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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도처에 나 있다. 부피를 갖는 것들은 위치를 보유해야 하고 위치를 보유한 것들은 위치와 위치 사이에, 안주하려는 마음과 새로운 위치로 이동하고픈 마음으로 갈등을 빚는다. 문득 현재의 위치가 지겨워질 때, 모든 익숙한 것들이, 익숙함으로 해서 따라붙는 지루함이 익숙함으로써 얻는 편리함 보다 점점 크게 느껴질 때, 우리들은 길을 떠난다, 아니 떠나고 싶어한다. 길을 떠남과, 떠나고 싶어함의 차이는 반복되는 일상의 고리를 물어뜯는 이빨의 강도보다는(예를 들면 돈이라든지 시간이라든지 하는) 그 고리를 물어뜯어내어 벗어나려는 인간 의지의 강약에 더 많이 기인하는 것 같다.
지난달 25일 이른 저녁에 서울을 출발한 비행기는 꼬박 10시간을 날아서 같은 날 정오에 샌프란시스코라는 위치에 나를 옮겨 놓았다. 서울에서 졌던 해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아직 중천이었고 그 해를 따라 다시 두시간여 땅 위를 움직이니 일차 기착지인 새크라멘토에 닿을 수가 있었다. 지구 둘레의 5분지 1쯤에 달하는 10000km 가까운 거리를 땅으로, 하늘로 난 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새삼 거리의 위대함을 실감해야 했다. 위치의 또 다른 이동 비용은 시간이라는 놈과 그리고 좁은 공간에 갇혀서 참아야하는 불편함이 숨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랜드캐니언을 보기 위해 1300km를 달려가다
4월 29일, 길을 떠나는 날의 아침은 맑았다. 이곳의 기후는 아침이면 상당히 쌀쌀하고 낮이 되면 한여름처럼 더웠다. 서늘하고 상쾌하고 오염없는 사월의 아침에 최신, 최고급 모델의 메르세데스를 타고 길을 떠나는 맛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잘 사는 조카를 둔 덕에 팔자에 없는 호강을 누리는 셈이었다. 그가 맨손으로 이 땅에 와서 이 위치에 오르기 까지 엄청난 고생을 할 때 아무것도 못 해준 주제에 이제 와서 그 호사에 슬쩍 끼어드는 게 많이 부끄럽긴 하지만, 말 그대로 눈 딱 감고 모른체 하기로 했다(사람이 백수가 되면 체면이 없어지는 모양이다. 큭큭).
쉬지 않고 5시간쯤을 내쳐 달렸던가. 오전 7시 30분에 새크라멘토를 출발한 것이 오후 1시가 되어갔다. 배도 고파오고 운전도 교대할겸 식당을 찾아 프리웨이를 벗어났다. 이상하게 미국의 도로에는 프리웨이건 하이웨이간에 휴게소가 거의 없었다. 기름을 넣거나 밥 한 끼라도 먹을려면 인근 도시로 찾아들어가야 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작은 도시에 들어가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오후2시에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평생 처음으로 세칭 말하는 벤츠를 몰아보게 된 것이다. 그것도 2007년형 s550을. 작은 흥분이 전신을 타 내렸다. 차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후진할 때는 네비게이터에 화면이 비치고 다른 차가 지나치게 근접하면 경보음이 울리는게 운전하기에도 편리하였다. 58번 프리웨이로 들어서자 차는 낮게 그릉거리며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표범처럼 재빠르게 달려나갔다. 제한 시속이 70mile(112km)이니 80mile(128km)까지는 달려도 된다는데 달리다 보면 어느새 150~160km를 육박하고 있었다.
달리다 보면 금세 160km를 넘나들어 자주 계기판을 보며 속도를 줄여야 했다. 속도는 중독된다고 했던가. 처음에는 아슬아슬 했던 것이 점차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고 마지막에는 아늑하기까지 하였다. 새크라멘토를 출발한 지 8시간이 넘어서야 근근히 캘리포니아를 벗어나 아리조나 주에 진입할 수 있었다. 어차피 오늘 하루 안에 그랜드 캐니언에 도착하기는 무리라 중간에 자고 가기로 하였다. 이미 해도 뉘엿 뉘엿 저물어 황량하고 쓸쓸한 서부의 분위가 물씬 배어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말을 타고 총을 손에든 사나이가 표표히 나타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길을 떠난 지 11시간 30분 만이었고 주파한 거리는 1100km를 조금 넘었다. 서울-부산을 한 번 반 왕복한 거리였다. 새우와 닭고기와 스테이크를 섞어주는 스페인 요리를 시키고 와인 한 잔을 먹고 기다리는데 졸렸다. 내게는 다섯 시간의 무정차 운전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도 즐거웠다. 익숙한 것에서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위치 이동은 여전히 어눌하였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시간이 지나면 차차 익숙해지고 이윽고는 지루하게 까지도 되겠지만 위치와 위치 사이에는 길이 있고 그길을 나는 오늘 하루도 마냥 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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