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파리에서 졸고 있다

[유럽기행 14] 파리 유람선 바토 무슈 기행
07.11.19 09:30 ㅣ최종 업데이트 07.11.19 14:05 노시경 (prolsk)

나는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아내와 딸을 채근하여 다시 파리 시내로 나왔다. 파리 세느 강의 유람선을 타기에 제일 좋은 시간이 해질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세느 강에서 가장 이름 있는 유람선인 바토 무슈(Bateau Mouches)의 승선장은 알마 다리(Pont de l'Alma) 아래에 있었다.

승선장 앞에는 십여 대의 관광버스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바토무슈 안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나는 괜히 마음이 바빠졌고, 빠른 걸음으로 도착해서 승선 티켓을 샀다. 티켓을 펀칭기에 넣고 통과하니 기다란 유람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배 위에 있었지만, 2층의 야외의자에는 꽤 많은 자리가 남아 있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유람선 중앙의 야외 좌석으로 향했고, 세느 강의 북단을 볼 수 있는 좌석에 앉았다. 우리가 좌석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배가 출발했다. 머나먼 이국 파리에서의 여행은 시간이 돈인데, 고맙게도 이 유람선은 우리 가족이 앉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신속하게 출발했다. 살짝 울리는 배의 진동이 발 아래로 느껴져 왔다.

▲ 세느 강 유람선. 2층의 시원한 야외의자에서 파리의 건축물들을 감상한다.
ⓒ 노시경
파리

배 위에는 지구상에서 삶을 사는 모든 인종들이 강바람을 맞고 있었다. 내 주변에서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언어가 통용되고 있었다. 바토 무슈는 파리 시내와는 또 다른 시끌벅적하고 흥겨운 분위기 속에 있었다. 흥겨운 유람선은 유유자적하며 강물을 헤치고 있었다. 여름밤이지만 강변의 유람선에서 맞는 바람은 더 이상 시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세느 강은 강의 폭이 약 100m 정도 되어서 강 주변을 구경하기에 딱 적당한 크기였다.

세느 강 주변에 관광명소가 나타나자, 각국어로 된 안내방송이 시작되었다.

“아빠! 가만, 한국어로도 안내방송이 나온다. 조용히 해 봐요.”

한국어 안내방송은 나오는 순서가 제일 마지막이었다. 설명순서가 느리다보니, 알렉산드르 3세 다리(Pont Alexandre Ⅲ)를 지난 뒤에야 다리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강 주변의 건축물들을 유심히 살피다 보니, 영어로 된 설명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해가 지면서 조금씩 빛의 여운을 남기는 세느 강변의 모습에 눈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유람선은 알렉산드르 3세 다리 밑을 지나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3세 다리는 1891년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기념하여 1900년 만국박람회 때에 완성된 역사적인 다리이다. 다리 입구 기둥 위에는 앞발을 들고 전진하려는 금빛의 청동말이 있었고, 저물어가는 햇빛을 받아 금빛이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유람선은 어느새 퐁네프(Pont Neuf) 밑을 지나고 있었다. 다리의 인도 위에서 갑자기 우리 유람선을 향한 우레 같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다리 위에서 강 밑을 지나는 유람선을 보고 열렬한 반가움을 표시하는 인사였다. 우리 유람선에 타고 있던 일단의 프랑스 학생들도 다리 위의 사람들을 향해 힘껏 고함을 질렀다.

다리 위와 유람선 위에서 상대방 사람이 가깝게 보일 정도로 세느 강 크기가 적당해서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세느강 다리 위의 사람들과 유람선의 사람들 사이에 이토록 정겨운 문화가 흐르는 것이 의외였다. 무뚝뚝한 파리지엥들 사이에 이런 흥겨운 전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나는 한껏 고함치며 떠들썩한 이런 전통이 어찌 보면 한국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딸은 이 고함소리가 시끄러운 모양이다. 고함소리 때문에 유람선 안내방송이 잘 안 들렸기 때문이다.

“아이, 시끄러워. 쟤들 때문에 설명이 잘 안 들리잖아.”

“왜? 아빠는 재미있기만 한데.”

유람선은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노틀담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콩시에르쥬리(Conciergerie) 앞을 지났다. 건축물 하나하나가 다 기라성 같은 명성을 자랑하는 곳들이다. 강 위의 유람선에서 우러러 보이는 야경 속의 건축물들은 거대하고 신비로웠으며, 눈 아래 세느 강은 더욱 정겨웠다.

▲ 파리 시떼 섬. 시떼 섬은 파리의 역사가 시작된 유서 깊은 곳이다.
ⓒ 노시경
파리

유람선은 어느덧 파리 한 중앙에 자리잡은 시테 섬(Ile De La Cite)을 지났다. 햇빛이 사라져가는 강변에 비치기 시작하는 불빛들이 아름다웠다. 시테 섬 아래의 강변 둔치에서 느긋하게 일요일 밤을 즐기는 파리지앵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람선의 우리들도 손을 흔들고, 강변의 파리지앵들도 우리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세느 강과 시원한 여름 밤, 그리고 환상적인 주변 건축물들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하고 있었다.

시테 섬을 한 바퀴 빙 돈 유람선은 왔던 길을 되돌아서 에펠탑 방향으로 향했다. 파리의 석양은 어느새 사라지고, 이미 어둠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둠 속의 세느 강 주변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세느 강의 모든 건물이 거대한 노란색 조명 속에 묻히고 있었다. 이 조명들은 세느 강 주변을 완전히 별천지로 만들어버렸다.

시계를 보니, 우리나라 시간으로 따지면 새벽 5시였다. 나의 딸은 언제부터인지 엄마의 품에 몸을 옆으로 묻히고 잠이 들어버렸다. 어제 밤에 늦게 파리에 도착했기 때문에 시차 적응이 안 된 탓이었다. 잠이 드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파리 여행 첫날부터 저녁의 세느 강 유람선 여행을 추진한 것은 시차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수였다.

아내도 잠깐씩 졸다가 눈을 떴다가 다시 졸다가 눈을 다시 뜨고 또 다시 졸았다. 나도 눈꺼풀이 자꾸 아래로 감겼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해도 눈은 자꾸 감기기만 했다. 눈꺼풀이 아래로 감긴다는 표현을 절감하는 몽롱함이 내 온 몸에 퍼져 있었다.

▲ 파리 에펠탑. 저녁의 세느 강에서 바라본 에펠탑은 환상적이다.
ⓒ 노시경
파리

어두운 밤하늘 속으로 에펠탑이 갑자기 찬란한 빛을 발사하며 조명 쇼를 시작하고 있었다. 빛이 부족한 어두운 밤, 무리해서라도 가슴 깊이 아름다운 저 야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런데 카메라 삼각대가 없었다. 나는 왜 호텔에 카메라 삼각대를 놔두고 왔을까? 유람선 위에 있으니 삼각대를 무겁게 들고 다닐 일도 없는데 말이다. 삼각대 없는 사진기가 남긴 사진은 대부분 초점을 잃은 채로 흔들리고 있었다.

1시간 20분 동안 어둠이 내리는 세느 강 주변을 훑은 바토무슈 유람선은 자유의 여신상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다시 배의 방향을 파리 도심 쪽으로 돌렸다. 한밤의 매력적인 유람선 주변을 장식하는 중세 건축물들의 휘황한 야경과 세느 강이 조금씩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유람선은 배의 출발점인 알마 다리 아래로 천천히 돌아왔다.

▲ 파리 자유의 여신상. 이곳에서 유람선이 방향을 틀어 알마 다리로 향한다.
ⓒ 노시경
파리

곤히 잠든 딸을 흔들어 깨웠다. 파리의 건축물들을 활기차게 일람하던 유람선에서 내리니, 시간이 너무 밤 깊은 시간이었다. 나의 딸은 유람선에서 잠이 든 사실이 너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잠도 꽤 잤기 때문에 체력이 회복되어 있었다.

“아빠! 왜 나를 안 깨웠어? 내일 낮에 와서 유람선 또 타자. 응?”

나는 너무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현 시점에서, 아내도 호텔로 돌아가 눈 붙이고 발 뻗고 잠을 자는 게 소원일 것이다. 그런데 나의 딸은 불꽃놀이 하듯 조명 쇼를 하는 에펠탑을 보더니, 거기까지 걸어가서 구경하자는 것이었다. 나와 아내가 내일 아침에 와서 에펠탑을 보자고 했더니 딸아이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딸의 눈물 앞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 밤중이라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우리는 야밤에 에펠탑을 향해 또 걷기 시작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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