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국가개요
스위스 베른 연방공화제
41,285 ㎢ 679만명 로마계
신교 불어/독어/이태리어 220V
41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불리는 스위스! 융플라워, 마테호른, 리기, 필라투스...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때로는 웅장한 자태를 그리고 때로는 한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스위스는 유럽을 여행하게 되면 누구나 꼭 한번씩은들르게 되는 나라이다. 유럽을 남북으로 가르는 알프스 사이시 사이로 점점이 들어선 수많은 마을들이 모여 23개의 칸톤이 모여 형성된 나라 스위스!. 이러한 스위스의 여행은 아마도 가장 가슴속에 담아오고 싶은 나라가 될 것이다.

역사,지리기후,시차통화,환전

역사

스위스 우표에는 스위스라는 국호대신 헬베티아(Helvetia)라고 적혀있다. 헬베티아는 알프스 산맥과 쥐라 산맥 사이의 고원에 위치한 중부 유럽의 특정 지역을 통칭하는 말인데 켈트계의 부족인 헬베티아족을 총칭하는 로마어에서 파생하였다. 기원전 58년 카이사르를 수장으로 한 로마군들이 지금의 스위스 땅에 살고 있던 헬베티아족을 정복하였다. 기원후 5세기경 알레마니족과 부르군트족의 침략을 받았고, 6세기에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다가 9세기에 스와비아와 트란스위라네 부르군트로 갈라졌다가 1033년 신성 로마제국때 다시 통합되었다. 13세기에는 쩨링겐과 키부르크 등 봉건 왕조가 합스루르크와 사브와 왕조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합스브르크 왕가가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등 산악 지방의 3개 주로 세력을 확장하자 1291년 3개 주는 방어 동맹을 형성하였다. 빌헬름 텔은 바로 그 당시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1315년 모르가르텐에서 동맹군이 승리를 거두자 루쩨른, 쮜리히, 쭈그, 글라우스, 베른 등이 합세하여 젬파흐와 네펠스에서 합스부르크를 격퇴하였다. 15세기에 스위스는 처음으로 군사력을 강화하여 아르가우, 투르가우, 티치노 계곡 지방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부르군트의 찰스 왕과 막시밀리안 1세 황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1499년 막시밀리안 1세는 스위스의 사실상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1513년 프리부르크, 졸로투른, 바제르 샤프하우젠, 아펜젤이 연맹에 가입하여 모두 13개의 주Canton를 형성하고, 이 체제가 1798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사브와 왕조에게서 보Vaud 주의 베른을 빼앗으면서 스위스는 세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하지만 1515년 마리냐노에서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했고, 그 때문에 스위스는 유럽의 주요 군사 세력의 입지를 잃고 프랑스와 영속적인 동맹관계를 체결하였다(1516). 그때 스위스는 정치적 중립국가로서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렇지만 스위스 용병은 그후 300년 동안 계속해서 해외로 원정을 나갔다. 그 이후로 내부의 알력과 사적인 협약이 체결되면서 주 사이에 결속이 느슨해졌고, 쮜리히의 쯔빙글리와 쥬네브의 칼뱅이 중심이 된 종교개혁 세력의 영향을 받아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하지만 가톨릭교 중심인 4개의 산악 지방에 위치한 주는 개혁파를 무찌르고, 카펠 조약을 체결하였다(1531). 그럼으로써 루쩨른, 우리, 슈비츠, 운테발덴, 쭈그, 프리부르크, 졸로투른 주에서는 계속해서 가톨릭을 유지할 수 있었다. 200년이 넘게 끈 내부 분열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지만 종교적인 분쟁때문에 스위스의 중립국 위치가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30년 전쟁이 끝날 무렵인 1648년에 스위스는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후 150여년간 주 정부들은 대부분 배타적인 소규모의 과두정을 펼쳤다. 18세기에 스위스는 정치적으로는 세를 키우지 못했지만 부를 축적하여 학자들과 지식인들이 모여들었고, 중요한 그룹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자 스위스의 과두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그 무렵 프랑스 공화군이 스위스를 침략하여 헬베티아 공화국을 수립하였고(1798-1803),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 러시아군과 스위스에서 격돌하였다. 나폴레옹의 중재 협약(1815)으로 부분적으로나마 구연방을 회복하였고, 뒤이어 빈회의에서 복구 조약을 맺어 구체제를 다시 형성하였다. 그리고 파리조약(1815)을 통하여 스위스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고하게 보장받았다.

뒤따른 경제 불황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미나 남미로 이민을 떠나게 되자 연방 헌법의 개정이 필요하게 되었고, 중앙 집권화를 반대하는 가톨릭은 주로 농촌 주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1845년 방어 동맹인 손데분트 급진당은 1848년 제정된 신헌법(1874년 개정)을 통해 스위스를 하나의 연방 국가로 통합하였다. 이때부터 국가적인 결속력이 강해지고 강력한 사회주의적인 법제가 시행되었는데 여기에 철도의 국영화와 사회보험제도가 포함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스위스는 무장 중립국의 자세를 고수하였다. 한편으로는 국제연맹의 회원국이었고, 국제 연합에서 실시하는 많은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제 연합의 규약에 따라 스위스의 강력한 중립성을 완화 시키지 않은 상태에서는 스위스의 회원 자격 행사가 어렵게 되었다. 1959년 스위스는 유럽 자유무역 연맹의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1972년 유럽 공동체 시장과 산업 자유 무역 협정에 서명하였다. 1950년대에 베른 주의 쥐라 산악 지역에 사는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쥐라주의 창설을 도모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1977년 헌법이 승인되고, 1979년 쥐라주는 공식적으로 스위스의 23번째 주가 되었다.

1971년 남성 유권자들만 국민투표를 해서 통과된 뒤 여성에게도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하고, 연방에서도 여성들에게 피선거권을 부여함으로써 급진 민주당의 엘리자베트 콥이 스위스 최초의 여성 장관(1984-1988)이 되었다. 1986년 스위스의 유권자들은 국제 연합에 참여하자는 의회의 제안을 거부하였는데 이는 국제 연합 참여가 스위스의 중립국으로서의 위상을 위태롭게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1992년 유럽 연합의 회원국으로 신청을 하였다.

지리

스위스는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서남쪽 지방에는 쥬네브호(레만호)와 쥐라산맥이 있고 북으로는 라인강과 콘스탄쩨 호가 독일과 국경을 이루로 있다.오른쪽으로는 리히헨슈타인,오스트리아와 인접하고,남쪽으론 알프스 산의 정상과 루가노호 마죠레호를 사이에 두고 있다.전국토의 60%가 산지이고 나머지 평지의 45%는 목초지이다.산림지역이24%이고 경작지는 5%도 되지않는다. 집약농업이 이루어지고 여름철에는 산 사면에서 소를 방목하기도 한다.알프스는 스위스의 중부와 남부 지방을 차지하고 있다.

스위스령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몬테로자(4,634m),마터호른(4,478m)이고, 유럽에서 가장 큰 빙하인 알레취 빙하(169km)가 가로놓여 있다. 북쪽으로 프랑스와 마주보고 있는 위치에 쥐라 산맥이 있고, 쥐라 산맥과 알프스 산맥 사이를 미텔란트 또는 스위스 평원이라고 부른다. 스위스 평원은 스위스에서 인구 밀도가 높고, 농업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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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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