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취재] 사랑을 만날 것 같은 예감 - 독일 하이델베르그

첫 방문자에게 독일은 으레 침울하고 시무룩한 인상을 남긴다. 예상보다 훨씬 지저분한 거리며 잿빛 건물은 기어이 우울증을 도지게 만든다. 둔탁한 독일어 발음만큼이나 거북살스러운 그런 느낌을 떨쳐버리고 싶다면 주저 없이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로 향해야 할 듯.

하이델베르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아기자기한 도시다. 물리적 크기는 작지만 독일어의 경음을 단번에 연음으로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저력과 매력은 그 어느 도시 못지않게 큰 곳이다. 뮌헨, 프랑크푸르트 등과 함께 독일 여행의 대표적인 목적지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단순히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다는 지리적 조건이 인기의 비결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역사 및 문화유적이 다른 지역에 비해 그리 뚝별스럽게 뛰어난 것도 아니다.

하이델베르그가 독일 학문과 철학,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하이델베르그대학은 1386년에 설립된 독일 최고(最古)의 대학이자, 중유럽에서는 3번째로 탄생한 대학이다. 변증론의 주창자 헤겔이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고 막스베버가 그의 사회과학이론을 발전시킨 터전이었을 정도로 그 역사만큼 학문적 깊이도 깊다. 하이델베르그대학은 '학생감옥'이라는 독특한 문화적 산물을 낳았는데 이곳은 말썽을 피우거나 싸움을 한 학생죄수들을 3일 동안 수감하던 곳이다. 과거에도 말썽꾸러기 학생들은 영웅대접을 받았는지 당시 학생들은 이곳에 수감되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아 감옥은 자주 만원이 됐다고 한다. 수감된 학생들이 남긴 각종 낙서와 그림들이 자유를 갈망하는 젊음의 열기를 느끼게 한다.

학문과 철학의 메카답게 괴테, 헤겔, 하이데거 등 수많은 철학자들은 하이델베르그 거리를 거닐며 사색에 잠기고 철학적 깊이를 더했다고 한다. 이들이 거닐던 거리는 현재 '철학자의 길'로 명명돼 당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시 전체와 시를 관통해 흐르는 넥카(Neckar)강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어 빽빽한 여정의 가쁜 숨을 고르는 데 제격이다. 지난 1907년에는 기원전 50만년 전 인류의 아래턱뼈가 발견돼 '하이델베르그인'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하이델베르그인은 유럽인들의 직계 조상 격이라 할 수 있다. 이 턱뼈는 현재 리멘슈나이더의 작품인 '12인의 사도' 등을 소장하고 있는 '선제후 박물관'에 전시돼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원시 인류의 실체를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이렇듯 하이델베르그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는 범상치 않다. 그렇지만 하이델베르그를 아름답게 하는 요소는 다른 면에 있다. 도시 전체에 깃들인 진한 암갈색 사랑의 빛깔이 바로 그것일 터이다. 그저 그런 정도의 농도였다면 황태자가 평범한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로맨틱한 내용의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Student Prince)'이 어찌 감히 이곳을 배경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물론 개인마다의 평가기준은 분명 다르겠지만 그다지 경솔한 단정은 아닐 듯싶다.

하이델베르그는 온통 암갈색이다. 시내 중심거리인 '하우프트 거리'도 그렇고 건물 지붕과 벽도 그렇다. 넥카강 위에 놓인 다리도 그렇다. 온통 암갈색이다보니 그렇지 않은 빛깔까지도 종국엔 암갈색으로 느끼게 될 정도다. 그 빛깔은 마치 설익은 포도알맹이처럼 풋풋하고 싱그럽다. 때론 잘익은 포도주처럼 묵직하고 바특하다. 사랑의 느낌처럼 말이다. 이 빛깔의 진원지는 하이델베르그 고성이다. 이 성은 가장 진한 암갈색을 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색채를 사랑의 빛깔로 숙성시킨 곳이라 할 수 있다.

13세기 이 일대를 통치하던 프와르츠공이 지은 이래 지속적으로 증축됐기 때문에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건축양식이 혼재돼 있다. 또 세월의 풍파에, 혹은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일부는 파손되기도 했지만 그 으밀아밀한 사랑의 느낌과 한갓진 낭만의 분위기는 시간이 흐를 수록 도를 더하고 있다. 성은 괴테의 시가 새겨진 시문을 비롯해 세계 최대 크기의 와인통, 약박물관, 전망탑, 시계탑, 감옥탑, 도서관 등으로 이뤄져 있다. 그 중 엘리자베스문은 애잔한 사랑의 전설을 담고 있어 한동안 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보헤미아의 왕 프리드리히 5세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왕은 공주를 매우 사랑했지만 공주는 항상 고향만을 그리워해 왕을 안타깝게 했다. 왕은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공주를 달래기 위해 그녀의 생일 전날 밤 하룻밤 사이에 대포가 있던 자리에 영국식 정원을 꾸미고 문을 만들어 선물했다'는 그런 내용이다. 다소 허무맹랑하고 시시껄렁한 얘기지만 꽤나 유명해졌는지 문 앞에는 다정스레 사진을 찍으며 사랑을 다짐하는 연인들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사랑의 전설뿐만 아니라 성의 호젓한 분위기도 사랑의 빛깔을 더욱 진하게 하는 요소다. 산 중턱에 자리 잡아 시내와 강, 철학자의 길이 있는 강 넘어 반대편 산까지 느긋한 마음으로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성의 야경은 가히 몽환적이다. 붉은 조명이 성 둘레를 은은하게 비춰 암갈색 성은 더욱 낭만적인 자태를 선사한다. 때문에 저녁 무렵 강변과 다리 위는 성의 야경을 감상하려는 이들의 집중적인 인기를 받는다. 성이 지닌 건축학적 아름다움과 지리적 위치에서 풍기는 호젓함, 그리고 거기에 깃들인 전설로 농도를 더하기 시작한 사랑의 빛깔은 야경에 이르러 끝내 그 절정에 도달하고 만다. 밤이 깊어 세상이 점점 까맣게 변할수록 그 빛깔은 더욱 신비스러워진다.

독일 하이델베르그 글·사진=김선주 기자 vagrant@traveltimes.co.kr

'독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리오 란자의 "축배의 노래(Dringking Song)"  (0) 2006.08.19
[하이델베르그-고성] 그 성에 오르고 싶다!  (0) 2006.08.19
프랑크푸르트  (0) 2006.06.13
프랑크푸르트 지도  (0) 2006.05.23
하이델베르그 지도  (0) 2006.05.23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