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잠에서 깨어난 신비의 사원
인도네시아 여행기(3) 족자카르타의 보로부두르 사원
정철용(ccypoet) 기자
힌두의 신들이 출연한 <라마야나>의 꿈을 꾸다가 깨어난 족자카르타에서의 다음날 아침은 상쾌했다.

열대야와 회교 사원에서 들려오는 새벽 기도 소리 때문에 매일 잠을 설쳤던 자카르타에서의 피곤이, 족자카르타의 쾌적한 호텔 방에서 방해받지 않고 단잠을 자고 나니 씻은 듯이 풀린 것이다. 맛있게 뷔페식 아침 식사를 하고 우리의 현지 가이드 와기여와 함께 출발하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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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카오스의 도시는 무엇으로 굴러가나

술탄 왕궁과 물의 궁전, 지난날의 영화는 덧없고

우리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시내에 있는 술탄 왕궁. 크라똔(Kraton)이라고 불리는 이 왕궁은 18세기에 지어진 술탄의 궁전이라고 하는데, 족자카르타 특별지구의 지사(Governor)이기도 한 현재의 술탄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일반에게 공개되는 이 왕궁 안에는 역대 술탄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우리는 왕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날 아침에 술탄이 중요한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관계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는 것이 와기여의 설명이었다. 어제만 해도 아무런 공지가 없었다면서 와기여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남자에게 투덜댔지만 소용없었다.

▲ 삼륜 자전거 택시 베차. 자카르타에서는 이제 종적을 감췄지만 족자카르타에서는 아직도 성업중이다.
ⓒ 정철용
와기여는 우리에게 미안했던지 대신 삼륜 자전거 택시인 베차(becak)를 태워주었다. 뒤에서 페달을 밟는 운전수야 힘이 들고 땀이 나겠지만 그늘진 좌석에 편히 앉아있는 우리 손님들은 시원한 바람도 맞아가며 한가롭게 거리도 구경하니, 왕궁을 보지 못한 아쉬움도 금방 잊을 수 있었다.

지나치면서 자세히 보니 어떤 베차는 경적은 물론이고 깜빡이등에 헤드라이트까지 갖춰져 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과연 저것들이 제대로 작동할까?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장식품이지 싶다.

베차가 우리를 내려 준 곳은 왕궁의 남서쪽에 위치한 별궁인 따만 사리(Taman Sari). 이곳은 술탄의 왕비와 후궁들이 사용하던 넓은 목욕장(또는 수영장)이 여러 개 있어 ‘물의 왕궁’이라고도 불린다.

술탄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의 꼭대기에서 왕비와 후궁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날 밤 같이 지낼 여자를 간택했다고 하니, 지난날 술탄이 누렸던 영화가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상상이 갔다. 그러나 지금은 허물어지고 갈라지고 물이끼가 잔뜩 낀 텅 빈 건물들만이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온갖 새들이 다 있는 새 시장, '나 좀 놓아줘!'

따만 사리를 모두 둘러보고 새 시장(Pasar Ngasaem)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왕궁의 높은 성벽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비좁은 골목길을 통과해야만 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고 초라한 집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더러 허물어져 방치된 집들도 보였다. 성벽을 경계로 안과 밖의 풍경이 이처럼 다를 수가 있다니! 내 마음은 그 골목길처럼 답답해졌다.

골목길이 거의 끝날 때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서 창문을 통해 잠깐 들여다보았더니 학교 건물이었다. 맘껏 뛰어놀 운동장은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 비좁은 학교의 교실에는 머리에 이슬람 전통 모자를 쓴 꼬마들이 여러 명 앉아 있었다. 그 중의 한 명과 눈이 마주친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맞받아낼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 새 시장 입구에서 만난 병아리 떼. 갖가지 색깔로 염색한 모습이 예쁘기보다는 가련해 보인다.
ⓒ 정철용
마침내 큰길로 들어선 우리를 맞이한 것은 갖가지 색깔의 병아리들이었다. 딸아이는 예쁘다며 한참을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지만 원래의 자신의 색깔 대신 분홍색, 연두색, 보라색, 고동색 등 온갖 색으로 염색한 그 병아리들은 모두 병약해 보이고 엄마 닭을 따라다니면서 보여주는 생동감이 없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새 시장에서 만난 새장 속의 새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나무나 철제로 만든 새장 속 홰에 앉아 있는 새들은 갖가지 색깔의 날개와 꼬리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색깔은 촘촘한 새장의 그물망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다.

또한 그 새들이 들려주는 소리 역시 하늘을 자유롭게 날던 때의 약동이 담겨있는 기쁨의 노랫소리가 아니라 날개짓해도 이제 날아갈 곳이 없는 답답함이 잔뜩 스며있는 슬픔에 찬 울음소리로 들렸다.

▲ 새장 속에 갇힌 새들. 그들이 내는 소리는 노래가 아니라 울음이다.
ⓒ 정철용
마치 “나 좀 놓아줘!”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그 새들의 지옥에서 빠져 나오면서 아내가 “휴우…"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단지 새 모이로 주려고 함께 파는 징그러운 벌레들로부터 벗어났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새는 날아야 하고 그 때야 비로소 새는 울음이 아니라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다.

보로부두르 불교 사원, 그 한없는 경이로움 앞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족자카르타의 최고 명소인 보로부두르(Borobudur) 불교 사원으로 향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아직도 그 신비가 다 밝혀지지 않고 있는 보로부두르 사원은 그 전날 프람바난 사원에서 우리가 느꼈던 장대함이 한낱 맛보기였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엄청난 규모와 놀랍도록 정교한 구조는 장대함을 넘어 경이로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 거대한 피라미드 모양의 보로부두르 전경. 천 년의 신비가 아직도 숨쉬고 있다.
ⓒ 정철용
각각 독립된 신전들이 모여 이루어진 프람바난 사원과는 달리 보로부두르 사원은 피라미드형 구조로 일체를 이루고 있는데, 최하부의 기단은 한 변이 약 120m에 달하고 높이는 31.5m(복원 전 원형은 42m)에 달한다.

모두 10층으로 되어 있으며 등신대 크기의 불상 504개와 약 3.5m 높이의 불탑(stupa) 72개가 층별로 기하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모든 것에 소요된 돌덩이만 해도 100만개가 넘는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보로부두르 사원의 경이로움은 이러한 엄청난 규모의 거대한 구조물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설계되었고 고도의 상징적인 의미를 그 구조 안에 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 보로부두르 사원 회랑 석벽의 부조. 일일이 그림을 맞추어 복원했고 끝내 찾지 못한 부분은 시멘트 벽돌로 채워놓았다고 한다.
ⓒ 정철용
정방형의 회랑으로 이루어진 1층에서 6층까지는 외부를 볼 수 없게 되어 있고, 대신 양쪽 벽에 쉽게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부조(浮彫, relief)를 새겨 놓아 사람들의 눈길을 그 부조들로 이끈다. 그것을 모두 순서대로 다 보려면 회랑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10회를 돌면서 6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그 거리가 무려 5km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다가 7층에 올라서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눈앞에 산과 대지가 펼쳐지는데, 이 순간에 느끼게 되는 장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정도이다. 이 정신적 희열감은 바로 1층에서 6층까지 길고 긴 배움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확 트인 둥근 단으로 구성된 7층에서 10층까지는 이제 배움의 과정이 아니라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공간이 된다.

▲ 보로부두루 사원 상단에 있는 둥근 불탑. 그 안에 불상이 하나씩 앉아 있다.
ⓒ 정철용
이처럼 보로부두르 사원은 예배를 드리는 신전이라기보다는 사원을 오르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교육의 장으로서 지어졌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래서 미국 태생의 인류학자 존 미크식(John Miksic)도 그의 책 <보로부두르의 미스터리(The Mysteries of Borobudur)>에서 보로부두르를 오르는 육체적 행위는 동시에 ‘세속’에서 ‘법열’로 이어지는 정신적 고양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천 년의 잠은 깨어났지만, 아직도 신비는 풀리지 않고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단지 추측일 뿐이며, 보로부두르를 언제,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완전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 정방형의 회랑에서 둥근 상단부로 올라가는 계단. 이 상승은 '세속'에서 '법열'로의 정신적 고양이기도 하다.
ⓒ 정철용
추측컨대는 8세기 중엽에 들어선 불교 왕조 샤일렌드라(Sailendra) 시대에 약 70여년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9세기 중엽에 들어선 힌두 왕조 산자야(Sanjaya) 시대에 보로부두르 사원은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상태에서 1006년에 폭발한 인근 메라피 화산(Mt. Merapi)의 화산재에 묻힘으로써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약 천 년 후인 1814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으나 당시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네덜란드는 발굴된 많은 불상들의 머리를 절단하여 태국의 왕에게 선물로 주는 등 오히려 훼손을 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보로부두르 사원에 있는 불상들의 약 35%는 두상이 없다.

▲ 머리 없는 불상. 초기 발굴 작업시 벌어진 약탈의 흔적이다.
ⓒ 정철용
20세기 초 네덜란드인 반 에르프(Van Erp)가 시도한 복원 작업을 거쳐, 1973년부터 10년간 인도네시아 정부는 2500만달러라는 거액을 지원해 준 유네스코의 협력을 얻어 대대적인 복원작업을 펼쳤다.

1983년 2월, 드디어 보로부두르 사원은 거의 복원된 모습으로 세상에 선을 보였지만, 천 년 동안 화산재에 묻혀 있었던 그 신비까지 밝혀내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보로부두르의 맨 꼭대기층의 거대한 불탑에 몸을 기대고 저 멀리 바라보이는 풍경 속에서 감히 그 대답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1층에서 6층까지 이어지는 회랑을 10회 돌아야 하는 배움의 과정도 생략한 채 그 위층으로 성큼 올라온 내가 어찌 그 깊은 뜻을 알 수가 있단 말인가! 그저 나는 그곳에 올라 저 먼 곳을 바라보았을 그 옛날 수도자들의 마음을 잠시 헤아렸을 뿐이다.

▲ 문두트 사원의 불상. 불상이지만 가부좌가 아니라 힌두교 식으로 의자에 앉은 자세여서 이채롭다.
ⓒ 정철용
오후 6시에 자카르타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그곳에 우리는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우리는 공항으로 가는 길에 문두트 사원(Candi Mundut)이라는 조그만 사원에 들렀다.

문두트 사원의 형태는 프람바난에서 보았던 힌두 신전과 더 흡사했지만 석실에 모셔져 있는 신상(神像)은 흥미롭게도 불상이었다. 불교와 힌두교의 혼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특이한 사원인 것이다. 석실에 모셔진 불상의 자세 역시 불교식의 가부좌가 아니라 힌두교식으로 의자에 앉은 자세다.

▲ 눈을 지그시 내리 깔고 보일듯 말듯 미소를 띤 불상. 보로부두르 사원의 신비는 저 미소를 닮았다.
ⓒ 정철용
어느 불교 전문가는 이 불상을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 중의 하나”라고 감탄했다고 하는데, 감식안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내 눈에는 보로부두르의 불탑 속에 앉아 있는 불상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인다.

그렇게 족자카르타에서 만난 보로부두르 사원의 신비한 아름다움은 자카르타까지, 아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뉴질랜드의 오클랜드까지 나를 쫓아와서 그 사원에서 만났던 불상의 입가에 머금은 그 신비한 미소로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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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들이 하룻밤 만에 세운 프람바난 사원
인도네시아 여행기 (2) - 족자카르타
정철용(ccypoet) 기자
자바 문화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는 고도(古都) 족자카르타(Jogjakarta)는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걸렸다.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현지 안내인은 뜻밖에도 분명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족자카르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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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기여(Wagiyo)라고 자신을 소개한 안내인은 족자카르타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5명의 현지 가이드 중 하나란다. 시내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최고의 국립대학교인 가자 마다(Gadjah Mada) 대학교에 있는 한국문화센터에서 4개월 동안 배운 실력치고는 너무나 유창했다. 덕분에 자카르타에서처럼 말이 통하지 않아 느낀 답답함과 불편함은 면할 수 있었다.

낯선 이국에서 한국말을 제법 잘 하는 현지 가이드를 만나니 반가운 마음과 친근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와기여의 설명에 의하면, 요그야카르타로 불리기도 한다는 족자카르타는 "우정(Yogya)의 도시(Karta)"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족자카르타는 우리에게는 정말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었다.

생김새와 피부색은 우리와 조금 달랐지만 한국말을 서로 주고받으며 그와 함께 한 1박 2일의 족자카르타 여행은 거대한 카오스의 도시 자카르타에서 경험한 유쾌하지 못한 인상을 말끔히 씻어내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인도네시아에 대해서 느끼는 일말의 우정은 족자카르타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혀두어야겠다.

▲ 멀리서 바라본 프람바난 사원. 정교하게 장식된 거대한 석탑들처럼 보인다.
ⓒ 정철용
장대한 규모로 우리를 압도한 프람바난 사원

점심을 먹고 제일 먼저 간 곳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힌두 사원으로 손꼽히는 프람바난 사원(Candi Prambanan)이었다. 사원이라면 으레 산 속 깊숙이 자리 잡은 우리나라 사찰이나 자카르타에서 머무는 동안 보았던 회교사원을 떠올리는 것이 고작인 내게 멀리서 바라다 본 프람바난 사원은 사원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장식된 거대한 석탑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서 드러나는 그 장대한 규모는 우리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힌두교의 3대 신을 모시고 있는 시바 신전과 그 양 옆의 브라마 신전과 비슈누 신전은 화려한 아름다움과 거대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 프람바난 사원 중앙의 시바 신전. 높이 47미터의 장대한 위용이 압권이다.
ⓒ 정철용
중앙에 위치한 47m 높이의 시바 신전은 힌두 최고신을 모신 신전답게 시바 신을 비롯하여 각기 다른 4개의 신상(神像)들이 봉안되어 있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나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4개의 석실에서 볼 수 있는 이들 신상 중에서 현지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북쪽 석실의 두르가(Durga) 상인데, 그녀는 시바 신의 부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그녀를 전설상에 나오는 아름다운 공주 라라 종그랑(Lara Jonggrang '날씬한 처녀'라는 뜻)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녀를 만지면 예뻐진다고 믿고 있다.

와기여의 이런 설명을 듣자마자 딸아이는 얼른 두르가 상에 손을 갖다 댔다. 나와 아내는 그 모습에 그저 웃고 말았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졌는지 온통 새까맣게 손때가 묻어 있는 두르가 상은 가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터이다.

이렇게 새까맣게 손때가 묻은 신상의 모습은 시바 신전의 서쪽 석실에 봉안된 가네샤(Ganesya) 상에서도 볼 수 있다. 시바 신의 아들인 가네샤는 코끼리 두상을 하고 있는데, 왼손으로 인간의 두개골을 잡고 긴 코로 그 내용물(두뇌)을 빨아먹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이 광경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지만, 그는 지혜의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으며 그 코를 만지면 똑똑해진다는 믿음이 이곳 현지인들에게는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만져보라고 하였더니 한사코 거부해서 대신 내가 만졌다.

그 이후로 내가 얼마나 똑똑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손때가 잔뜩 묻어 있는 신상들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내 마음은 썩 개운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문화유산 제642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이 훌륭한 세계의 문화재를 이토록 소홀하게 관리해도 되는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 지혜의 신 가네샤 상. 똑똑해진다고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새까맣게 손때가 묻었다.
ⓒ 정철용
힌두교의 3대 신을 모신 신전 앞에는 흥미롭게도 그 신들이 교통수단으로 이용했던 동물을 모신 신전들이 각각 서 있다. 그 배치에 따르면, 시바 신은 소(Nandi)를 타고 다니고 브라마 신은 백조(Angsa)를, 비슈누 신은 독수리(Garuda)를 타고 다닌다. 인도네시아의 국적 항공사인 가루다 인도네시아의 이름이 어디서 연유했는지를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70년이 넘게 걸린 복원 작업

현재 프람바난 사원에는 이 6개의 신전들과 이들 측면에 각각 2개씩 서 있는 작은 신전들을 포함해서 모두 18개의 신전들만이 복원되어 서 있다. 그러나 9세기 무렵 처음 건립 당시에는 라라 종그랑의 전설이 전하고 있는 1000개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작은 신전들을 포함하여 모두 240개의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6세기에 화산 폭발과 큰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프람바난 사원은 1918년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서 복원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200년이 넘도록 폐허 속에 방치되었다. 무너져 내린 돌조각들을 퍼즐 맞추듯 하나하나 맞추어 쌓아 올려야만 하는 까다로운 복원작업은 쉽지 않은 재정문제로 여러 번 중단되기도 하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70년이 넘도록 계속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복원된 신전은 18개에 불과하며 복원되지 못한 나머지 작은 신전들은 아직도 프람바난 사원 주위에 돌무더기들로 쌓여 있으며 복원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와기여의 말로는 재정 문제 때문에 더 이상 복원작업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다는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사원 주위에 무너진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신전들의 돌무더기. 언제쯤 제 모습을 찾을까?
ⓒ 정철용
프람바난 사원을 모두 둘러보고 나오면서 만난 한 할머니가 구걸하면서 한국말을 건네고 있음에도 그 말이 반갑기보다는 아프게 들린 것은 그 때문이었으리라. "잔돈 좀 줘!" 내 뒤통수에 꽂히는 그 말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바틱 공방에서 한없이 느린 시간을 만나다

프람바난 사원에서 만났던 구걸하는 이들의 모습은 시내에 있는 바틱(Batik) 공방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수없이 목격되었다. 우리 차가 신호대기로 정차하고 있으면 작은 기타를 든 아이들과 청년들이 어김없이 다가와 손을 벌렸다. 거부 의사를 밝히면 끈질기게 따라붙지 않고 쉽게 포기하는 것을 봐서는 그러한 구걸행위에 이골이 난 것처럼 보였다.

저렇게 해서 그들이 버는 돈은 하루에 얼마나 될까? 아직 학생들일 텐데, 학교 끝나고 저렇게 거리에서 구걸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부모들은 가만히 놔두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나는 쉽게 떨쳐버리지 못했다.

드디어 도착한 한 바틱 공방은 어두운 조명에 흙바닥이 그냥 드러난 것이 공방이라기보다는 낡은 공장이나 헛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열심히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이들의 손놀림은 정교하고 섬세했다. 그 손놀림을 따라 왁스가 옷감에 흘러내리면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바틱 공방의 아주머니들. 정교한 손놀림으로 한없이 느린 시간의 무늬를 그리고 있다.
ⓒ 정철용
두 가지 색상으로만 이루어진 가장 단순한 바틱의 경우에도 그것을 수작업으로 할 경우에는 도안 작업, 두 차례의 왁스 작업, 두 차례의 염색 작업, 마무리 왁스 작업, 왁스 제거 작업 등 8개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고 하니 바틱 만들기는 인내심을 배우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작업처럼 보였다. 실제로 하나의 바틱을 만들어내는 데 실크의 경우에는 2개월이 걸리고 면의 경우에는 2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한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설명을 듣고 보니, 바틱의 그 아름다운 무늬와 색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한없이 느린 그 시간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자카르타의 한 백화점에서 산 바틱 그림 3점의 값이 한국 돈으로 2만원도 안 될 정도로 싸다고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말이다.

싼 것은 이들의 노동력이지 바틱의 값어치가 결코 아닌 것이다! 일일이 사람의 손이 가는 복잡하고 많은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바틱의 아름다움은 정녕 한없이 느린 시간의 아름다움이다.

프람바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환상의 무대, 라마야나 발레 공연

바틱 공방에서 나와 호텔 체크인을 하고 우리는 잠시 쉬었다. 오후 6시에 호텔 로비에서 와기여를 다시 만나 저녁을 먹고 우리가 향한 곳은 다시 프람바난 사원. 낮에 느꼈던 프람바난에서의 감동을 이번에는 프람바난을 배경으로 삼은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에서 맛보기 위해서였다.

▲ <라마야나> 무용극의 주인공 라마와 신타. 자카르타의 한 백화점에서 산 바틱 그림 세 점 중 하나다.
ⓒ 정철용
이 공연은 프람바난 사원의 시바 신전과 브라마 신전의 석벽에 부조로 새겨져 있기도 한 힌두신화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 이야기를 타악기를 중심으로 한 이곳의 전통음악 가믈란(Gamelan) 반주에 맞추어 펼쳐 보이는 화려한 무용극이다.

무대의 자연적인 배경을 이루는 프람바난의 시바 신전과 비슈누 신전 사이로 솟아오른 보름달이 환하게 비치는 가운데 무대가 열리면 가히 북경의 자금성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토트>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환상적인 공연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이 공연을 본 날은 그믐에 가까운 날이라서 그렇게 멋진 광경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매일 있는 공연이 아니니, 공연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을 삼을 수밖에….

아요댜(Ayodya) 왕국의 왕자 라마(Rama)가 원숭이 전사들의 도움을 받아 악마의 왕 라바나(Rahwana)를 죽이고 그에게 납치당한 자신의 아내 신타(Sinta)를 구해낸다는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공연의 내용은 다소 호전적이었다. 하지만 야외무대에서 느낄 수 있는 시원함과 무대 뒤에 자연스럽게 배경이 되어 주고 있는 프람바난 사원의 신비스러운 실루엣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살육과 전쟁까지도 아름다운 신화적 세계로 감싸 안아 주었다.

▲ <라마야나> 무용극의 한 장면. 무대 뒷편 프람바난 사원의 뾰족한 첨탑이 양쪽에 희미하게 보인다.
ⓒ 정철용
공연이 다 끝나고 출연 배우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나오는 길에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무대를 다시 바라다보았다. 그 무대의 뒤편으로 프람바난 사원의 시바 신전과 브라마 신전과 비슈누 신전도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언뜻 본 듯했다. 인간의 공연이 끝나고 비로소 시작되는 신들의 공연! 인간이 떠난 무대에 이제 신들이 내려와 한바탕 그들만의 잔치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람바난 사원의 전설

옛날에 반둥(Bandung)이라고 불리는 한 왕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적국의 아름다운 라라 종그랑 공주에 반해서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공주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와의 결혼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공주는 그의 마력을 두려워해 그의 청혼을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하룻밤 만에 천 개의 신전을 쌓는다면 결혼하겠노라는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다.

반둥은 그의 마력으로 많은 악마들을 불러들여 순식간에 신전들을 쌓아올렸다. 새벽녘에 이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된 공주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침이 밝아오면 신호를 보낼테니 신전 하나를 무너뜨리라고 했다. 드디어 아침이 밝아 오자 1000개의 신전을 모두 세운 악마들은 일을 멈추었고 마을 사람들은 공주의 신호에 따라 신전 하나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천 개에서 딱 하나 모자란 999개의 사원이 세워지게 되고, 뒤늦게 공주의 농간에 의해 자신의 꿈이 무너진 것을 안 반둥은 공주를 돌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석상을 일천 번째 신전으로 삼았다.

이곳 사람들은 그 일천 개의 신전이 세워진 곳이 바로 프람바난 사원이며 사원의 중앙에 있는 시바 신전 북쪽 석실의 두르가 상이 바로 라라 종그랑의 석상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프람바난 사원을 라라 종그랑 사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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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카오스의 도시는 무엇으로 굴러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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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카오스의 도시는 무엇으로 굴러가나
인도네시아 여행기(1) - 자카르타
정철용(ccypoet) 기자
지난 9월 20일부터 10월 4일까지 2주간 인도네시아 여행을 다녀왔다. 올해 5월부터 자카르타의 현지법인에서 파견 근무 중인 처남이 부모님과 함께 그곳에 살고 있어서 가족 방문을 겸해 다녀온 여행이었다. 주로 자카르타의 처남 집에 머물면서 자바 섬의 몇 군데 도시를 다녀왔는데, 그 여행의 기록을 4회에 걸쳐 게재한다. 그 첫 회는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다.

자카르타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쯤. 오클랜드에서 출발한 지 13시간 30분 만이다. 직항편이 없어 이렇게 늘어진 비행시간이 그래도 지겹지 않았던 것은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선 여행객으로서의 흥분과 오랜만에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는 설렘 때문이었으리라.

모든 입국 수속을 마치고 걸어 나오니 처남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한다. 공항 청사 주변은 늦은 시간인데도 웬 사람들과 차량들이 그렇게 많은지 마치 저자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숨이 턱 막히는 후끈한 열기의 매캐한 공기와 어지럽고 무질서하게 도로변에 댄 차들에 짐들을 싣느라 정신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뉴질랜드가 아닌 다른 나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주차장까지 걸어가서 짐을 실으면 이런 번잡스러움과 혼란은 없을 텐데…. 속으로 생각하면서 눈살이 조금 찌푸려지는데 처남의 차가 우리 앞에 다가와 선다. 뒷좌석에 올라 탄 우리 가족은 차가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질겁한다. 마치 자동차 경주를 하듯이 앞차들을 추월해 달리는 거친 운전 때문이다. 안전띠를 서둘러 매자, 앞좌석의 처남은 이 정도는 양호한 것이라며 웃는다. 자세히 보니 처남과 운전기사는 안전띠도 매지 않고 있다. 처남 말로는 이 나라에서는 안전띠를 매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긴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땅을 밟은 지 1시간 안에 경험한 이러한 혼란과 무질서는 우리 가족이 자카르타에 머무는 동안 계속 느껴야만 했던 거대한 카오스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할 뿐이었다. 영화 <자카르타>에도 나오듯이 오죽했으면 자카르타가 완전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하는 도시로 여겨지게 되었으랴!

거대한 카오스의 도시

처남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니 마치 군부대 입구의 초소처럼 차단기가 설치된 경비 초소에서 경비원이 나와 신원을 확인하고 차를 들여보낸다. 주로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 이 아파트의 입주민들을 도둑이나 강도 등의 범죄와 폭동 사태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삼엄한 경계 태세는 집을 벗어나 도심의 대형 쇼핑센터나 공항 등의 공공 건물로 들어설 때도 어김없이 이어져 숨이 막히기까지 하다. 이렇게 철저한 차량 검문검색은 지난 해 발리에서 발생한 나이트클럽 폭탄 테러 사건과 최근 자카르타 도심의 마리옷(Marriott) 호텔 주차장 폭발 사건 탓이다. 그러나 둥근 거울이 달린 장비로 자동차 밑을 검사하고 트렁크의 짐과 탑승자까지도 살펴보는 검색요원들의 얼굴에는 어쩐지 진지함이 없어 보이고 시늉만 하는 듯한 느낌이다.

자카르타는 지금도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여행 자제를 요청할 정도로 위험하게 여기고 있는 지역인데, 정작 이곳 사람들은 그러한 위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듯하다. 겉으로는 삼엄한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무심함과 태연함이 지배하고 있는 모습 역시 자카르타의 거대한 카오스를 이루는 일부이다.

그러나 그 거대한 카오스의 밑그림을 이루는 가장 큰 요소는 극심한 빈부 격차다. 처남의 아파트가 자리한 동네는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부촌이어서, 9층 처남의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집들은 하나같이 엄청나게 큰 대저택들이다. 그러나 조금만 벗어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보면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을 볼 수 있다.

▲ 박물관에서 나온듯한 미니 삼륜차 택시 바자이. 창문이 없어 매연이 그대로 들어온다.
ⓒ 정철용
일부 부유층은 기사가 딸린 자가용을 2대, 3대씩 소유하고 있지만 대다수 서민들은 작은 오토바이가 고작이다. 그것도 없으면 비좁고 낡은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창문이 없어서 매연이 숭숭 들어오는 미니 삼륜차 택시 바자이(bajaj)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자가용과 버스는 물론이고 오토바이와 바자이까지 모두 같은 도로를 사용하다보니 서울의 도심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길이 막히는 것은 당연한 일. 여기에 차선과 교통규칙까지도 모두 무시하는 이들의 운전 습관이 더해져 차 안에서 바라보는 도로의 교통 흐름은 답답하고 짜증이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조금만 길이 뚫려도 속도를 내고 중앙선을 넘어 추월하는 운전기사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자카르타에서 운전하는 것은 거대한 카오스를 뚫고 지나가는 스릴 가득한 모험이다.

백화점에서 살짝 엿본 전통문화

개발도상국에서 흔히 목격되는 개발과 보존의 대립은 자카르타의 거대한 카오스에 색채를 더해준다. 그러나 그 대립이 만들어 내는 색채는 어떤 경우에는 강한 충돌 효과를 낳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묘하게 조화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련되고 날렵한 최신형의 승용차와 자동차 박물관에서 막 끌고 나온 것 같은 코믹한 모습의 바자이가 함께 달리는 거리의 풍경이 전자의 예라면, 복잡하고 다양한 인종과 문화와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건물들의 모습은 후자의 예라 하겠다.

자카르타의 현대식 백화점인 빠사라야(Pasaraya)에서 한 층 전체가 인도네시아의 전통 목공예품, 은세공품, 바틱(Batik)제품 등을 판매하는 매장으로 할애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생경함보다는 감동이 앞섰던 것도 바로 그 모습 속에서 거대한 카오스 속에도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가꾸어 나가는 조화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 화려한 색상과 무늬의 바틱 그림. 이 그림 한 장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갔을까.
ⓒ 정철용
바틱은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직물을 말하는데 자연물에서 따온 다양한 문양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한 정교한 무늬와 화려한 색상이 특징이다. 지금은 기계로 찍어내는 바틱도 많다고 하지만 일일이 사람 손을 거치는 제조 과정이 전통 바틱의 특징이며 그렇게 만든 수제품이 더 고급품으로 평가받는다.

너무나 화려하고 인상적이라 기념으로 집에 걸어두고 친구에게 선물로 줄 요량으로 손으로 그리고 서명도 들어가 있는 바틱 그림 세 점을 샀다. 그런데 그림 세 점이 모두 합쳐서 한국 돈으로 2만원! 액자에 들어있지 않고 접혀진 상태로 비닐 안에 포장되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얼마나 싼가! 그러나 나중에 족자카르타를 여행하면서 한 바틱 공방을 둘러보기 전까지는 얼마나 많은 손길이 그 천에 닿아야 했을까를 나는 미처 가늠하지 못했다.

이외에도 자동차에서 오토바이까지, 고양이에서 호랑이까지 없는 게 없는 갖가지 모양의 목공예품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바틱과 각종 공예품을 만들어낸 그 정교하고 섬세한 손재주가 인도네시아의 전통문화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더 놀라운 곳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미니’ 공원, 인도네시아 인다

1970년대 초, 수하르토 대통령의 부인인 이부 티엔 여사가 제안해서 만들었다는 따만 미니 '인도네시아 인다'(Taman Mini "Indonesia Indah"-작은 공원 “아름다운 인도네시아”라는 뜻)가 바로 그곳이다. 현지에서는 흔히 따만 미니라고 불리는 이 공원은 그러나 이름처럼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 마치 날아갈듯이 날개를 펼친 술라웨시섬 남부지역의 독특한 건물
ⓒ 정철용
150헥타르(약 45만여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문화, 자연과 생태 등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15개에 달하는 박물관이 들어차 있을 뿐 아니라, 아름답고 특색 있게 꾸며놓은 갖가지 정원과 공원, 각 종교별 사원, 그리고 각종 오락 유흥시설까지 완비되어 있다. “여기에 오면 인도네시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캐치프레이즈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여기에 인도네시아 27개 지역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지어 그 안에 그들의 주거, 의상, 풍속 등과 관련한 전시물을 전시해 놓은 민속촌도 자리 잡고 있어서, 많은 여행객들에게는 인도네시아 민속촌이라고도 불린다. 공원의 중심에는 인도네시아 지도 모양으로 인공 섬들을 만들어 놓은 커다란 인공 호수가 있고, 그 호수 주변으로 지도에 상응하는 위치에 각 지역별 민속촌이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 수마트라섬 남부지역의 뾰쪽한 첨탑을 지니고 있는 건물. 지붕의 첨탑 수는 방의 개수와 함께 소유자의 지위와 부를 반영한다고 한다.
ⓒ 정철용
이 민속촌만 제대로 둘러보는데도 한나절이 더 걸릴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서 우리는 승용차를 몰고 들어가서 이동하면서 구경을 했다. 지역마다 확연하게 표가 나는 독특한 건축 양식은 매우 이채로왔는데, 특히 술라웨시섬 남부 지역(South Sulawesi)의 날아갈 듯이 하늘로 향한 처마를 가진 건물과 수마트라섬 서부 지역(West Suamatra)의 지붕에 여러 개의 뾰족한 첨탑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외에도 칼리만탄섬 동부 지역(East Kalimantan)의 건물 내벽을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무늬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형태의 나무 계단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 칼리만탄섬 동부 지역의 건물 내벽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무늬. 거미를 본뜬 문양이냐는 내 질문에 안내인은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 정철용
그러나 안내판 하나 서 있지 않고 간혹 서 있는 안내인에게 물어보아도 영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그러한 특이한 형태의 건축양식과 무늬와 나무 계단이 지니고 있는 깊은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입장료와는 별도로 돈을 주고 산 공원 안내문에도 건물의 위치와 개략적인 설명만 있을 뿐이어서 답답할 뿐이었다. 게다가 군데군데 있는 화장실조차도 유료로 운영하고 있어서 기분이 언짢았다.

인도네시아 최고의 관광지로 꾸며 놓고는 이렇게 부실하게 운영하고 있으니 이 또한 자카르타의 카오스를 이루는 또 하나의 모습임이 분명하다.

▲ 칼리만탄섬 동부 지역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나무 계단
ⓒ 정철용
자카르타의 잠 못 이루는 밤

자카르타의 거리와 관광지에서 경험한 이러한 사회문화적 카오스에 적응하는 것 못지않게 내가 빨리 적응해야만 했던 것은 시차와 기후였다. 그러나 5시간 시차는 어렵지 않게 극복하였지만 한밤에도 에어컨이나 선풍기 없이는 견디기 힘든 자카르타의 열대야는 떠나는 날까지 내 잠을 방해하였다.

어렵사리 잠이 들어도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회교 사원의 기도 소리에 나는 잠을 깨고는 하였다. 선풍기를 켜놓고 자려니 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만 했는데, 그러다 보니 새벽 4시만 되면 모스크의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 야릇한 코란 암송 소리를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며칠 잠을 설치다 보니 드디어 몸에 탈이 나기 시작했다. 자카르타에 도착한 지 1주일 정도가 지나자, 피곤하면 잇몸이 욱신거리고 심한 경우 염증이 생기기도 하는 나의 고질병인 치주염이 재발한 것이다. 뉴질랜드로 돌아와서도 2주 동안 치료를 받고 쉬어야만 했을 정도로 통증이 제법 있어서 현지 치과에서 검사를 받고 약을 지어 먹었다.

▲ 수라바야의 호텔 천장에서 발견한 '키블라' 표시. '키블라'는 메카의 카바 신전을 가리키는 방향표시로 이슬람 교도들은 기도할 때 항상 '키블라'를 향한다.
ⓒ 정철용
그런 어느 날, 어김없이 들려오는 새벽의 코란 암송 소리에 잠이 깬 나는 거실 베란다로 나가 멀리 그 소리의 진원지쯤으로 여겨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1시간 정도 더 있어야 하는데도 여기저기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다. 기도를 드리려고 이 이른 시간에 벌써 모두 깨어났구나!

그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인도네시아는 전 국민의 90%가 이슬람교도인 세계 최대의 회교국가라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이 거대한 카오스의 도시 자카르타가 굴러나가는 힘 역시 종교로부터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개발과 보존의 첨예한 충돌이 빚어내고 있는 거대한 카오스를 이곳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의 유일한 무기인 종교로 지금 돌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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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만남의 도시 자카르타

'완전범죄를 뜻한다'는 한국영화 '자카르타'가 지난 연말 극장가에서 히트를 쳤다. 전국 70만 관객 동원이라니 영화팬들 입에 '자카르타 자카르타' 많이도 오르내렸겠다. 그럼 자카르타는 범죄를 지은 사람들이 숨어사는 도시?

자카르타를 방문한 3월 14일, 때마침 인도네시아 와히드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가 대통령궁이 위치한 자카르타 중구 일대에서 열려 좀 소란스럽긴 했어도 자카르타를 범죄와 연결시켜 지난해 우리나라가 영화화한 것은 이 곳 사람들이 알면 기분이 좋지는 않겠다 싶다. 자카르타에서의 이틀이 지나면 발리로 갈 예정이다.

헐리우드는 '남태평양(South Pacific)'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아카데미상을 쥐어주고는 국제적인 휴양지로서 발리를 알리는 일등공신이 됐는데, 우리는 자카르타를 국제적인 범죄도시로 잘못 알릴 수 있는 영화를 떡 하니 내놨으니. 실제로 발리에서는 아직도 영화 남태평양의 주제곡인 '발리 하이'를 상표로 사용한 맥주회사, 여행사, 크루즈회사 등이 성업중인 것을 보면 영화가 한 지역을 국제적인 관광지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인 것만은 틀림없다.

자카르타를 건너뛰어 바로 발리를 둘러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런 기분 있잖은가.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들른 도시에서 공항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공항 창문 밖으로 그저 그 도시의 분위기만 느껴야 할 때. 얼마나 나가서 맘껏 둘러보고 싶던지.

자카르타 국제공항은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의 이름을 따서 수카르노-하타 국제공항이라고 불리운다. 공항청사의 빨간 지붕과 주변 녹음이 어우러져 한적한 느낌을 주고 여객터미널 내부는 국제공항치고는 매우 한산한 편이다. 서울은 3월이라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데 공항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훅' 하니 더운 기운이 발끝부터 가슴까지 순식간에 휩쓸고 올라간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3월은 평균기온 27℃의 사바나(savanna)기후가 위력을 발휘하는 건기(乾期)의 초입이구나.

다행히 스콜(squall)은 6일간의 인도네시아 일정을 비껴갔다. 스콜은 열대지방 관광도중 시시때때로 관광객들의 일정을 방해하며 퍼붓는 열대성 소나기. 지난해 말레이시아 랑카위에서 만났던 스콜은 자동차 보닛을 쿵쿵 두드릴 정도로 위력적이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울보다 약간 큰 대도시 자카르타에는 인구 1,100만이 거주하고 있다. 대통령궁이 있는 중구와 동서남북구를 합쳐 총 5개 구로 이뤄진 자카르타의 중심은 역사적인 건물과 정부기관, 공원, 박물관, 이슬람 사원, 교회 등이 자리잡은 중구 메르데카(Merdeka)광장이다. 또 이 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선 높이 137m의 모나스(MONAS) 탑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탑으로 무게 35kg의 황금이 탑 꼭대기에서 불꽃처럼 빛나고 있다.

그래도 이런 곳은 좀 딱딱하다. 해서 젊은이의 거리로 유명한 '블록M'이 있는 시 남부로 향한다. 때마침 해도 뉘엿뉘엿, 자카르타의 젊음이 기대된다. 블록M은 일단 쇼핑가가 발달돼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은 세계 어디나 그렇듯 그들 취향에 맞는 브랜드의 의류와 악세서리로 포장된 알디론플라자, 메라웨이플라자 등의 백화점이 있고 만남의 장소가 될 서양식 레스토랑도 눈에 띤다. 외국인이 밤 한때를 보낼 수 있는 유흥가와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식당도 길 한 켠에 크게 자리잡았다.

2 억1,000만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 인구의 80%는 이슬람교를 믿는다. 낮에 들렀던 시 동부 '수하르토 전 대통령 기념관'에서 만났던 여학생들처럼 머리에 천을 두른 무슬림들이 대부분이다. 우스운 것은 이들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또는 사원을 갈 때 머리에 둘렀던 천을 벗으면 그때부터는 남학생들과 자유롭게 어울린다는 것이다.

블록M의 활기찬 풍경은 낮에 만난 수줍은 미소의 여학생들과 함께 묘하게 교차된다. 중구와 동·남구를 둘러보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인도네시아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화교들이 모여 사는 곳,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상인들의 활기찬 장사판을 보러 가도 좋다.

자카르타 글·사진=김성철 기자 ruke@traveltimes.co.kr
취재협조-가루다인도네시아항공 한국지점 02-753-8848 발리 투어 02-757-4592

◆ 수하르토 박물관과 인도네시아 민속촌
자카르타의 중심 메르데카광장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1시간30분 가량 달리면 흔히 인도네시아 민속촌이라고 부르는 곳이 나타난다. 볼거리가 한 곳에 그득하기 때문에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잦은 편이다.

'뮤지움 푸르나 박티 페르티위(MPBP)'라는 복잡한 이름의 '수하르토 대통령 박물관'과 '따만 미니 인도네시아 인디(TMII)'라는 인도네시아 각지의 명소를 미니어처로 만들어 전시한 '인도네시아 민속촌'이 이 곳의 주요한 볼거리이다.

수하르토 대통령 박물관은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세계 각국의 정상들과 유명인사들이 인도네시아를 방문, 선물로 남기고 간 '작품'들이 전시된 곳이다. 특히 노태우, 김영삼 등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남기고 간 청자, 백자, 자개장들이 다른 세계 정상들이 선사한 이색적인 선물과 함께 전시돼 일면 '세계속의 한국'의 위상을 보기도 하고 세계 각국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박물관 입구의 '투쟁관(Hall of Struggle)'에는 인도네시아 최고의 조각가들이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헌정한 '라마 탐박'이라는 조각이 전시돼 있다. 이슬람, 힌두, 불교의 상징을 거대한 나무에 부조로 새겨 뿌리가 위쪽을 향하도록 전시한 이 작품은 박물관 입구를 통해 도저히 안쪽으로 들여올 수 없어서 이 작품을 중심으로 밖에서부터 박물관을 지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인도네시아 민속촌으로 불리는 TMII에는 축구박물관, 아이맥스영화관, 통신박물관, 수공예품박물관, 족자카르타의 보로부두르 사원 모형, 새공원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섬 보유국으로 알려진 인도네시아의 모습을 연못 위에 흙을 메우고 잔디를 심고 나무를 가꿔 표현한 '미니 인도네시아'가 이채롭다. '미니 인도네시아'를 조성한 연못 주위로는 가로로 5,000km의 긴 나라만큼이나 다양한 가옥구조를 각 지역별로 그대로 옮긴 미니어처들이 둘러싸고 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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