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미소 앞에서 딸을 잃다

[유럽기행 10]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 이탈리아 회화관
07.10.23 10:01 ㅣ최종 업데이트 07.10.23 11:05 노시경 (prolsk)

▲ 루브르 박물관. 세계 최대의 박물관답게 규모가 웅장하다.
ⓒ 노시경
프랑스

역시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은 세계 최고의 박물관답게 거대한 덩치로 우리 가족을 맞이하였다. 웅장한 박물관 입구로 많은 사람들이 꼬리를 물듯이 계속 들어가고 있었지만, 공휴일이 아니라서 박물관 입구의 입장 대기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리가족은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서 파리 뮤지엄 패스를 제시하고 박물관 안으로 입장하였다. 우리는 박물관 로비에서 한국어로 된 박물관 안내 팸플릿 한 장을 집어 들었고, 그 안내서의 지도를 따라 드농(Denon)관 2층으로 올라갔다.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여행자들이 드농관 2층 대회랑을 가득 메우며 밀려다니고 있었다. 이 회랑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이탈리아 회화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회랑의 회화실 벽면이 온통 중세와 르네상스 당시의 성화들로 뒤덮여 있다. 이 성화들은 모두들 미술책에서 한 번쯤 봤던 불세출의 명작들이자 세계 회화의 정수들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 되어버린 모나리자(Mona Lisa)를 찾아가는 안내 표지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모나리자만을 찾아 줄을 이어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표지판이 생겨났을 것이다.

▲ 모나리자 관람객. 모나리자 앞을 수많은 관람객들이 둘러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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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도 없이 이어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 모나리자 안내표지판은 모나리자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모나리자가 모셔져 있는 방은 마치 미술관의 다음 구역을 연결하는 작은 복도처럼 이어져 있었고, 모나리자는 아예 단독 전시실의 한쪽 벽면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모나리자 앞에는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는 강력한 방탄유리가 끼워져 있고, 그 유리 내부는 자동으로 습도와 온도가 조절되고 있었다. 유리 안에 갇힌 모나리자의 앞에는 관람객들의 가까운 접근을 막는 통제선까지 설정되어 있고, 통제선 밖에서는 박물관 직원들이 모나리자가 다치지 않도록 관람객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모나리자는 그 곳에 당연히 있지만, 그 앞에서 직접 모나리자를 일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나리자 앞을 수많은 관광객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군중을 뚫고 모나리자에 접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당 1500명이 모나리자를 찾는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드는 것 같다.

나는 이 군중을 뚫고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의 가족은 유명세의 모나리자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모나리자가 거기에 잘 있는지 확인을 해야 되는 상황 속에 있었다. 나는 나의 딸이 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 다치지 않을지, 여기에서 내 딸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순간, 순식간에 딸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자기의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군중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나는 모나리자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딸이 어디에 있는지 빨리 확인해야 하는 상황 속에 들어와 버렸다. 나는 군중의 중앙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포기하고 군중의 왼편으로 돌아들어갔다. 모나리자를 찍는 것은 포기한 것이다. 아직 어려 키가 작은 나의 딸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애 엄마는 모나리자 전시실 입구를 막고 서 있고, 나는 보이지 않는 딸 때문에 초조해졌다. 한참 걱정을 하고 있을 즈음, 모나리자 사진 촬영을 하는 군중들의 가장 앞으로 딸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딸이 자리싸움 끝에 덩치 큰 외국의 관광객들을 제치고 안정적인 자세로 모나리자를 촬영하고 있었다.

▲ 모나리자. 신비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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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딸을 시선에서 놓지 않으며 모나리자의 왼편에서 모나리자를 살펴보았다. 얼핏 보이는 모나리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모나리자는 자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인파를 향해서 조용하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윤곽이 뚜렷한 코 아래로 부드러운 입술이 오묘하고 애매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 속에 기쁨이 녹아 있는지 슬픔이 섞여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익히 보아왔던 대로 원작에도 눈썹이 없었다. 눈썹은 사람의 감정이 격해질 때 근육이 움직이면서 바로 반응을 보이기에,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년~1519년)는 미소 짓는 그녀에게서 눈썹을 없앴을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하기 위해 눈썹을안 그린 게아닐까?

나는 군중에 밀려다니는 관람객 사이에서 빠져 나왔다. 도저히 차분하게 모나리자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나는 모나리자 전시실을 빠져나오면서, 화려한 색채로 그려진 엄청나게 큰 대작을 만났다.

사실, 이탈리아 회화실의 작품들은 당시 시대상황과 더불어 가톨릭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종교가 없는나는 이 회화실의 대작 중 몇몇 작품에 대해서만 줄거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 가나의 혼인잔치. 예수님이 행한 기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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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본 듯한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활약했던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년~1588년)가 그린 ‘가나의 혼인잔치’라는 그림이다. 이 대작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그림 중 가장 규모가 큰 회화작품 중의 하나다. 내 눈앞에 걸린 ‘가나의 혼인잔치’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곱 가지 기적 중 최초의 기적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혼인잔치의 기적이란 술이 떨어지자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이었다.

그런데 베로네세는 이 잔치에서 행해진 기적에 그림의 초점을 맞추었다기보다는 축하연의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기다란 식탁의 중앙에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지만, 이 그림에는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과 잔치에 시중드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베로네세는 복음서의 내용을 왜곡하고 있었다. 그림의 잔칫상에는 음식이 가득 차있고, 그 뒤로는 이탈리아 베니스의 거대한 건축물들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던 당시 갈릴리(Galilee) 근처의 가나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이었고, 혼인잔치에 술이 떨어졌을 정도였으니 잔칫상이 그림처럼 화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설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에서처럼 무리한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는 없다. 화가는 성서 본래의 의미 외에 무언가 다른 것을 그리려 하였던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기 베니스 물산의 풍부함이 화가의 그림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니까 화가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상이1500년 전의 시대를 그린 그림에 무리하게 그려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살던 이탈리아의 화가는 예수님이 어떤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고, 상상으로 그림을 그려나간 것이다.

천장까지의 높이가 9m에 이르는 이 대회랑에는 수많은 이탈리아의 명화들이 도열하듯이 이어지고 있었다. 명화들은 마치 깊고 깊은 다른 세상 속으로 나를 인도하는 듯이 서 있었다. 나는 어떻게 이렇게 세계에 이름난 명작들로 이 회랑을 가득 메우고 있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루브르 박물관 기행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나의 가족같이 몇 시간 내에 루브르 박물관 관람을 마치는 사람들은 루브르의 모든 전시물을 관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빠트릴 수 없는 명작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보지 않을지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은 나의 딸은 배가 너무 고프고 다리도 아파 더 이상 박물관 관람을 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었다. 나는 배고픈 딸을 핑계로 대작들의 감상이라는 강박감을 떨쳐버렸다. 과감하게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 밖으로 나왔다. 금강산도 식후경, 우리는 파리의 미식을 찾아 파리 시내로 들어섰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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