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도 넘친 뉴질랜드의 로토루아 기행 (상)
박일원 2008-01-09 11:06:47 조회수: 695 추천:2

진실이라 믿기에는 그 증거가 부족했고 미신 따위로 깎아내리기에는 그 예측이 두려울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1886년 5월 31일 새벽안개로 덮인 뉴질랜드의 로토루아에 있는 타라웨라 호수에서는 불길한 징후 즉 대규모 화산폭발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날 아침 타라웨라 호수는, 빼꼭하게 침엽수림으로 뒤덮인 타라웨라 산 아래에서 새벽안개를 둘둘 말아 다리 사이에 낀 채 잠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먹이를 찾아 일찍 잠에서 깨어난 새들만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었지요.


와카 타우아(Waka Taua, War Canoe)라고 하는 커다란 마오리 전사의 카누가 호수를 가로 질러 천천히 물가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배의 한쪽 줄에는 앉은 자세로 마오리 전사들이 노를 젓고 있었고 다른 쪽 전사들은 머리를 해오라기 깃털로 장식한 채 아마로 만든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날은 이미 밝았지만 겨울 해라 그런지 호수를 덮은 안개를 걷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하더라도 목격자들, 그러니까 그 날 아침에 마오리족 가이드인 소피아와 함께 호수 관광에 나섰던 랄프 박사와 켈리허 신부님과 오클랜드에서 온 사제를 포함한 여러 관광객들은 카누를 타고 가까이 다가오는 마오리 전사들의 모습을 식별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이구동성으로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습니다.


당시 안내를 위해 관광객 일행과 배에 함께 탔던 다른 마오리 족은 아마포로 온 몸을 싼 그런 마오리 전사의 모습은 죽음의 산을 향하여 떠나가는 영혼들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유령선의 출현은 불행의 전조이자 대재난의 징조라며 다들 몹시 불안해했다고 합니다.


이런 불안의 조짐은 정확히 실현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열흘 뒤인 6월 10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뉴질랜드 중심부에 있는 로토루아에서는 30여 차례의 지진이 있은 후 타라웨라 화산이 폭발을 시작합니다. 근 네 시간 동안 고로 속의 쇳물과도 같은 시뻘건 용암과 온 세상을 덮어버릴 것 같은 뜨거운 화산재와 진흙을 분출합니다. 해서 같은 북 섬에 있었던 오클랜드는 물론 800킬로나 떨어진 남 섬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서도 그 불길이 관측되었다고 합니다.


대폭발이 있기 전까지 타라웨라 산 아래 마을은 평화롭고 목가적이었습니다. 농사짓는 얼마 안 되는 마을 주민과 호수에서 송어 낚시를 겸해 찾아오는 관광객이 좀 있었을 뿐입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핑크엔 화이트 테라스라를 찾는 관광객들이 주로 묵었다던, 작은 2층 목조 건물이었지만 당시로는 최고였던 호텔이 키 큰 전나무 숲 가운데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산 폭발로 타라웨라 호숫가의 ‘테 와이로아’ 마을을 포함한 인근 세 개의 마을이 150명의 생명과 함께 화산재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제가 타라웨라 호수를 찾았을 때는 상쾌한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고깔 모양의 산봉우리들과 잉크 색의 호수가 조용히 어둠의 이불을 걷으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지요. 그런데 여명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타라웨라 호수가 이처럼 빼어난 경치를 지녔음에도 송어낚시 배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구경꾼들이 별로 없는 걸 보니 뉴질랜드 인구가 적긴 적은가 봅니다. 시드니에서 세 시간을 날아와 오클랜드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이곳 로토루아까지 오는데 한적한 길가로 산등성이 마다 웬 양들이 그토록 많이 보이는지요. 확실히 양이 사람숫자보다 많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호수 근처에 있는 베리드 빌리지(Buried Village)는 화산재로 묻힌 마을을 복구해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마을입니다. 입구 전시장에는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대형 사진과 그림, 마오리 원주민의 장신구와 조각상 그리고 화산재 속에 묻힌 농기구 등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야외 전시장이 있는 바깥으로 나가니 파란 하늘 위로 독수리 한 마리가 푸드득 거리며 지나갑니다. 관리사로 보이는 펜스 너머로는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몇 마리의 양이 풀을 뜯고 있는 게 보입니다. 붉게 채색된 마오리의 전통가옥과 창고, 녹슨 펌프를 지나니 작지만 너무나 맑아 차라리 싱싱해 보이는 시냇물이 나타났습니다. 마을을 가르며 타라웨라 호수로 흘러가는 냇물은 이끼와 소철과 칡넝쿨로 덮여져 있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팔뚝만한 송어 떼가 힘차게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시커먼 송어 떼가 그토록 자연스럽게 노는 게 하도 신기해서 냇가에 머물며 바라보고 있는데 배낭을 짊어진 청년이 옆에 앉더니 함께 먹자며 도너츠가 담긴 갈색 종이봉투를 불쑥 내밉디다. 이른 아침에 숙소를 나오느라 아침 식사를 걸렀다며 오는 길에 주유소 마켓에서 샀다는데 배낭 속에 넣어두었기 때문인지 아직도 따끈따끈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역시 아침을 걸렀더군요. 자신은 핀란드에서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뉴질랜드에 왔다며 현재 이년 반을 계획하고 여행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잡은 여행기간이 아무리 핀란드가 부자나라이고 복지국가라 하더라도 한창 젊어 보이는 청년이 유랑하며 보내기에는 좀 긴 세월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근처 폭포를 둘러보고 가겠다는 그와 헤어져비탈길을 오르니 눈 아래로 타라웨라 호수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구름을 이고 있어 더욱 파랗게 보이는 하늘, 그 하늘과 마주한 채 마치 산 위에 둥실 떠 있는 것 같은 청푸른 호수. 그 호수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도 쇄골 드러난 어깨 위로, 흘러내린 셔츠를 자꾸 올려대던 여인의 가늘고 긴 하얀 손가락. 탄넨바움 숲을 가르며 들려오던 바람소리와 가파른 산 위에 있어, 오르지 못했던 폭포물의 낙하소리, 그 폭포를 향해 가고 있던 핀란드 젊은이의 경쾌한 자갈 밟는 소리. 기쁨을 주며 평화롭게 흘러가는 시냇물. 이끼 낀 바위 위를 유장하게 기어가던 민달팽이. 주인은 온데간데없이 무지개만 덩그러니 걸린 거미줄. 활짝 핀 민들레 들판. 그 위로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는 벌떼. 무수한 잎사귀를 해작거려 신비스럽고 매혹적인 향기를 실어 온 산 바람. 독수리를 피해 도망가는 건지 죽어라고 들판을 달려가던 잿빛 토끼. 이 모든 것은 그토록 잔인했던 타라웨라 화산의 회복된 얼굴이었습니다. 세월이-젊은 청년이 유랑하며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제 마음대로 생각해 버렸던 그 세월이, 중년인 제가 안타깝게 여기며 두려워하는 그 세월의 흐름이 대폭발로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 위로 물과 바람을 흘려 피와 진액을 닦아주고 봉합하고 보듬어 마침내 새살이 돋아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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