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에펠탑에서 서울까지는 몇 km일까?

[유럽기행 19] 파리 에펠탑(Eiffel Tower) 기행
07.12.26 21:07 ㅣ최종 업데이트 07.12.27 09:15 노시경 (prolsk)

몽파르나스 역(Gare Montparnasse)에서 스위스 인터라켄 행 기차티켓을 예매하다 보니 아침 시간이 꽤 흘렀다. 다리가 아파 호텔에서 쉬고 싶다는 아내를 호텔에 남겨 두고, 딸 신영이와 서둘러서 에펠탑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에펠탑까지는 걸어서 10분. 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파리의 아침이 상쾌했다. 신영이는 도로 옆 가게의 익살스런 휴대폰 광고판과 특이하게 생긴 하수구멍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십 여 년 전, 에펠탑 아래에 앉아서 에펠탑을 올려보고 있었다. 당시 파리에는 한파가 몰아쳐서 에펠탑 엘리베이터 운행이 중지되었고, 나는 할 수 없이 에펠탑 앞에서 사진 한 장만 찍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당시의 에펠탑에 대한 아쉬움은 이번 파리여행의 기대감으로 남았다.

▲ 에펠탑 오르는 사람들. 아침부터 서둘러서 에펠탑을 찾은 사람들이다.
ⓒ 노시경
프랑스

우리가 에펠탑 아래에 도착한 시간은 에펠탑에 오르는 엘리베이터 운영 시작 시간이 불과 10분이 지났을 때였다. 하지만 이른 아침에 에펠탑을 오르려는 관광객들이 에펠탑 아래에 벌써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나올 걸 하는 후회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서 이곳에 도착했을 사람들의 대기 줄 사이에 들어가서 섰다. 우리도 급하게 나왔기 때문에 호텔에서 주는 아침식사도 하지 못하고 나온 상태였다. 배가 고프다는 딸을 장사진 속에 남겨두고, 매점으로 뛰어갔다. 와플 2개와 오렌지 주스 2개를 사는데, 점원의 손동작이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빠르지는 못하다. 아빠가 오지 않자 딸은 계속 아빠가 갔을 매점 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낮 시간에 에펠탑을 오르려면 수많은 관광인파 속에서 2시간 이상 줄을 서야 한다는데, 다행히 나와 신영이는 40분만에 엘리베이터 매표소 앞에 설 수 있었다. 매표소 앞 기둥에는 에펠탑의 설계자인 귀스타프 에펠(Gustave Eiffel)을 기리는 금박의 흉상이 서 있었다.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철골 노출의 구상을 실천에 옮긴 선각자에게 바쳐진 기념비였다.

에펠탑 3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티켓 2장을 사서 1장을 신영이에게 주었다. 나이가 어린 딸이 파리를 바라보는 시각은 내가 파리를 바라보는 시각과 많이 다른데, 이 에펠탑 티켓을 보면서 그 차이가 또 드러났다. 이 아이는 에펠탑 엘리베이터 티켓이 너무 예술적으로 예쁘다는 것이다. 나는 엘리베이터 티켓을 다시 쳐다보았다.

▲ 에펠탑 티켓.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마다 모서리를 절취하면 탑 모양이 된다.
ⓒ 노시경
프랑스

“아빠! 이 티켓 봐! 색도 예쁘고 디자인도 너무 좋아! 아빠, 엘리베이터 2번 타잖아. 한번 탈 때마다 이 모서리를 떼어 내나봐. 그러면 삼각형으로 에펠탑 모양이 될 것 같은데?”

신영이의 생각대로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승무원이 티켓의 한쪽 모서리를 떼어냈다.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와서 멈춰 섰고, 에펠탑 밑에서 이 엘리베이터만을 한참 기다린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작은 안도의 탄성이 나왔다. 내부가 웬만한 미니버스보다도 넓은 엘리베이터 안은 순식간에 수많은 외국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 에펠탑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노출된 철골의 위용을 직접 볼 수 있다.
ⓒ 노시경
프랑스

우리가 탄 에펠탑 북쪽의 엘리베이터는 에펠탑 철탑의 경사면을 따라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갈수록 파리의 중세 건축물들이 시야의 아래쪽으로 들어섰고, 파리의 광활한 지평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야 많이 타 봤기 때문에 신기할 게 없지만, 철탑 속의 개방형 엘리베이터에서 보는 거대한 철골 구조물의 위용이 대단했다. 지상에서 보던 에펠탑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서 이 철탑에 오르는 모양이다.

에펠탑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도 훨씬 웅장한 것이었다. 어떻게 1889년에 이 수많은 1만 2천개의 철 덩어리를 짜 맞춰서 에펠탑을 쌓아올렸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에펠탑을 오르는 수많은 여행기에서 에펠탑의 웅장함을 찬탄하는 것이 조금은 과장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와서 직접 보는 에펠탑은 거대함과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엘리베이터 2층 전망대에서 내리자, 2층 전망대에서 3층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운행되고 있었다. 2층 전망대는 나중에 둘러보기로 하고 3층 전망대행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줄로 바로 걸어갔다. 우리의 줄 뒤로는 계속 한국말이 들리고 있었다. 줄에 서 있으면서도 딸은 계속 신이 나서 에펠탑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이번 여행에서의 느낀 점을 스스로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식을 낳으면, 여행을 보내라고 했다.

에펠탑 3층에서 내려다 본 전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다. 우리나라의 산하와는 달리 도시와 도시 주변으로 끝없는 평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에펠탑 서쪽 발 아래에는 사이요 궁(Palais de Chaillot)이 있고, 사이요 궁과 푸른 녹지대 너머에 라 데팡스(La Defense)가 눈에 들어왔다. 세느강 주변으로는 뛸르리(Tuileries) 정원과 루브르 박물관(Musee Du Louvre)이 태양 아래 있었다.

▲ 라데팡스 원경. 에펠탑 서쪽으로 파리 신도시가 펼쳐진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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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신영이가 찾고자 하는 것은 다른 데 있었다. 3층 전망대 올라가기 전 2층 전망대에서 기념품 가게를 보았던 것이다. 신영이는 2층 전망대로 내려오자마자 기념품 가게로 들어갔다. 신영이가 골라서 집어든 기념품은 목각 달력이었다. 이 나무 기념품은 매일 직접 날짜 주사위를 수동으로 변경하는 목각 달력인데, 에펠탑과 샤크레 쾨르 사원(La Basilique du Sacre Coeur), 노틀담 사원(Cathedrale Notre Dame)을 배경으로 한 기념품이었다. 신영이가 졸라서 할 수 없이 산 이 수동 목각달력이 이제는 유럽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념품이 되었다.

나는 기념품 가게를 나와 2층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줄을 한참 서서 에펠탑에 올랐던 나의 직장 동료는 고생해 가면서 에펠탑에 꼭 오를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에펠탑에 직접 오른 건 남다른 경험이었다. 노출된 철골 구조물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파리가 왜 아름다운 계획도시인지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세느강변 세느강변으로 중세의 건축물들이 이어진다.
ⓒ 노시경
프랑스

나는 신영이와 전망대를 한 바퀴 돌면서 파리의 파노라마를 찍었다. 그러다가 나와 신영이의 눈에 강렬하게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전망대 상단에 에펠탑에서 세계 주요도시까지의 거리가 각 나라의 국기와 함께 표시되어 있었고, 거기에 대한민국 서울이 있었다. 서울까지의 거리는 8991km, 평양까지의 거리는 8794km. 나는 지구의 반지름보다 훨씬 먼 이 거리를 이동해서 지금 에펠탑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파리까지 기차를 타고 8991km를 여행한다면? 물론 기차 안에서는 긴 시간의 지루함에 정신이 지칠 것이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신체는 괴로움을 호소할 것이다. 하지만 열차에서 지친 몸을 내려 바라본 파리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와 닿지 않을까?

나는 에펠탑 위에서, 서울에서 파리까지 8991km를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집에서 서울역까지 잠깐 택시를 타고 이동하여 파리행 기차를 탄다. 내가 탄 기차는 서울역을 출발하여 평양을 거쳐 모스크바, 베를린을 지나,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에 도착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상상이 내가 죽기 전까지는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열차가 개성공단까지 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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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파리에서 졸고 있다

[유럽기행 14] 파리 유람선 바토 무슈 기행
07.11.19 09:30 ㅣ최종 업데이트 07.11.19 14:05 노시경 (prolsk)

나는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아내와 딸을 채근하여 다시 파리 시내로 나왔다. 파리 세느 강의 유람선을 타기에 제일 좋은 시간이 해질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세느 강에서 가장 이름 있는 유람선인 바토 무슈(Bateau Mouches)의 승선장은 알마 다리(Pont de l'Alma) 아래에 있었다.

승선장 앞에는 십여 대의 관광버스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바토무슈 안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나는 괜히 마음이 바빠졌고, 빠른 걸음으로 도착해서 승선 티켓을 샀다. 티켓을 펀칭기에 넣고 통과하니 기다란 유람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배 위에 있었지만, 2층의 야외의자에는 꽤 많은 자리가 남아 있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유람선 중앙의 야외 좌석으로 향했고, 세느 강의 북단을 볼 수 있는 좌석에 앉았다. 우리가 좌석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배가 출발했다. 머나먼 이국 파리에서의 여행은 시간이 돈인데, 고맙게도 이 유람선은 우리 가족이 앉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신속하게 출발했다. 살짝 울리는 배의 진동이 발 아래로 느껴져 왔다.

▲ 세느 강 유람선. 2층의 시원한 야외의자에서 파리의 건축물들을 감상한다.
ⓒ 노시경
파리

배 위에는 지구상에서 삶을 사는 모든 인종들이 강바람을 맞고 있었다. 내 주변에서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언어가 통용되고 있었다. 바토 무슈는 파리 시내와는 또 다른 시끌벅적하고 흥겨운 분위기 속에 있었다. 흥겨운 유람선은 유유자적하며 강물을 헤치고 있었다. 여름밤이지만 강변의 유람선에서 맞는 바람은 더 이상 시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세느 강은 강의 폭이 약 100m 정도 되어서 강 주변을 구경하기에 딱 적당한 크기였다.

세느 강 주변에 관광명소가 나타나자, 각국어로 된 안내방송이 시작되었다.

“아빠! 가만, 한국어로도 안내방송이 나온다. 조용히 해 봐요.”

한국어 안내방송은 나오는 순서가 제일 마지막이었다. 설명순서가 느리다보니, 알렉산드르 3세 다리(Pont Alexandre Ⅲ)를 지난 뒤에야 다리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강 주변의 건축물들을 유심히 살피다 보니, 영어로 된 설명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해가 지면서 조금씩 빛의 여운을 남기는 세느 강변의 모습에 눈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유람선은 알렉산드르 3세 다리 밑을 지나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3세 다리는 1891년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기념하여 1900년 만국박람회 때에 완성된 역사적인 다리이다. 다리 입구 기둥 위에는 앞발을 들고 전진하려는 금빛의 청동말이 있었고, 저물어가는 햇빛을 받아 금빛이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유람선은 어느새 퐁네프(Pont Neuf) 밑을 지나고 있었다. 다리의 인도 위에서 갑자기 우리 유람선을 향한 우레 같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다리 위에서 강 밑을 지나는 유람선을 보고 열렬한 반가움을 표시하는 인사였다. 우리 유람선에 타고 있던 일단의 프랑스 학생들도 다리 위의 사람들을 향해 힘껏 고함을 질렀다.

다리 위와 유람선 위에서 상대방 사람이 가깝게 보일 정도로 세느 강 크기가 적당해서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세느강 다리 위의 사람들과 유람선의 사람들 사이에 이토록 정겨운 문화가 흐르는 것이 의외였다. 무뚝뚝한 파리지엥들 사이에 이런 흥겨운 전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나는 한껏 고함치며 떠들썩한 이런 전통이 어찌 보면 한국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딸은 이 고함소리가 시끄러운 모양이다. 고함소리 때문에 유람선 안내방송이 잘 안 들렸기 때문이다.

“아이, 시끄러워. 쟤들 때문에 설명이 잘 안 들리잖아.”

“왜? 아빠는 재미있기만 한데.”

유람선은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노틀담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콩시에르쥬리(Conciergerie) 앞을 지났다. 건축물 하나하나가 다 기라성 같은 명성을 자랑하는 곳들이다. 강 위의 유람선에서 우러러 보이는 야경 속의 건축물들은 거대하고 신비로웠으며, 눈 아래 세느 강은 더욱 정겨웠다.

▲ 파리 시떼 섬. 시떼 섬은 파리의 역사가 시작된 유서 깊은 곳이다.
ⓒ 노시경
파리

유람선은 어느덧 파리 한 중앙에 자리잡은 시테 섬(Ile De La Cite)을 지났다. 햇빛이 사라져가는 강변에 비치기 시작하는 불빛들이 아름다웠다. 시테 섬 아래의 강변 둔치에서 느긋하게 일요일 밤을 즐기는 파리지앵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람선의 우리들도 손을 흔들고, 강변의 파리지앵들도 우리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세느 강과 시원한 여름 밤, 그리고 환상적인 주변 건축물들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하고 있었다.

시테 섬을 한 바퀴 빙 돈 유람선은 왔던 길을 되돌아서 에펠탑 방향으로 향했다. 파리의 석양은 어느새 사라지고, 이미 어둠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둠 속의 세느 강 주변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세느 강의 모든 건물이 거대한 노란색 조명 속에 묻히고 있었다. 이 조명들은 세느 강 주변을 완전히 별천지로 만들어버렸다.

시계를 보니, 우리나라 시간으로 따지면 새벽 5시였다. 나의 딸은 언제부터인지 엄마의 품에 몸을 옆으로 묻히고 잠이 들어버렸다. 어제 밤에 늦게 파리에 도착했기 때문에 시차 적응이 안 된 탓이었다. 잠이 드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파리 여행 첫날부터 저녁의 세느 강 유람선 여행을 추진한 것은 시차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수였다.

아내도 잠깐씩 졸다가 눈을 떴다가 다시 졸다가 눈을 다시 뜨고 또 다시 졸았다. 나도 눈꺼풀이 자꾸 아래로 감겼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해도 눈은 자꾸 감기기만 했다. 눈꺼풀이 아래로 감긴다는 표현을 절감하는 몽롱함이 내 온 몸에 퍼져 있었다.

▲ 파리 에펠탑. 저녁의 세느 강에서 바라본 에펠탑은 환상적이다.
ⓒ 노시경
파리

어두운 밤하늘 속으로 에펠탑이 갑자기 찬란한 빛을 발사하며 조명 쇼를 시작하고 있었다. 빛이 부족한 어두운 밤, 무리해서라도 가슴 깊이 아름다운 저 야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런데 카메라 삼각대가 없었다. 나는 왜 호텔에 카메라 삼각대를 놔두고 왔을까? 유람선 위에 있으니 삼각대를 무겁게 들고 다닐 일도 없는데 말이다. 삼각대 없는 사진기가 남긴 사진은 대부분 초점을 잃은 채로 흔들리고 있었다.

1시간 20분 동안 어둠이 내리는 세느 강 주변을 훑은 바토무슈 유람선은 자유의 여신상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다시 배의 방향을 파리 도심 쪽으로 돌렸다. 한밤의 매력적인 유람선 주변을 장식하는 중세 건축물들의 휘황한 야경과 세느 강이 조금씩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유람선은 배의 출발점인 알마 다리 아래로 천천히 돌아왔다.

▲ 파리 자유의 여신상. 이곳에서 유람선이 방향을 틀어 알마 다리로 향한다.
ⓒ 노시경
파리

곤히 잠든 딸을 흔들어 깨웠다. 파리의 건축물들을 활기차게 일람하던 유람선에서 내리니, 시간이 너무 밤 깊은 시간이었다. 나의 딸은 유람선에서 잠이 든 사실이 너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잠도 꽤 잤기 때문에 체력이 회복되어 있었다.

“아빠! 왜 나를 안 깨웠어? 내일 낮에 와서 유람선 또 타자. 응?”

나는 너무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현 시점에서, 아내도 호텔로 돌아가 눈 붙이고 발 뻗고 잠을 자는 게 소원일 것이다. 그런데 나의 딸은 불꽃놀이 하듯 조명 쇼를 하는 에펠탑을 보더니, 거기까지 걸어가서 구경하자는 것이었다. 나와 아내가 내일 아침에 와서 에펠탑을 보자고 했더니 딸아이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딸의 눈물 앞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 밤중이라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우리는 야밤에 에펠탑을 향해 또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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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미소 앞에서 딸을 잃다

[유럽기행 10]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 이탈리아 회화관
07.10.23 10:01 ㅣ최종 업데이트 07.10.23 11:05 노시경 (prolsk)

▲ 루브르 박물관. 세계 최대의 박물관답게 규모가 웅장하다.
ⓒ 노시경
프랑스

역시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은 세계 최고의 박물관답게 거대한 덩치로 우리 가족을 맞이하였다. 웅장한 박물관 입구로 많은 사람들이 꼬리를 물듯이 계속 들어가고 있었지만, 공휴일이 아니라서 박물관 입구의 입장 대기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리가족은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서 파리 뮤지엄 패스를 제시하고 박물관 안으로 입장하였다. 우리는 박물관 로비에서 한국어로 된 박물관 안내 팸플릿 한 장을 집어 들었고, 그 안내서의 지도를 따라 드농(Denon)관 2층으로 올라갔다.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여행자들이 드농관 2층 대회랑을 가득 메우며 밀려다니고 있었다. 이 회랑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이탈리아 회화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회랑의 회화실 벽면이 온통 중세와 르네상스 당시의 성화들로 뒤덮여 있다. 이 성화들은 모두들 미술책에서 한 번쯤 봤던 불세출의 명작들이자 세계 회화의 정수들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 되어버린 모나리자(Mona Lisa)를 찾아가는 안내 표지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모나리자만을 찾아 줄을 이어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표지판이 생겨났을 것이다.

▲ 모나리자 관람객. 모나리자 앞을 수많은 관람객들이 둘러싸고 있다.
ⓒ 노시경
프랑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 모나리자 안내표지판은 모나리자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모나리자가 모셔져 있는 방은 마치 미술관의 다음 구역을 연결하는 작은 복도처럼 이어져 있었고, 모나리자는 아예 단독 전시실의 한쪽 벽면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모나리자 앞에는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는 강력한 방탄유리가 끼워져 있고, 그 유리 내부는 자동으로 습도와 온도가 조절되고 있었다. 유리 안에 갇힌 모나리자의 앞에는 관람객들의 가까운 접근을 막는 통제선까지 설정되어 있고, 통제선 밖에서는 박물관 직원들이 모나리자가 다치지 않도록 관람객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모나리자는 그 곳에 당연히 있지만, 그 앞에서 직접 모나리자를 일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나리자 앞을 수많은 관광객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군중을 뚫고 모나리자에 접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당 1500명이 모나리자를 찾는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드는 것 같다.

나는 이 군중을 뚫고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의 가족은 유명세의 모나리자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모나리자가 거기에 잘 있는지 확인을 해야 되는 상황 속에 있었다. 나는 나의 딸이 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 다치지 않을지, 여기에서 내 딸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순간, 순식간에 딸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자기의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군중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나는 모나리자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딸이 어디에 있는지 빨리 확인해야 하는 상황 속에 들어와 버렸다. 나는 군중의 중앙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포기하고 군중의 왼편으로 돌아들어갔다. 모나리자를 찍는 것은 포기한 것이다. 아직 어려 키가 작은 나의 딸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애 엄마는 모나리자 전시실 입구를 막고 서 있고, 나는 보이지 않는 딸 때문에 초조해졌다. 한참 걱정을 하고 있을 즈음, 모나리자 사진 촬영을 하는 군중들의 가장 앞으로 딸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딸이 자리싸움 끝에 덩치 큰 외국의 관광객들을 제치고 안정적인 자세로 모나리자를 촬영하고 있었다.

▲ 모나리자. 신비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압권이다.
ⓒ 노시경
프랑스

나는 딸을 시선에서 놓지 않으며 모나리자의 왼편에서 모나리자를 살펴보았다. 얼핏 보이는 모나리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모나리자는 자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인파를 향해서 조용하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윤곽이 뚜렷한 코 아래로 부드러운 입술이 오묘하고 애매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 속에 기쁨이 녹아 있는지 슬픔이 섞여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익히 보아왔던 대로 원작에도 눈썹이 없었다. 눈썹은 사람의 감정이 격해질 때 근육이 움직이면서 바로 반응을 보이기에,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년~1519년)는 미소 짓는 그녀에게서 눈썹을 없앴을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하기 위해 눈썹을안 그린 게아닐까?

나는 군중에 밀려다니는 관람객 사이에서 빠져 나왔다. 도저히 차분하게 모나리자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나는 모나리자 전시실을 빠져나오면서, 화려한 색채로 그려진 엄청나게 큰 대작을 만났다.

사실, 이탈리아 회화실의 작품들은 당시 시대상황과 더불어 가톨릭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종교가 없는나는 이 회화실의 대작 중 몇몇 작품에 대해서만 줄거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 가나의 혼인잔치. 예수님이 행한 기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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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본 듯한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활약했던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년~1588년)가 그린 ‘가나의 혼인잔치’라는 그림이다. 이 대작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그림 중 가장 규모가 큰 회화작품 중의 하나다. 내 눈앞에 걸린 ‘가나의 혼인잔치’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곱 가지 기적 중 최초의 기적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혼인잔치의 기적이란 술이 떨어지자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이었다.

그런데 베로네세는 이 잔치에서 행해진 기적에 그림의 초점을 맞추었다기보다는 축하연의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기다란 식탁의 중앙에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지만, 이 그림에는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과 잔치에 시중드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베로네세는 복음서의 내용을 왜곡하고 있었다. 그림의 잔칫상에는 음식이 가득 차있고, 그 뒤로는 이탈리아 베니스의 거대한 건축물들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던 당시 갈릴리(Galilee) 근처의 가나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이었고, 혼인잔치에 술이 떨어졌을 정도였으니 잔칫상이 그림처럼 화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설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에서처럼 무리한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는 없다. 화가는 성서 본래의 의미 외에 무언가 다른 것을 그리려 하였던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기 베니스 물산의 풍부함이 화가의 그림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니까 화가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상이1500년 전의 시대를 그린 그림에 무리하게 그려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살던 이탈리아의 화가는 예수님이 어떤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고, 상상으로 그림을 그려나간 것이다.

천장까지의 높이가 9m에 이르는 이 대회랑에는 수많은 이탈리아의 명화들이 도열하듯이 이어지고 있었다. 명화들은 마치 깊고 깊은 다른 세상 속으로 나를 인도하는 듯이 서 있었다. 나는 어떻게 이렇게 세계에 이름난 명작들로 이 회랑을 가득 메우고 있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루브르 박물관 기행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나의 가족같이 몇 시간 내에 루브르 박물관 관람을 마치는 사람들은 루브르의 모든 전시물을 관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빠트릴 수 없는 명작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보지 않을지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은 나의 딸은 배가 너무 고프고 다리도 아파 더 이상 박물관 관람을 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었다. 나는 배고픈 딸을 핑계로 대작들의 감상이라는 강박감을 떨쳐버렸다. 과감하게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 밖으로 나왔다. 금강산도 식후경, 우리는 파리의 미식을 찾아 파리 시내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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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방에는 프랑스 역사가 흐른다
[유럽기행 1] 베르사이유 궁전 거울의 방
07.09.18 09:55 ㅣ최종 업데이트 07.09.18 10:53 노시경 (prolsk)

얼마나 다시 나와 보고 싶던 유럽이던가? 나는 프랑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베르사이유 궁전을 향했다. 뜨거운 햇살이 머리 위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궁전 입구에서 가족과 함께 줄을 섰다. 뜨거운 햇살을 피할 길이 없었다.

▲ 베르사이유 궁전 가는 길 한낮의 햇볕이 따가웠다.
ⓒ 노시경
프랑스

나는 아내와 딸을 따라 거울의 방에 들어섰다. 사진을 찍으며 베르사이유 궁전(Palais de Versailles)을 감상하는 나는 아내와 딸에게 항상 뒤쳐져서 걸어가고 있다. 거울의 방은 장기간의 수리를 마치고 올해 5월에 재개장함으로써 다시 많은 사람들의 사람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최근에 새로 복원된 거울의 방 내부는 황금빛 내부 장식과 밝은 유리로 온통 반짝거린다.

거울의 방은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고, 방과 방 사이의 통로는 관광객들이 서로 부딪힐 정도로 복작거린다. 거울의 방 입구 사람 무리 속에서 팔을 높이 들어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보인다. 거울의 방에서는 대형 거울에 자신의 전신이 모두 비친다. 대부분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이 대형 거울 앞에서 대형거울에 비친 자신의 전신을사진으로 찍는다.

거대한 물결을 이룬 사람들이 관람 동선을 따라 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히 바깥의 더운 날씨에 비해 실내가 덥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관람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머릿속에 그리던 문화유산을 직접 눈 앞에 대하면 감흥이 커지는 법인데,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치이다 보니 흘러간 세월의 무상함만이 느껴진다.

거울의 방은 베르사이유 궁전의 여러 개 방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백미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의 방(Galerie des Glaces)은 루이 14세 당시 프랑스 전제왕권의 힘이 느껴진다. 루이 14세는 1678년~1688년에 건축가 망사르(Mansart)에게 지시하여 베르사이유 궁전 증축공사를 시행하였다. 이 공사를 통해 정원 쪽 2층에 기둥이 받치고 있던 이탈리아식 테라스를 거대한 회랑 모양의 방으로 만들었고, 이 호화로운 방이 현재 거울의 방이라고 불리고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있는 둥그런 돔 형태의 천장에 시선을 옮겼다. 높이 12.3m, 길이73m, 폭 10.5m에 이르는 천장이 온통 프랑스 왕실의 최고화가였던 샤를르 르브룅(Charies le Brun)의 프레스코 천장화와 금박의 화려한 내부 장식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 그림의 세밀함이야 베르사이유 궁전의 모든 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나는 천장에까지 하늘의 세계를 묘사한 화려함에 기가 질렸다.

▲ 거울의 방 유리를 통해 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아름답다.
ⓒ 노시경
베르사이유 궁전

이 거울의 방은 프랑스 왕실의 대연회장과 가면무도회장으로 사용되었고, 이 거울의 방에서는 외국의 특사를 맞이하는 등 왕이 주도하는 수많은 궁전의식이 거행되었다. 나는 눈앞의 수많은 관광객을 걷어내고 이 아름다운 방에서 움직였을 사람들을 상상해 보았다.

프랑스 왕권이 내리막길을 걷던 루이 16세 당시,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가 이곳에서 화려한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거울의 방에서 풍성한 음식의 향연과 향기로운 와인 속의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거울의 방에는 프랑스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다시 또 역사의 세월이 흘렀다. 1871년 1월 29일,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 패권을 겨루던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패해 항복하고 말았다. 유럽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영국과 프랑스 외에 독일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곳 베르사이유 궁 거울의 방에 독일 프로이센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독일 프로이센 사람들은 이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 선언을 하게 된다. 거울의 방에서 이루어진 프랑스 치욕의 날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의 6월 28일, 프랑스 땅, 거울의 방에 다시 독일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이 프랑스 등 연합국에게 항복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거울의 방은 독일 등의 전제국가들이 패퇴하고 자유 민주주의가 확산되는 역사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태양왕의 권위가 살아 숨 쉬던 방에 뜨거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방 안은 온통 대형 거울에 둘러싸여 있었다. 대형 거울에 햇빛이 반사되면서 빛의 크기는 더욱 증폭되고 있었다. 긴 회랑 천장에 긴 줄로 매달린 샹들리에는 그 빛이 영롱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방 전체를 눈부시게 하는 것은 샹들리에의 조명보다는 창으로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이다. 나는 대낮에 불을 밝힌 샹들리에가 저녁이 되어야 아름다움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울의 방 정원 쪽으로 무려 17개나 되는 아치형의 대형 창문이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받고 있었다. 사각형 격자 창문에는 수많은 유리들이 박혀 있었다. 지금이야 이런 대형 유리 창문이 많이 보급되었지만, 당시 중세 유럽에서 이런 대형 유리 창문은 후기 바로크 양식의 가장 호화롭고 획기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원 반대쪽 벽면에도 17개의 커다란 아치형 거울이 반짝거리고 있다. 대형 17개 거울은 총 578장의 거울을 이어서 벽면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나는 금빛 찬란하고 영롱한 거울이 반짝이는 이 방이 보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 거울의 방에서 바라본 베르사이유 궁전 정원 정원의 풍경이 시원하다.
ⓒ 노시경
베르사이유 궁전

워낙 명성이 자자한 방답게 이 방에서 바라보는 창밖의 정원 풍경도 압권이다. 정원 너머로는 호수와 왕의 사냥터가 보인다. 거울의 방은 베르사이유 궁전 내에서도 정원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고, 창문도 시원하게 커서 눈으로 보이는 정원의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그런데 방이 너무나 화려하다. 아내는 방이 너무 커서 질린다고 했다. 이곳 거울의 방은 아름다움이 과한 곳이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치 못하다. 아름다움이 과하게 넘치면 아름다움이 부족함만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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