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열면 눈 덮인 융프라우가 한눈에

[유럽기행 38] 스위스 인터라켄(Interlaken)의 아침
08.05.16 10:24 ㅣ최종 업데이트 08.05.16 10:55 노시경 (prolsk)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머릿속이 깨끗했고 기분이 맑았다. 매일 아침마다 생각나는 회사일 스트레스가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이곳은 십년 넘게 내 마음 속 여행의 이상향으로 남아있던 스위스의 인터라켄(Interlaken)이었고, 호텔의 창문을 통해 알프스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나의 가족은 간밤 아주 늦은 시간에 인터라켄 서역에 도착했고 몹시 피곤했었다. 호텔 앞 바에서 몇 사람만이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 밤 시간의 인터라켄은 조용했었다. 유럽 최고의 대도시 파리에 있다가 밤에 만난 알프스의 산 아래 동네는 아늑하기만 했다.

인터라켄은 어느 계절에 가장 아름다울까?

▲ 인터라켄의 호텔. 알프스의 거점으로 발달한 인터라켄에는 역사가 오랜 호텔이 많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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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인터라켄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 산책길에 세면을 하고 나갈지 잠시 생각하다가 면도만 하고 호텔을 나섰다. 샤워는 아내가 화장을 하는 시간에 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 방이 있는 2층에서 내려와 호텔 로비의 문을 열고 나섰다. 호텔 2층 베란다에는 붉은 바탕에 십자가 문양의 스위스 국기와 함께 베른주(州)의 주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베른주를 상징하는 곰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아!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내 기억 속 눈 쌓인 겨울의 인터라켄은 간 곳이 없고, 여름날 아침의 따스한 햇살이 넓게 퍼지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인터라켄은 어느 계절이 더 좋은지를 생각해 보았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인터라켄은 아름다운 것 같았다. 겨울의 인터라켄은 온통 백색으로 뒤덮인 눈의 나라였고, 여름의 인터라켄은 초록색 초원 위에 설산이 어울리는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

▲ 아레 강. 브리엔츠 호수를 통과한 강물이 툰 호수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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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켄 서역과 동역을 연결하는 회에(Hoheweg) 거리는 아레(Aare)강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거리에서 벗어나 북쪽으로 조금 걸어갔다. 눈앞에 바로 아레강이 보였고 아레강에는 알프스의 빙하 녹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브리엔츠(Brienz) 호수를 통과한 아레강은 툰(Thun) 호수를 향해 거센 물살을 움직이고 있었고, 석회질을 품은 강물은 푸른색 위에 회색을 덧칠하고 있었다.

원래 인터라켄이라는 도시 이름도 '호수의 사이'라는 뜻이고 그 호수는 바로 툰호와 브리엔츠호를 말하는 것이다. 스위스에서 가장 긴 강인 아레강은 스위스의 수도 베른(Bern)을 관통하고 국경에서 라인 강과 합류한다고 한다. 인터라켄의 아레강은 브리엔츠 호수 쪽에서 흘러오고 있었다. 브리엔츠 호수가 있는 동쪽 산위로 아침 해가 눈부셨다. 세상은 밝기만 했다.

▲ 회에 거리. 공원과 함께 호텔과 기념품 가게가 몰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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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알프스를 오르는 등산 기지로 발전했던 인터라켄은 현재도 알프스 융프라우를 오르려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회에 거리에는 호텔과 카지노 외에도 퀼트 가게, 전통옷 가게, 스위스 칼 가게, 목각인형 가게, 스위스 록 크리스탈(Rock Crystal) 가게를 열고 있는 샬렛(Chalet)이 가득 이어진다. 135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빅토리아 융프라우 호텔(Victoria Jungfrau)도 아침 햇살을 받아 거대한 몸체를 빛내고 있었다.

아침의 햇볕 사이로 일단의 일본인 단체 관광객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융프라우(Jungfrau)에 올라가기 위해 저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한 모양이다. 이 일본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들뜬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하는 인터라켄에서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참으로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 애완견과 산책 나온 시민. 맑은 공기 속에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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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견을 데리고 아침 산책을 나온 인터라켄 시민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리를 쉬려고 길가의 벤치에 앉았다가 도로변의 쓰레기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검은 색 쓰레기통의 중간에 흰 줄이 둘러져 있고, 그 위에 'Thank You, Merci, danke'라고 3개 언어가 적혀져 있었다. 독일 민족과 프랑스 민족 등 여러 민족이 어울려서 연방국가를 이룬 스위스에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광경이다. 스위스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도 국민들이 단합하면 얼마든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회에 공원(Hohe Matte)의 잔디밭 뒤편으로 만년설을 머리에 인 융프라우가 눈에 들어왔다. 겨울과 달리 여름에는 융프라우에만 만년설이 쌓여 있고, 그 아래에는 회색의 암벽과 초원 지대가 드러나 있었다. 회에 공원 뒤편의 민가와 호텔에서는 창문을 열면 눈 덮인 융프라우가 사람들을 맞이할 것이다.

스위스 사람은 '센스쟁이'?

▲ 인터라켄의 교회. 뾰족한 첨탑이 알프스의 봉우리들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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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진 나무 뒤편으로 알프스를 닮은 교회의 첨탑이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교회의 첨탑은 산이 날카로운 이곳 알프스와 아름답게 어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교회 앞에는 일본 오츠(大津)시에서 기증한 '우호의 정원'이 자리하고 있고, 일본 오츠 시장의 이름까지 각인된 비석이 서있었다.
나는 일본 정원과 알프스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뭉툭한 산과 어울리는 일본의 정원은 이 인터라켄에서 부조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의 평화를 만끽하며 인터라켄 동역(Interlaken Ost)까지 천천히 걸었다. 잠시 다리를 쉬었다가 숙소로 다시 돌아가는데 다리가 꽤 피곤했다. 아침 시간이라 회에 거리에는 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았다. 나는 왔던 길을 다시 걸어서 돌아갔다. 나는 피곤하게 걸으면서, 많이 걸으려면 역시 신발이 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늘 알프스에서 트래킹을 하는 딸을 위해 이곳 인터라켄에서 등산화를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 딸과 함께 신선한 알프스의 유제품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인터라켄 시내로 나왔다. 융프라우에 올라가는 등산열차를 타는 것은 조금 미루고 어린이용 등산화 파는 가게를 찾아가기로 했다. 융프라우에 올라가는 시간은 조금 늦어지겠지만 나는 자유 여행자였다.

호텔에서 가까운 신발가게에는 어른들 구두와 운동화만 팔고 있었다. 하지만 인터라켄에 어린이 등산화를 파는 곳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 가게 아주머니는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면 어린이 등산화와 운동화를 파는 가게가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 인터라켄의 등산화 가게. 장사를 아주 잘하는 여주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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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짧게 자른 젊은 인터라켄 여인이 넓은 등산화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이 여주인은 신영이의 발 크기를 대충 보더니 이내 예쁜 등산화를 가지고 왔다. 신영이 발에 그 등산화를 신겨 보더니 조금 더 큰 등산화를 가져왔고 다시 신발을 신기고 능숙하게 운동화 끈도 매준다.

이 여주인은 대부분의 스위스 사람들이 그렇듯이 영어도 능숙한데다가 눈치도 빠르고 손놀림도 빨랐다. 아내와 나는 이 여자가 참 장사를 잘 한다고 동시에 말했다. 유럽 여행에서 유럽의 각 나라 사람들과 부딪쳐 보면, 유럽 내에서 스위스 사람들만큼 센스 있고 행동이 빠른 사람들도 없다.

아내는 내가 몇 년째 신고 있는 헌 운동화도 버리자고 했다. 내 운동화가 뒤축이 많이 닳았고 발뒤꿈치 쪽이 찢어진 곳이 있는 데다가 이 신발 가게의 예쁜 운동화들이 아내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정든 신발을 버리기 아까웠지만 아내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아내는 가격이 불합리하게 비싼 제품만 아니라면 한번 사고 싶은 것을 꼭 사고야 마는 집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화의 착용감은 예상 외로 가벼웠다. 우리는 새로운 신발을 신고 인터라켄 동역을 향해 발길을 서둘렀다. 이 인터라켄의 운동화는 이후 유럽여행의 수많은 도보여행을 지켜 주었다. 나는 이 운동화를 볼 때마다 스위스의 인터라켄과 융프라우가 생각났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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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년 100m씩 후퇴한다
<유럽기행 20> 스위스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기행
08.01.07 10:05 ㅣ최종 업데이트 08.01.07 12:11 노시경 (prolsk)

내유럽 여행의 꿈은 알프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알프스 아이거(Eiger, 3970m) 북벽의 산허리를 뚫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산악열차는 터널 속을 계속 달리고 있었다. 산악열차는 마치 땅굴 속 7.2km를 기어가는 긴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기어식으로 설치된 이 산악열차는 최대경사 25°의 급경사면을 쉬지 않고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거대한 암반 속의 철길에서 스위스인들의 도전 정신에 감탄하고 있었다.

▲ 아이거반트 역에서 내려다본 전경. 전망창 아래로 그린델발트가 아스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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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행 산악열차는 관광객들이 겪을 기압차를 견디게 하기 위해서 중간 역인 아이거 반트(Eigerwand, 2865m) 역에서 5분간 정차를 했다. 나는 딸과 함께 내려 아이거 북벽의 아래를 조망할 수 있는 관측창으로 뛰어갔다. 아이거 북벽 약 1800m 아래 쪽에 있는 그린델발트(grindelwald) 마을이 마치 하나의 점같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나의 눈 바로 앞에는 마치 칼로 잘린 것 같은 짙은 갈색의 석회암 절벽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 절벽은 중생대 쥐라기 시대에 만들어진 석회암이었다. 이 석회암은 눈앞의 알프스가 쥐라기 당시에는 바다였다는 표시이다. 나는 살아 움직이는 지구의 표면을 내다보고 있었다.

알프스의 만년설은 거의 직각에 가까운 절벽에 쌓이지 못하고, 절벽 아래쪽 산허리에 높게 포개어져 있었다. 푸른 하늘과 함께 알프스에 걸린 흰 구름을 배경으로 흰 눈이 마치 꿈같이 쌓여 있었다. 그 정경은 마치 비행기에서 구름 아래의 지구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이 몽롱했다.

▲ 아이스미러 역 전망창 밖으로 거대한 알프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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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열차는 캄캄한 터널 속으로 조금 더 나아가다가 멈춰 섰다. 아이스 미러(Eismeer, 3160m) 역에서 다시 5분간 정차. 열차가 잠시 쉬어간다는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알프스의 산경을 보러 뛰어나갔다. 내가 왜 뛰어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설레는 마음이 나를 뛰게 만들었을 것이다.

▲ 아이스미러 역 설경. 눈앞으로 알프스의 만년설이 켜켜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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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융프라우 철로는 1896년에 아돌프 구에르 첼러(Adolf Guyer-Zeller)라는 엔지니어에 의하여 착공되어 1912년에 완공된 역사적인 철로이다. 당시 융프라우 철로는 산비탈을 깎지 않고 화강암 암반 속으로 철길을 내면서, 알프스의 자연을 보호하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열차로 다시 돌아오면서 보니, 아이스미러 역 전망대 한쪽에 아이스미러 역 백년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 설명판이 붙어있었다.

▲ 아이스미러 역 설명판. 해머를 들고 동굴을 파내려간 역사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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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명판에는 무려 16년 동안 해머로 바위를 쪼아 만든 철로의 개통 당시 모습과 함께 뻥 뚫린 아이스 북벽의 전망창이 아스라한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사진 속의 터널 건설 인부가 자그마한 해머로 아이스 북벽을 내려치는 사진은 조금은 무모해 보였지만, 저 해머로 수없이 내려친 움직임이 이 장엄한 동굴을 만들었을 것이다.

백년 세월 전, 관광객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을 당시에, 스위스인들은 4000m가 넘는 봉우리에 어떻게 철길을 놓을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저 아름다운 봉우리까지 철길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서 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호기심은 알프스의 많은 것을 변하게 했고,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은 현재의 스위스인들에게 많은 경제적 풍요를 선사하고 있었다.

나의 딸, 신영이는 오른손으로 ‘V’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알프스의 높은 높이가 신영이에게 묘한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신영이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강한 희열을 느끼게 하는 저 눈밭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자연의 풍광과 차가운 공기 속의 알프스 정경에 눈이 부셨다.

묀희(Monch, 4099m) 봉 속의 동굴 속을 달리던 열차는 클라이네 샤이데크(Kleine Scheidegg, 2061m) 역에서 출발한 지 50분 후에 유럽 최고 높이의 역,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3454m) 역에 여행자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알프스에서 기차를 타고 오를 수 있는 최고봉인 융프라우요흐에는 알프스의 정상 부근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여행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화강암 암반 속에 만들어진 동굴같이 어두운 터널을 걸어 나왔다.

▲ 융프라우요흐역. 기차를 타고 가장 높이 올라올 수 있는 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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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의 ‘융(Jung)’은 젊음을 뜻하고, ‘프라우(frau)’는 처녀를 뜻하니, ‘융프라우’는 젊은 처녀라는 뜻이다. 그리고 ‘요흐(joch)’는 아래라는 뜻이니 ‘융프라우요흐’는 융프라우 봉우리의 아래라는 뜻이다. 융프라우, 즉 젊은 처녀는 융프라우 아래의 인터라켄에 살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수녀이다.

스위스 인들은 이 젊은 수녀의 헌신적인 종교 활동에 감명을 받아,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젊은 처녀의 봉우리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베른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해발 4158m의 ‘젊은 처녀의 봉우리’는 해발 4478m의 마터호른(Matterhorn)과 함께 스위스 알프스의 4000m 급 봉우리 가운데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융프라우요흐 역에서 밖으로 나서니, 환한 신천지가 눈앞에 갑자기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우선 점심식사를 하면서 알레치 빙하(Aletsch gletscher)를 감상하기로 했다. 나는 융프라우요흐 역에 있는 5개의 식당 중에서 셀프 서비스로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이 식당도 융프라우요흐의 바위를 파내고 들어가서 세워진 고산 지대의 식당이다.

우리가 고른 음식은 각종 야채 샐러드와 과일, 쏘시지 요리, 감자튀김, 사과 주스, 오렌지 주스였고, 생각보다 음식 가격은 비싸지 않았다. 뷔페식으로 진열된 샐러드와 과일은 우리가 직접 골랐고, 쏘시지와 감자튀김이 나오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나는 이 높은 곳에 자리한 식당과 식당의 음식보다도 식당의 통유리를 통해서 비치는 빙하의 모습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알레치 빙하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융프라우와 융프라우 남동쪽의 알레치 빙하 일대는 2001년부터 알프스 산맥에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긴 알레치 빙하는 융프라우에서부터 무려 26.8km를 뻗어나가고, 주변의 알프스 만년설은 남쪽의 이탈리아까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었다. 빙하의 평균너비가 1800m에 면적이 115㎢에 이른다고 하니, 산 정상에 흐르는 빙하의 규모가 대단하다.

▲ 알레치 빙하. 유럽에서 가장 긴 빙하로서 세계자연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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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이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고 있었다. 이 얼음의 강은 강이지만, 꽁꽁 얼어 있었다. 얼어 있는 빙하는 1년에 약 50cm 가량 미세하게 인터라켄 반대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느림과 관조의 미학이 느껴지는 정경이다.

빙하 주변의 만년설은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하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빙하 위를 밟아보고, 걷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빙하 속으로 빠져보고도 싶었다. 머리 속에는 한계상황의 공포 속에서 빙하 위를 마구 달리는 나의 모습이 있었다. 계속 달리다 보니, 빙하가 녹은 물이 론(Rhône) 강의 상류로 흘러들고 레만(Leman) 호수와 프랑스를 지나 지중해를 향하고 있었다.

달리면서 보니, 아쉽게도 이 알프스의 거대한 빙하는 빠른 속도로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초래한 지구 온난화가 이 아름다운 빙하를 녹이고 있는 것이다. 알레치 빙하는 매년 아래쪽의 100m 정도가 녹아 없어지면서, 점점 위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빙하가 없어진 알프스,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지구 온난화가 눈 쌓인 알프스에까지 퍼지고 있었다.

얼음 궁전을 지나 구름 속으로 들어가다
[유럽기행 21]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기행
08.01.15 09:28 ㅣ최종 업데이트 08.01.15 10:19 노시경 (prolsk)

우리는 알프스의 융프라우요흐에 자리 잡은 얼음궁전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융프라우요흐 역에 내렸을 때부터 이상이 없었던 나의 신체는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현기증이라고 해야 할까? 머리가 약간 띵했다. 그동안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신체의 느낌이다.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계단을 성급하게 오르다가 소위 고산증을 느끼게 된 것이다.

가장 괴로운 것은 호흡이 힘들다는 점이었다. 마치 100m를 전력질주하고 숨이 가쁘듯이 호흡이 힘들었다. 나는 계단에서 멈춰 섰다. 딸 신영이도 같은 증세를 느끼고 있었다. 구토까지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융프라우 전망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축 늘어져서 앉아 있는 모습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사람의 몸이란 것은 또한 신기한 것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이 적응되고, 두통이 사라지고, 호흡도 정상이 되었다. 나는 다시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올랐다.

▲ 얼음궁전 입구. 빙하 아래의 얼음세계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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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융프라우요흐의 알레치 빙하 20m 밑, 얼음으로 만든 전시장인 얼음궁전(Eispalast)이었다. 산 정상에 만들어놓은 전시장으로는 규모가 꽤 큰 얼음궁전은 내가 초등학교 어릴 때에 책에서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펴던 공간이었다. 나는 당시에 책 속의 흑백사진으로 얼음궁전을 접할 수 있었고, 알프스의 산을 파서 얼음궁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었다.


나는 어릴 적 상상의 나라로 들어가고 있었다. 천장이 동그랗게 파 들어간 은빛 투명한 동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미끈하고 영롱한 바닥이 내 발 밑에 이어지고 있었다. 온통 얼음으로 이루어진 벽면에는 백색 조명이 얼음세계를 밝히며 환상의 세계를 더하고 있었다.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에 드디어 도달한 느낌, 그것도 큰 행복 중의 하나이다.


역시 가장 신이 난 것은 어린이, 신영이었다. 신영이는 사진을 찍을 때에 대부분 오른손을 들어 'V'자를 그리는데, 이곳에서는 손을 모은 채 입을 벌리고 춥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영이 사진 중 유일하게 포즈가 다른 사진이 이곳에서 나왔다. 그리고 신영이는 어느 곳에서 찍은 사진보다 활짝 웃고 있었다.

▲ 얼음궁전. 이글루와 에스키모, 물개가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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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궁전의 녹지 않는 얼음 조각들이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다. 아무리 4000m에 가까운 산 아래라고 하지만 수천 명 관광객의 체온 속에서도 이 얼음 궁전의 얼음이 녹지 않고 일정한 모양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얼음궁전에는 관광객들 눈에 보이지 않는 온도조절 특수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이 기계를 이용하여 이곳의 온도를 계속 영하 2℃로 유지하고 있었다.

얼음궁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데, 이 관광객들로부터 생기는 온기는 융프라우요흐 각 식당의 난방에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에너지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는 유럽 선진국다운 모습이다. 걸어서 움직이는 관광객들의 온기를 어떻게 모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통로의 공기를 더 차가운 외부공기와 순환시키는 시스템을 이용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로 얼음 조각상들이 몇 년씩 녹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다.


얼음궁전은 1934년에 융프라우 아래 마을인 그린델발트(grindelwald)와 벵겐(Wengen) 출신의 두 산악인이 알레치(Aletsch) 빙하 아래에 굴을 파서 만든 전시공간이다. 지금도 매년 약 50cm 가량 아래로 이동하는 빙하 때문에 정기적으로 얼음궁전 지붕은 보수가 이루어진다. 빙하 아래의 얼음세상! 얼음궁전이 융프라우에 만들어질 당시만 해도 빙하 아래의 공간을 파내서 전시공간을 만드는 것은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인 발상이었고, 이 시대를 앞서는 안목은 지금도 이곳 1000㎡ 공간에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얼음 궁전의 아치형 통로를 지나자 여러 전시실에 북극곰, 물고기, 독수리, 물개, 이글루 속 에스키모, 유빙 위의 펭귄, 유럽 연합 마크를 장식한 생쥐들이 살고 있었다. 이 예술품들은 모두 안이 시원스럽게 훤히 비치는 예쁜 속살을 가지고 있었다.

▲ 푸른 조명아래 얼음조각. 얼음으로 만든 조각들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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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궁전에 어울리는 조명은 흰색이다. 흰색 조명이 흰색의 얼음세계를 더욱 환상적으로 빛나게 한다. 조금 더 걸어가니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의 얼음 조각이 자수정 보석 같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마치 크리스탈로 조각된 지상의 궁전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얼음 궁전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온 남녀 대학생 3명이 우리와 같은 동선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친구들 덕분에 얼음조각들을 배경으로 어렵지 않게 가족사진 여러 장을 남겼다. 남자 친구 2명과 함께 융프라우까지 올라온 여대생은 전문가용 DSLR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나도 사진 찍어 줄께요. 사진기 줘 봐요.”


인공 조명 속의 얼음궁전 안에는 사진기에 필요한 빛이 부족했다.

“그런데, 사진이 어둡게 나왔네요. 설정된 데로 찍었는데, 감도 설정을 더 높여야 될 것 같은데요?”

“이 친구 사진기가 안 좋아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 사이에 섞인 내 조국의 후배들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나는 16년 전 스위스 알프스를 여행하던 나의 과거를 생각했다. 나도 유럽에서 사귄 대학생 친구들과 저렇게 유쾌하게 여행을 다녔었다. 나는 그들이 참으로 씩씩하게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 푼 한 푼 아끼며 배낭여행을 하고 있을 그들을 다시 만나면 내가 시원스럽게 한 턱 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 플라토 전망대 북쪽 전경. 많은 여행자들이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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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음궁전을 나온 후 계단을 올라 작은 고원지대에 자리한 플라토(Plateau) 전망대로 나갔다. 따뜻한 실내에서 찬바람 몰아치는 설산으로 나간 것이다. 사람들 왕래가 잦아 발 아래 눈은 녹아서 서걱거리는 곳도 있지만, 발에 밟히는 눈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순백색의 융프라우 설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설경의 장관은 가슴 속의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버릴만큼 시원했다. 고원 정상에는 십자가 형상의 스위스 국기가 온통 백색의 세상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백색 설원에서는 붉은색이 가장 선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미리 고려라도 한 듯이 스위스 국기는 이곳에 잘 어울렸다.


한 스위스 아저씨가 우리 가족사진을 가로로 찍더니 다시 세로로 찍고, 스위스 국기가 잘 펄럭이는 장면을 찍는다며 다시 찍어주었다. 국기 아래에서 모든 관광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높은 알프스 아래에 펄럭이는 국기가 상징적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 플라토 전망대 남쪽. 빙하 저 멀리는 이탈리아이다.
ⓒ 노시경
스위스

아침에 환상적으로 구름이 걷혔던 융프라우 정상에 구름의 무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가끔 구름이 끼었지만, 융프라우 산 아래의 모습은 잘 보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게 고산지대의 날씨인데, 이 정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우리 뒤에 오는 여행자들은 구름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 같다.

융프라우를 둘러싼 구름이 점점 우리를 포위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 구름은 마치 안개같이 보였지만 그것은 구름이었다. 조금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구름 속을 헤맬 것이다. 구름 위에 뜬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는 구름 속에 뜨지는 않았지만 구름 속을 걷고 있었다.

3500m 높이에서 맛있는 라면 먹기
[유럽기행 32]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스핑크스 전망대
08.04.02 09:00 ㅣ최종 업데이트 08.04.02 09:25 노시경 (prolsk)

스위스 알프스의 융프라우요흐. 나의 가족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한가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알프스의 산정에서 최대한 시간을 보내다가 하산하기로 했다. 융프라우요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기로 했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우체국이 있다. 세계 각국으로 우편 엽서를 보낼 수 있는 우체국에서 신영이가 학교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내겠다고 한다. '탑 오브 유럽(Top of Europe)' 매점에서 융프라우요흐를 찍은 그림 같은 엽서 한 장과 스위스 국기가 그려진 빨간 볼펜을 샀다.

딸은 이 높은 산위에서 엽서를 보낸다는 사실에 너무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빠! 우리가 한국에 먼저 도착할까? 이 엽서가 선생님에게 먼저 도착할까?"

나는 우리의 몸과 이 엽서가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들어올 거라고 말해 주었다.

▲ 스핑크스 전망대 연결통로. 융프라우의 암반을 뚫은 길이 개미굴같이 이어진다.
ⓒ 노시경
스위스

신영이가 엽서를 쓰고 아내가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나는 스핑크스 전망대로 향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융프라우요흐역 주변 매점과 식당에 비해 이 통로는 비교적 한가한 편이었다. 융프라우요흐의 암반을 뚫어서 만든 길다란 땅굴이 개미굴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부는 보통 지상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지만 이 통로의 위쪽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고,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스핑크스 전망대의 높이는 3571m. 여행자들이 융프라우요흐에서 올라가는 가장 높은 위치이자 내가 사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높이이다. 고속 엘리베이터는 전망대까지 108m를 순식간에, 정확히 25초 만에 올라갔다. 이 새로운 2기의 엘리베이터는 1996년 6월에 새로 만들어졌고, 이 엘리베이터 옆에는 1940년대에 제작된 과거의 엘리베이터가 보존되어 있다. 과거의 엘리베이터도 버리지 않고 이 높은 산의 역사로 만드는 그들의 안목이 돋보인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면 스핑크스 전망대 테라스를 향한 나선형 계단이 있고, 그 오른편에는 고급시계를 파는 시계가게가 있다. 가게의 점원도 한국 젊은이이고, 그 가게의 시계를 차고 사진으로 서 있는 광고모델도 한국의 인기 연예인이다. 가끔 외국 젊은이들의 키스 세례를 받는 것이 민망하지만, 알프스 산정의 한국 연예인은 기념사진 모델로 꽤 인기가 있었다.

▲ 스핑크스 전망대. 동서남북 모든 방향의 알프스를 감상할 수 있다.
ⓒ 노시경
융프라우요흐

드디어 나는 스핑크스전망대 테라스로 나왔다. 아까 클라이네 샤이데크(Kleine Sheidegg)에서 보았던 작은 점이 이 스핑크스 전망대였을 것이다. 격자 모양의 철제 바닥 밑으로 융프라우의 설원과 깎아 만든 듯한 절벽이 바로 내려다보였다. 아찔한 발아래의 정경을 보면서 비로소 내가 높은 높이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무수히 뚫려 있는 격자의 구멍 사이에 구름이 있었고, 전망대의 둥근 돔 위에도 구름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안개같이 보이는 희미함은 바로 구름이었다. 그 구름 사이에는 최고 시속이 250km에 달한다는 알프스의 강풍이 넘나들고 있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1924년에 지어진 휴게소가 있었는데 그만 화재로 소실되었고, 3년간의 난공사 후 1970년에 이 자리에 들어선 것이 바로 스핑크스 전망대이다. 1996년에 개축된 이 복합건물에는 전망대 테라스 외에도 유럽의 방송전파 중계소와 천체관측소, 상대성원리 연구소가 함께 들어서 있다.

그래서 이 전망대 건물의 옥상에는 저녁에 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천체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물론 아쉽게도 여행자들은 접근할 수 없다. 이 복합건물의 외벽은 융프라우에 어울릴 정도로 인상적이다. 건물 외벽은 돌을 벽돌같이 만들어 쌓았고, 번개가 칠 때 발생하는 전력을 저장하는 수많은 철끈이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이 전망대 테라스에서 동서남북 모든 방향의 알프스를 즐겨 감상했다. 아침에 그리도 맑던 융프라우 산정에 구름이 몰려왔다가 지나가고 있었고, 하늘은 잠시 얼굴을 보였다가 다시 구름 사이로 몸을 숨겼다. 나는 구름 위에 떠다니고 있었다. 날씨가 흐린 날 융프라우에 오른 사람들은 융프라우 봉우리를 구경도 못한 채 사진만 찍고 내려가지만, 나는 융프라우에 구름이 걸친 모습이라도 감상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눈앞에 4158m 높이의 융프라우 정상이 떠억 버티고 서 있었다. 만년설에 쌓인 고봉이 나의 시야 전면을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대자연을 대하며 가슴 벅찬 느낌을 만끽해 보았다. 융프라우의 왼편에는 4105m 높이의 묀히(Monch) 봉이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산세가 완만하지 않고 깎아지른 듯한 장엄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산봉우리의 만년설은 선글라스를 끼고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부셨다.

▲ 스핑크스 전망대에서의 전망. 산 위에 구름이 걸려 있다.
ⓒ 노시경
스위스

전망대 테라스 격자 바닥 아래로는 모두 3000~4000m에 달하는 고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고, 그 사이로 빙하 줄기가 길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지구의 산하가 모두 내 발 밑에 있는 느낌이다. 나는 나를 둘러싼 거친 삼각형 모양의 알프스 봉우리들이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눈을 쌓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서 있는 스핑크스 전망대는 피라미드를 지키려고 서 있는 '스핑크스'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보이는 봉우리까지 걸어가는 사람들이 설원 위의 점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저 봉우리를 돌아서면 또 다시 새로운 풍경이 여행자들을 압도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념을 가지고 눈 위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 딸이 융프라우요흐의 매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는 그 쪽으로 발을 뗄 수는 없었다. 설원 위의 하이킹이 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미리 여정을 준비했을 것인데,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

나는 스핑크스 전망대의 매서운 바람을 뒤로 하고 실내로 돌아왔다. 신영이의 엽서에는 선생님께 보내는 글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신영이는 길다란 통같이 생긴 붉은 우체통에 엽서를 고이 넣고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 융프라우요흐 매점의 안내문. 한글은 반갑지만 라면과 물 값이 너무 비싸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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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사랑스런 알프스에서의 마지막을 한국 라면을 먹으며 장식하기로 했다. 우리의 수중에는 융프라우요흐 매점에서 한국의 매운 컵라면을 먹을 수 있는 무료 쿠폰이 3장이나 있었다. 매운 컵라면은 공짜지만, 뜨거운 물 가격이 4 스위스 프랑, 젓가락 가격이 1.5 스위스 프랑이나 했다.

이 가격이 매점에 한글로 적혀있는 것은 반가웠지만, 그 가격 자체는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마실 물이 클라이네 샤이데크에서 가져 온 비싼 물이라지만, 관광대국 스위스답게 모든 것, 작은 것 하나하나에 돈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알프스가 너무 아름답기에 이 높은 물가가 용서되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라면을 너무나 좋아하는 신영이가 예상 외로 컵라면을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점심식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따뜻한 물까지 따라서 가져온 컵라면 한 개를 반납하러 매점 쪽으로 갔다.

매점 앞 식당에는 단체로 패키지여행을 온 한국 관광객들이 모두 모여서 컵라면을 먹는 일대장관이 연출되고 있었고, 그 옆에서 유럽의 관광객들도 젓가락질을 해가며 매운 라면을 정말 맛있게 먹고 있었다. 매점 앞은 매운 라면을 사려는 외국인들로 혼잡했고, 한 중동계 외국인이 컵라면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면서, 우리의 맛있는 컵라면을 그에게 그냥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따뜻한 물까지 담겨 금방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나에게 정말 고맙다며 밝게 웃었다.

▲ 3,500m 높이에서 라면 먹기. 설원을 바라보며 먹는 맛이 꿀맛이다.
ⓒ 노시경
스위스

그런데 우리 자리로 돌아와 보니 신영이가 엄마의 컵라면을 뺏어 먹고 있었다. 나는 내 컵라면의 라면 면발을 신영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신영이는 스위스에서 라면을 먹는다는 사실을 너무 신기해하고 있었고,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라면을 먹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외국 여행 시에 그 나라 음식만을 먹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야 그 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3500m 높이의 알프스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은 정말 끝내주게 맛있었다. 자극적인 라면 스프가 녹은 국물이 잎 안에서 꿀물인양 맴돌았다. 아마도 눈쌓인 설원을 바라보며 따뜻한 국물과 면발을 먹는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켰을 것이다.

나는 휴지통에 적힌 한글 설명문을 보고 다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라면 먹고 남은 국물은 휴지통에 버리지 말라'는 설명문이었다. 라면 국물이 너무 맵고 자극적이어서 많은 한국인들이 라면 국물을 휴지통에 버렸던 모양이다. 평소에 라면 국물을 다 마시지 않는 나는 국물을 다 마셔버리고 컵라면 통을 휴지통에 던졌다. 하수를 산 아래의 그린델발트(Grindelwald)까지 보내어 처리하는 이곳을 괜히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컵라면을 마지막으로 융프라우요흐를 떠나기로 했다. 그린델발트로 가는 기차시간을 확인하며 우리는 융프라우요흐 역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내 옆의 갈색 머리, 파란 눈의 어린 아이가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볼에 생긴 주근깨가 귀여웠다. 이 아이의 엄마는 고산증 때문에 기운이 없었다.

하산하는 기차 속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이 들었고, 객차 안은 조용했다. 왜 모두 잠이 들었을까? 높은 산에서의 고산증 때문일까? 고산증 때문에 융프라우요흐에서 신체가 피곤했기 때문일까? 기차 안에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어서 덥기 때문일까? 아니면 객차 내에 사람이 많아 이산화탄소 농도가 너무 높기 때문일까?

신영이는 엄마의 품에 안겨 골아 떨어졌고, 아내도 잠이 들었다. 그런 가족을 찍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졸게 되었다. 눈을 떠 보니, 어느새 기차는 묀희 봉의 땅속을 나와 지상의 클라이네 샤이데크를 향하고 있었다.

언제 다시 융프라우요흐에 다시 오를 수 있으려나? 그게 언제쯤이 될까? 그때 나는 융프라우에서 잠을 청하며 밤하늘의 별을 헤아려 볼 것이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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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궁전을 지나 구름 속으로 들어가다
[유럽기행 21]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기행
노시경 (prolsk)

우리는 알프스의 융프라우요흐에 자리 잡은 얼음궁전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융프라우요흐 역에 내렸을 때부터 이상이 없었던 나의 신체는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현기증이라고 해야 할까? 머리가 약간 띵했다. 그동안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신체의 느낌이다.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계단을 성급하게 오르다가 소위 고산증을 느끼게 된 것이다.

가장 괴로운 것은 호흡이 힘들다는 점이었다. 마치 100m를 전력질주하고 숨이 가쁘듯이 호흡이 힘들었다. 나는 계단에서 멈춰 섰다. 딸 신영이도 같은 증세를 느끼고 있었다. 구토까지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융프라우 전망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축 늘어져서 앉아 있는 모습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사람의 몸이란 것은 또한 신기한 것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이 적응되고, 두통이 사라지고, 호흡도 정상이 되었다. 나는 다시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올랐다.

▲ 얼음궁전 입구. 빙하 아래의 얼음세계가 펼쳐진다.
ⓒ 노시경
스위스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융프라우요흐의 알레치 빙하 20m 밑, 얼음으로 만든 전시장인 얼음궁전(Eispalast)이었다. 산 정상에 만들어놓은 전시장으로는 규모가 꽤 큰 얼음궁전은 내가 초등학교 어릴 때에 책에서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펴던 공간이었다. 나는 당시에 책 속의 흑백사진으로 얼음궁전을 접할 수 있었고, 알프스의 산을 파서 얼음궁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었다.


나는 어릴 적 상상의 나라로 들어가고 있었다. 천장이 동그랗게 파 들어간 은빛 투명한 동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미끈하고 영롱한 바닥이 내 발 밑에 이어지고 있었다. 온통 얼음으로 이루어진 벽면에는 백색 조명이 얼음세계를 밝히며 환상의 세계를 더하고 있었다.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에 드디어 도달한 느낌, 그것도 큰 행복 중의 하나이다.


역시 가장 신이 난 것은 어린이, 신영이었다. 신영이는 사진을 찍을 때에 대부분 오른손을 들어 'V'자를 그리는데, 이곳에서는 손을 모은 채 입을 벌리고 춥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영이 사진 중 유일하게 포즈가 다른 사진이 이곳에서 나왔다. 그리고 신영이는 어느 곳에서 찍은 사진보다 활짝 웃고 있었다.

▲ 얼음궁전. 이글루와 에스키모, 물개가 조각되어 있다.
ⓒ 노시경
스위스

얼음궁전의 녹지 않는 얼음 조각들이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다. 아무리 4000m에 가까운 산 아래라고 하지만 수천 명 관광객의 체온 속에서도 이 얼음 궁전의 얼음이 녹지 않고 일정한 모양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얼음궁전에는 관광객들 눈에 보이지 않는 온도조절 특수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이 기계를 이용하여 이곳의 온도를 계속 영하 2℃로 유지하고 있었다.

얼음궁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데, 이 관광객들로부터 생기는 온기는 융프라우요흐 각 식당의 난방에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에너지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는 유럽 선진국다운 모습이다. 걸어서 움직이는 관광객들의 온기를 어떻게 모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통로의 공기를 더 차가운 외부공기와 순환시키는 시스템을 이용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로 얼음 조각상들이 몇 년씩 녹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다.


얼음궁전은 1934년에 융프라우 아래 마을인 그린델발트(grindelwald)와 벵겐(Wengen) 출신의 두 산악인이 알레치(Aletsch) 빙하 아래에 굴을 파서 만든 전시공간이다. 지금도 매년 약 50cm 가량 아래로 이동하는 빙하 때문에 정기적으로 얼음궁전 지붕은 보수가 이루어진다. 빙하 아래의 얼음세상! 얼음궁전이 융프라우에 만들어질 당시만 해도 빙하 아래의 공간을 파내서 전시공간을 만드는 것은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인 발상이었고, 이 시대를 앞서는 안목은 지금도 이곳 1000㎡ 공간에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얼음 궁전의 아치형 통로를 지나자 여러 전시실에 북극곰, 물고기, 독수리, 물개, 이글루 속 에스키모, 유빙 위의 펭귄, 유럽 연합 마크를 장식한 생쥐들이 살고 있었다. 이 예술품들은 모두 안이 시원스럽게 훤히 비치는 예쁜 속살을 가지고 있었다.

▲ 푸른 조명아래 얼음조각. 얼음으로 만든 조각들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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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궁전에 어울리는 조명은 흰색이다. 흰색 조명이 흰색의 얼음세계를 더욱 환상적으로 빛나게 한다. 조금 더 걸어가니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의 얼음 조각이 자수정 보석 같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마치 크리스탈로 조각된 지상의 궁전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얼음 궁전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온 남녀 대학생 3명이 우리와 같은 동선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친구들 덕분에 얼음조각들을 배경으로 어렵지 않게 가족사진 여러 장을 남겼다. 남자 친구 2명과 함께 융프라우까지 올라온 여대생은 전문가용 DSLR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나도 사진 찍어 줄께요. 사진기 줘 봐요.”


인공 조명 속의 얼음궁전 안에는 사진기에 필요한 빛이 부족했다.

“그런데, 사진이 어둡게 나왔네요. 설정된 데로 찍었는데, 감도 설정을 더 높여야 될 것 같은데요?”

“이 친구 사진기가 안 좋아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 사이에 섞인 내 조국의 후배들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나는 16년 전 스위스 알프스를 여행하던 나의 과거를 생각했다. 나도 유럽에서 사귄 대학생 친구들과 저렇게 유쾌하게 여행을 다녔었다. 나는 그들이 참으로 씩씩하게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 푼 한 푼 아끼며 배낭여행을 하고 있을 그들을 다시 만나면 내가 시원스럽게 한 턱 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 플라토 전망대 북쪽 전경. 많은 여행자들이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방향이다.
ⓒ 노시경
스위스

나는 얼음궁전을 나온 후 계단을 올라 작은 고원지대에 자리한 플라토(Plateau) 전망대로 나갔다. 따뜻한 실내에서 찬바람 몰아치는 설산으로 나간 것이다. 사람들 왕래가 잦아 발 아래 눈은 녹아서 서걱거리는 곳도 있지만, 발에 밟히는 눈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순백색의 융프라우 설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설경의 장관은 가슴 속의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버릴만큼 시원했다. 고원 정상에는 십자가 형상의 스위스 국기가 온통 백색의 세상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백색 설원에서는 붉은색이 가장 선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미리 고려라도 한 듯이 스위스 국기는 이곳에 잘 어울렸다.


한 스위스 아저씨가 우리 가족사진을 가로로 찍더니 다시 세로로 찍고, 스위스 국기가 잘 펄럭이는 장면을 찍는다며 다시 찍어주었다. 국기 아래에서 모든 관광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높은 알프스 아래에 펄럭이는 국기가 상징적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 플라토 전망대 남쪽. 빙하 저 멀리는 이탈리아이다.
ⓒ 노시경
스위스

아침에 환상적으로 구름이 걷혔던 융프라우 정상에 구름의 무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가끔 구름이 끼었지만, 융프라우 산 아래의 모습은 잘 보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게 고산지대의 날씨인데, 이 정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우리 뒤에 오는 여행자들은 구름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 같다.

융프라우를 둘러싼 구름이 점점 우리를 포위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 구름은 마치 안개같이 보였지만 그것은 구름이었다. 조금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구름 속을 헤맬 것이다. 구름 위에 뜬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는 구름 속에 뜨지는 않았지만 구름 속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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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년 100m씩 후퇴한다
<유럽기행 20> 스위스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기행
노시경 (prolsk)

내유럽 여행의 꿈은 알프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알프스 아이거(Eiger, 3970m) 북벽의 산허리를 뚫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산악열차는 터널 속을 계속 달리고 있었다. 산악열차는 마치 땅굴 속 7.2km를 기어가는 긴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기어식으로 설치된 이 산악열차는 최대경사 25°의 급경사면을 쉬지 않고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거대한 암반 속의 철길에서 스위스인들의 도전 정신에 감탄하고 있었다.

▲ 아이거반트 역에서 내려다본 전경. 전망창 아래로 그린델발트가 아스라이 보인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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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행 산악열차는 관광객들이 겪을 기압차를 견디게 하기 위해서 중간 역인 아이거 반트(Eigerwand, 2865m) 역에서 5분간 정차를 했다. 나는 딸과 함께 내려 아이거 북벽의 아래를 조망할 수 있는 관측창으로 뛰어갔다. 아이거 북벽 약 1800m 아래 쪽에 있는 그린델발트(grindelwald) 마을이 마치 하나의 점같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나의 눈 바로 앞에는 마치 칼로 잘린 것 같은 짙은 갈색의 석회암 절벽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 절벽은 중생대 쥐라기 시대에 만들어진 석회암이었다. 이 석회암은 눈앞의 알프스가 쥐라기 당시에는 바다였다는 표시이다. 나는 살아 움직이는 지구의 표면을 내다보고 있었다.

알프스의 만년설은 거의 직각에 가까운 절벽에 쌓이지 못하고, 절벽 아래쪽 산허리에 높게 포개어져 있었다. 푸른 하늘과 함께 알프스에 걸린 흰 구름을 배경으로 흰 눈이 마치 꿈같이 쌓여 있었다. 그 정경은 마치 비행기에서 구름 아래의 지구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이 몽롱했다.

▲ 아이스미러 역 전망창 밖으로 거대한 알프스가 있다.
ⓒ 노시경
스위스

산악열차는 캄캄한 터널 속으로 조금 더 나아가다가 멈춰 섰다. 아이스 미러(Eismeer, 3160m) 역에서 다시 5분간 정차. 열차가 잠시 쉬어간다는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알프스의 산경을 보러 뛰어나갔다. 내가 왜 뛰어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설레는 마음이 나를 뛰게 만들었을 것이다.

▲ 아이스미러 역 설경. 눈앞으로 알프스의 만년설이 켜켜이 쌓여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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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융프라우 철로는 1896년에 아돌프 구에르 첼러(Adolf Guyer-Zeller)라는 엔지니어에 의하여 착공되어 1912년에 완공된 역사적인 철로이다. 당시 융프라우 철로는 산비탈을 깎지 않고 화강암 암반 속으로 철길을 내면서, 알프스의 자연을 보호하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열차로 다시 돌아오면서 보니, 아이스미러 역 전망대 한쪽에 아이스미러 역 백년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 설명판이 붙어있었다.

▲ 아이스미러 역 설명판. 해머를 들고 동굴을 파내려간 역사를 볼 수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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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명판에는 무려 16년 동안 해머로 바위를 쪼아 만든 철로의 개통 당시 모습과 함께 뻥 뚫린 아이스 북벽의 전망창이 아스라한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사진 속의 터널 건설 인부가 자그마한 해머로 아이스 북벽을 내려치는 사진은 조금은 무모해 보였지만, 저 해머로 수없이 내려친 움직임이 이 장엄한 동굴을 만들었을 것이다.

백년 세월 전, 관광객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을 당시에, 스위스인들은 4000m가 넘는 봉우리에 어떻게 철길을 놓을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저 아름다운 봉우리까지 철길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서 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호기심은 알프스의 많은 것을 변하게 했고,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은 현재의 스위스인들에게 많은 경제적 풍요를 선사하고 있었다.

나의 딸, 신영이는 오른손으로 ‘V’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알프스의 높은 높이가 신영이에게 묘한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신영이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강한 희열을 느끼게 하는 저 눈밭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자연의 풍광과 차가운 공기 속의 알프스 정경에 눈이 부셨다.

묀희(Monch, 4099m) 봉 속의 동굴 속을 달리던 열차는 클라이네 샤이데크(Kleine Scheidegg, 2061m) 역에서 출발한 지 50분 후에 유럽 최고 높이의 역,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3454m) 역에 여행자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알프스에서 기차를 타고 오를 수 있는 최고봉인 융프라우요흐에는 알프스의 정상 부근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여행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화강암 암반 속에 만들어진 동굴같이 어두운 터널을 걸어 나왔다.

▲ 융프라우요흐역. 기차를 타고 가장 높이 올라올 수 있는 역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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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의 ‘융(Jung)’은 젊음을 뜻하고, ‘프라우(frau)’는 처녀를 뜻하니, ‘융프라우’는 젊은 처녀라는 뜻이다. 그리고 ‘요흐(joch)’는 아래라는 뜻이니 ‘융프라우요흐’는 융프라우 봉우리의 아래라는 뜻이다. 융프라우, 즉 젊은 처녀는 융프라우 아래의 인터라켄에 살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수녀이다.

스위스 인들은 이 젊은 수녀의 헌신적인 종교 활동에 감명을 받아,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젊은 처녀의 봉우리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베른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해발 4158m의 ‘젊은 처녀의 봉우리’는 해발 4478m의 마터호른(Matterhorn)과 함께 스위스 알프스의 4000m 급 봉우리 가운데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융프라우요흐 역에서 밖으로 나서니, 환한 신천지가 눈앞에 갑자기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우선 점심식사를 하면서 알레치 빙하(Aletsch gletscher)를 감상하기로 했다. 나는 융프라우요흐 역에 있는 5개의 식당 중에서 셀프 서비스로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이 식당도 융프라우요흐의 바위를 파내고 들어가서 세워진 고산 지대의 식당이다.

우리가 고른 음식은 각종 야채 샐러드와 과일, 쏘시지 요리, 감자튀김, 사과 주스, 오렌지 주스였고, 생각보다 음식 가격은 비싸지 않았다. 뷔페식으로 진열된 샐러드와 과일은 우리가 직접 골랐고, 쏘시지와 감자튀김이 나오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나는 이 높은 곳에 자리한 식당과 식당의 음식보다도 식당의 통유리를 통해서 비치는 빙하의 모습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알레치 빙하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융프라우와 융프라우 남동쪽의 알레치 빙하 일대는 2001년부터 알프스 산맥에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긴 알레치 빙하는 융프라우에서부터 무려 26.8km를 뻗어나가고, 주변의 알프스 만년설은 남쪽의 이탈리아까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었다. 빙하의 평균너비가 1800m에 면적이 115㎢에 이른다고 하니, 산 정상에 흐르는 빙하의 규모가 대단하다.

▲ 알레치 빙하. 유럽에서 가장 긴 빙하로서 세계자연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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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이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고 있었다. 이 얼음의 강은 강이지만, 꽁꽁 얼어 있었다. 얼어 있는 빙하는 1년에 약 50cm 가량 미세하게 인터라켄 반대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느림과 관조의 미학이 느껴지는 정경이다.

빙하 주변의 만년설은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하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빙하 위를 밟아보고, 걷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빙하 속으로 빠져보고도 싶었다. 머리 속에는 한계상황의 공포 속에서 빙하 위를 마구 달리는 나의 모습이 있었다. 계속 달리다 보니, 빙하가 녹은 물이 론(Rhône) 강의 상류로 흘러들고 레만(Leman) 호수와 프랑스를 지나 지중해를 향하고 있었다.

달리면서 보니, 아쉽게도 이 알프스의 거대한 빙하는 빠른 속도로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초래한 지구 온난화가 이 아름다운 빙하를 녹이고 있는 것이다. 알레치 빙하는 매년 아래쪽의 100m 정도가 녹아 없어지면서, 점점 위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빙하가 없어진 알프스,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지구 온난화가 눈 쌓인 알프스에까지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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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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