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2005)..........
''장회태자묘 예빈도'' 앞에서
동봉
2006. 12. 14.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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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이런 게 아닐까. 백만 번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접했어도 내 홍채에 그 현장을 담고 내 발로 그 땅을 딛었을 때의 느낌만은 상상하지 못하매 기어이 발품을 팔아야 하는 과정. 지금 그 발품으로 이 '느낌'을 누리며 그림 앞으로 가고 있다.
새삼 이 사람을 거론함은 그의 생애가 색다른 의의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묘 동벽에 그려진 객사도(客使圖) 즉, 예빈도(禮賓圖)라는 벽화가 한국 사람에 주는 각별한 의미 때문이다. 이 그림은 실제로 장회태자 생전에 외국의 사절을 맞이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림 속 한 사내가 눈길을 끈다.
일본은 최근 유난히 이 그림에 관심을 보인다. 일본에서 특별전시회도 열고 다섯 번째 조우관을 쓴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논문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중국학자들 내에서도 대다수는 고구려나 신라인 중 하나일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일본인으로 보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중국 내 역사 연구에 미치는 일본의 자금과 활동력에 의해 동양고대사가 일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를 감안한다면 이 판세는 또 어떻게 되어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반면에 신라는 연대적으로도 측천무후 통치기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새깃털(鳥羽)을 꽂은 관모(冠帽)에 붉은 고름, 넓은 소매가 있는 흰 포복에 속대를 찬 복식의 유사성이 있으니 가장 유력한 후보라 이르기에 무방하다. 사마르칸트 아프랍시압 궁전의 <신라사신도> 벽화와 같은 계보에 있는 그림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40분 넘는 시간을 오로지 예빈도 앞에서만 서성이고 있다. 한참은 진열장에 코가 닿을 듯 가까이 응시하고 또 한참은 반대편 벽에 기대어 멀찍이 바라본다. 1300여 년 전 해동국인이 뚜렷한 모습으로 서 있는 광경이 묘한 감정을 자아낸다(비록 모사품이지만. 실물은 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전시품은 발굴에 참여한 당창동(唐昌東) 화백이 그린 모사). 석상처럼 부동자세를 유지하던 박물관 경비병('경비원'이 아니라 스물이 갓 넘은 앳된 군인들이다)이 흘끔흘끔 곁눈질로 나를 본다. 궁금하기도 하겠지. 저 자는 왜 자꾸 이 그림 앞에서만 얼쩡거리나 하고. 그러나 그가 어찌 알랴. 이국에서는 자기 나라 여행객만 만나도 반가운 것이거늘 하물며 이역만리에서 옛 동포를 접하는 자별한 심회를.
영어는 서툴고 중국어는 젬병이니 소상한 내용이야 알 길 없어도 다섯 번째 인물을 가리키며 내뱉는 단어가 무얼 의미하는지 정도는 알겠다. '까오리'(高麗:고구려), '신루워'(新羅)라는 말이 가장 많이 들리고 '조신'(朝鮮:북한을 이르는 말이니 아마도 고구려를 의미할 듯), '한구어'(韓國:신라를 말하는 듯함)도 간혹 나온다. 영어로 설명하는 가이드는 '코리아'(Korea)로 통칭해 말하는데 한 여자 가이드는 '한국이나 일본 중 어느 한 나라일 것'이라며 제법 정확한 안내를 한다. 에릭님은 사신으로 조아리러 온 과거의 흔적에 불편한 감정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먼 곳에 그림으로 남은 굴욕의 역사. 그러나 유홍준 교수의 말대로 중국이라는 '대형할인매장' 옆에 조그만 '구멍가게'로 태생한 운명 그 자체에 대해선 어찌할 수가 없잖은가.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 영세 가게들이 대형할인매장 옆에서 망해 넘어가고 흡수 통합되어 갈 때 당당히 업소를 지키며 끊임없는 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구멍가게의 저력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조공무역'이라 하나 그것이 당시 외교의 한 형태였다고 할 때 저 그림의 사신이 속한 나라들이 일찍이 동서문명 교류사의 주역들 중 하나로 참여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 점이 바로 일본이 예빈도의 인물 중 하나가 자국인임을 주장하는 이유다. 문명 교류사의 객체로서, 피동적 수용자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체적인 활동국이었음을 증명하고자하는 노력인 것이다.
호기심 많은 어떤 이들은 그녀의 요강 분석을 토대로 몸무게 83kg이라는 가설까지 만들어 냈다. 그 가설의 신빙성 여부를 생각지 않더라도 중국 내 석굴조각이나 불교미술에서 당 대의 작품임을 입증할 때 풍만하고 복스러운 체형을 내세우는 바, 당시 미인의 조건으로 통통한 체형은 기본이었을 것이다. 가치규범의 변화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미의 기준이 변한다. 굳이 당 대와 현대의 가치기준을 따질 것도 없다. 우리네 모습을 비추어 보더라도 40년 전과 지금의 미인은 얼마나 다른가. '다이어트' 광기가 세상을 덮더니 그것도 모자라 퓨마새끼 닮은 '작은 얼굴' 신드롬이 득세를 하고 급기야 '동안' 열기까지 가세한 지금 사람의 관점에서 1000년도 넘는 세월 저 편에 있는 미인의 모습을 떠올리기가 어렵더니 여기 박물관의 여인상들에서 한 줄기 감을 얻는다.
약조한 시간보다 늦게(이 짠순이 아줌마가 센양(함양)공항에서부터 택시가 아닌 버스를 탔다)숙소 현관에 들어서는 아내를 보니 왈칵 반가움이 몰린다. 마음 같아선 안아주고 싶은데 그저 두 손 비죽이 잡아주는 게 고작이다. 바보. 이제껏 얼굴 보며 살았던 사람이 이토록 반가울까. 매일 맡는 공기는 소중함을 모른다. 부부도 떨어져 봐야 서로의 가치를 아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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