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귀향과 함께 안식을 달라
대영박물관의 미라들... 안식을 빼앗긴 채 타향살이까지
한대일(epsilon710) 기자
과학적으로 볼 때 사람은 죽으면 그저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다. 거기에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생명이 다하면 그 '사람'이었던 물체는 어떤 행동에도 반응하지 않으며 그저 썩어간다. 이는 분명히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집단은 설사 '사람'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썩어가는 단백질 덩어리'로 인식하지 않았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인간은 일반 동물들과 달리 죽은 사람을 매우 특별히 대했으며, 이러한 것들은 다양한 장례 풍습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예식을 통해 산 사람은 죽은 사람에게 명복을 빌었고, 죽은 사람은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네안데르탈 인으로부터 시작된 이런 '죽음'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 없었다면, 지금도 인간은 그저 포유류의 한 종에 불과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의식이 코끼리에게도 나타나긴 하지만 장례에 대한 인간의 다양성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집트나 라틴 아메리카에 나타나는 미라도 그런 성스러운 의식 중 하나였다. 파라오든 평민이든 이집트 사람들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는 생각을 절대로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사후 세계를 지금보다 영원한 세계로 인식해서 죽은 자들에 대한 철저한 예우을 갖추었다.

파라오나 귀족과 같이 있는 사람은 있는대로, 평민과 같이 없는 사람은 없는대로 죽은 사람을 미라화하거나 붕대를 감으면서 장례 의식을 시작했다. (평민에게 미라 의식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장례 때 간단히 붕대만 감았다. 하지만 후에 평민들의 지위와 부가 향상되자 이들 중 일부는 미라 의식을 치루기도 했다.) 그리고 무덤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부장품을 집어넣음으로써 망자를 사후 세계에 보낼 준비를 했다.

또한 장례가 다 끝난 후에도 지속적인 제례 의식을 통해 망자의 명복과 안식을 빌었다. 세계 곳곳, 그리고 현대 사회에 와서도 다양한 수단을 통해 장례를 치루듯이 고대 이집트 사회는 미라라는 수단을 통해 망자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미리 말하지만, 따라서 이런 특별함을 갖춘 미라는 결코 관광객 눈요깃거리나 하는 박물관 전시품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 대영박물관의 모습
ⓒ 한대일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대영박물관은 침략문화의 본고장이다. 로제타 스톤, 아시리아의 부조물들, 파르테논 신전 벽 장식물과 같이 대영박물관의 주요 볼거리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온 것들이다. 그것도 제국주의 시절에 식민지에서 강탈한 것들이다.

따라서 지금도 과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 곳곳에서는 대영박물관 측에 자국의 유물을 반환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대영'이라는 말을 따라 해외 유물들을 모두 반환한 채 박물관에 순수한 영국 유물만이 놓여진다면 대영박물관은 금세 옹색해진다. 이는 지금도 콧대높은 영국인들의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주는 일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대영박물관은 문화재 반환에 절대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고, 지금도 각 문화재 원래 소유국들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 로제타 스톤. 프랑스군이 발견해서 현재는 대영박물관에 놓여져 있다.
ⓒ 한대일

일단 우리가 매우 '너그러운' 마음을 품은 채 영국의 이런 과거 행위들을 되도록 인정하는 모습을 취해 보자. 19세기야 세계 곳곳이 영국 땅이었으니 '자국'의 문화재를 수도인 런던에 갖다 놓아도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집트든 인도든 오스트레일리아든 어짜피 그 당시는 영국 영토였으니 영국 영토에서 나는 모든 것들은 곧 영국 소유일테니 말이다.

도자기, 금제 장신구, 비단... 심지어 건물 벽체를 통째로 뜯어와도 한번 이를 인정해보자. 하지만 이런 엄청난 관용의 관점으로 봐도 영원한 안식에 빠졌을 죽은 사람들의 시신, 즉 미라까지도 원래 무덤에서 끄집어내 런던에 갖다놓는 행위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진실로 이것까지 받아들이고 허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필자는 그를 신과 같은 대단한 자비심을 갖춘 사람, 혹은 철심장을 가진 채 죽은 이에 대한 예우가 전혀 없는 사람으로 인식할 것이다.

▲ 아시리아의 라마수 부조. 벽체를 통째로 뜯어왔다.
ⓒ 한대일

인간은 죽음을 그저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망자를 위해 여러 가지 의식을 취해왔다. 미라는 그러한 노력의 알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미라에는 산 사람들의 소망과 함께 죽은 사람들의 안식에 대한 편안함이 묻어나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무덤에서 끄집어내 박물관 쇼케이스 안에 미라를 갖다두는 행위는 죽은 사람의 안식을 빼앗는 엄청난 모독 행위이다.

죽은 자는 편안히 쉬지 못한 채 쇼케이스 너머에 있는 관람객들의 시선과 소음을 견뎌내야 한다. 물론 여기에 '인간은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과학적 관점이 개입된다면야 미라도 단순한 전시품에 불과할 것이지만, 맨 처음에 얘기했듯이 미라를 비롯한 인간의 죽음은 산 사람들의 의식을 거침과 함께 죽은 이의 안식을 빌었다는 측면에서 일반 동물들하고는 별개로 봐야 한다.

▲ 이집트 석관. 현재 이 석관 안에 미라가 안치되어 있다.
ⓒ 한대일

어쩌면 미라들에게 있어 힘든 점은 안식에 대한 방해보다도 타향살이에 있을 수 있겠다. 카이로 박물관에도 그 유명한 람세스 2세를 비롯해서 여러 파라오들의 미라가 전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는 대영박물관과 유사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 카이로 박물관의 미라관은 조용하고 어두운 분위기 속에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어 조금이나마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거기다가 자신의 고향인 이집트에 그대로 있게 되니 설사 무덤에서 나왔다고 할 지라도 그 미라들은 나름대로 만족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영박물관의 미라들은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 머나먼 바다와 대륙을 건넌 타향살이까지 견뎌야 한다. 그들은 생전에는 영국은 커녕 이집트를 못벗어났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 머나먼 여행 끝에 듣도보도 못한 '영국 런던'이라는 곳에 있게 되었으니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의 이런 죽은 이에 대한 모독 행태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된다.

▲ 미라들의 모습. 이렇게 미라는 어린이와 같은 관람객들의 단순한 흥밋거리로 전락해버렸다.
ⓒ 한대일

죽은 이는 단순히 죽음으로써 끝난게 아니다. 산 사람들은 장례나 제례와 같은 의식을 통해 끊임없이 죽은 이를 배웅했고 그 혹은 그녀의 안식을 소망했다. 이런 인간들의 소망이 모여있는 미라는 그 존재 이상의 특별함을 지녔으며, 따라서 절대로 박물관 전시물이 될 수 없다.

설사 교육 목적으로 인해 무덤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최대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추면서 고향의 조용한 분위기 속에 그들의 쉼터를 마련해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영박물관의 미라들은 안식과 고향살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다 잃은 상태이며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관람객들의 부담스런 시선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들이 귀향과 함께 안식을 찾을 날은 지금도 요원해 보인다.

▲ 미라의 모습. 무뚝뚝한 표정에서 힘겨움과 슬픔이 느껴진다.
ⓒ 한대일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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