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에서 만난 병령협과 병령사

맥적산 석굴

▼ 운영자 알림: 중국의 오지를 탐험하는 독자 이준만씨의 오지 여행기 그 네번째 입니다. 지난번엔 옥황상제도 놀라 쉬고 갈만한 소삼협과 소소삼협의 비경을 소개해많은 독자분들이 놀라워 했습니다.

이번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실크로드를 소개합니다. 그 중에서도 병령협과 병령사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인터넷상에 실크로드 여행기로 병령사 석굴은 많이 올라오지만 병령협은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아울러 이준만씨의 주옥같은 사진들은 '크게 보기'를 클릭해서 보시길 권장합니다.

중국 고대사에서 복희씨[伏羲氏/伏犧氏]는 삼황(三皇)의 첫머리에 꼽는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 또는 신으로서 어렵(漁獵)을 가르치고 팔괘(八卦)를 만들었다 한다. 그의 고향 천수에서 복희씨의 사당과 깍아내린 바위 절벽에 새긴 수많은 불교예술을 꽃피운 맥적산 석굴을 구경한 후 우리는 황하에 있는 병령협과 병령사를 찾아 길을 나섰다.

☞ 맥적산 석굴 사진 크게 보기

우리는 란주에서 버스를 타고 류가협댐(刘家峡大坝)에서 내려, 보트를 타고 병령사로 향하였다. 배를 타고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중 양쪽의 산들은 나무하나 풀한포기 구경할 수 없는 황무지의 산들뿐이다.

저기서 흘러내리는 진흙들이 황하에 스며들어 물의 색깔이 황토색이어서 황하라는 가보다 라는 생각을 하였다.

황하 주변의 모습들 ☞ 큰 사진으로 보기

청해성에서 발원하여 7개의 성을 지나가는 황하는 매년 약 45.5만평방km의 진흙이 황하로 유실된다고 한다.

중국의 진흙유실 방지대책으로 제방들을 쌓고 있는데, 2020년까지 그 제방을 모두 쌓으면 매년 4억톤이상의 진흙유실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어느새 병령협에 들어서자, 풀한포기 없는 황량한 바위들이 마치 성곽처럼 높다랗게 솟아있었다. 모두들 카메라를 들어 풍경을 찍기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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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령협 파노라마 ☞ 큰 사진으로 보기

사실 병령사 석굴의 모습보다는 병령협의 풍경에 더 심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병령협은 병령사가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란주에서 북쪽으로 황하를 따라 거슬러 약 110km 에 있는 병령사(柄靈寺)석굴은 서진(西秦) 건홍(建弘)원년(서기 420년, 그 많은 석굴중에서 연대가 정확히 표시된 것은 이곳밖에는 없다.)에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현재 석굴은 183개, 크고 작은 돌로된 조상(雕像)은 694개, 진흙으로 만든 것이 82개, 벽화가 900 평방미터, 이 모든 작품들이 당나라 시절, 특히 측천무후 시절에 만든 것이 2/3 를 차지한다.

병령사(炳灵寺)의 최초 이름은 당술굴(唐述窟),강(羌)족어로“귀신굴(鬼窟)이라는 의미이다. 그 후에 용흥사(龙兴寺), 영암사(灵岩寺) 등으로 불리다가 명나라 영락때 장족어로 10만불(十万彿)이라는 뜻의 병령사(炳灵寺)라 칭하고 있다.

이중에서 125번 굴의 석가모니 상이 병령사 석굴중 걸작품에 속한다. 그리고 벽화는 6국(六國)시대의 서북부 지역의 사회풍습, 서민정서, 음악과 춤등의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169번과 175번굴은 각각 300원을 주고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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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에는 맥적산 석굴, 병령사 석굴, 둔황의 막고굴, 유림굴, 서천불동굴 등이 있지만, 그중에서 둔황의 막고굴의 단연 으뜸으로 친다. 모두 그 모양들이 다르게 되어 있다.

그중에서 막고굴은 가는 모래입자로 된 토양 때문에 큰 굴을 파고 정중앙에 부조형식의 석가상과 제자상, 넓은 동굴안에는 온갖 벽화로 치장되었지만 맥적산과 병령사는 바위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둔황의 막고굴처럼 큰 동굴이 존재하지 않고 바위 표면에 자그마한 굴을 파서 석가상과 벽화를 만들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유림굴은 벽화의 모양이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탐험가들이 이 유림굴을 발견하였을 당시, 이곳이 곧 정토의 세계구나 라고 했다.

유림굴의 토양은 막고굴보다 굵은 입자와 약간의 자갈이 섞여 있어 막고굴보다는 큰 동굴을 파지 않고 약간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서천불동굴은 유림굴보다 더 굵은 자갈과 모래로 되어 있어, 굴을 파기에는 무척 힘든 토양을 갖고 있었다.

병령사 안쪽에 있는 모습- 마치 요새나 성곽의 모습을 하고 있다. ☞ 큰 사진으로 보기

그래서 이곳 각각의 굴들이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토양과 밀접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굴들은 시대가 변하면서 색깔을 덧칠하고 여러가지 조각상도 각기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초기 서진때의 벽화들은 선과 색깔이 매우 거칠고 단순함을 띄었지만, 당나라때 와서는 선이 매우 부드럽고, 색은 화려함을 자랑한다.

그리고 서하시대나 원나라때의 그림은 그림이 매우 단순하고, 화려한 색깔을 칠하지도 아니하였다.

과연 시대가 흐르면서 불교의 예술이 어떻게 변하고, 서양의 기독교 예술이 가미되면서 벽화의 모습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석굴의 안내자들이 설명을 하지만, 불교에 대한 지식과 불교예술에 대한 심미적인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있었다.

병령사 석굴의 파노라마 ☞ 큰 사진으로 보기

단지 장안을 나와 서역으로 가는 상인들이나 군인들 모두, 무시무시한 사막을 넘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가야하는 그들로서는 그들의 안전과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불교에 의지하고, 그 기원이 담긴 염원을 이곳 석굴에 표현하고 또한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곳에서 높다란 대불을 보며 우리의 실크로드 여행에 대한 심도있는 가치가 가득하길 빌어보았다.

도깨비뉴스 블로거= 이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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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으로 가는 유일한 길, 하서주랑을 지나다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⑧] 란주의 백탑산 공원, 그리고 하서주랑
조수영(sy0707) 기자
▲ (사진 위) 황하 제1교는 황하에 놓인 수백 개의 다리 중 가장 먼저 세워진 철교이다. 당시 청해성과 신강지구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로 동서교통의 핵이었다.(사진 아래) 황하 제1교 아래에 양가죽 뗏목. 양의 머리와 네 발목을 떼어낸 통가죽에 공기를 넣어 부력을 얻는다.
ⓒ 조수영
란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백탑산 공원(白塔山公園: 바이타산공유엔)

시내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백탑산 공원으로 향한다. 공원은 언덕 위에 지어진 백탑사와 백탑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황하를 따라 상류로 가다가 황하 제1교를 건너면 오를 수 있다.

황하 제1교는 황하에 놓인 수백 개의 다리 중 가장 먼저 세워진 철교이다. 이 철교는 프랑스인이 설계한 다리로 당시 청해성과 신강지구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로 동서교통의 핵이었다고 한다.

더운 날씨에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갈증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백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니 란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황하 제1교 아래로 누런 황하가 흐르고 있다.

사원의 중심에 백탑산 공원의 상징물인 백탑이 있었다. 기단은 8각을 3층으로 쌓았는데 연꽃무늬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탑신의 아랫부분이 둥근 항아리 모양으로 된 것은 티베트의 불탑양식이고, 그 위에 7층 8면의 탑 형태는 중국의 불탑양식이다. 서로 다른 두 양식을 혼합한 퓨전 건축 형태인 것이다. 각 층의 각 면에는 불상이 조각되어 있고, 모서리에는 방울을 달았다.

백탑산 공원의 백탑의 유래는 이러하다. 칭기즈칸이 전국을 통일하기 바로 직전에 티베트 불교의 법왕에게 불법을 청하자 법력이 뛰어난 승려를 몽골로 보냈다. 이때 란주에 이른 승려가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원나라는 이곳에 기념탑을 세워 그를 기념하였다고 한다.

명나라 시기에 현존하는 백탑의 형태로 중건되었고, 청나라 강희제 때 보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백탑 뒤에 있는 사원 또한 겉모습은 중국식이지만 그 안에서 수행하는 승려의 대부분은 라마승이라 한다.

이밖에 코끼리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상피북과 청동종 등도 볼 수 있다. 처음에 이곳은 높은 곳에서 란주를 방위하는 요새로 만들어졌으나, 지금 백탑 주변은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경내에는 관광객보다 여가를 즐기려는 란주 시민들로 북적였다.

▲ (사진 왼쪽) 백탑을 중심으로 조성된 백탑산 공원 (사진 오른쪽) 백탑의 아래쪽은 티베트의 불탑 건축양식을, 위쪽은 중국식 탑 양식을 사용했다.
ⓒ 조수영
▲ (사진 위) 란주에 오면 반드시 먹어봐야 한다는 우육면 (사진 아래) 음식을 파는 곳 중에 청진(淸嗔)이라 쓰인 곳이 많다. 이슬람교도가 많은 만큼 이곳의 음식들은 돼지고기를 일체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 조수영
저녁으로 란주에 오면 꼭 맛보라는 우육면을 먹었다. 소고기 국물에 말아주는 국수다. 시원하고 얼큰한 맛이라는데 내 입맛에는 느끼하고 누린 냄새까지 나는 것 같다. 고추장까지 뿌려 먹었는데도 영 시원치가 않다.

가욕관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란주역으로 갔다. 역 앞 광장에는 천리마상이 있는데 날아가는 제비를 뒷발로 밟고 달리는 모습이다. 란주 시내에 있는 감숙성 박물관의 동분마(銅奔馬)를 본뜬 것이다.

동분마는 한나라 장군의 분묘에서 발굴된 것으로 실제는 길이 45cm, 높이 34.5cm의 크기의 청동상이다. 일명 '마도비연(馬跳飛燕)' 또는 '마답비연(馬踏飛燕)'이라고도 하는데 하늘을 나는 제비보다 더 빨리 달리는 한혈마 또는 천리마를 의미하는 것이다.

▲ 란주역. 광장에는 제비를 밟고 있는 천리마상이 있다.
ⓒ 조수영
처음 타보는 중국의 침대 열차

란주에서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까지의 거리는 754km인데, 열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란주역에는 침대칸 전용 대기실이 있었다. 대기실에서 충전도 하고 넓은 의자에서 휴식도 취할 수 있었다. 깨끗한 화장실도 따로 구비되어 있어 모두 씻고 닦느라 여념이 없었다. 열차에서는 씻는 것이 힘들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수도 하고 신발도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러나 열차에 타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화장실보다 더 좋은 세면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객실용 슬리퍼도 있었다.

중국의 열차 좌석은 네 종류로 나누어진다. 가장 싼 가격으로 딱딱한 좌석인 잉쭈어(硬座)에서는 4명 또는 6명이 마주보고 가는데 의자를 뒤로 젖힐 수 없게 되어 있다. 부드러운 의자인 루안쭈어(軟座)는 우리나라 무궁화호와 비슷한 것 같다.

침대칸으로는 딱딱한 잉워(硬臥)와 편안한 루안워(軟臥)가 있다. 잉워는 6인 1실로 되어 있는데 각 칸은 칸막이는 있으나 문이 없어 복도에 드러나 있다. 이름은 딱딱한 침대지만 보통 수준의 쿠션이 깔려있다.

우리는 4가지의 좌석 중 가장 비싸다는 4인 1실의 루안워를 탔다. 창가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2층 침대 2개가 마주보고 있다. 깨끗한 시트와 이불, 베개, 보온병, 슬리퍼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6인실과 달리 칸마다 문이 있어 안전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복도에는 따뜻한 물이 준비되어 있어 항상 차를 마시는 중국인들의 생활을 말해준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9시간의 기차여행은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 4인 1실의 루안워는 칸마다 문이 있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2층 침대가 마주보고 있다. 복도에는 따뜻한 물이 준비되어 있어 항상 차를 마시는 중국인들의 생활을 말해준다.
ⓒ 조수영
하서주랑을 지나다

난주에서 가욕관까지 가는 열차는 오른쪽엔 고비사막을, 왼쪽으로는 만년설의 기련산맥(祁蓮山脈: 치롄산맥)을 끼고 달린다.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시작이다. 중원에서 서역으로 갈 때나 서역에서 중원으로 들어올 때 이곳 이외에는 길이 없다. 하서란 황하의 서쪽을 뜻하는 것이고, 주랑은 복도를 의미한 것이다. 재미있는 이름이다.

이 긴 복도는 무려 800km에 이른다. 또 말이 복도지 그 폭도 무려 40∼100km 이상 된다. 감숙성의 기다란 모양과 일치한다. 기련산맥으로 둘러싸인 이 복도를 일본인들은 좁은 회랑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 불렀다.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를 지나간다. 그러나 늦은 밤 출발한 열차의 창밖은 암흑뿐이었다.

▲ 서역으로 유일한 길, 하서주랑. 오른쪽엔 고비사막을, 왼쪽으로는 만년설의 기련산맥(치롄산맥)을 끼고 달린다. (직접 그림)
ⓒ 조수영

실크로드와 한혈마(汗血馬)

옛날 서역에 대완이란 나라가 있었다. 지금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었다. <사기>에는 대완국에 좋은 말이 많은데, 그 중 피땀을 흘린다는 한혈마는 천마의 후손이라고 적혀 있다.

이 나라에는 하늘에 닿는 높은 산이 있어 그 위에 천마가 내려와 논다. 그런데 이를 잡을 수가 없어 산 아래 오색 암말을 방목하여 암내를 피우면 이 천마가 내려와 교배를 하여 새끼를 낳았고, 그것이 한혈마, 천마의 자식이라 천마자라고도 부른다 했다.

실제 이곳에서 방목 되는 말들은 현재에도 체구가 크고 온몸이 주로 검붉은 색이다. 여타 지역의 말들에 비해 힘이 있어 빠르고 오래 달린다고 정평이 나 있다.

한혈마가 피땀을 흘리는 까닭은?

피땀을 흘린다는 기록의 근거는 말들은 주로 발목 부근과 어깨뼈 근처에 기생충이 서식하는데 전속력으로 달릴 때 급속하게 혈관이 팽창하고 그로 인해 사람의 모공과 같은 부분이 부풀어 올라 땀이 배출하면서 기생충이 서식하는 곳에서 피가 약간 섞여서 나온다는데 있다.

또 단순히 흘리는 땀이 검붉은 피부색에 의해 언뜻 피처럼 보인다는 설도 있다. 하여튼 당시의 사람들은 이것이 하늘의 축복을 받은 증표로 생각했다.

날쌘 말을 얻기 위한 한무제의 노력

한 무제의 말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천적인 흉노와 싸우는데 가장 큰 약점이 말이었기 때문이다. 장건이 서역을 개척하고 돌아와 올린 보고에서 한혈마의 존재를 들은 무제는 무척이나 기뻤다.

이후 날쌘 한혈마는 주된 교역물품이었지만, 실은 최상급의 한혈마는 한나라 사절의 눈에 들키지 않게 이사성에 숨겨 기르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한무제는 황금으로 말을 만들어 대완에 보내어 이사성의 한혈마를 보내줄 것을 청했다. 이를 거절하자 자존심을 상한 한나라 사절은 그 황금마를 망치로 두드려 깨버리고 돌아왔다.

화가 난 무제는 이광리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대완 정벌을 시켰으나 실패하였다. 2차 원정군은 병력 6만 명에 말 3만 필의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살아 돌아온 병력은 겨우 1만 명에 불과했으나 순종 한혈마를 탈환해 오는 데는 성공했다.

이때 무제는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를 지어 칭송했다. 한무제가 천마를 얼마나 애지중지하였는가를 다음의 시 한 편으로 알 수 있다.

천마가 오네 서극에서 오네
만리를 넘어 중국으로 오네
신령한 위엄을 이어받아 외국을 항복시키니
유사를 건너 모든 오랑캐가 복종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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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협댐에 반쯤 잠긴 병령사 석굴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⑦] 란주의 병령사 석굴
조수영(sy0707) 기자
▲ 병령사의 대표격인 제 171굴의 대불. 당대에 조성된 현암좌불은 높이가 약 30m인데, 상반신은 천연의 석주를 이용하여 조성했고 하반신은 찰흙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 조수영
다시 서쪽으로...

천수에서 란주까지의 거리는 300km나 된다.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다. 신기한 것은 그 먼 거리를 가면서 그 넓은 땅에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산꼭대기까지 개간해 놓은 밭이 있고, 염소나 양을 키우고 있는 목동이 보인다.

마침 밀 수확 계절이라 곳곳에 널어놓은 밀짚들의 모습이 재미있다. 산비탈의 중턱쯤에는 마치 인위적으로 판 것처럼 보이는 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협곡운동에 의해 생긴 자연현상이다. 이곳의 주민들에게는 곡식 저장고나 농기구 보관창고로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우박이 떨어졌다. 그 지름이 1㎝가 넘는다. 차들이 모두 멈춰 섰다. 혹시나 해서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봤다가 손바닥이 뚫리는 줄 알았다. 몇 분 사이에 주위는 온통 하얀 구슬의 세상이 되었다. 다양한 풍경과 변화하는 날씨 덕분에 6시간의 긴 이동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 (사진 위) 천수에서 란주로 가는 길.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사진 아래) 갑자기 떨어지는 엄지 손톱만한 우박이 멈출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 조수영
황하의 시작, 란주(蘭州, 란저우)

란주는 기다랗게 생긴 감숙성(甘肅省:깐수성)의 성도로 중국대륙의 거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육도의 심장이라 불리는 곳이다. 란주부터는 자연환경이나 사람들의 분위기가 현저히 바뀐다. 여기서부터는 사막이다. 오아시스마다 도시가 발달해 있다. 사람들도 이슬람교도인 회족이 많이 살고, 위구르인 등 소수민족이 많이 보인다. 한족들을 전략적으로 많이 이주시켜서인지 도심에서는 한족이 많이 보인다.

또한 이곳은 유가협댐의 건설로 풍부해진 수력발전, 난주에서 옥문유전까지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의 건설로 풍부한 석유, 교통의 요지라는 점에서 서북지역 최대의 공업도시로 발전했다.

시내에 들어서자 누런 황하가 도심의 중심을 흐르고 있다. 강가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었고 도심도 깨끗하고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상류로 가니 아파트공사가 한창이다. 머지않아 우리의 한강처럼 아파트들의 철벽으로 쌓이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 (사진 위) 란주 시내 중심을 흐르는 황하.(사진 아래) 감숙성의 성도로 발전한 란주
ⓒ 조수영
유가협댐으로 반쯤 잠긴 병령사(炳靈寺: 빙링쓰) 석굴

병령사 석굴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란주 시내에서 2시간 정도 황하 상류를 향해 달린다. 황하를 끼고 달리기 때문에 강가에서 아침 일찍 기공체조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황하의 발원지인 만큼 강변 공원에는 '황하모친상' 조각이 있다. 상류로 가니 험준한 산세 탓인지 곳곳에 교통사고가 나 있다.

▲ (사진 위) 란주 시내에서 2시간 동안 황하를 끼고 달린다. 병령사로 가는 길은 황량하고 험준한 협곡이 이어진다.(사진 아래) 1974년에 완성된 유가협댐은 높이가 148m, 발전 전기량이 122만㎾에 달한다. 중국 서북지구에 공업용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댐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호수는 길이 65㎞, 너비 4.5㎞, 면적 137㎢에 달한다.
ⓒ 조수영
누런 능선들을 지나고 또 지나서 유가협(劉家峽)댐에 도착했다. 유가협댐은 댐의 크기도 크고 방류량도 어마어마하지만 협곡을 막아서 만든 탓인지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는 이 댐을 후진타오가 직접 설계했다고 하지만 자세히 확인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 후진타오는 감숙성의 청화대학교에서 하천발전 분야를 전공했다. 문화혁명기간 동안 일체의 정치활동을 하지 않고 이곳에서 일하면서 혁명의 광풍에 휘말리지 않았던 것이다.

댐에 있는 선착장에서 병령사까지는 50㎞, 보트를 타고 한 시간 거리이다. 댐건설로 생긴 인공호수와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절벽을 즐기다 보면 산 위에 병령사의 한부분인 불예대(佛爺臺)가 보인다. 이곳이 고대에 대상들이 황하를 건넜던 지점이다. 선착장에 내려 선장과 한 시간을 약속하고 병령사 계곡으로 들어선다.

▲ (사진 위) 댐건설로 생긴 인공호수와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절벽을 즐기다 보면 산 위에 병령사의 한부분인 불예대(佛爺臺)가 보인다. (사진 아래)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멀리 하사 산벽에 조각된 현암좌불이 시야에 들어온다.
ⓒ 조수영

▲ 병령사 석굴. 거대한 현암좌불을 중심으로 석굴이 조정되어 있다. 와불상은 댐건설로 그 자리를 옮겨야 했다.(직접 그림)
ⓒ 조수영
병령(炳靈)은 티베트어로 '십만불'이라는 뜻인데, 천불동, 만불동 등과 같이 많다는 의미이다. 병령사 석굴은 5호 16국 시대인 420년 서진시대부터 시작해서 명대까지 조성되었으나 룡흥사(龍興寺)로 불리던 당나라 때 가장 활발하게 석굴이 지어졌다. 송대에 이르러서도 토번과 서하의 침입에 대처하는 의미로 불심을 모으기 위해서 많은 참배자가 찾았다.

이에 따라 불상에 대한 공양이나 동굴의 수리가 계속 이어졌고 원나라 이후에는 라마불교가 유행해서 라마불교 양식의 석각이 조각되었다. 약 1500년간 183개의 석굴과 776구의 불상이 조성되었다.

석굴은 크게 주 석굴이 있는 하사, 계곡 상부가 되는 상사, 그리고 이 중간지역인 중사의 세 구역으로 나뉜다.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멀리 하사(下寺) 산벽에 조각된 현암좌불(懸巖座佛)이 시야에 들어온다. 크고 작은 석굴은 상하로 나뉘어져 산기슭을 따라 2km에 걸쳐 이어진다. 풍부하고 다채로운 조각과 지금도 색채가 뚜렷하고 아름다운 보살, 비천 등의 벽화가 남아 있다.

▲ 서진시대부터 약 1,500년간 183개의 석굴과 776구의 불상이 조성되었다.
ⓒ 조수영

▲ 제70굴 십일면관음보살입상. 굴은 당대에 만들어졌지만 입상은 명대의 것으로 복식이 화려하고 기법이 정교하다.
ⓒ 조수영
높이 27m, 풍만한 현암좌불

병령사 석굴군의 대표격인 현암좌불은 당대에 조성되었으며 높이가 27m인데, 상반신은 천연의 석주를 이용하여 조성했고 하반신은 찰흙을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바위자체가 입자가 작고 점착력이 좋은 사암으로 되어 있어 뚫거나 조각하기에 좋았다.

석불이 어찌나 큰지 강의 반대편에 서서야 한눈에 들어온다. 불상의 자태는 풍만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거대한 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된 석굴들이 서로 잘 조화되어 장관을 이룬다. 원래 대불 앞에는 다층누각이 있었지만 청대 말 화재로 소실되었다.

옛날 사냥꾼이 사냥을 하다가 이곳에 이르게 되었는데 절벽에서 오색의 빛이 발하는 것을 보고 대불을 조성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다리 밑에는 계곡 위쪽 상사로 가는 지프차가 있다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석굴의 아랫부분에 있던 와불상은 댐건설로 물이 차오르면서 보존의 어려움이 있자 따로 절을 지어 실내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예술적으로는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169번과 172번 석굴은 사다리를 타고 석벽을 올라가야 하는데 입구가 막혀 있다.

왜 막아놓았으며, 어떻게 하면 저 곳에 갈 수 있느냐고 안내원에게 물으니 주로 전문가들이 저 곳으로 올라가는데 가려면 한 사람당 300위엔을 더 내야 한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선장과 약속한 시간 때문에 서둘러 선착장으로 돌아와야 했다.

▲ 댐건설로 자리가 옮겨진 16호굴의 와불상
ⓒ 조수영
1) 감숙성(甘肅省:깐수성) - 황하 상류와 영하 자치구, 섬서성, 사천성, 청해성, 신강 자치구, 내몽고 자치구, 몽골공화국과 접한다. 중국과 서방세계를 연결해주는 성으로,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이다. 행정구역은 7개의 구와 5개의 시, 9개의 현급 시, 60개의 현, 7개의 자치현으로 나뉜다.

2) 후진타오 (1942년~ )- 2004년. 중국 공산당 내 최고 권력자리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에 선출되었다.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에 이어 제4세대로 불린다.

3) 토번- 중국 당나라, 송나라 때에 ‘티베트 족’을 이르던 말.

4) 서하- 1032년에 티베트계 탕구트 족 이원호가 감숙성과 내몽골의 서부에 세운 나라. 불교가 성하였고 서하 문자를 만드는 등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었으나, 1227년에 몽골에게 망하였다.

5) 라마불교 - 인도에서 티베트로 전하여진 대승 불교가 티베트의 고유 신앙과 동화하여 발달한 불교

6) 현암좌불(懸巖座佛) - 벽에 걸려 있고 앉아 있는 불상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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蘭州 炳靈寺가는 길

난주 2006. 7. 15. 14:15

8. 蘭州 炳靈寺가는 길


우리 일행은 서안에서 중국동방항공편으로 란주로 갔다. 서안공항에서 항공기를 탑승하기 직전에 일몰을 잡을 수 있었다. 중국 스튜어디스의 친절에 감사한다.

란주공항에서 바로 병령사 석굴을 향해 우리는 이동하였다. 척박한 산악과 불모지의 황야가 이어지는 길을 우리는 한참 달려갔다.

란주공항에서 바로 병령사 석굴을 향해 우리는 이동하였다. 척박한 산악과 불모지의 황야가 이어지는 길을 우리는 한참 달려갔다.

황하가 아닌 청하를 따라 쾌속정이 바람을 가르며 달려 간다.

황하 양쪽으로 기암괴석이 이어서 나타나 우리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황하 양쪽으로 기암괴석이 이어서 나타나 우리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갑자기 물이 흙탕물이 되더니 이름 그대로 황하가 격랑을 치며 급하게 흘러 가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는 기암괴석 사이를 달려, 그리고 푸른 물결, 누런 물결을 헤치면서 병령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우리가 타고 다녔던 쾌속정

병령사 입구에서 장사를 하는 이 할아버지는 순진무구한 사람의 웃음을 보내며 호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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