지도를 찾아나섰다. 입구 왼쪽의 서점에는 한글 안내책자도 보였지만 비싸고 별로 볼게 없어서 카운터의 아줌마에게 무료 지도 FREE MAP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모른다고 인상을 쓴다.


화려한 불단-이런 걸 만드는 동안
서민들의 허리는 휘었을 터


처음 만나는 불친절에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 다니려면 어쩔 수 없지 하며 아줌마 앞의 1파운드짜리 지도를 샀다. 마음을 비우기로 하고, 오기 전에 이주헌의<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을 읽으며 찍어놓았던 대로 고대 그리스 미술품들이 있는 1번 방부터 차례차례 보기 시작했다.

대영박물관 유료지도
-무료지도와 별차이없데~요

고대 그리스의 흙인형 중에는 아프리카인형과 비슷한 풍만한 형태도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조금만 넘어가도 도자기의 그림 속 선에서도 그리스인들의 자유분방함이 철철 넘쳤다.

손톱 만한 흙이나 브론즈의 동물인형, 신화 속 인물이 그려진 단추들을 보면 웬지 자꾸만 즐거워지고 미소짓게 된다.

어디선가 그리스의 공기가 흘러들어오는 듯 하다. 그들의 향연에 드디어 우리가 정식으로 초대되려나보다.


암포라엽서

고요한 고대미술실에 앉아 옷주름이 흘러내리는 거대한 조각상을 사이에 두고 지현이와 마

주보고 앉아, 유리천창에서 떨어져 내리는 빛을 따라 시선을 풀어 놓으니 참으로 오랜만에 완전히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에 빠져들 수 있었다.

입안에선 예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에니메이션 <천공의성 라퓨타>의 주제음악이 맴돌았다.

그리스인들의 인체조각 중 옷의 묘사를 왜 그리 칭찬하나 했는데 직접 와서 보니 정말 입이 안 다물어지는 실력이었다. 어떻게 돌을 가지고 투명해 보이는 옷을 묘사할 수 있었을까. 이름 모를 장인의 신기에 가까운 손길이 느껴진다.정적을 깨는 지현이의 질문

"그런데 왜 다들 목이 잘렸어? 다 있으면 훨씬 아름다울 텐데 사진 찍기도 그렇고. 신경질 나"


날아갈 듯한 여신상

건 신경질 낼 일이 아니라 슬퍼하거나 분노할 일이다

전쟁통에 침략자들에 의해서 목이 잘려나가고, 또 어떤 정복자들은 예술을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조각품뿐만 아니라 생 건물기둥까지 통째로 뽑아다가 배에 실어 자기네 나라로 가져오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상하고 망가진 채 그 후손들의 놀라운 복원기술로 다시 땜질 되어 서 있는 게 바로 이런 작품들이다.

이건 또 뭔가.

그게바로 그 유명한 판테온의 기둥이란다.

굵기가 경복궁의 가장 두꺼운 대들보의 10배가 넘으니 그 웅장했을 판테온의 규모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판테온기둥하나-기둥아래
메모하는 정현이 보이시나요



판테온 페디먼트에 있던 부서진 포세이돈-부분만 남아있어도 느껴지는 이 놀라운 덩어리감

이런 거대한 석상들을 만들던 조각가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오늘날과 달리 사회적 지위가 무척 낮았다는데, 그래도 어슴프레한 달밤이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신화 속 인물들 사이에서 술취한 제우스로 아폴론으로 행복했을 꺼다.

그리스 여신상의 포즈는 현대의 모델들의 포즈에 절대 뒤지지 않는 독특한 개성이 있다.

특히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자태는 순결하면서도 섹시했다.

고개 돌린 아프로디테-그녀 앞에서 누가 멈출 수 있었겠는가

특이한 포즈로는 <발가락의 가시를 빼는 소년> 만한 것이 없는데 그런 순간적인 정황을 어떻게 잡아낼 생각을 했는지 예술가의 관찰력이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달의 요정 사이렌을 주인으로 둔 지친 말의 표정도 너무 생생해서 측은할 정도였다.

발가락의 가시를 빼는 소년


<사자의 울음소리로 가득 찬 앗시리아 미술>

살아있는 듯한 조각품들에 취해 그리스 로마실을 돌아보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나보다. 폐관시간이 2시간 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는 미술관 전체의 반의 반도 못 돌아보았으니 욕심 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마음이 급해진다.

대표적인 군국주의 미술인 앗시리아 미술은 자유와 평화를 사랑했던 그리스 미술과는 달리 창과 활이 빠지지 않는 늠름하거나 잔인한 작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잔인한 사자사냥

특히 사자사냥연작이 있는 방은 웬 사지를 그리도 많이 잡았는지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혀 죽어 가는 2500년도 더 지난 사건 속의 사자의 고통에 내내 이마가 찌푸려질 정도로 묘사가 뛰어났다. 지현이는 옆방에도 사자사냥이 이어지자 "또 사자잡이야. 잘났어 정말" 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외면하며 옆방으로 가버렸다.

역시 힘을 숭배하는 이들은 단순한 것, 직선을 아름답게 느끼는 미의식을 지녔던 모양이다.

부조 속의 나무는 모두 다 큰 기둥에서 같은 굵기의 중간 가지가 10개정도 뭉텅이로 솟아 나와, 역시 같은 모양과 크기의 나뭇잎 몇 개로 뒤덮이게 똑같이 그렸다. 그리고 위대한 인물의 수염은 꼬불꼬불하게 나다가 다시 쭉 뻗고 다시 꼬불꼬불 하다가 쭉 뻗는 희한한 묘사를 했다.

<주마간산으로 본 이집트미술>

지현이는 예전부터 이집트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앗시리아 방들까지 돌아보고 나니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그리스미술을 너무 오래 봤어" 2층으로 오르는 지현이의 발걸음이 더 빨라진다."난 이대로 나가도 후회 없어. 너무 좋았잖아"

정말 힘들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사람들에 떠밀려 다닐 거라는 예상과 달리 차분하게 푹 빠져서 본 그리스 로마실에서 보낸 시간 때문에 나는 차라리 이 기분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냥 나가고도 싶었다.

사람들이 왜이리 적나 했더니 다들 2층에 올라와 있었던 모양이다. 대영박물관이 자랑하는 컬렉션인 만큼 이집트실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영화 미이라에서 보았던 풍뎅이 장식도 있고(풍뎅이를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수컷만 있다고 생각하여 강한 남성의 상징으로 숭배했다고 한다),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는 않았지만 분명 진짜 미이라도 있었다.

안팎을 온통 섬세한 그림들로 채워 놓은 관도 있고 소머리장식의 하프도 있었다.그러나 밝음의 미술이었던 그리스미술과 달리 부장품에서 느껴지는 웬지 모를 서늘한 기운에 겁 많은 나는 얼른 나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공포나 괴기영화를 좋아하는 지현이는 땅속에 웅크린채 죽은 미라를 보면서

"어허 리얼하다"하며 좋아하고, 이집트 실을 보는 내내 오싹오싹했던 나는 자꾸만 부장품 가까이 나를 데려가려는 지현이를 당기며

"싫어, 기분이 참 이상해 싫다니까"를 연발하며 도망 다녔다.

좋아하던 이집트 미술품 앞에선 지현-그러나 지쳐있다


<불친절의 도를 넘은 감시원들>

한참 이집트관을 보고 있는데 웬 아저씨가 전시실의 불을 끄며 신경질 적인 표정으로 우리를 쫓아낸다. 시계를 보니 아직 4시 50분. 폐관시간까지 10분이나 남았는데 벌써 자기는 경찰복 같은 제복을 벗고 퇴근하려고 평복으로 갈아입고서 관람객들을 개 쫒듯이 몰아낸다. 대영박물관 지키는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자기네 나라를 찾아온 손님들한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쉽게 마음상하는 나는 심장이 다 벌렁벌렁 뛴다. 10분일 찍 나가래서가 아니라 그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놀란 것이다.

혹시나 해서 가지고 다니는 우황청심환을 먹을까 했지만, 이렇게 사소한 일에 맘고생 하며 다닌다면 앞으로 여행은 어떻게 다닐까 싶어 스스로 진정하며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쫓겨 나와 미술관 앞 커다란 기둥 앞에 앉아 잠시 머리를 식혔다.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온 젊은 엄마는 뭔가 좋은 일이 있는지 아기를 어르며 싱글벙글 이다. 잠시 후 엄마가 어딘가를 가리키자 아기가 왜인지 까르르 자지러진다.

곧이어 아빠인 듯한 사람이 등장하고 아기를 안아 올린다. 상황을 보니 아빠가 퇴근하는 걸 기다린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칼같이 5시. 우리를 4시 50분에 쫓아내야 자기들이 5시에 퇴근하나보다.

상황을 보니 아빠가 퇴근하는 걸 기다린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칼같이 5시. 우리를 4시 50분에 쫓아내야 자기들이 5시에 퇴근하나보다. 한국에선 어떤 부인도 5시에 회사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밤 늦은 하교길에 전철역에서 이제나 저제나 아빠를 기다리던 아이들과 엄마는 여러 번 보았다.

선진국의 올바른 노동문화라 칭찬해야할지. 아까 우리가 받은 대접이 있는 지라 곱게 봐야 할 것에도 고운시선이 안 간다.


대영박물관 앞의 정현

대영박물관 기둥 옆에서 혼자 온 이순한이라는 한국여학생을 만났다. 혼자 오면 다 좋은데 사진 찍고 싶은 순간을 많이 놓치는 게 안타깝다고 해서 함께 몇 장 찍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가까이에 런던대학이 있다고 보러간다고 해서, 이제 저녁 먹는 것말고는 특별한 일정이 없는 우리도 함께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길을 가르쳐 준 사람에게 내가 고맙다며 자꾸 고개를 숙이자, 캐나다에서 유학한 순한이가, 외국애들은 그런 모습을 참 이상하게 본다면서 그냥 고맙다고 가볍게 말만해도 된다고 가르쳐 준다. 하지만 오랜 습관을 어떻게 순식간에 고치랴. 특히 나이 많은 할머니가 길을 가르쳐 주시면 나도 모르게 허리까지 굽히게 된다. 지현이가 계속 잔소리를 해도 고쳐지지 않았다.

사실 내가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은 탓도 있다. 고개 숙인 인사는 친절을 베푼 사람들한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된다. 우습게 보는 외국 사람이 있더라도 계속 내 방식대로 인사하며 다니고 싶다.

런던대학은 우리네 캠퍼스 같은 넓은 곳이 아니었다. 달랑 건물 몇개와 잔디밭 뿐 이었다. 의외로 동양인 유학생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런던대학 오른쪽에 오래된 성당 같은 건물이 있어 뭔가 하고 들어가 보려고 살폈더니, 옛 건물을 개조한 아파트였다. 우리 같으면 다 밀어버리고 용적률 높게 새 건물을 지었을 텐데. 법으로 막고 있는 건지 스스로들 그러는 건지 런던시내에는 빌딩보다 옛 건물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런던에서 지하철타기>

런던 지하철1구간은 길기도 하고 엄청 짧기도 하다. 그래서 지도상으로는 멀리 가더라도 방심하지 말고 지나가는 역 이름을 잘 보고 있어 야 한다.

그리고 가까운 전철역을 물을 때는 지하철 지도를 펴놓고 물어봐야 한다. 우리나라 보다 지하철 역과 역사이가 가까운 편이라서 엉뚱한 노선의 다른 역을 가르쳐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아주 바쁠 때는 꼭 두 번 이상 물어보라. 우리도 외국인에게 길을 가르쳐 주고는 한참 있다가 거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며 미안해하는 것처럼 그들도 실수는 한다. 그것도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자주.

지하철 표는 넙적하게 생겼는데 하루권 3일권 7일권등 종류가 다양해서 명칭을 잘 확인해야한다. 트래블카드는 9시 30분 이후에 이용할 수 있는데 버스도 탈 수 있다. 그리고 1부터 6Zone구분이 있는데 대개 2 Zone이면 된다.


전철표 2존 1day 트래블카드 (왼쪽) 6존 1day 트래블카드(오른쪽)
비교해보니 zone표시가 어디있는지 아시겠죠?

지하철역에서 표를 살 때는 발음에 웬만큼 자신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원하는 표의 이름과 Zone을 적어서 내미는 게 좋다. 한국식 발음은 못 알아 듣고 예를 들면 "워털루" 라는 발음은 "워~럴루~~" 이런식으로 우리나라에서 수업시간에 그렇게 발음했다가는 왕따 당하는 혀 꼬부라진 발음을 해줘야한다. 괜히 바쁜 시간에 안 되는 발음으로 우기고 있으면 직원이 답답해한다. 사려는 표 가격과 거스름돈 미리 생각하고 있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 승강장으로는 특정한 노선의 전철만 들어오는데 런던은 여러 가지 선의 전철이 한 승강장에 들어오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처럼 전철노선에 고유색이 있기는 한데, 이름은 우리처럼 1호선 2호선이 아니라 노란선은 circle line 붉은선은 central line 이런 식으로 노선 성격에 따라 붙여놓았다.

또 하나 런던 지하철노선도는 여기저기서 구할 수 있는데 전철역에서 주는 손바닥 보다 작게 접혀진 지도가 뒷면에 지명보고 쉽게 위치 찾을 수 있는 색인과 XY좌표식 표시가 되어있어 가장 편리하다.

<영국에 피클은 없다? >

점심을 샌드위치로 때우고 5시간을 계속 걸은 셈이니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파온다. 그렇다고 물가가 엄청나다는 영국에서 아무식당이나 들어가자니 맛도 믿을 수 없고 가격도 걱정된다.

그래서 여행 100배 즐기기 책에 소개된 "chelsea kitchen"을 찾아 나섰다. 지하철 노란 선인 circle 라인과 녹색라인이 모두 지나가는 sloane square역에 내려서 kings riad 98번지를 찾았다. 우선 kings road를 물어서 가라는 방향으로 왼쪽길로 쭉 따라 가는데 칙칙한 런던에 이런 거리도 있나 싶게 화려한 옷가게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반대편 길도 살피면서 5분쯤 걸었는데, 옷가게가 끝날 때쯤엔 어느새 kings road는 끝나버리고 다른 이름의 번지수가 시작되었다. 골목 깊숙한 곳에 있는 식당인가 보다 하고 반쯤 포기하고, 다시 현지인을 따라 무단횡단을 하여 반대편 길로 전철역쪽으로 되돌아오기로 했다.

오다보니 어느 식당 노천에 나이 드신 분들이 맛있게 식사를 하고 계셔서 우리도 여기서 먹을 수 있나하고 간판을 앗 허름하고 조명도 없는 간판에"chelsea kitchen"이라고 써 있는 게 아닌가. 큰길가에 있기는 하지만 멀리서는 잘 안보이게 생겼다. 내부는 소박하고 여행책자에 "싸고 맛있게"를 표방한다고 적혀있듯 조용한 고급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아니고 웨이터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피크타임에는 지하의 좌석으로 내려가거나 등받이 없는 쇼파에 앉아야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바로 그랬다. 에고 허리야)

5.5파운드짜리 세트메뉴와 3.6파운드짜리 굴라쉬를 시켜놓고 기다리며 글쓰고 있는데, 음식 맛은 방금 나온 야채가 성글성글 들어간 붉은빛 도는 스프를 맛보고 지현이가

"음,익숙한 맛이야."하는 걸로 봐서 괜찮은 모양이다.

드디어 본 메뉴가 나왔다. 세트메뉴는 써있기는 soup+stake+mushroompie or jam pudding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stake 가 아니라 굴라쉬와 비슷한 맛의 소스로 양념된 듬성듬성 썰린 고기덩어리가 나온다.

그 말로만 듣던 굴라쉬라는 것은(여기는 헝가리가 아니니 정통 굴라쉬 인지는 확인할 바 없지만) 쌀밥 위에 정말 큼직하고 두툼한 고기 덩어리들과 양파 등을 매콤새콤하게 끓여서 덮은 덮밥형식의 음식인데 옆에 감자튀김과 야채가 함께 나왔다. 양도 많고(물론 식성 약간 좋은 여성기준) 맛은 한국인 입맛에 맞아 며칠동안 타이항공의 느끼한 기내식에 질린 우리들의 뱃속을 흐뭇하게 했다.

지현이가 먹는 동안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글을 쓰고 있다가 굴라쉬도 한참 관찰한 다음에 비로소 포크를 들자 문가인 옆좌석에 앉아있던 지배인쯤 되어보이는 아저씨는 내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았다. 한입 먹어본 내 표정은 '음 괜찮군' 하는 표정이었으니 안심하고 다시 신문을 볼 수 있겠지. 아니었다. 내가 접시에 담긴 것을 골고루 하나씩 먹어보고 지현이 것까지 먹어볼 때까지 눈을 떼지 않는 거다. 아 어떻게 하겠는가. 맘약한 나는 약간의 오버를 섞어서 맛있다는 것을 온 얼굴로 표현하며 식사를 했다.

정말 굴라쉬도 맛있고 세트메뉴에 나오는 mushroom pie도 맛있다. 지현이도 처음에 자기가 기대한 스테이크가 나오지 않아 실망했지만 살코기가 엄마의 장조림고기 비슷하다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유럽 쌀은 누구 말대로 불면 날아갈 것 같아 진짜 불어봤는데 내 입김이 약했는지 날아가진 않고, 포크로 잘못 치면 튕겨 나가기는 했다. 물은 듣던 대로 주문해야 했는데 아뿔싸 주의를 요하던 gas물이 나왔다. 못 먹고 버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설탕 뺀 사이다의 씁쓰름한 맛이란.....

그런데 식사 중반쯤 되자 타이항공 음식보다는 개운했지만 김치에 길들여진 우리에게는 뭔가 개운한 것이 필요했다. 피클이 혹시 없을까 하여 웨이터를 불러

"pickle please"를 열심히 외쳤는데 남, 여 웨이터 모두 그게 무슨 소리여?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오이가 뭐더라??? 당황하니 중학교 1학년단어도 생각이 안난다. 급히 한영사전을 뒤지니 cucumber가 나오는데 이번엔 마음이 급하니 발음이 안나온다"큐-쿰 아니 컴-........"도대체 왜 이러는 지. 웨이터 하나가 알아들은 표정을 짓고 주방에 갔는데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피클은 못 얻어먹었다.

나중에 슈퍼에서 보니 다양한 채소로 피클을 담아두었는데 피클 병에 적힌 것을 보니 오이피클은 pickled cucumber,양파피클은 pickled unions 하는 식으로 재료이름을 붙여서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콩글리쉬로

"절인 거 절인 거"하고 있던 샘이니 이거 창피해서 원.

<워털루하우스로 돌아오는 길>

safe way라는 식당 앞의 슈퍼에서 물가조사를 하고 오늘과 같이 배고픈 상태로 돌아다니지 않게 쵸컬릿(75펜스=1320원)을 샀다. 지현이가 먹어보고 싶었다는 쵸코파이의 하얀 부분만 모아놓은 것 같은 머쉬멜로우 덩어리도 샀는데, 나는 자꾸 고스트버스터에 나오는 머쉬멜로우유령이 떠올라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하철역에서는 흑인소녀들이 검표원 아저씨와 요금시비가 붙었는데 양쪽 다 만만치 않다. 아마도 그 복잡한 zone이 문제인 것 같은데, 우리같이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덤터기 벌금을 낼 것 같다. 앞으로 주의해야겠다.

동네 슈퍼에서 2차 물가조사를 했다. 아까 시내슈퍼는 우리나라 대형슈퍼와 별 다를게 없어서 재미없었는데 아랍인이 경영하는 동네슈퍼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불량식품인 통에 담긴 젤리까지 있어서 구경하기는 더 좋았다. 가격은 물론 동네슈퍼가 더 쌌다. 우유(59p=1000원)와 오렌지주스 큰 것(99p=1700원), 쵸코칩과자(99p)를 사고 절대 안 된다는 지현이를 졸라 5펜스(85원)짜리 기다란 공룡 젤리를 하나 입에 물었다. 한입 준다는 데도 지현이는 끄떡을 안 한다. 젤리표면에 발라진 것이 설탕물만이 아닌 듯 자꾸 짜고 신맛이 난다. 여기 애들은 이런 맛을 좋아하나.

버튼을 눌러야 파란불로 바뀌는 건널목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아까는 낮이라 다니는 사람이 많아 몰랐는데 밤이라서 우리가 누르지 않으면 파란불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의 차들은 서행하는 편이고 사람을 우선시 하는 경향이 있어서 인지 도심이 아니면 무단횡단이 보편화 된 것 같다.

5 영국 둘째날-꽉 채운 런던에서의 하루

<고요한 런던의 새벽공기><아직도 헤매는 전철표사기>

<또 특별전에 발목잡힌 네셔널 겔러리><트라팔가광장과 제임스 파크><런던의 피자헛>

<벼룩시장 찾아 허위허위><달리는 버스 타기><피자헛과 오페라의 유령>


<고요한 런던의 새벽공기>

어제 이것저것 정리하다가 1시 반에야 잠이 들었는데 이상하게 새벽 5시 반에 눈이 떠졌다.

더 신기한 건 내가 눈뜨고 누워있는데 옆에서 지영이가 "아 배아퍼"하며 잠을 깨니, 저쪽에서 혜진언니가 "아직도?"하며 기척을 하고, 평소엔 늦게 자면 12시가 되어야 겨우 일어나는 지현이까지 "응가 안 해서 그런 거 아냐?"하며 우리를 웃기며 동시에 깨어나는 거였다.

여행지라서 긴장을 해서 그런 건지 선잠들을 자서 그랬는지. 어제 저녁에 모두 색깔만 다르고 똑같이 생긴 등산 모자를 가지고 온 것에 놀란 데 이어 두 번째로 놀랐다.

우린 혹 전생에 네 마리의 돌고래 자매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전쟁기념관 앞의 큰 나무


전쟁박물관앞 지현


갑자기 노크소리가 나서 문을 빼꼼이 열어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영호가 부시시한 얼굴로 고개를 불쑥 내밀고

"산책들 안갈래요"하는게 아닌가.

다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아침공기를 마시러 나섰다. 민박집 근처에 미술관 같은 건물이 보여 들어가 보았더니 기다란 대포가 정면에 쭉 뻗은 전쟁 박물관(imperial war museum)이었는데 그 부속공원 꽃밭이 잘 가꿔져 있었다.

공원 안에 큰 나무가 있어 그 아래서 체조를 하며 기를 느껴보려 했는데 별 느낌이 없어 실망했다. 영국은 나무도 영어만 알아듣나.

박물관 옆에는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밥나무들이 쭉 심어져 있었다. 아직 어린데도 굵직한 둥치가 묘한 매력을 주는 나무였다.

어떤 아주머니가 다리하나가 없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셨다. 교통사고로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참 안쓰러웠다. 우리가 몇 번 쓰다듬어 줬더니 신발을 핥고 난리다. 샌들을 신었던 나는 양말이 흠뻑 젖고 말았다.


바오밥나무밑의 정현

공원을 나서서는 뒷길로 조용한 런던주택가의 아침 정경을 즐겼다. 연립주택들이 밀집한 곳이었는데 길가에 주차된 차들은 거의 다 티코보다도 작은 차들이었다. 종류도 다양하고. 우리는 웬만하면 다들 중형차로 바꾸고 차 크기로 자존심 세우는 광고도 많은데, 각자 분수에 맞는 차를 사서, 애지중지 오래 타는 그들의 검약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다.


작은 녹색 차 옆의 정현


만화가 그려진 차앞의 지현과 지영


<아직도 헤매는 전철표사기>

민박집에서 닭국물에 맛있게 아침을 먹고 네셔널 겔러리가 있는 피카델리 역으로 향했다.

아침에 전철역에서 weekend travel ticket을 사려다가 불친절한 흑인 표 파는 아저씨와 말이 잘 안통해서 그냥 하루권을 사고 말았다. 종이에 적어오지 않은 게 실수였다. 돈을 맡은 지현이는 거스름돈 얼마 받을 지를 늘 생각하고 내라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무조건 큰돈부터 불쑥 내밀고, 돌아서서 잔돈을 계산하는 행태를 계속 보여서 나의 잔소리를 듣더니, 드디어 오늘 아침에는 원하는 표도 못산 데다가, 한참을 계산해보더니 잘못 받았다고 가서 한 번 말해본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보는 앞에서 잘못 받은 것 따지기도 어려운데 뒤돌아서서 한참 있다가 온 사람을 누가 믿겠는가.

속상해서 불끈 쥔 주먹을 펴며 포기하고 그냥 전철을 타려는데

"앗, 여기있다!"

못 받은 줄 알았던 큰 단위 동전은 처음부터 지현이 주먹 속에 있었던거다. 아, 허탈해. 괜히 아침부터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다 아프다.


<또 특별전에 발목잡힌 내셔널 겔러리>

피카딜리역에 9시 50분에 도착했는데도 10시 개관인 네셔널 겔러리앞에는 줄이 길다.

일단은 오늘 오후에 뮤지컬<the phantom of the opera>를 보러 올 her majesty's 극장을 찾아 한국 여행사에서 해준 예매가 잘 되어 있나를 확인하고 다시 네셔널 겔러리로 향했다.

건물 밖에 줄서있던 사람들은 벌써 들어가고 이젠 건물 안에만 줄이 이어져 있다. 줄서서 10분쯤 있다보니, 2층으로 그냥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다.

1뭔가 싶어 분위기를 파악해 보니 우리가 줄 선 것은 또 유료인 특별전이었다. 예수특별전(seeing salvatino - the image of christ)이라고 그림 속의 예수의 모습들만 모아놓은 전시라서 그렇게 나이 드신 외국 관광객들이 아침부터 와서 줄을 섰나보다.

종교가 없는 우리는 별 관심 없는 분야이긴 하지만 유럽미술에서 종교화가 차지하는 비중을 알기에, 또 줄 서있던 시간도 아깝고 하여 한 번 기대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30분이나 줄서서 들어간 지하의 특별전은 너무 사람이 많아서 떠밀려 다니기에 바빴고, 포스터의 달리 그림과, 고문 후의 예수를 그린 벨라스케스의 그림 말고는 특별히 인상적인 작품도 없었다.

괜히 지쳐서 투덜대며 상설 전시 그림들을 보러 올라갔다.


예수특별전 포스터-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1260년부터 1510년 사이에 그려진 그림들이 있는 세인트베리 관에는 주로 마리아와 아기예수와 같은 성서와 관련된 인물과 사건의 그림들로 가득했다. 지현이는 방 하나를 보더니 종교화는 지겹다고 현대작품들이 있는 동관 east wing부터 보겠다고 했고, 나는 시대 순으로 세인트버리관 saintbury wing부터 보고 1시에 만나기로 했다.

500년도 더 지난 중세의 그림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당시를 표현하고 있는 세인트버리관에서 우첼로의 만화적 그림과 라파엘로 그림의 밝은 색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초상화들에서 느껴지는 옛 사람들의 다양한 성격과 영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한스 홀바인 elder <jorg fischer부인의 초상>1512
(뭔헨 쿤스뮤지엄에서 잠시빌림

마치 한사람 한사람과 찻잔을 들고 가까이 마주보고 앉았다가 아쉽게 일어나 듯 수백년 전 지구 반대편에 살던 사람들과 눈에서 눈으로 교감하는 기분은 참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여태까지 초상화는 몇몇 작품 빼고는 "돈 많은 사람들을 주로 그린 지루한 그림" 쯤으로 여겼는데, 이름 없는 작가의 초상화부터 유명한 초상화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내면을 그렇게 짧은 순간에 만나보는 경험은 참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쳐다보기 민망할 정도로 화면 밖을 응시하는 모로니의 초상화.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수도승은 무슨 내용이기에 저런 표정인지.

다양한 표정만큼이나 다채로운 영혼을 가진 듯 보이는 여인들의 초상.

모자에 앉은 파리까지 표현한 초상화는 세밀하게 그렸다는 것을 자랑하려 함일까? 모델을 두고두고 모독하려함일까?

초상화들을 보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들로 미술관 마루를 둥실 떠다니듯 누비고 다녔다.


얀 반 아이크<붉은 터번을 쓴 남자>1433

마리아와 아기예수의 그림이 가장 많았는데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마리아의 얼굴이 아닌 좀더 어리거나 나이 들거나 화려하거나 소박하거나 한 다양한 마리아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하긴 화가들은 그 시대의 어머니 상을 마리아에 투영하고자 했을 테니까 그렇게 다양한 것도 생각해보니 당연하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 걸려있는 마리아 상이 르네상스식 마리아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 보면 현대의 교회미술가들을 게으르다고 해야할까 창조력이 부족하다고 해야할까.


마사초,<마돈나와 예수>1426

세인트베리관을 다 돌아보고, 다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라파엘로를 보니 왜 수많은 그 시대 작가들 중에서도 그들을 대가중의 대가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전체적으로는 어두운 느낌이 들지만 빛을 받는 부분의 표현을 강조하면서도, 그 경계가 어색하지 않고 부드럽게 느껴지며, 그의 그림 속의 인물들의 얼굴에는 고뇌와 고난을 겪어낸 자들의 미소가 들어있다.

이에 비해 밝음과 평화로움이 돋보이는 라파엘로의 인물들은 그 전까지의 그림들에서 마치 하나의 장막을 걷어놓은 것 같은 편안함을 준다.


다빈치 <암굴의 성모>1508

본격적으로 르네상스미슬이 모여있는 서관에는 유명한 브론지노의 <비너스와 큐피트의 알레고리>가 있었다.

이주헌의 책에서 읽은 그림의 숨은 뜻을 확인해 보려고 그림을 꼼꼼히 살피려는데 그림이 생각보다 너무 크고 (가로116cm 세로140cm)생생해서 자꾸 낯이 뜨거워진다.

황금사과를 손에든 것은 비너스가 맞고 그녀를 몸을 배배 꼰 자세로 안고 있는 것은 날개와 화살로 보아 큐피트가 맞는 것 같은데, 장미꽃을 던지는 아기는 또 무어고 뒷 배경인 푸른 천을 벗겨 내려는 심술궂은 할아범은 또 무언가. 이 와중에 무표정도 표정인양 인어 같은 몸통과 뱀의 꼬리를 하고 그림 속으로 고개를 들이민 소녀는 또 뭔지.

각각 어리석은 쾌락과 시간과 속임의 상징이라는데, 그래서 이 그림의 주제는 어리석은 쾌락의 추구를 훈계하는 것이라는데.

내 눈에는 그저 그저 예쁜 색과 살아있는 듯한 표현만 눈에 들어온다.


브론지노 <비너스와 큐피트의 알레고리>1540-50

에라스무스의 초상 등 한스 홀바인의 그림은 참 묘사가 뛰어나다. 소매의 밍크털 하나 하나까지 자세히 그려내다니

단체로 왔는지 의자에 엎드려 자기가 맘에 드는 그림 앞에서 연필로 그림 모사하는 초등학생의 모습이 참 진지해 보였다.


한스 홀바인younger<대사들>153

사실 내가 그림을 좋아하게 된 것도 중학교 때 방학마다 숙제로 미술관 관람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런데 단 하나 아쉬운 것은, 그때는 왜 그냥 팜플릿을 내라고만 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렇게 하나만 골라서 그려 오거나 감상문을 써오라고 해도 좋았을 것을.

하긴 요즘도 인사동에 가면 주말에는 화랑 입구마다 팜플릿을 달라는 아이들로 붐빈다. 그렇게 라도 그림에 익숙해지는 것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지현이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 반도 다 못 봤다.

급히 보아도 터너의 그림 속 해는 정말로 뜨고 지는 듯 보였다.


터너 <전함테르메르호>1839


앵그르 <마담무아테시에>1856


렘브란트 <목욕하는 여인>1654

북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그림은 너무 급히 보아서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현대 작품들이 있는 동관은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만나기로 한 로비에 잠깐 앉아있으니 지현이가 나타난다. 자기는 동관만 자세히 보고 나머지는 보고 싶은 그림만 골라서 봤단다.

렘브란트는 정말 좋았다면서 시간이 남아서 아트샵도 봤는데 별 게 없다고 한다. 시간을 좀 더 달라니까 동관에는 별 볼게 없단다. 고흐의 해바라기도 가짜고. 볼 게 없다는 말 믿어도 될까.

한국에 돌아와서 지현이는 이렇게 말했다.

"난 거기서 좋은 거 많이 봤는데 넌 못 봤지"


<트라팔가광장과 제임스 파크>

네셔널 겔러리 바로 앞이 트라팔가광장이다. 넬슨제독의 트라팔가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50m의 기념비 아래 많은 관광객들과 젊은이들이 모여 쉬고 있었다. 분수대 옆의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비둘기들과 거리의 초상화가들이 넘치고, 아이스크림 장수는 기본이다.

넓고 넓어라. 서울에도 이렇게 넓은 광장이 도심에 있었으면 숨통이 좀 트이련만. 땅만 생기면 빌딩 아니면 아파트가 들어서니 이런 공공을 위한 공간이 생길 리가 있나. 있던 여의도 광장도 애매해진 판인데. 독지가들은 대학에다 몇억씩 장학금만 기부할게 아니라 공원이나 광장하나 만들 생각은 왜 못할까.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두고두고 혜택을 받을텐데.

넬슨기념비 앞의 지현-너무 높아서 뒤로 가도 가도 안 잡힌다.

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깊고 장중한 소리를 자랑하는 큰 종이 달려있다는'big ben'이라는 시계탑이 있는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빅벤앞의 정현

아침부터 걷기만 했더니 배가고프다. 길을 건너 제임스공원에 가서 좀 쉬기로 했다. 햇살은 따가운데 공원은 어쩌면 이리 넓은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이 공원보다 더 큰 하이드 공원이나 리젠드 공원은 그럼 얼마나 크다는 건지 상상이 안 된다. 공원 안에 커다란 강이 흐르는 듯 한데 알고 보니 연못이란다.

오리와 이름 모를 백조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유유히 노니는 풍경은 참 평화로웠다.

제임스파크의 비둘기화 한 오리들

공원 안에 오두막 같은 야외 음식점이 있어서 가격을 보니 만만치 않아서, 그냥 걷다가 노점의 1.5파운드(2650원)짜리 아이스크림과 2.5프랑(4420원)짜리 핫도그를 한 개씩만 사서 반씩 나눠먹고 때우기로 했다. 공원이라서 그런지영국의 비싼 물가가 실감났다

제임스파크 안에 있는 호수-공원이 얼마나 큰지 아시겠죠

1시간쯤 공원에서 쉬다가 다시 런던관광에 나섰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쪽으로 나와 사원 앞 잔디밭에서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했다. 그런데 사원건물이 너무 커서 뒤로 서너 번을 다시 물러나 찍어야 했다. 외국에 나오니 그림도 그렇고 건물도 그렇고 규모 면에서 우리를 압도하는 것 같다.

한쪽에 커다란 돌 벤치가 있어서 가보니 바로 템즈 강이 보이는 강변이었다. 독서를 하는 대학생도 있었고 겹쳐 앉은 연인도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뻘쭘하게 있다가 벼룩시장을 구경하기로 하고 얼른 일어섰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의 지현

<벼룩시장찾아 허위허위>

우리가 산 전철 트래블패스는 버스도 맘대로 탈 수 있는 표이므로, 이번에는 한번 버스로 이동하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공항에서 구해온 버스노선도를 뚫어지게 바라본 결과 12번 버스를 타면 벼룩시장이 있다는 notting hill gate전철역까지 한번에 간다는 결론을 얻었다. 빅벤 옆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비싸 보이는 사설 투어버스는 많이 오는데 12번 버스는 영 오지 않는다. 그나마 한 대 온 버스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세우지 않았더니 한참 뒤에 뛰어오던 할머니 앞에 서서 그 할머니만 태우고 간다.

다시 기다려 다음 버스를 세워서 타고 한눈으로는 지도를 확인하고 한눈으로는 경치를 구경하며 반쯤은 잘 온 것 같은데, 갑자기 다 내리는 분위기다. 역시 작은 노선도 만으로는 정확한 노선파악을 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우물 본 김에 쉬어간다고 이곳이 옥스퍼드스트리트라는 위치만 일단 파악하고 슈퍼에 들려 아까부터 꼬르륵거리던 배에 뭘 좀 넣어야겠다.

버스정류장 앞 슈퍼에서 요구르트 4개(1.55파운드=2740원)와 바나나우유 큰걸(61펜스=1037원)사서 노팅힐에 간다는 94번 버스를 기다리며 둘이서 거의 다 먹었다. 밥을 못 먹은 데다 여행지라서 계속 걸어서 그런지 마셔도 마셔도 배가고픈 것 같다.

옥스퍼드거리는 쇼핑가인 모양이다. 94번 버스로 한참을 가도 옷이며 구둣가게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옥스퍼드거리가 끝나니 이번에는 옆으로 하이드 파크가 펼쳐진다. 세상에 이렇게 넓은 공원이 도시 한복판에 있다니. 차로 몇 정거장을 달리고 있는데도 잔디밭이 계속이다. 녹색의 공원이 끝나면 딱 내려야 하는데 너무 안 끝나니 불안해진다. 이러다가 지나치면 안 되는데. 가뜩이나 내리는 벨 누르는 사람도 없고 해서 이제쯤 끝나겠지 싶은 곳에서 그냥 내렸다.

내려서 멋진 영국 여성에게 길을 물었더니 친절한 답변이 돌아온다. 여기서 한참 걸어야 한다고. 그리고 벼룩시장 문닫을 시간이 다 되었다고.

아차 그 생각을 못했네. 지금이 5시니까. 종종걸음으로 가면 볼 수 있겠다 싶어 봉지를 든 사람들이 오는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는 골동품상점들과 제과점 문방구 등이 있다.

야채로 만든 차 과일 차 등 다양한 각국 차tea만 모아서 파는 가게도 있고, 어디서 흘러들어 왔는지 모를 옷들을 파는 옷가게도 있다.

포크를 이리저리 휘어서 모빌처럼 만들어놓고 좌판 가득 내놓고 파는 사람도 있어 사진을 한 장 찍었더니 옆 좌판 사람들이 부러워한다.

벼룩시장의 포크예술가.

자 드디어 벼룩시장에 도착했는데, 어라, 파장 분위기다. 급한 마음에 쭉쭉 길을 따라 내려가 보는데, 몇몇 느긋한 장사꾼들은 그대로 좌판을 벌려놓고 있지만, 벌써 자리를 걷고 떠난 주인들도 꽤 보인다. 어제 대영 박물관에 이어 두 번째로 쫓겨나는 분위기다. 알고 보니 금요일까지는 아침부터 6시경까지 하는데 토요일은 원래 1시 30분이면 파장이란다. 일요일은 쉬고.

그래도 장사꾼들은 마지막 손님까지 잡으려 하는 법. 35펜스(595원)짜리 호박하고,연꽃봉우리로 보이는 야채를 샀다. 연꽃 봉우리는 이우일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인데, 도대체 뭐 길래 그렇게 그림까지 자세히 그리며, 연꽃 받침의 특정부위가 묘한 맛이라고강조 하는지 너무 궁금했다. 민박집에 가서 삶아 먹어 봐야지.

<달리는 버스타기>

버스노선도-길따라 검은 숫자가 버스길을 표시

야채트럭들이 끝나니 벼룩시장도 끝이 났다.

이제 뮤지컬을 보러 피카디리까지 돌아가야 하는데 몇 번 버스를 타나. 정류장에는 동네 할머니들 뿐이다. 그 중 한 분을 잡고 물어보니 거기계신 모든 분들에게 물어봐 주신다.

그분들이 태워주시는 대로 몇 번인지도 모르고 탔다. 중간에 갈아타야 했으므로 edgware roads정류장에서 내려서 정류장에 붙은 자세한 노선도를 보니 23번 버스를 타면 된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버스 안내도가 자세히 붙어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앗 그런데 23번 버스가 우리 앞에서 출발하고 있다. 우리가 못타서 안타까운 표정을 짓자 버스 뒤의 검표원이 "All right" 하면서 타라는 표시를 한다.

어제 현지 젊은이들이 달리는 버스에 뛰어 타는 걸보고 "저럴 수가"했던 우리는 당황해서 서로를 마주봤지만 어느새 지현이는 버스에 타고있고, 나도 따라 버스 뒷문 옆의 봉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All right"은 아닌 것이. 휴, 오페라 때문에 입은 치마 찢어질 뻔했다.

런던의 거리는 온통 빨간 버스이다. 자가용이나 택시도 거의 안 보인다. 10대에 1대 꼴 정도. 그래서 인지 한낮에는 교통체증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면 시민들은 뭘 타고 다니나? 버스나 전철을 그렇게 많이 이용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런던의 거리는 온통 빨간 버스이다. 자가용이나 택시도 거의 안보인다. 10대에 1대꼴 정도. 그래서 인지 한낮에는 교통체증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면 시민들은 뭘 타고 다니나? 버스나 전철을 그렇게 많이 이용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사진 이층 버스 앞 지현)

<런던의 피자헛과 오페라의 유령>

피카디리 역까지 잘 찾아왔다.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뮤지컬을 볼 때까지 조금 시간이 남아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한끼를 부실하게 먹으니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진 것이 느껴진다. 지현이는 한 끼만 안 먹어도 현기증이 나는 이상한 체질인데다가(비축해둔 지방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내가 허리가 아프다고 아까 산 감자며, 호박이며 혼자 짊어지고 다니느라 입이 한자는 나와 있어서, 저녁은 지현이가 좋아하는 걸로 사먹기로 했다.

"앗, 피자헛이다. 가격도 괜찮아" 한국에서도 피자면 환장을 하는 지현의 눈빛이 빛난다. 배불리 먹고 남긴 세 쪽은 싸달라고 할 정도로 큰 수퍼 슈프림피자(10.55파운드)와 콜라 두 잔(2.9파운드)을 맛있게 먹었다.

단 지현이는 thin 피자를 시켰는데 그게 우리나라처럼 두껍지가 않고 pan처럼 얇다고 약간 불만이다. 나는 thin하고 pan이 무슨 차인지 아직도 모르겠는데.

<뮤지컬 아는 만큼 보인다>

지현이가 전부터 꼭 보고 싶다고 했던 팬텀 어브 오페라(THE PHANTOM OF THE OPERA)는, 원래 오래된 프랑스 소설을 원작으로 근래에 연출자이자 작곡인 엔드류 웨버가 부인이었던 사라브라이트만을 주인공으로 생각해 두고 쓴 뮤지컬이다.

오페라라고 발표하려다가 정통 오페라와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에 비난이 두려워 뮤지컬로 발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라브라이트만의 모습과 맑은 음성은 이제 이 극장에서 들을 수 없다. 둘의 이혼과 함께 사라는 떠나고 다른 배우들이 무대를 채웠기 때문이다.

사라브라이트만의 공연모습(CD속에 있는 그림)

나는 영국 하면 뮤지컬 "CATS"나 "레미제라블" 생각은 했는데 "팬텀어브오페라"는 몰랐었다. 그런데 지현이가 여행준비를 하면서 이 뮤지컬에 푹 빠져서, 여행 막판에는 아예 나눠 맡은 여행준비도 제껴 두고, 영어대본을 독파하고 사라브라이트만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외우기까지 했다. 내용을 좀 얘기해 달랬더니 나에게도 대본을 던져주고 읽고 가야 비싼 입장료가 안 아깝다나.

나도 읽고 싶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을 맡았던 나는 할수록 여행준비 할게 늘어나서 손도 못 대고 있다가 여행 떠나기 얼마전 EBS교육방송에서 아주 옛날 흑백무성영화를 해주길래 힘들게 보고(대사 대신 한 장면 지나가면 영어 자막이 나왔다.)내용을 파악했다.

유명한 오페라 작곡자가 사고로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오페라극장(지금도 파리에 가면 이 극장이 있다.)지하에 숨어서 유령이 되었다는 소문이 들린다. 언젠가부터 극장에는 사고가 이어지고 유령은 자신이 작곡한 오페라를 극장매니저에게 보내서 조연에 불과한 크리스틴에게 주역을 맡기라고 협박한다.

펜텀어브오페라 포스터

이름 모를 벽 속의 스승에게서 노래수업을 받은 크리스틴은 드디어 주인공이 되지만, 이 모습을 보고 나타난 어릴 적 친구 라울과 오페라의 유령 사이에서 갈등한다. 분노한 오페라의 유령은 그녀를 납치하고 라울은 그녀를 찾아 나서는데......

그흥미진진한 스토리와 함께 아름다운 음악으로 유명한 이 뮤지컬을 보러 세계각국의 관광객들이 허 마제스티 극장에 몰려든다.

허마제스티극장

그런데 대 극장일 줄 알았는데, 우리네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과는 달리 좌석도 협소한 중간 크기의 옛 건물이었다. 그래서 신경쓰지 않으면 무심코 그 앞을 그냥 지나치기 쉽다. 러나 그리 넓지 않은 무대에서 어쩌면 그렇게 역동적인 무대전환을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희들이 뛰어다니던 마루가 금새 배가 다니는 지하 수로로 변하고 강물에서 반딧불 같은 신비로운 불빛이 새어나오는가 했더니, 어느새 그 불빛들은 무수한 촛대 위의 촛불로 바뀌어 무대를 밝혔다.

극중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샹들리에는 가는 철끈에 매달려 주인공을 태운 채 상하좌우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1막 끝에는 극중 무대와 연결된 1층 관객들 머리위로 추락하기까지 한다.

주인공인 팬텀의 애끓는 노래도 감동을 주지만, 개개인이 독특한 개성을 지닌 조연들의 노래도 듣는 이들의 귀를 즐겁게 한다.

펜텀어브오페라의 팜플릿

단 사라의 그늘이 너무 커서인지, 여주인공의 노래나 카리스마가 너무 약해서 전체적인 집중도는 떨어졌다.

이번 여행의 징크스도 이날 생겼다. 이날을 위해 지현이는 종로바닥을 뒤져 자랑스럽게 쌍안경을 사왔는데 아침에 허둥대다가 놓고 오고 말았다. 뭐든 필요하면 없다. 이게 우리여행의 징크스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좌석마다 앞에 2파운드를 넣으면 쓸 수 있는 플라스틱 쌍안경이 있었는데, 우리가 동전을 넣으니 돈만 먹고 뽑히지가 않아서 옆자리의 프랑스 할아버지가 힘으로 빼내주셨다.

그분 내외는 팜플릿도 서로 읽어주고 아주 다정해 보였는데, 고마워서 1막 쉬는 시간에 콜라를 드리려고 했더니 화장실 가고 싶을까봐 사양하신단다. 나이 들어서 여행하는 것에도 고충은 있구나 싶었다. 행복한 노년을 생각한다면 젊어서부터 건강을 지키며 생활해야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앞자리의 다른 프랑스 단체 관광객들 중 한 아주머니가 주인공의 키스신을 보고 나서 나도 키스하고싶다고 하자 동행인 파바로티 닮은 어떤 아저씨가 기꺼이 키스를 해주신다.

지현이는 대사와 노래가 다 귀에 들어온다며 너무 좋아서 붕 떠있다. 나는 환상적인 무대장치에 취해있고, 아름다운 밤이다.

펜텀어브오페라의 한장면


***오페라의 유령 원본 대본을 읽고 가면 너무 귀에 잘 들어와요 . [대본 받기] 클릭하세요.***

6 영국셋째날-아! 연꽃이여

<earl's court 찾아가는 길><웬지 산만한 빅토리아엘버트 뮤지엄>

<테이트겔러리가는 길><슬픔이 선연한 그림들이 숨어있는 테이트겔러리>


<earl's court 찾아가는 길>


오늘은 먼저 내일 아침 일찍 모여야할 다국적 배낭여행의 집합장소인 earl's court의 top deck 사무실을 확인해 놓고 미술관들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잠시 여기가 외국이라는 것을 잊었었다. 한국과 비슷한 지하철의 진동과 광고들 때문이었나 보다. 어느 것에 대해서나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나면 타성이 생기게 되나보다.

earl's court 전철역은 참 큰 역이었다. 검표 원에게 사무소를 물었더니 반대편 입구로 가라고 해서 한참을 돌아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역의 사무원인 듯 한 흑인아저씨가 분명히 저쪽이라며 우리가 온 쪽을 가리킨다. 다시 돌아가서 이번에는 우리가 받아온 예약 표를 보여주며 다시 물으니 아까 그 검표 원이 미안하다며 우리가 earl's court를 찾는 줄 알았다나. 우리발음이 top deck과 earl's court도 구별 못 할 정도로 안 좋나. 실망이다.

역 밖으로 나오니 커다란 역과는 달리 옆 앞의 길은 아담한 소로다. 지도를 보고 쉽게 사무실을 확인한 뒤 점심을 먹으러 역 앞에 있는 ben jus 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현지인들이 많이 가는 것 같아서 들어갔는데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today special이 가장 저렴해 보여서 그중 sirloin steak와 lamb chops을 시켰다. 신선한 삶은 콩과 감자칩이 함께 나오는데 나는 맛있게 먹는데 지현이는 자꾸

"나는 맛없는 걸 먹으면 화가나" 하며 바꿔 먹자고 한다. 지현이가 먹던 것을 먹어보니 세상에, 일부러 아무런 조미도 안하고 굽기만 한 채로 요리해서, 자기 입맛대로 소금이나 후추, 조미식초를 뿌려서 먹으라는 건데, 여태까지 밍밍하게 그냥 먹고는 맛없다고 투털 대고 있었다.

식사를 끝내니 12시 30분. C1이라는 버스를 타고 가까이 있는 빅토리아엘버트 뮤지엄으로 향했다.


<웬지 산만한 빅토리아엘버트 뮤지엄>

프랑스나 스페인에 비해 별로 기대를 안 했었는데 영국의 미술관들도 그 규모와 소장품의 양이 상상을 넘어섰다. 한 미술관을 일주일을 봐도 다 못 본다는 말은 보통사람에게는 좀 과정 섞인 말일지라도, 한 미술관을 하루 이틀에 다 볼 수 없다는 말은 맞다.

빅토리아엘버트 뮤지엄은 빅토리아여왕이 남편이 엘버트공의 권유로 만들게 되어서 그렇게 긴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데, 미술 공예 컬렉션으로는 세계 최대규모의 미술관으로 꼽힌다고 한다. 하긴 안에서 3번이나 길을 잃을 정도였으니.


빅토리아엘버트뮤지엄 전경


빅토리아엘버트뮤지엄 입구의
플라스틱조형물1


빅토리아엘버트뮤지엄의
입구플라스틱조형물2


들어서자마자 기괴한 조형물이 우리를 맞는다. 플라스틱 같기도 하고 비닐 같기도한 길쭉한 덩어리들을 색색가지로 얽어 높이 세워놓았다. 외계생명체 같기도 한 요상한 모양새가, 우리네 어른들이 보시면 딱 귀신 나올 것 같다고 하시게 생겼다.

옛스러운 미술관 로비 한가운데서 그런 현대적 작품이 들어설 수 있는 그네들의 예술적 관용이 부럽다. 우리의 국립박물관이나 경복궁미술관에도 이런 전시물이 입구를 장식할 수 있을까.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르누보포스터

고양이포스터

매표소를 찾아보니 여기도 어김없이 특별전이 한참이다. ART NOUVEAU 1890-1914 라는 제목으로 아르누보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기분 좋게도 학생할인이 되어서 원래 7.5파운드의 요금을 2.5파운드에 특별전까지 볼 수 있었다. 애써서 학생증을 만들어간 보람이 있었다.

아르누보란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시작된 건축, 공예, 회화등의 새로운 예술사조인데, 덩굴풀등 현실의 속의 자연의 곡선을 즐겨 사용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잠자리보석 전체


잠자리보석 부분

여기저기서 아르누보라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개념이 잘 잡히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중요 작품들을 한군데 모아놓고 보니 그들의 예술관이 조금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장식품도, 가구도 도자기도 단순한 곡선과 은은한 색으로 자연 속에서 주워온 것처럼 만들면서도 귀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었다.

특별전을 잘 보고 나오니 드넓은 이 박물관의 어디를 먼저 보아야 할지가 막막했다. 대영박물관처럼 특별히 공부를 해온 것도 아니고. 우선 유명하다는 스테인드글래스와 건축장식품들을 먼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지도를 보고도 찾아가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몇 번을 헤맨 끝에 스테인드글래스가 모여있는 곳에 도달했지만 명성만큼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이 창문들이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모두 처음 있던 성당 등의 제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면 훨씬 아름다웠을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또 하나의 유명한 컬렉션은 40번 "dress"의 방으로 유럽 복식 변천사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때를 잘 맞춰 가면 고대 조각상 옆에서 펼쳐지는 패션쇼도 볼 수 있다는데 우리가 간 날은 엽서로만 볼 수 있었다.


아르누보 스테인드글라스 엽서

6층도 넘는 이 뮤지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방은 1층의 46번 방과 50번 방이었다. 각각 "plaster casts" 와"sculpture& architecture" 라는 방의 제목대로 건물 안에 있기에는 너무 거대한 비석이나 석고 주조물들이 가득했다. 물론 모작도 있겠지만 이 많은 조각과 묘비등을 뜯어온 그리스나 로마의 자리는 얼마나 허할까 싶었다.

그 옆 47G번 방은 한국 미술실인데 삼성에서 지원해서 만들어서인지 한복과 도자기 틈에 한국의 풍물이 나오는 삼성 텔레비젼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관에 비해 너무 소장품도 적고 시시해서 우리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알리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위치도 마치 통로 한쪽을 빌려쓰는 것 같아서 자존심 상했다. 박물관끼리 소장품 교류같은 것도 있다고 들었는데 안되면 백제 금동향로 모작이라도 하나 만들어다 놨으면 좋겠다.


옛 조각상과 함께 하는 패션모델

빅토리아엘버트 뮤지엄에는 무척 많은 그림, 조각, 수공예품이 있었다. 하지만 대영박물관 처럼 그 시대를 느끼도록 잘 정리되어 전시되어있지 않고, 종류별로나 나라별로만 다닥다닥 모아놓아서 마치 뭐든 끌어 모으기 좋아하는 어린아이의 장난감 정리함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테이트겔러리가는 길>

빅토리아엘버트 뮤지엄을 나오니 2시 50분이었다. 하루에 미술관 2개 보는 건 좀 무리가 있지만, 비행기표 때문에 영국 일정이 너무 짧아진데다, 내일 단체여행을 시작해서 프랑스로 떠나는 상황에서 영국의 근 현대 미술품이 총집합 되어있는 테이트겔러리를 오늘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철역으로 급히 가는 중에도 특이한 건물은 눈에 띄는 법. 창문이 유난am히 좁고 긴 세련된 건물을 발견했다. 도서관인지 병원인지, 뭐 하는 건물인지 가보고 싶었지만 지현이는 건널목도 건너 이미 저만큼 뛰어가고 있다.


빅토리아 엘버트가는길에 있는
창이 좁은 특이한 건물


빅토리아엘버트 뮤지엄에서 제일 가까운 south kensington역에는 걸어서 지나가야하는 긴 지하터널이 있다.

그런데 그 터널에는 거리의 악사가 있어서 구슬프고 아름다운 바이올린의 선율이 온 터널 안을 울리고 있었다. 영국에 지하철이나 거리의 악사는 많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는 처음이었다. 아마 그는 수많은 지하철 역의 통로 중에서 가장 울림이 아름다운 지점을 찾아내느라 온 역사를 뒤졌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지하철역의 무용공연 포스터들과 함께 일렁이며 기춤을 추며 발걸음을 늦추었다. "또 시작이다. 뭐해 빨리 와. 시간 얼마 없어" 지현이가 옷깃을 당기고 마침 전철도 오는 바람에 동전 한 닢 못 놓고 왔지만, 나는 잠시 거리의 악사 옆에서 춤을 추며 사는 삶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한참동안 바이올린 소리의 여운에서 못 깨어나는 나에게 지현이가 던지는 소리.

"아까 그 사람 조용히 연주하다가 우리 지나가니까 더 크게 연주하더라, 그게 다 돈 버는 방법이야" 산통을 깬다.

그래도 나는 언젠가 다시 영국에 오면 꼭 이 역에 다시 와서 아름다운 음악에 젖어 지칠 때까지 춤을 추리라 다짐했다. 그때 지현이는 꼭 떼 놓고 와야지.

<슬픔이 선연한 그림들이 숨어있는 테이트겔러리>

첫날 대영박물관에서 고대미술에 취하고, 둘째날 국립미술관에서 중세 미술에 취하고, 오늘은 드디어 근현대 미술과 만나는 날이다.

pimlico역에서부터 뛰어오느라 과열된 머리속을 정리하고 우리는 1시간 반 동안 각 자 보고싶은 것을 보고 만나 홈페이지를 위한 그림엽서를 좀 사기로 했다.

1시간 반이라. 무슨 전쟁도 아니고, 이 아름다운 그림들 앞을 경보를 하며 돌아야 하다니, 한국식 배낭여행의 한계가 새삼 느껴졌다.

'여기서 하루종일 있어도 모자라 모자라'

를 입안으로 웅얼거리면서도 발걸음은 멈출 수 없는 이 비애.

한 30분은 그렇게 돌다가 "다 보려고 욕심부리려 하지 말고 반만 보고와"라는 친구의 말을 되새기며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테이트겔러리전경

터너의 그림은 참 아련한 느낌을 준다, 그에게 세상은 늘 이런 모습으로 보였는지 궁금해진다. 담배나 술 혹 이 두 친구가 항상 함께 해서 세상이 아련했던건 아닌지.

반면 러스킨의 풍경화들에서는 동양화적 선과 느낌이 보인다. 유화인데도 마치 수묵 담채화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있다.


터너의 그림

가장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것은 워터홀스의 "the lady of shalotte"였다. 주제별로 작품을 전시한 이 미술관의 <word&image>실에 있다.

물위에 뜬 배 위에 꺾어질 듯 앉아 있는 소녀의 처연한 표정이 너무도 절절한 그림이었는데, 화가는 감정을 전하는데 주가 되는 표정만 정성껏 그린 게 아니라, 풀숲에 꺾어진 풀줄기하나,

물위에 썩어 가는 꽃잎하나까지 섬세하게 엮어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서서 보다가 너무 마음에 끌려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보았다.


워터홀스 the lady of shalotte

유명한 오필리어 역시 슬픔의 아름다움을 넘치게 담은 작품이었다.

창백한 오필리어의 피부와 짙푸른 물색의 대비.

그위로 너무나 선연한 색색의 잔꽃들의 흩뿌려짐은 너무 아려서 외면할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밀레이 -오필리어

현대의 그림으로 넘어와서는 chirl ofili의 "no woman no cry"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아마 유럽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흑인여인이 주인공인 그림이었다. 중세 이전의 그림 속의 흑인은 모두 노예로만 표현되었고 그 이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다가 현대의 그림 속에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당당한 주인공으로.

커다란 화면 속의 여인은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다. 여인의 앞에는 마치 갖가지 유리구슬로 만든 듯 하기고 하고, 여인의 눈물로 만든 것 같기고 한 그물 같은 망이 가로막고 있다.

여인은 전통문양의 목걸이와 머리장식을 했는데 그 화려한 장식이 여인을 더 슬퍼 보이게 한다.

엄마를 따라온 다섯 살쯤 되어보이는 꼬마여자아이가 그림 속의 여인과 비슷한 땋은 머리를 하고 그림을 관심있게 쳐다본다.


chirl ofili "no woman no cry"

아마도 이 미술관에서 유일하게 보는 자기를 닮은 그림에 놀랐나 보다. "no woman no cry" .

이 아이의 할머니 또 그 할머니는 얼마나 울며 생을 살아 갔을까. 그림의 제목처럼 이제 이 세상에서 유리그물에 갖혀 눈물흘리는 여성이 없기를 기원해본다.

빨리그린 그림은 빨리보아도 그 느낌이 포착되는 반면 오랜시간이 걸려서 그린 옛 그림은 천천히 보아야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현대의 그림들은 우리에게 즉각적인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는 하지만 은은한 아름다움은 덜하다.

중앙홀을 따라 오른쪽방에 전시되있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보고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미술이 완전히 인간을 위한 미술일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로운 소재와 자유로운 색, 선. 인간은 드디어 그리고 싶은 것을 맘껏 그리게 되었다.


콕스- A WINDY DAY 1850

미술은 이렇게 자유로운 것인데 내가 받은 미술교육은 대부분 금지와 강요의 연속이었다. 유치원 때는 크레파스화를 그릴 때 검은 선으로 사물의 테두리를 그리면 안 된다고 했다. 또 화면에 조금이라도 흰 도화지를 남겨서도 안 된다고 했다. 미술교육인지 절약교육인지. 국민학교에 가서 수채화를 배웠을 때 꼭 연필로 선을 그리고 색칠을 해야했고 사물은 보이는 대로 똑같이 그려야만 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때까지 쭉 군사독재정권하에서 교육을 받아왔다.

심지어 고등학교때는 1년내내 미술시간마다 붓글씨만 써야한 적도 있다.

그랬으니 그림이란, 미술이란 자유로운 거라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못한 채 정물이든 풍경이든 똑같이 그리기를 못하는 나를 답답히 여기면서 학창시절을 보낸 것도 내 죄는 아니다.


템즈강변 벤취의 정현

다행히 중학교때 의욕적인 미술선생님들이 계셔서 매주 다른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미술체험을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이렇게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행운이랄까.

대학에 와서 미학오디세이라는 책을 읽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학문도 있었구나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게. 또 예술 속의 아름다움이란게 이렇게 다양한지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 때 읽었던 미학론은 톨스토이의 도덕론적 미학론일 뿐이지 그게 미학의 다가 아니었다는 것도.


템즈강변에서 보이는 웨스터민스터와 빅벤

한국의 미술교사들에게 유럽연수를 좀 보냈으면 좋겠다. 그냥 이렇게 방대한 미술관에서 다양한 작품들과 만나고 가면 적어도 아이들에게 똑같이 그려내라는 강요는 하지 않을 것 아닌가.

벌써 그러고 있나? 모를 일이다.

요즘아이들은 스케치북에 피카츄나 그려대고 있는 건 아닌지. 그건 더 무서운 독재다.

런던아이


<아! 연꽃이여>


민박집의 일행들과 페루라는 아르바이트생

민박집에 돌아와서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준비를 하고, 지현이는 저녁밥을 지었다. 그런데 중간에 땀범벅이 되어 돌아온 지현이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하는 말 "얼른 와. 밤늦게 부엌 이용하면 안된다고 눈치줘" 10시면 늦긴 늦었다.

게다가 아까 사온 연꽃까지 한쪽에서 삶노라니 부엌이 찜통이다. 먹는 연꽃은 생전 처음 보는 거라서 아직까지도 이게 맞는지 확신이 안 선다. 그리고 이우일의 여행기에 적힌 대로 삶고 있기는 한데 얼마나 삶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부엌에서 선 채로 볶은밥은 먹고, 연꽃은 들킬까봐 방으로 가져왔다. 맛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나눠먹겠는데, 알 수 없으니 일단 방으로 철수했다


처참해빈 연꽃

갑옷같이 딱딱한 껍질을 벗겨보니 연꽃이 맞기는 맞는 듯 한데, 희한한 맛이라는 꽃받침의 아랫부분은 눈치보느라 덜 익혀서 그런지 밤과 도토리의 중간 맛 정도인 것도 같고 별 맛이 없다. 그 난리를 쳐서 기대했던 맛이 안나오니 허탈해하는 지현이의 표정이란. 내가 더 미안했다.

그리고 나는 하숙집생활을 그래도 몇 년 해서 공동 화장실과 남의 집살이(?)의 눈치에 조금은 익숙한데(처음에는 많이도 울었다), 지현이는 이것저것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은가보다. 나보다 더 적응이 빠른 성격이니까 곧 익숙해 지겠지.

짐을 싸면서 지영이와 혜진언니에게 비상약과 샴푸를 조금씩 나눠 주었다. 그때는 잠잠하던 지현이가 나중에 하는 말

"그만 좀 퍼줘. 나, 무거워서 약상자하나 언니 몰래 집에 두고 왔단 말이야" 앞으로 또 어떤 고백을 듣게 되려나.


덜 익은 연꽃을 앞에 두고
허탈해하는 지현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