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힌두의 신들이 출연한 <라마야나>의 꿈을 꾸다가 깨어난 족자카르타에서의 다음날 아침은 상쾌했다. 열대야와 회교 사원에서 들려오는 새벽 기도 소리 때문에 매일 잠을 설쳤던 자카르타에서의 피곤이, 족자카르타의 쾌적한 호텔 방에서 방해받지 않고 단잠을 자고 나니 씻은 듯이 풀린 것이다. 맛있게 뷔페식 아침 식사를 하고 우리의 현지 가이드 와기여와 함께 출발하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술탄 왕궁과 물의 궁전, 지난날의 영화는 덧없고 우리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시내에 있는 술탄 왕궁. 크라똔(Kraton)이라고 불리는 이 왕궁은 18세기에 지어진 술탄의 궁전이라고 하는데, 족자카르타 특별지구의 지사(Governor)이기도 한 현재의 술탄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일반에게 공개되는 이 왕궁 안에는 역대 술탄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우리는 왕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날 아침에 술탄이 중요한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관계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는 것이 와기여의 설명이었다. 어제만 해도 아무런 공지가 없었다면서 와기여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남자에게 투덜댔지만 소용없었다.
지나치면서 자세히 보니 어떤 베차는 경적은 물론이고 깜빡이등에 헤드라이트까지 갖춰져 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과연 저것들이 제대로 작동할까?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장식품이지 싶다. 베차가 우리를 내려 준 곳은 왕궁의 남서쪽에 위치한 별궁인 따만 사리(Taman Sari). 이곳은 술탄의 왕비와 후궁들이 사용하던 넓은 목욕장(또는 수영장)이 여러 개 있어 ‘물의 왕궁’이라고도 불린다. 술탄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의 꼭대기에서 왕비와 후궁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날 밤 같이 지낼 여자를 간택했다고 하니, 지난날 술탄이 누렸던 영화가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상상이 갔다. 그러나 지금은 허물어지고 갈라지고 물이끼가 잔뜩 낀 텅 빈 건물들만이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온갖 새들이 다 있는 새 시장, '나 좀 놓아줘!' 따만 사리를 모두 둘러보고 새 시장(Pasar Ngasaem)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왕궁의 높은 성벽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비좁은 골목길을 통과해야만 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고 초라한 집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더러 허물어져 방치된 집들도 보였다. 성벽을 경계로 안과 밖의 풍경이 이처럼 다를 수가 있다니! 내 마음은 그 골목길처럼 답답해졌다. 골목길이 거의 끝날 때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서 창문을 통해 잠깐 들여다보았더니 학교 건물이었다. 맘껏 뛰어놀 운동장은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 비좁은 학교의 교실에는 머리에 이슬람 전통 모자를 쓴 꼬마들이 여러 명 앉아 있었다. 그 중의 한 명과 눈이 마주친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맞받아낼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새 시장에서 만난 새장 속의 새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나무나 철제로 만든 새장 속 홰에 앉아 있는 새들은 갖가지 색깔의 날개와 꼬리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색깔은 촘촘한 새장의 그물망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다. 또한 그 새들이 들려주는 소리 역시 하늘을 자유롭게 날던 때의 약동이 담겨있는 기쁨의 노랫소리가 아니라 날개짓해도 이제 날아갈 곳이 없는 답답함이 잔뜩 스며있는 슬픔에 찬 울음소리로 들렸다.
보로부두르 불교 사원, 그 한없는 경이로움 앞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족자카르타의 최고 명소인 보로부두르(Borobudur) 불교 사원으로 향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아직도 그 신비가 다 밝혀지지 않고 있는 보로부두르 사원은 그 전날 프람바난 사원에서 우리가 느꼈던 장대함이 한낱 맛보기였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엄청난 규모와 놀랍도록 정교한 구조는 장대함을 넘어 경이로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모두 10층으로 되어 있으며 등신대 크기의 불상 504개와 약 3.5m 높이의 불탑(stupa) 72개가 층별로 기하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모든 것에 소요된 돌덩이만 해도 100만개가 넘는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보로부두르 사원의 경이로움은 이러한 엄청난 규모의 거대한 구조물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설계되었고 고도의 상징적인 의미를 그 구조 안에 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다가 7층에 올라서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눈앞에 산과 대지가 펼쳐지는데, 이 순간에 느끼게 되는 장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정도이다. 이 정신적 희열감은 바로 1층에서 6층까지 길고 긴 배움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확 트인 둥근 단으로 구성된 7층에서 10층까지는 이제 배움의 과정이 아니라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공간이 된다.
천 년의 잠은 깨어났지만, 아직도 신비는 풀리지 않고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단지 추측일 뿐이며, 보로부두르를 언제,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완전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약 천 년 후인 1814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으나 당시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네덜란드는 발굴된 많은 불상들의 머리를 절단하여 태국의 왕에게 선물로 주는 등 오히려 훼손을 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보로부두르 사원에 있는 불상들의 약 35%는 두상이 없다.
1983년 2월, 드디어 보로부두르 사원은 거의 복원된 모습으로 세상에 선을 보였지만, 천 년 동안 화산재에 묻혀 있었던 그 신비까지 밝혀내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보로부두르의 맨 꼭대기층의 거대한 불탑에 몸을 기대고 저 멀리 바라보이는 풍경 속에서 감히 그 대답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1층에서 6층까지 이어지는 회랑을 10회 돌아야 하는 배움의 과정도 생략한 채 그 위층으로 성큼 올라온 내가 어찌 그 깊은 뜻을 알 수가 있단 말인가! 그저 나는 그곳에 올라 저 먼 곳을 바라보았을 그 옛날 수도자들의 마음을 잠시 헤아렸을 뿐이다.
문두트 사원의 형태는 프람바난에서 보았던 힌두 신전과 더 흡사했지만 석실에 모셔져 있는 신상(神像)은 흥미롭게도 불상이었다. 불교와 힌두교의 혼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특이한 사원인 것이다. 석실에 모셔진 불상의 자세 역시 불교식의 가부좌가 아니라 힌두교식으로 의자에 앉은 자세다.
그렇게 족자카르타에서 만난 보로부두르 사원의 신비한 아름다움은 자카르타까지, 아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뉴질랜드의 오클랜드까지 나를 쫓아와서 그 사원에서 만났던 불상의 입가에 머금은 그 신비한 미소로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
'쟈카르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네시아 여행기 (2) - 족자카르타 (0) | 2007.05.04 |
---|---|
인도네시아 여행기(1) - 자카르타 (0) | 2007.05.04 |
만남의 도시 자카르타 (0) | 2006.08.06 |
자카르타/인도네시아/8810 (0) | 2006.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