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4구간] 덕유산 지형지질
[백두대간 대장정 제4구간] 덕유산 지형지질 2300만 년 전 지리산과 함께 융기, 외양 비슷해져 수평적으로 단단한 암석 구조여서 펑퍼짐한 육산 형성 | ||||||||||||
백두대간이 남으로 힘차게 달리다가 추풍령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에 다시 한 번 힘차게 솟구치며 영호남을 가르는 높은 산줄기를 빚어놓았다. 바로 덕유산이다.
덕유산은 주봉인 향적봉(1,614m)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중봉(1,594m), 덕유평전(1,480m)을 지나 무룡산(1,491m), 삿갓봉(1410m)을 거쳐 남덕유산(1,507m)에 이르는 장장 100리 길이로 백두대간 상의 한 줄기를 이룬다. 20~18억 년 전 형성된 편마암층 2300만 년 전의 습곡 및 요곡운동으로 융기
그런데, 어떻게 해서 1,000m 이상의 높은 고도 상에 그렇게 드넓은 구릉성의 평탄지가 생겨날 수 있었을까. 약 2300만 년 전 한반도는 동해의 해저 지각이 확장하면서 대륙 지각을 밀어붙이자 횡압력을 받으며 대대적인 습곡 및 요곡운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한반도 땅덩어리는 대대적으로 융기하게 되었는데, 이때 서쪽에 비해 동쪽의 지반이 더 높이 융기하여 동고서저의 경동(傾動) 지형을 이루며 한국 방향의 낭림산맥과 태백산맥, 그리고 태백산맥에서 분기된 소백산맥이 형성됐다. 과거에 오랜 동안 침식과 풍화에 의해 평탄화된 구릉지대를 유지하고 있던 덕유산 일대는 소백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지리산과 함께 높이 솟아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봄철 화사하게 피어난 철쭉으로 천상의 화원을 이루는 덕유평전을 포함한 덕유산 능선을 따라 곳곳에 펼쳐진 평탄면들은 모두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구천동계곡은 정상부와는 다른 화강암계 지질
심산유곡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무주구천동은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한 여러 설이 전해진다. <박문수전(朴文秀傳)>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 구씨(具氏)와 천씨(千氏)가 함께 살면서 집안싸움을 하는 것을 어사 박문수가 해결해 준 뒤부터 구천동(具千洞)이라 불리다가 지금의 구천동(九千洞)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조 선조 제위 시 이조판서를 지냈던 갈천(葛川) 임훈(林薰·1500-1584)이 명종 7년(1552년)에 덕유산을 직접 등반하고 기술한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에 보면 ‘이곳은 이른바 구천둔(九天屯) 골짜기라고 한다’, ‘옛날 이 골짜기에 성불공자(成佛功者) 구천인(九千人)이 있었던 까닭에 이름하였는데, 그 터가 있는 곳은 알지 못하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로는 산이 신비해서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전한다’는 등의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곳 무주구천동 일대가 다양하면서도 특이한 암석 지형을 이루게 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그 해답은 무주구천동 일대의 지질이 덕유산 정상의 능선부를 이루는 지질인 편마암과는 판이한 암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무주구천동 일대의 지질은 크게 구천동 33경 가운데 북부의 외천구동 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석영안산암과 삼공리에서 백련사 부근에 이르는 내구천동 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무주구천동 일대는 다양한 암석 경관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중생대 백악기 약 7천만~8천만 년 전 구천동 지역을 남북으로 양분하면서 관입한 석영 안산암은 지표면 근처에서 냉각되어서 형성된 분출암으로, 침식과 풍화에 강하여 주로 절벽 형태의 노출된 암상을 이룬다. 그리고 비교적 판상절리의 발달이 탁월하여 수평에 가까운 하상 암반이 대규모로 발달해 있다. 제2경 은구암에서 제 12경 수심대에 이르는 와룡담, 일사대, 학소대 등이 이에 속한다. 한편, 구천동 제13경 세심대에서 제30경 연화폭에 이르는 지역은 주로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일대는 불규칙적인 절리의 발달로 인하여 담(潭)이나 소(沼) 등 다양한 하상 경관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독특한 석영 암맥이 곳에 따라 습곡을 이루고 있어 특이하고도 기괴한 하상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수경대, 월하탄, 사자담, 호탄암, 구천폭포 등이 이에 속한다. 이와 같이 덕유산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는 70리에 이르는 무주구천동 계곡의 경관은 육산의 형태를 취하며 장엄한 능선으로 이어지는 편마암 계열의 정상부와 다른 화강암 계열의 암질을 반영하는 지질 및 지형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덕유산이 빼어난 설국(雪國) 이루는 이유
이처럼 덕유산 일대에 눈이 많이 내리는 이유는 바로 백두대간의 일부로 한반도 남부의 한복판을 동과 서로 가르며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철 시베리아 고기압의 확장으로 황해를 건너며 수증기를 흠뻑 머금은 대기는 빠른 속도로 내륙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때 높은 장벽을 이루는 덕유산맥의 산사면을 타고 강제 상승한 대기는 단열·팽창(斷熱 膨脹)하여 냉각됨으로써 눈이 되어 내리는 것이다. 덕유산 능선을 중심으로 무주의 적상산(1,029m), 두문산(1,051m)과 거창의 투구봉(1,274m), 대봉(1,300m) 등은 겨울철 눈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여름철 강우량 또한 같은 이유로 인하여 많다. 무주군 통계에 의하면 1,347mm(2002년), 2,177mm(2003년), 그리고 거창군의 경우는 1,768mm(2002년), 1,949mm(2004년)로 덕유산 일대는 우리나라 연간 평균 강수량 1,200mm를 훨씬 뛰어넘는 많은 비가 내리는 다우지임을 알 수 있다. 영호남의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이끈 덕유산맥
과거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로서 무주구천동 물줄기와 나란히 달리는 석견산(404m)에는 소천리 설천과 현내리 무풍을 잇는 나제통도(羅濟通道)라는 고갯길이 있었다. 이 고갯마루를 경계로 동쪽의 무풍은 신라 무산(茂山) 땅이었으며, 서쪽의 설천과 적상면은 백제 적천(赤川) 땅이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부터 이를 경계로 두 지역 간에는 서로 다른 관습과 풍속을 지니게 됨으로써 한반도 남부의 문화가 동서로 큰 차이를 갖게 되었다. 그 한가운데 바로 덕유산이 위치한 덕유산맥이 있었던 것이다. 스키대회 이유로 더 이상 상처 주지 말아야
특히 정상인 향적봉에서 남쪽 중봉에 이르는 8부 능선에는 약 1,000그루가 넘는 300~500년 생 주목과 구상나무가 천연 군락을 이루고 있어 태고적 신비를 자아내고 있다. 이는 한국의 식생 경관 중 보존가치가 가장 높은 고령의 극상림 지구에 속한다. 그러나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를 위해 1988년부터 시작된 스키장, 골프장 등을 포함하는 무주리조트 개발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이곳 덕유산의 자연 자원 및 생태계를 크게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개발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해발 850~960m 부근에 골프장이, 그리고 향적봉 바로 아래인 설천봉 부근 1480m까지 스키 슬로프가 건설되었다. 산자락을 헐어내고 산정까지 파헤치며 관광곤돌라를 만들며 많은 동·식물들이 서식처를 빼앗기고 쫓겨 갔으며, 건설 현장 주변의 많은 주목과 구상나무들이 말라죽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덕유산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하고 있다. 2014년 동계 올림픽 개최 후보지 선정에 실패한 무주군은 다시금 동계 세계대회 유치를 위한 밑그림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만약 동계 올림픽이 이곳에 유치된다면 지금 시설을 몇 곱절 뛰어넘는 추가 개발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완만하고도 밋밋한 덕유산의 지형적 특성상 필요한 급경사지의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산 정상부에 최소한 40~50m의 인공 구조물을 건축해야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봅슬레이 및 루지와 같은 특수 경기장 건설을 위해서는 덕유산 국립공원 내의 또 다른 부지에 손을 대야만 한다. 그야말로 덕유산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인 셈이다. 지리산과 함께 한반도 남부 생태계의 보고를 이루는 덕유산의 운명이 개발과 보존이라는 극한 대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금부터 대안을 찾는 데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80년대 경험했던 무원칙적이고 비효율적인 난개발로 인하여 다시금 덕유산이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 /글 이우평 백령종합고교 지리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