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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신라 왕족의 조상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산 동쪽으로 넘어온 유럽인종 중 일부가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르도스를 지나 한동안 중국 동북 지역에 살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최종적으로 평양과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들어온다." -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정형진 지음, 일빛, 2005)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천착하게 된 의문이었다. 사실일까?
과연 이 기록은 모화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과 연관시키려한 공작이었을까? 아니면 진실을 기록해 놓은 것일까? 모화사상에 젖은 공작으로 보기엔 비의 주인공이 당나라와 대결하였던 문무왕이라는 점에서 납득이 안 되고 사실이라고 보기엔 내용이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다. 천산 언저리의 흉노 일파가 동으로의 이주를 거듭해 결국 신라왕족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니….
이외에도 고깔모자, 무덤에서 발굴되는 늑대 관식, 사슴뿔 모양의 왕관, 계림 김알지 설화를 반영하는 것 같은 페르시아의 구슬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이 단순히 주변문화를 차용한 것인지 주민이동에 따른 문화의 전파인지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깨지니 위 학설은 말이 안 된다고?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도 인도 아유타국(아요디아)에서 온 아리안족 여인이니 김해 김씨와 허씨는 아리안족인가? <삼국유사> 황룡사 9층탑 조에 신라의 지장스님이 중국 유학 때 문수보살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한다. "너희 국왕은 인도의 찰리 종족 왕인데 이미 불기(記:약속)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 공공의 족속과 같지 않다.(汝國王是天竺刹利種族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바로 여기에 나온 찰리(刹利) 종족이 바로 사카족인데 바로 이들이 한 무제에게 패한 휴도왕의 '흉노'족이다. 여기서 '사카족'이란 석가모니의 세속 인연 종족인 석가족을 의미하며 이들은 애초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을 하던 스키타이인 중 사카라고 불린 사람들이 남하하여 인도에 정착한 사람들이라는 것. 이 사카족이 남하하여 인도로 들어가기도 하고 천산을 넘어 동쪽으로도 진출하였는데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종족이 바로 이들 천산 진출 사카족이라는 것. 그런데 문무왕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많으니 이에 따르면 신라 이사금 이후 마립간 대부터의 신라왕족은 이들의 후예가 된다는 것. 이것이 위 책 저자의 주장이다. 기록에 의하면 휴도왕(休屠王)은 '금인제천(金人祭天)'을 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금인'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금인이 불상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렇게 해석하면 휴도왕이 불교를 신봉하는 왕이었기에 '금인(金人)'이라 불린 불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데(<한서> 김일제전에도 휴도황이 금인제천하는 까닭에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찾은 백마사는 이 금인(金人)과 관련이 있는 절이다.
인도의 승려 가섭마등(迦葉摩騰:Kasyapa Matainga), 축법란(竺法蘭:Dharmaratna) 등이 명제의 사신 채음(蔡愔)의 간청으로 불상·경전을 흰 말에 싣고 낙양에 들어왔으므로 후대에 절 이름을 백마사라 한 것. 이를 상징하듯 절 입구 양쪽에 송(宋)나라 때 만들어진 두 마리의 백마상이 서 있다. AD 67년,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이후 최초의 사찰이니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겠지만 현재의 건물은 명·청대에 중수된 것이고 그나마 관광지화 된 80년대 이후의 느낌이 많아 가람 자체에서 느끼는 고아한 맛이 덜하다. 어쩌면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중국이 '해방'된 49년부터 종교정책을 완화하기 시작한 80년대까지 근 30여 년 동안 종교가 없었던 나라인데 사찰이라는 건축물에 갑자기 신실한 종교인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이기는 하다. 여기 유적이 대개 청대의 건축물이라 해설하는 낙양 현지 가이드에게, 그럼 이곳이 문화혁명의 위기를 어찌 넘겼느냐 물으니 건물이 회의장소로 쓰였기 때문이란다. 참 짙게 드리운 문혁의 그림자다.
과거 자금성을 지어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위압하고자 했던 그 황제기질이 상하이 푸동거리와 베이징 장안대가에 지어진 필요 이상의 고층건물들로 발현되고 있다고 할 때, 이 향로의 규모도 그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겠다. 중국 고사에 '중국인 개개인은 모두 순민이지만, 또한 모두가 황제다(中國人個個都是順民, 亦個個都是皇帝)'라 이르는 말이 빈소리가 아닌가 보다.
기복(祈福)에 관한한 한국인은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확실히 중국은 한 수 위다. 절집 곳곳에 복을 줄 수 있는 여러 장치를 안배하고 직접 현금을 모을 수단도 고려해 놓았다.
끝없는 무단횡단과 끼어들기의 물결. 경적, 경적, 경적. 쿵. 기어이 택시 하나가 소형트럭의 꽁무니를 들이 박는다. 다행히 사람이 다칠 정도는 아니다. 낙양 벗어나며 작동되기 시작한 네비게이션 덕에 숙소 인근까지는 잘 왔는데 입력이 안 되어 있는 호텔인지라 택시를 앞세워 찾아냈다(도심에선 유용한 길 찾기 방법이다). 밤 11시 10분. 숙소 앞에 차를 대고 나니 몸이 후르르 무너진다. 야간 고속도로 주행의 위험과 도심 교통의 혼잡함 때문에 신체의 모든 감각이 예리하게 날을 세운 탓이다. 아… 오늘도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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