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여행의 히든카드 ‘칠일빙천’

가욕관의 모습

▼ 운영자 알림: 중국의 오지를 탐험하는 독자 이준만씨의 오지 여행기, 그 다섯번째 입니다. 지난번 부터 실크로드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옥황상제도 놀라 쉬고 갈만한 소삼협과 소소삼협의 비경을 소개한 이후 실크로드까지많은 독자분들이 놀라워 했습니다.

중국의실크로드 여행기는 인터넷상에 많이 올라오지만 이준만씨는 관광코스와는 다르게 숨겨진 비경을 찾아내 소개하고 있습니다.아울러 이준만씨의 주옥같은 사진들은 '크게 보기'를 클릭해서 보시길 권장합니다.

어둠이 짙은 새벽녘, 우리는 기련산(祁連山, 중국 간쑤성과 칭하이성에 있는 산) 깊은곳에 있는 칠일빙천(七一氷川)을 등반하려고 길을 나섰다. 어제는 이곳 웅장한 모습의 가욕관(嘉峪关)을 구경하고 오늘 등반하여 먹을 것들을 배낭에 잔뜩 넣고는 일찍 잠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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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련산(祁連山), 청장고원 동북부(青藏高原东北部)에 위치한 산으로 동서 길이 900~1000km, 남북의 폭이 200~400km, 모두 해발 4000~6000m 로서, 5000m가 넘는 봉우리가 약 26개나 된다. 또한 이곳에는 빙천(氷川)이 모두 3306개가 있으며, 빙천의 면적은 약 2062㎢이다. 얼음을 저장한 양이 1145억㎥라고 한다.

이중에서 가장 큰 빙천은 대설산(大雪山) 노호구(老虎沟)에 있는 12호 빙천이다. 빙천의 길이 10km, 면적은 21.45㎢이다.

그러나 사람이 가장 가깝게 근접하여 갈수 있는 곳은 가욕관에서 약 116km 떨어져 있는 기련산 깊은 곳에 있는 칠일빙천이다. 1958년 7월 1일 중국과 옛 소련의 지질학자들이 공동으로 지질 조사를 하던 중 이 빙천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칠일빙천이다.

빙천의 최고 꼭대기는 5150m 빙천의 가장 바닥 부분은 4300m , 빙천의 평균두께는 78m, 가장 두꺼운 곳은 120m, 경사 45도 이상.

여행객들이 만리장성의 서쪽끝인 이곳 가욕관을 구경하고 난 후 가장 간과할 수 있는 빙천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우리는 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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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살의 기련산. ☞ 큰 사진으로 보기

새벽의 여명이 만년설 기련산의 하얀 봉우리에 빛을 받아 조금씩 만년설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기련산이 실크로드를 가는 곳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들을 풍요로운 도시로 만들어주는 설산의 맑은 물을 공급해주는 산인 것이다.

저 기련산의 눈 녹은 맑은물이 세월이 흐르면서 빙하기와 온난기를 반복하면 그 주위의 도시들이 흥망성쇠를 가름한다는 역사의 사실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야하는 어쩔 수 없는 작은 존재일뿐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아무리 달려도 끝없이 펼쳐지는 높고 깊은 광활한 산들 뿐이다. 여름에만 잠깐 풀이 있어, 말과 양떼들이 노는 초원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지만, 지금은 눈과 황량한 바람만이 초원을 감싸고 있다. 그래서 너무나 황량한 고원.

기련산의 초원들(여름에만초원을 구경할 수 있다)☞ 큰 사진으로 보기

어느 덧 우리는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곳에까지 왔다. 배낭을 메고 등반을 하기 시작하였다. 산이 높으니 계곡 또한 거의 낭떠러지 수준이다. 여름에만 빙천 녹은 물이 조금씩 흐르는 계곡은 지금은 물 한방울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사면에는 온통 날카로운 바위조각으로 뒤덮여있고, 풀한포기 없는 곳에도 작은 동물들이 살고 있는 것이정말 이해할수 없었다. 이곳에 사는 새들이나 쥐들을 위해 우리는 가지고 간 식빵을 조금씩 떼어서 바위 위에다 올려놓았다.

빙천 가는길. ☞ 큰 사진으로 보기

눈덮인 설산에서는 무척 추울거라고 여겼는데 오히려 햇살이 뜨거워 두꺼운 옷을 배낭에 넣고 마치 초가을 산행하는 기분으로 땀을 훔치며 올라가니 좌측편에 높다랗지만 작은 빙천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숨이 가빠오기 시작하였다.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잠시 쉬었다 다시 가야만 하는 상황이 된것이다. 아! 이것이 고산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얼마를 더 가야 할 지를 모르겠지만, 빙천의 모습을 가까이 눈앞에서 보고 싶은 욕심에 다시 한발 한발 디디었다.

빙천 가는길. ☞ 큰 사진으로 보기

숨쉬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서 발걸음을 떼는 것은 정말이지 마음 속에서는 포기 하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데 마지막 힘든 고개 비슷한 것을 간신히 넘어 올라서니 앞에 바라보이는 것이 칠일빙천의 밑바닥 부분이 보인 것이다.

저것이 바로 칠일 빙천이구나! 빙천의 꼭대기가 바로 눈앞에서 보이고 하얀 맑은 구름이 빙천 꼭대기에 머물고 있는 모습이 지금까지의 힘든 여정을 말끔하게 씻어주는 기분이다.

우리는 좀 더 올라가서 빙천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4500m까지 와서 큰 바위에 앉아 배낭에 갖고온 먹거리를 펼쳐놓고 허기진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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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일빙천. ☞ 큰 사진으로 보기

빙천, 마치 스키장의 모굴처럼 출렁거리는 듯한 얼음 물결이 강한 햇살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진짜 전문가라면 꼭대기까지 가고 싶은 욕심이 있겠지만 우리는 아직도 실크로드를 가야 할 여정이 많기에 이런 빙천을 코앞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해야했다.

한동안 나는 자리에 앉아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기원전 1세기 한나라 무제때, 곽거병이 이 기련산을 점령하고 있는 흉노족과 싸워서 한나라의 대승리에 의해 흉노족은 고비사막 북쪽으로 물러가버리고 한나라는 이곳에 하서사군(장액,주천,돈황,무위)을 설치하였다.

그때 흉노족들에 유행했던 "우리가 기련산을 잃어 가축을 먹일수도 없고, 우리가 연지산을 잃어 흉노여인들의 아름다움을 모두 잃었다"는 민요는 흉노족들이 얼마나 이 곳 기련산을 중시여겼는지 알수 있다.

당시 기련산의 언지산에서 나는 식물을 채취하여 여인들에게 연지를 바르는 습관이 있었다. 우리 조상이 여인들에게 연지를 찍어주는 습관이 이 흉노족들과 동일한 습관이 아닐까?

지금 이 곳 기련산은 온난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많은 물이 흘러내려 주위의 도시에 맑은 물을 흘려보내 줄것이다.어느 역사 학자는 말했다. 중국의 역사상 이 곳이 온난기에 들어갈 때 중국의 번성기가 시작된다고…….

만년설 기련산의 모습들. ☞ 큰 사진으로 보기

여름에 온다면 기련산에 펼쳐진 초원과 말과 양떼들, 그리고 이 빙천에서 흘러내리는 맑은물을 바라본다면, 더 더욱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감상을 하고 있을쯤, 정상의 맑은 구름이 갑자기 어두운 구름으로 바뀌니 금새 얼음장 같은 추위가 몰려왔다.우리는 얼른 두꺼운 옷을 꺼내입고 작별을 하고는 다음 여정을 향해 출발을 하였다.

도깨비뉴스 블로거= 이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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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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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은 달에서 보이지 않는다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10]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성
조수영(sy0707) 기자
▲ 가욕관과 천산
ⓒ 조수영
가욕관성으로 향했다. 가욕관은 고비사막 한가운데 있는 만리장성의 서쪽관문이다. 남쪽으로는 기련산맥이 가로막고 있고, 북쪽으로는 용수산, 마종산이 막고 있어 서쪽의 여러 민족들이 쳐들어오기 위해서는 이곳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을 지나야 하서주랑을 거쳐 중원에 이르는 것이다.

천예의 요새 가욕관성... '천하웅관'으로 중국인들의 심정적인 국경

천예의 요새가 아닐 수 없다. 과거 이곳은 중국의 행정력이 미치는 서쪽 끝이었다. 좀 더 서쪽으로 가면 양관(陽關)이라는 관문이 하나 더 있긴 하지만 크기도 작거니와 군사적 중요도도 낮아 중국 사람들의 심정적인 국경은 여기까지였다고 한다.

또 중국인들은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을 '천하제일관'이라고 하고, 서쪽 끝인 이곳 가욕관을 '천하웅관(天下雄關)'이라고 불렀다.

가욕관의 성채는 명나라 주원장 때인 1372년 빙승 장군이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성 안에는 1개 대대 약 400명의 병사가 상주했었고, 높이 10m, 두께 8m, 동서로 256m, 남북은 160m의 규모로 벽돌을 쌓았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지었기 때문에 성이 완성된 뒤에 예상했던 벽돌 수에서 단 한 장의 차이가 났다고 전해진다.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기지로 세워졌지만, 몽골고원이 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이 일대의 장성도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1958년 인민정부에 의해 개발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불과 30여 가구만이 사는 오지로 남아있었다.

▲ 치밀한 설계로 세워진 성곽은 설계도와 벽돌 한 장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 조수영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

성의 입구는 주차장에서 500m나 떨어져 있어 뜨거운 햇살을 피해 전동차를 타야 했다.

가욕관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웅장한 성문을 통과하면 또다시 성문이 나타나는 겹겹으로 싸인 요새이다. 외성의 동쪽 문으로 들어가서 내성을 통과하여 외성의 서쪽 문을 통해 서역으로 가는 것이다. 당시에도 동서의 두 개의 문을 열었다.

▲ (사진 위) 외성으로 들어서니 깎아낸 듯한 내성이 서 있다. (아래 사진 왼쪽) 외성의 동문을 통해 가욕관 성채로 들어간다. (아래 사진 오른쪽) 천하웅관이라 세겨진 비석.
ⓒ 조수영
'천하웅관'이라 조금은 허술해 보이는 현판이 걸려있는 동문을 통해 외성으로 들어섰다.

약간의 오르막길을 걸으니 오른쪽에 '천하웅관(天下雄關)'이라 새겨진 비석이 있고, 왼편으로 웅장한 내성이 우뚝 서 있다. 넓은 성채 안에 있는 위풍당당한 3층의 성루와 깎아낸 듯한 성벽이 인상적이다. 극장이었던 문창각(文昌閣)과 관제묘(關帝廟)가 있다.

▲ (사진 위) 극장이었던 문창각. (사진 중앙) 관우를 모시는 관제묘. (사진 아래) 관제묘의 관우장군상.
ⓒ 조수영
내성을 ㄷ자형으로 쌓은 까닭은?

내성에도 동서로 두 개의 문이 있다. 동쪽의 광화문(光化門)은 상서로운 기운이 동쪽에서 일어나 두루 비춘다는 의미이고, 서쪽의 유원문(柔遠門)은 회유로써 서쪽의 변방까지 안정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광화문으로 들어서니 하늘을 제외한 사방이 모두 10m가 넘는 높은 성벽으로 막혀있다. 성문 앞에 ㄷ자형으로 성을 쌓아 그 옆문을 통과해야 성문을 공격할 수 있게 했다. 두터운 성 위로는 방어벽을 쌓아 사람들이 다니며 성 아래 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했다.

성벽 위에서 화살이라도 쏘아댄다면 완전히 독 안에 든 쥐가 되는 것이다. 내성을 이루는 문도 침입에 대비해 이렇게 겹겹으로 쌓은 것이다. 예전엔 군사들로 붐비었을 내성 안의 넓은 광장에는 뜨거운 햇살에 간신히 자라고 있는 나무와 잡초뿐이었다.

▲ (사진 위) 광화문을 통과하여 내성으로 들어선다. 군사들로 붐비었을 내성 내부 광장. (사진 아래) 가욕관성의 서쪽 누각 가욕관루. 멀리까지 만리장성이 이어져 있다.
ⓒ 조수영
내성의 서쪽 유원문을 통해 내성을 빠져나오니 외성의 가욕루가 보인다. 성채의 가장 서쪽에 있는 상징적인 누각이다.

누각에 오르니 서쪽으로 끝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고, 사막이지만 사람이 다녔을법한 길의 흔적이 성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적의 침입을 알리는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그 뒤로 모랫바람을 일으키며 수십만의 오랑캐가 달려오는 듯하다.

멀리 지평선이 보인다. 예전에는 죄인들을 성 밖 사막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저 땅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흙, 바람과 같은 가장 원초적인 자연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안쪽 성벽을 따라 성 위로 오르는 비탈길은 성문을 들어선 병사가 장군에게 소식을 전할 때 말을 타고 단숨에 올라오기 위함이다. 적이 침입했음을 다른 성에 알릴 때에는 늑대 똥을 태워 봉화로 알렸는데 비가 올 때는 파발을 보냈다. 명대에는 포를 쏘기도 했다.

가욕루를 지나 성 밖으로 나가니 비로소 가욕관성의 웅장한 모습과 멀리까지 뻗어있는 장성의 모습이 펼쳐진다. 웅장한 성채와 달리 장성은 높이가 겨우 2m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낮은 성벽으로도 적을 막을 수 있는 까닭은 서쪽의 유목민들은 말을 타고 식량으로 양들을 거느리고 오는데, 성이 가로막혀 있어 말과 양이 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사진 왼쪽) 안쪽 성벽을 따라 성 위로 오르는 비탈길은 성문을 들어선 병사가 장군에게 소식을 전할 때 말을 타고 단숨에 올라오기 위함이다.(사진 오른쪽) 두터운 성 위로는 방어벽을 쌓아 사람들이 다니며 성 아래 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했다.
ⓒ 조수영
▲ 장성박물관과 전시품들.
ⓒ 조수영
▲ 가욕관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직접 그림).
ⓒ 조수영
그러고 보면 이곳에 비가 적게 오는 것이 불리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곳의 장성들은 대부분 갈대와 진흙을 빚어서 만든 것이므로 비가 제대로 온다면 한 번에 흘러내릴 것이다. 그러나 이 건조한 날씨가 그것을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고비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 가욕관

가욕관성은 사막 한가운데 서 있다. 고비사막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고비사막은 몽골과 중국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땅을 가로질러 뻗어 있다. 고비는 몽골어로 '물이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심한 대륙성 건조기후로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무덥다. 자갈과 흙은 급격한 기온의 차이로 인해 풍화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잿빛이 섞인 갈색의 메마른 땅에도 '로우타우차우'라 불리는 낙타풀이 듬성듬성 자라나 꽃을 피워냈다. 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인 이 풀은 날카로운 가시가 숭숭 돋아나 있다. 이 가시 때문에 양떼도 먹을 수 없다. 단지 낙타만이 이 풀을 먹는다. 낙타도 이 풀을 먹을 땐 주둥이와 입안이 온통 피로 붉게 물든다고 했다. 날카로운 가시가 마구 찌르기 때문이다.

▲ (사진 왼쪽) 고비사막은 급격한 기온차로 인해 풍화작용이 일어나 자갈과 흙이 생긴 암석사막이다. (사진 오른쪽) 메마른 땅에도 낙타풀이 자란다.
ⓒ 조수영

결코 달에서 보이지 않는 만리장성

▲ 가욕관에서 산해관까지 이어지는 만리장성
ⓒ조수영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원래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 조나라, 위나라 등의 각 제국이 쌓아 놓은 성을 진시황제가 하나로 연결한 것이다. 동쪽의 산해관에서 시작하여 북경의 팔달령에 있는 거용관, 대동의 안문관, 주천의 가욕관까지 6300㎞를 시황제가 완성했던 것이다.

그 후 한나라가 서쪽으로 흉노를 몰아내고 돈황 근처의 옥문관, 미란 쪽의 양관까지 496㎞를 연장하여 총 6796㎞가 된다. 중국의 1리는 500m로, 산해관에서 가욕관까지는 1만2천리, 양관까지는 약 1만3천리다.

이후 왕조들은 장성의 축조에 별로 비중을 두지 않았다. 장성을 쌓는다고 해서 북쪽 오랑캐들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장성의 축조와 복구가 계속된 것은 명대에 이르러서다. 꾸준히 반복되는 몽골의 침입을 막을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장성을 보수하고 확장한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만리장성을 쌓는데 들어간 돌과 벽돌로 높이 5m, 두께 1m가 되는 벽을 다시 쌓는다면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는다.

또 만리장성은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구조물로 유명한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38만4400㎞이다. 달에서 본 지구는 대부분 하얗고(구름), 일부는 푸르며(바다), 군데군데 노란 덩어리가 있고(사막), 또 얼마간은 초록색(산야)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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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주천의 벽화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⑨] 주천 5호묘, 낙타가 사막에서 살아가는 법
조수영(sy0707) 기자
ⓒ 조수영
다음날(8월 7일) 새벽, 가욕관역에 도착했다. 가욕관시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감숙성에 속하고, 하서주랑의 중심에 있다. 가욕관시 서북쪽에는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가욕관성이 있고, 남쪽에는 만년설로 뒤덮인 기련산맥이 버티고 있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황량한 고비사막이 펼쳐져 있다.

인구는 30만명 정도이고, 연강수량은 80㎜밖에 되지 않는 건조한 곳이다. 가장 추운 1월은 기온이 영하 28℃이고, 가장 더운 7월은 38℃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연평균온도 7℃라 하니 뜨거운 날보다 추운 날이 더 많은 셈이다.

그래서 이곳의 관광은 5월에서 11월 사이에만 가능하다. 그 이후의 기간에는 기온이 너무 낮아 여행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주민들은 그 기간 동안 1년의 수입을 다 벌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주변 도시보다 물가가 비싼 것 같다.

가욕관 시내는 제철공장이 생기면서 신흥도시로 형성되어 구획정리가 잘 되어 있고 건물들이 깨끗한 것이 우리나라 신도시와 같았다.

▲ (사진 위) 다음날 새벽 도착한 가욕관역 (사진 아래) 가욕관 시내. 깨끗하고 정리가 잘되어 있다.
ⓒ 조수영
아무리 마셔도 모자라지 않는 술의 샘, 주천

가욕관성으로 가기 전에 주천 5호묘를 들르기로 했다. 주천은 가욕관역에서 20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주천은 실크로드의 주요 오아시스 중 하나로 일찍이 상업도시로서 번영했던 곳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 속에서 한족과 유목민과의 세력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곧 싸움터의 한복판이 되고 마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주천으로 가는 길 양쪽에는 우산나무, 백양나무, 버드나무 등의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이 나무들은 원래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오아시스 도시의 주변에 많이 심었다. 그 너머에는 옥수수밭과 보리밭, 목화밭 등이 펼쳐져 있다.

주천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러하다. 북방의 유목민 흉노와 싸워 이긴 곽거병과 그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무제가 술을 보내왔는데 전군이 마시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곽거병이 그 술을 샘에 쏟아 부었더니 샘이 금방 술로 변해 아무리 마셔도 모자라지 않았다고 하여 술의 샘이라는 지역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 (사진 위)얼핏 보아선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천5호묘 입구과 매표소. (사진 아래) 안내원이 열어준 철문을 지나 계단으로 내려간다.
ⓒ 조수영

▲ (사진 왼쪽)안내원이 열어준 철문을 지나 계단으로 내려간다. (사진 오른쪽) 입구에서 가까운 지점에 도굴의 흔적이 있었다.
ⓒ 조수영
주천 5호묘는 천 육백년 전 위진남북조시대 어느 제후의 무덤이다. 고비사막에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묘가 천 개 정도 있는데 가욕관 6호묘와 이곳 주천 정가갑 5호묘가 대표적이다. 주천 5호묘란 주천에서 발견된 다섯 번째 무덤이라는 뜻이다.

안내원이 열어준 철문으로 들어서면 계단이 나타난다. 시원한 내부는 뜨거운 이곳의 더위를 식히기에 충분했다. 묘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나라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이 생각났다. 무령왕릉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했으니 그 전형을 여기에서 본 셈이다.

인간세상과 천상을 벽화에 그리다

전실과 후실은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각 실의 최대높이는 12m 정도이고 전체 길이는 33m이다. 벽돌로 지어서 석회칠을 한 내부에 그려진 화려한 벽화가 특징이다. 전실에는 당시 사람들의 이상향과 제후의 생활을 보여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벽화의 아랫부분은 인간세상의 모습을, 윗부분은 하늘세상을 그렸다.

천장은 둥글게 만들어 천상의 모습을 나타냈는데 천리마, 용 등이 그려져 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린 것은 도교의 영향이라 한다. 바닥은 사각으로 만들어 인간세상을 표현했는데 무덤의 주인인 제후가 가무를 즐기는 모습, 농사짓는 모습, 마차 등의 그림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얼굴이 각양각색이란 점인데 당시 많은 소수민족이 같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성한 나무와 농사짓는 그림에서 당시에는 이곳이 척박한 땅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좁은 통로로 연결된 후실에는 제후와 부인 그리고 애첩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묘실의 바닥에는 화려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발자국에 지워져 가고 있었다.

ⓒ 조수영

▲ 서왕모는 산이 치솟아 바위처럼 보이는 그 위에 손을 모으고 앉았으며, 그 아래에 세발까마귀와 구미호가 있다. 그리고 서왕모의 머리 위에는 달을 나타내는 원 속에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 조수영

ⓒ 조수영
사막의 강자, 낙타

밖으로 나오니 사막의 따가운 햇살이 정수리에 꽂힌다. 등에 큰 혹을 가지고 있는 낙타는 이러한 사막에서 살아가기 적합하게 진화되었다. 스스로 닫을 수 있는 콧구멍과 귀 주변의 긴 털, 긴 속눈썹은 모래를 막아준다. 넓은 발은 모래 위를 걸어 다니기에 적합하다.

오랜 시간 물 없이도 견딜 수 있다. 등의 혹은 물이 아닌 지방이 저장된 것이어서 이를 비상식량으로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에는 혹이 점점 작아지다가 나중에는 거의 없어진다고 한다. 혹의 크기도 영양 상태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낙타는 혹이 1개 있는 단봉낙타와 2개가 있는 쌍봉낙타의 2종류가 있는데, 단봉낙타가 90%를 차지한다. 단봉낙타는 야생이 없고, 아랍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산다. 쌍봉낙타는 단봉낙타보다 크기가 약간 작은데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서부터 고비사막, 몽골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한다. 그래서 중국 쪽의 실크로드에서 본 낙타는 모두 쌍봉낙타였다.

낙타는 옛날부터 가축화되어 사람이 타고 다니는 일 이외에도, 젖은 비타민C가 풍부한 음료로, 털은 천막이나 카페트를 만들고, 낙타가죽은 가방과 밧줄을 만든다. 낙타의 발에는 3개의 관절이 있기 때문에 관절염에 좋다하여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은 낙타발 요리를 꼭 찾는다. 그러나 고기나 혹은 맛이 없어서 먹지 않는다 한다. 하늘의 비행기과 육지의 책상을 빼곤 다 먹는다는 중국인도 가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 맛이 없나보다.

▲ 낙타가 사막에서 살아남는 법 (직접 그림)
ⓒ 조수영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라는 말이 있다. 상당히 힘들다는 의미인데 어떻게 다른 동물도 아니고 낙타일까? 바늘과 낙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데 말이다. 이 속담은 잘못된 번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실 성경 마태복음 19장 24절에 나오는 성경구절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 번역자가 아랍어의 원어 'gamta(밧줄)'를 'gamla(낙타)'와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낙타에 비한다면 훨씬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생각으로는, 물리학에서는 아주 쉽게 낙타를 바늘구멍으로 통과시킬 수 있다. 꼭 낙타뿐만 아니라 빛만 있다면 세상에 모든 물체를 바늘구멍으로 통과시킬 수 있다. 바늘구멍 사진기를 이용하면 낙타를 바늘구멍으로 통과시켜 필름에 상을 맺을 수 있고 그곳에 흰 종이를 대면 실상을 관찰할 수도 있다. 실상은 바늘구멍 안쪽에 있으므로 낙타는 결국 바늘구멍을 통과한 것이 되지 않는가?

모래 사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막의 기준

일반적으로 사막이라 하면 모래언덕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러한 모래사막은 사막의 분류 중 한 가지일 뿐이다. 사막의 한계를 정하는 데 사용되는 기준은 건조도(aridity)이다. 1년에 내리는 비의 양이 250㎜ 이하일 때를 사막이라 한다.

뜨거운 사막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영구 빙하지역인 남극대륙, 그린란드 등은 고위도의 한성사막에 해당한다.

적도 주변에 존재하는 고압대 사막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 인도의 타르사막,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사막, 남아프리카의 칼라하리사막이 있다. 고압대 사막은 적도에서 더워진 공기가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차가워져서 내려올 때 생기게 된다.

내륙사막은 바다에서 먼 내륙에 있어서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실크로드를 지나면서 볼 수 있는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이 그것이다. 이러한 내륙사막에서는 기온의 일교차뿐만 아니라 계절적 변화도 크다.

또한 사막은 표면을 형성하는 물질에 따라 암석사막과 모래사막으로 구분된다. 흔히 사막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생각되는 모래사막은 단지 북아메리카에 2%, 사하라 사막의 10%, 아라비아 사막의 30%를 차지할 뿐이다.

우리가 지나는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은 자갈과 흙의 암석사막이다. 암석사막에서는 기온변화에 의해 암석이 풍화되었으나, 강한 바람에 의해 작은 세립물질들이 날아가 버려 모래를 거의 볼 수 없다.

사막의 생물이 살아가는 법

▲ 사막식물의 진화(직접 그림)

사막의 동식물들은 부족한 물을 얻어서 오랫동안 보존하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식물은 키가 작고, 물이 증발되는 표면적을 줄이기 위해 잎은 작거나 없어지고, 가시로 진화되었다.

또한 뿌리는 넓게 퍼지거나 깊이 내린다. 낮 동안에는 기공을 닫고 있으며, 물의 증발을 막기 위해 큐티클 층으로 덮여 있고, 많은 양의 물을 축적하기 위해 다육다즙기관을 지니고 있다.

동물들은 대부분 기회만 있으면 물을 마시지만, 물이 없을 때는 다즙식물이나 그들의 먹이가 되는 다른 동물의 피나 조직을 통해 수분을 공급받는다. 심지어 낙타는 등의 혹에 축적되어 있는 지방을 산화시켜 물을 만들어낸다.

물의 보존 방법도 다양한데 파충류와 곤충류는 두꺼운 외피를 가지며, 포유류는 배설하기 전에 오줌 내의 물을 재 흡수하여 오줌을 농축시킨다. 갈증을 피하기 위해 야행성이 된 것도 있고, 가뭄기간 동안 여름잠을 자는 동물도 있다.
1) 곽거병 - 한무제 때 장군으로 흉노의 정벌에 공이 컸다. 그러나 그가 24세인 젊은 나이에 죽어 안타까웠던 무제는 자신의 무덤인 무릉 근처에 무덤을 만들게 하고, 그 앞에 흉노를 밟고 있는 말의 상을 세우게 했다. 이른바 마답흉노(馬踏匈奴)이다.

2)청룡 - 동쪽의 수호신. 푸른 용의 형상을 하고 봄을 관장했다.

3)백호 - 서쪽의 수호신. 하얀 호랑이의 모습으로 가을을 수호하며, 쇠와 같은 금속을 관장한다.
4)주작 - 남쪽의 수호신. 붉은 새의 모습으로 불을 다스리며 여름을 관장한다.

5)현무 북쪽의 수호신. 뱀의 꼬리를 가진 검은 거북이의 모습이다. 북쪽에서 오는 매서운 겨울을 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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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第一雄關 가욕관성 입구



가욕관성 안에 있는 內城(외성이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방어벽이라면
내성은 요새진지인 셈이다)





내성안에 있는 각종 건축물들
























내성에서 바라본 서측 외성
(저기 흰눈이 보이는 기련산맥까지 이어져 있다함.)



성밖에서 본 내성 관문
(이 문을 통하여 외부 사람들이 출입한다함)



성밖에 있는 낙타와 말들
(왜 떼지어 있는지 모르겠다)




만리장성 박물관안에 있는 그림들 /
성축조에 인부로 징용나가기 전 동네 어른들한테 인사하는 모습


아내와 자식과 작별하는 장면




만리장성 전경(동측방면)







젊었을때 이 지역에서 수십년 간 노역과 군역을 치러야했던


당나라때 승려시인이던 왕범지의 詩 한首를 적습니다.



- 삶이 죽음보다 (王梵志)



넌 삶이 죽음보다 좋다고 말했지?

난 죽음이 삶보다 좋다고 말해.



삶은 곧 苦戰死이지만,

죽으면 치는 사람이 없어.

열 여섯에 부역에 충당되고,

스무 살에 부병에 충당되네.



모래펄을 걸어 서쪽으로 향하고,

옷과 병기는 무거워.

대낮에 먹을 땅을 찾아가고,



밤마다 거의 새우네.

쇠파리 떼에 마른 밥을,

다투어 분쟁하네.



머리는 길대로 길고 기아로 죽을 것 같고,

뱃가죽은 늘어붙을 것 같네.

이렇게 고통을 받을진대,



자애하신 어머니 차라리 낳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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