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최후의 날)

이태리 2006. 6. 14. 16:37

폼페이 최후의


보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폼페이 인간화석

1709 이탈리아 중부 서해안에 자리잡은 베수비오스산 서쪽의 레지나 마을.수도원 뜰에서 우물을 파던 일꾼이 문득 무엇인가를 주워들었다.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이었다.그는 몇번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1738
4 따뜻한 봄날.한 농부가 베수비오스산 기슭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난데없이 괭이 끝에서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흙을 파헤치니 쇠붙이가 나왔다.소식을 듣고 달려온 토목기사들은 그것이 아주 옛날에 쓰인 수도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렇다면 밑에는 도시가 묻혀 있다는 말인가.


오랜 세월동안 잿더미에 묻혀있던 도시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나폴리 국왕 샤를르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네는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다.그녀는 왕실 공병부대 지휘관인 알쿠비에르를 시켜 베수비오스 기슭을 파헤쳤다.알쿠비에르는 폭약을 써서 15m 두께 바위를 뚫는 성공했다.

발굴에서 그들은 청동 조각품 몇개를 찾아냈고,1211일에는헤르쿨레늄 극장이라고 새겨진 돌을 발견했다.그들은 베수비오스 화산이 터졌을 용암에 파묻힌 1700 로마 제국의 도시 헤르쿨레늄을 찾아냈던 것이다.


‘헤르쿨레늄’ 문화유적인 극장에는 지정된 좌석번호까지 새겨져있었다.

1748 41,샤를르 왕의 명령을 받은 알쿠비에르는 베수비오스산 기슭의 다른 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엿새째인 46 이상한 돌기둥들이 나왔다.거기에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었다.더 깊이 파들어 가자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돌벽이 나왔다.

419,청동제 조각들과 대리석 조각들이 쏟아져 나오던 끝에 처음으로 사람의 주검이 발굴되었다.금화를 잔뜩 움켜쥔 남자가 석고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나폴리 왕국은 사건으로 떠들썩해졌고,출토된 유물들은 빠짐없이 국왕에게 바쳐졌다.얼마 원형 극장을 발굴한 알쿠비에르는 기대했던 보물이 나오지 않자 발굴을 그만두고 말았다.

1754
년이 되자 이름 모를 지하 도시에 대한 발굴이 다시 시작되었다.그 지하 도시가 어느 시대 어느 도시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더구나 샤를르 왕은 문화나 미술품에 대해 흥미가 없었으므로,그저보물 찾기 빠져 이곳저곳 옮겨 가며 파헤치기만 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프레스코 벽화 (Fresque de Pompei)

훌륭한 문화 유적들이 무식한 일꾼들의 곡괭이에 마구 허물어지고 망가졌다.참으로 오랫동안 지하 도시는 그렇게 마구잡이로 파헤쳐졌다.

1755 6 어느 독일의 뛰어난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이 자기 서재에서 로마시대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프리니우스 편지집 읽어 내려가던 빙켈만의 손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 나폴리 국왕이 오래 전부터 파헤치고 있는 곳이 바로 로마시대 폼페이로구나!’

베수비오 산기슭에 묻힌 지하 도시가 폼페이란 사실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빙켈만은 몇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거기에는 화산이 터졌을 프리니우스가 아버지인 () 프리니우스를 따라 폼페이 시민들을 구하러 일을 상세히 적은 편지가 있었다. 편지에는 끔찍했던 날의 폼페이 모습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폼페이와 함께 묻힌 생의 마지막 순간

서기 79년 8월24일 아침. 지체 높은 로마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 도시인 폼페이는 바쁘고 활기에 넘쳐 있었다.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산 기슭에서 사루누스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 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 주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Mount Vesuvius ? 베수비오스

베수비오스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욱 멋지게 꾸며 주고 있다고 말했다.

정오쯤,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스 산으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 오듯 쏟아졌다.

새들은 날다가 낙엽처럼 떨어졌고,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다. 화산은 쉴새없이 터졌고,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The last day of Pompeii'

Painting by : Karl Pavlovich Briullov

새들은 날다가 낙엽처럼 떨어졌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다. 화산은 쉴새없이 터졌고,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4시간쯤 지나자 인구 2만명 가운데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을 힘을 다해 바닷가로 달아났다. 베수비오의 화산재는 30㎞나 떨어진 미세눔에까지도 날아오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미세눔 해군사령관이었던 대 프리니우스는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모든 배는 폼페이로 가서 바닷가로 탈출한 시민들을 구하라!”

함대가 폼페이 항구에 다다르니 배 위로 화산재와 경석이 마구 쏟아졌다. 바닷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프리니우스는 카스텔라마레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는 폼페이 시민들이 바닷가를 따라 그리로 가리라고 예상했다.


‘동작 멈춤’을 보여주듯... 사라진 아름다운 도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닷가를 달려가고 있었다. 함대는 서둘러 카스텔라마레 해안에 배를 대고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믿어지지 않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바람이 돌연 낮게 깔리며 바닷가로 들이닥쳤다. 숨을 못 쉬도록 뜨거운 불기운과 독한 가스가 순식간에 함대를 덮쳤다. 구조 작업을 지휘하던 대 프리니우스, 로마 병사들, 그리고 막 구조돼 한숨을 돌리던 폼페이 시민들은 독가스에 질식돼 모두 죽고 말았다. 소 프리니우스와 몇몇 병사만이 간신히 그 곳을 벗어나 이 기록을 남겼다.


마지막 순간을 공포로 마감해야 했던 처절한 모습의 인간화석들

사흘이 지나자 분화가 멈추고 눈부신 태양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폼페이시는 한 채의 건물, 한 사람의 자취도 없이 모든 것이 화산재와 용암 아래 파묻히고 말았다.

폼페이와 함께 베수비오스 산기슭에 세워진 헤르쿨레늄도 똑같은 불행을 당했다. 그러나 두 도시는 서로 다르게 파괴되었다. 헤르쿨레늄에는 화산재와 비, 용암이 뒤섞인 진흙이 쏟아졌다. 그것은 무려 20m 두께로 덮여 이 도시를 영원히 잠재웠다.


화산재를 뿜어내는 베수비오스 산정의 분화구

폼페이는 이와 달랐다. 흙탕물 대신 잿가루와 경석들이 우박처럼 쏟아졌고,유황 연기가 그 뒤를 따라 도시를 덮침으로써 모든 생명을 질식시켰다. 폭발이 끝난 뒤에도 화산재 구름은 바람을 타고 멀리 아프리카에까지 번져 갔다.

1,700년이나 흐른 뒤, 사람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갑작스레 닥친 재앙이었던지, 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 한 채로 발견되었고, 반쯤 구워진 빵이 발굴되기도 했다.

빵과 고기를 굽던 오븐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감싸 안고 있었고,어떤 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 채 돌더미에 깔려 있었다. 어느 집 문턱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 있었고, 한 집에서는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듯 문상객들이 빙 둘러앉은 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다.

모든 집이 1,700년 전 8월 어느 날 한때의 모습을 ‘동작 그만’인 채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실에는 두루마리 종이가, 작업장에는 연장이, 목욕탕에는 수세미가, 여인숙 탁자에는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폼페이 발굴


발굴된 지역에 모습을 드러낸 옛 도시의 모습

1717년 12월9일 프러시아의 슈텐달에서 가난한 신기료 장수 집안에서 태어난 빙켈만. 그는 어려서부터 옛 무덤을 찾아 시골을 떠돌거나 오래된 항아리들을 파내는 일을 즐겼다.

폼페이가 처음 발굴되던 1748년 빙켈만은 드레스덴의 뷔나우 백작 집에 서적을 맡아 보는 사서(司書)로 들어갔다. 거기서 옛 그리스 문화를 연구하던 그는 얼마 뒤 드레스덴에서 옛날 유물들이 발굴되자 그것을 연구한 책을 내어 그 방면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1758년 빙켈만은 알바니 추기경의 고대 유물 수집품을 맡는 사서가 되었고,1763년에는 로마 일대의 고대 유물 감독관이 되었다. 그는 감독관 자격으로 나폴리 왕국을 찾아갔다. 그의 가슴 속은, 땅속에 묻힌 지하 도시가 폼페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힌 주인공으로서, 그곳을 과학적으로 발굴하여 로마 제국의 미술을 깊이 연구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들

폼페이를 찾아간 빙켈만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일꾼들은 아무 곳이나 무턱대고 파들어 가다가 귀중품이 나오면 슬쩍 호주머니에 넣거나 왕에게 보냈다. 귀중한 사료가 되는 벽이나 건축물을 마구 부순 뒤 유물만 파내고 건물은 도로 묻어 버렸다. 빙켈만은 나폴리로 달려가 샤를르 국왕을 만났다.

“전하, 나폴리 학자들이 폼페이를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있습니다. 제발 폼페이를 훼손하지 말고 발굴해 주십시오. 거기서 나오는 물건은 인류 전체의 재산이며,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연구할 귀중한 자료입니다.”


왕은 벌컥 화를 냈다.

“무슨 헛소리냐? 여긴 내 땅이고 출토품도 내것 이다. 나폴리 학자들은 내 명령에 따라 폼페이를 잘 발굴하고 있다.”

빙켈만은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뿐만 아니라 다시는 폼페이에 가지 못하도록 감시당했다. 그는 나폴리 박물관에 있는 폼페이 출토품을 스케치하는 일조차 거절당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예술공예품 중에서 가장 귀한 유리화병 ‘Blue Vase’, 짙고 푸른

유리병에 카메오(Cameo)를 조각해넣은 이 화병은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그러나 쉽게 물러날 빙켈만이 아니었다. 그는 현장 감독에게 돈을 주고 몰래 발굴 현장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얻은 지식을 가지고 그는 1762년 ‘헤르쿨레늄 발굴에 관하여’라는 책을 출판했으며, 1764년에는 ‘고대 미술사’라는 길이 남을 책을 펴냈다.

‘헤르쿨레늄 발굴에 관하여’와 ‘고대 미술사’는 폼페이와 헤르쿨레늄에서 나온 유물들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바르게 평가함으로써 ‘로마 미술사’라는 학문 체계를 세웠다.

빙켈만은 ‘헤르쿨레늄 발굴에 관하여’와 ‘고대 미술사’에서 옛 유물을 통해 옛 문화를 이해하는 법을 밝힘으로써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바탕을 마련했다. 그는 아주 작은 실마리로부터 역사를 추리해 내고,유물을 통해 그 사실을 뒷받침했다.


Herculaneum Streeet - 옛 도시 ‘헤르쿨레늄’의 거리

역사학자나 철학자의 책상 위에서 맴돌던 고고학은 빙켈만이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당당한 학문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1768년 6월8일,진정한 고고학의 창시자 빙켈만은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한 이탈리아인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이 나폴리 국왕의 미움을 산 데에서 말미암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범인이 빙켈만을 죽일 살해동기는 전혀 없었다.

나폴리, 사르디니아, 시칠리아 등 여러 왕국으로 나뉘어 있던 이탈리아가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일된 때는 1861년 3월이었다.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고고학자 주제페 피오렐리로 하여금 폼페이를 과학적으로 발굴하게 한 것은, 빙켈만이 죽은 지 거의 100년이 다 돼서였다.

피오렐리는 빙켈만의 뜻을 이어 오늘날과 같은 발굴 방식을 처음 시도했다. 그것은 가재도구, 집, 거리…. 무엇 하나 빠짐없이 차근차근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 일은 지금껏 100년이 넘도록 계속되어 오고 있는데, 약 5분의 4쯤 발굴되었다.


계속되는 폼페이 폐허의 발굴현장

여태까지 드러난 바로는, 폼페이는 약 3㎞ 둘레의 타원형 도시이다.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쌌으며, 성문은 모두 8개, 길은 바둑판처럼 곧게 뻗어 있다. 길들은 7m너비로 모두 돌로 포장되었고, 인도가 마찻길 양옆으로 나 있다.

길모퉁이마다 공동 수도전이 세워져 있어 집집마다 수돗물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발굴된 목욕탕은 네 군데. 한증탕, 냉탕, 온탕이 갖추어져 있었다.


‘춤추는 폰의 동상’이 있는 ‘House of the Faun’은 6 에이커에 달하는 아름다운 정원과

건물을 자랑하는 1세기의 대표적인 대 저택이다. 뒤로 베수비오스 산의 정상이 보인다.

폰 하우스(House of the Faun) 뒷뜰에 있는 여러 개의 작은 정원 중 하나

도시 서남쪽에서는 광장 세 군데와 극장 두 군데(각각 800명,5,000명 수용)가 드러났으며,근처에는 조합사무소, 도량형 검사소, 시청, 체육관 따위 공공 건물이 모여 있다. 동쪽 끝에는 만명도 넘게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이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미술품 가운데 특히 ‘큐피드 벽화’와 ‘춤추는 폰의 동상’은 로마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앞으로 10년 안에 발굴이 끝나면, 로마 제국의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눈부신 유산이 더 많이 공개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도시를 완전무결하게 보전하는 방법으로 도시를 화산재로 덮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드뎌!!
폼페이 도착~!


처음 폼페이에 들어섰을때 모습이다.


이건 빵을 만들던 기구(?)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위치가...
지금으로 따지자면 제과점이라할 수 있다.-_-;;


이곳은!!!
사창가~~~(맞나?-_-;;)
그 시대에도 이런것이 있다니...


이건 사창가 가는 표시라한다..
성기모양이라고 하는데...
음...왤케 갑자기 외설적으로 바뀐것이야...


여긴 그 시대에 장이 열리던 곳이다.
한참을 바라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공포 여행으로 변하는^^;;
말로만 들었던 폼페이에 직접 방문해 봤다.
뭐..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던 아이를 안고 있다가 그대로 화산에 덥쳤던...
그러한 모습은 볼수 없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 그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일상을 꾸려가던 모습은 생생히 엿볼 수 있었다.
폼페이...그 자체는 화산과 함께 사라졌을진 몰라도...
끝임없는 복원으로 인해 그 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략 3-4시간 버스로 달려서 폼페이에 도착..

폼페이 입구의 간판..

10유로를 내면 들어간다..

여기서 나눠주는 지도를 보면

한시간반, 두시간, 네시간, 여섯시간을 돌 수 있는 코스 설명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왔으면 지도를 꼭 챙기도록..!!


폼페이 들어가는 입구..

여기 그늘하나 제대로 없고 안에 음료수 하나 파는 곳 없으니까

미리 음료수 등을 꼭 챙길 것..!!

이런 폐허를 보면.. 흠흠..

뭔가 신비로움이 감돈다..

글고..만약 자기가 호기심이 강하다면.. 가이드책을 사거나 (한글책 앞에서 판다)

투어를 받을 것..

그냥 돌아보면 뭐가 뭔지도 모르고 아무 감흥도 없으니까..


폼페이를 잿더미로 만든 베수비오 화산..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는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기름진 캄파니아 광야의 길목에 있던 폼페이는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였고 제정 로마 초기에는

귀족들의 별장이 들어선 휴양지이기도 했다.

당시의 폭발은 2-3m 두께의 화산력과 화산재가 삽시간에 시가지를 덮쳐 미처 도망가지 못한 수천명의 시민이 사망한 엄청난 참사였지만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잊혀졌고, 단지 치비타라는 언덕의 이름만 남아 후세에 전설로 이어졌다.

16세기말부터 소규모의 발굴이 시작되었고, 1748년부터 발굴이 본격화되면서

지금까지 절반정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벽화를 포함한 중요 발굴품들은 전성기 로마시대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고 중요한 유물들은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자신만만 유럽여행 이탈리아편 발췌 -


입구에서 들어가는 아본단차 거리

폼페이의 가장 중요한 거리로 중앙광장서 외곽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마차가 단지는 차도와 인도로 구분되어 있고

인도가 높았는데 사람들이 하도 많이 다녀서 인도가 차도까지 닳았다..

저 중앙에 박혀있는 흰색 돌들은

밤에 달빛을 받아 빛나는 돌로 말하자면 야광석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중앙광장..

여기에 민회부터 쥬피터신전, 아폴로신전,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등이 있었다...

폼페이의 종교, 상업, 정치의 중심지..


기둥만 남은 아폴로 신전..

무거운 화산재로 지붕은 날라가고 기둥만 남았다..


발굴중인 일부 유물을 보관하는 곳..

그리고 거기 있는 사람의 모습..

화산재로 덮힌 후 시간이 지나 유기물은 부패하고 건조한 상태에서 그 안의 내용물은

다 없어지고 빈 공간만 남는다..

거기에 석고를 부어서 죽을 당시 상태를 그대로 재현해낸 것..

고고학박물관에는 더 리얼한 모습들도 보인다..


포도주 항아리..

나한테 저 항아리 10병과 항아리 채울 와인 10종류만 골랐음 딱 좋겠다..

그럼 올 한해(?)는 와인걱정없이 보낼텐데.. ㅋㅋ


폼페이 거리에서 한장 찰칵~~


중앙광장 욕장의 온탕 모습..

이런 공중목욕탕은 로마의 독특한 문화다..

방금 아침에 하동관가서 곰탕 한그릇 때리고 동네 목욕탕 다녀왔는데

이 글 쓰고 있자니..

로마시대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란 생각이..


개조심이란.. 문구가 써 있는

비극시인의 집..현관


훌륭한 정원을 가진 부호의 집..

목신(피우니)의 조각상이 있어 목신의 집이라고도 불린다..


알렉산더 대왕과 다리우스 황제의 전투장면을 묘사한 모자이크화

진품은 나폴리고고학 박물관에~~


여기도 폼페이의 거리..

주거지역~


빵굼터?

빵집?

암튼.. 빵굽는 화덕~


Lupanare 루파나레 라는 창녀의 집.. 이 폼페이에 있다..

이때 보수중인지 닫아놨던데..

그 안에 들어가면 방마다 각종 성행위를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거기보면 그들이 생활하면서 적어놓은 낙서들이 그대로 있어서

그네들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고..

이건 루파나레 가는 길목에 있는 그림..

이런 해학적(?) 인 그림들이 가득한 곳~~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 가면 Secret Cabinet (비밀의 방) 이라는 전시실이 있는데

폼페이에서 출토된 성애에 관한 유물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내 블로그 유럽여행이야기 카타로그에 보면 예전여행때 찍은 사진 몇개 올려놨다..

또, 이번에 Secret Cabinet 유물들에 대한 조그만 책자를 샀는데

그 중 몇개 발췌해서 사진으로 내일쯤 올릴테니 감상들 잘 하시길~~

뭔지 모르겠다고?

흠흠..

이것도 루파나레 가는 길목에 있는 ..... 흠흠


원형극장..

지금도 가끔 공연을 한다고..

근처에 원형경기장도 있는데 이 날은 시간부족으로 못가보고..

여기까지 보고 근처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폼페이를 나섰다..

기차를 못타고 버스로 이동해서 시간제약이 있어서인지

안타깝게도 너무 빠르게 지나간 듯한..

폼페이만 좀 더.. 한 2시간-3시간정도 자세히 돌아보았음 좋으련만..아쉬움이 남는 순간..

하지만..

내가 이태리를 더 이상 안올것도 아니고..


폼페이를 나서면서 찍어봄...
이제 포지타노와 아말피 코스트로..
비가 살짝 뿌리는 것도 같다가
그래도 조금씩 개어서 아말피 절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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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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