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2005)..........
시안 화청지
동봉
2006. 12. 15. 15:51
| ||||||||
'역사가 윤회하는 땅 화청지' 7월 23일. 2호차 팀들은 시안 남쪽의 종남산(終南山)으로 향하고 1호차 팀인 아내와 나, 그리고 철봉씨는 시안 동쪽 교외의 화청지, 병마용을 향해 나섰다. 종남산. 서북의 신장성 호탄에서 시작한 진령산맥(秦嶺山脈)이 뻗어내리다 멈춘 곳. 일찍이 장안 사람들이 영산으로 우러렀던 이곳에 김가기전 마애각문(金可記傳 磨崖刻文)이나 신라왕자대(新羅王子臺), 흥교사(興敎寺)의 원측탑, 원측상 등 해동인의 흔적이 흥건하고 계곡마다 신라 고승의 흔적이 오롯이 배어 있다. 이처럼 서해를 건너 신라방-장안-종남산으로 이어지는 해동흔적의 증표이면서 가깝게는 일본 강점기 때 국내 진공을 준비하던 시안 OSS지대의 장준하, 김준엽 선생 등이 산악훈련을 받던 장소이기도 하니, (지금의 흥교사는 당시 OSS의 통신훈련소로 쓰였다) 아니 가 볼 수는 없는 터. 그러나 중국 현대사의 흔적이 배인 화청지와 오랜 세월 상상으로만 그리던 진시황릉병마용을 건너뛸 수도 없는 노릇. 해서 부득이 팀을 둘로 나누어 양쪽으로 나선 것인데 말이 1호차 팀이지 실상은 시안이 처음인 우리 셋뿐이다.
어차피 사람이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는 존재가 아니냐. 전진시대부터 존재한 유명한 온천지대에서 유독 그들의 흔적만 더듬게 되는 것도 이런 속성 때문이리라.
740년 가을. 겨울을 나기 위한 현종의 긴 행렬이 이곳 화청지로 오고 있다. 행렬엔 부왕들과 친왕의 무리도 보이고 현종의 18번째 아들 수왕과 수왕비 양옥환(楊玉環)의 모습도 보인다. 당도하여 연회를 베풀던 중 현종의 눈에 구룡전(九龍殿) 연못에 비친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 들어온다. 유부녀가 된 지 5년이고, 이미 스물둘의 나이이니 풋풋한 아름다움이야 찾을 길 없건만, 이미 지천명을 넘긴 지 오래인 현종의 눈엔 그 농익은 자태가 황홀하다. 3년 전 아내(무혜비)를 잃은 현종의 가슴에 금세 새로운 사랑이 둥지를 튼다. 겪어본 자들은 그러더군. 사랑의 아픔을 잊기엔 세월보다 좋은 것이 또 다른 사랑이라고. 그런데…, 며느리라는 사실이 현종의 맘에 걸린다. 그 할아비 고종이 부왕의 후궁인 측천무후를 취했던 바를 떠올리며 용기도 내어보지만, 이러다 '베지밀 가족'이 되지나 않을지 자못 염려스럽다. 이때 우리의 환관 고력사가 '제왕은 무치'라며 똥구멍을 살살 긁는다. 어느 영화에서 대통령으로 분한 송재호가 뱉은 대사 '남자 배꼽 아래의 일은 따지는 게 아니야'도 나레이션으로 등장한다. 드디어 현종은 아들 수왕을 왕복 2년의 광동지역에 어사로 출장 보내고, 양옥환은 '태진'이란 도사로 임명하여 가까이에 둔다. 우리의 불쌍한 수왕. 태자 쟁탈전에서 참으로 아까운 고배를 마신 수왕은 이때까지도 이 긴 출장을 자신에 대한 신임으로 받아들이며 단꿈을 꾼다. 순박한, 아니 영악한 양옥환도 이참에 현종 옆에서 확실한 점수를 따 남편을 태자 자리에 앉히겠다는, 그리하여 종내는 자신이 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그러나 어디 세상일이 사람 맘처럼만 되겠는가. 양옥환이 들어앉은 태진궁은 곧장 신방으로 변하고 끝내 수왕을 새장가 들인 현종이 양옥환을 귀비로 책봉했다. 이곳 화청지의 온천궁에서 그녀를 만난 지 5년 뒤의 일이다. "나 사진 찍어 줘요." 아내의 말에 서서히 환각에서 깨어난다. 하얀 양귀비상 앞에 아내가 선다. 렌즈의 초점을 맞추니 파인더에 가득한 아내의 얼굴 뒤로 양귀비상이 급하게 흐려진다. "해어화(解語花)." 나도 모르게 읊조린다. "뭐요?" 자세를 잡던 아내가 물었다. "말을 알아듣는 꽃. 내게는 당신이 해어화야." 아내가 히∼웃는다. 양귀비가 함수화를 건드렸더니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리며 시들었다는 데서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이란 별칭이 붙었다지. 이 때문에 현종이 양귀비를,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일렀다는데, 오늘은 아내 앞에서 양귀비상이 시든다.
현종과 양귀비 사랑의 정체는 뭐였을까. 짝 잃은 노인의 한물간 욕정? 물불 안 가리는 여인의 권력욕? 지체와 나이를 뛰어넘은 순수한 사랑? 말라버린 욕탕만큼이나 그들 사이를 가늠할 상상력이 건조해진다. 모르겠다. 현종이 양귀비의 언니 양옥쟁과 놀아난 적이 있다는 등 양귀비는 안록산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등 사서에 등장하는 여러 기사가 있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먼 뒷날의 나로서는 알기가 어렵다. 다만 안록산의 난을 피해 도주하던 현종이 부하들의 독촉에 못 이겨 그녀에게 자결을 명할 때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떠올려 볼 뿐이다. 오간청 총성이 역사를 바꾸다
시안사변은 '시안에 둥지를 틀고 있던 동북(만주) 군벌 장쉐량(張學良)이 공산군 토벌에 혈안이 되어 목전의 일본을 방치하던 장제스를 체포하여 내전을 중단하고 국공합작을 하도록 유도한 사건'으로 어렵지 않게들 정의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린 <대륙의 딸>과 <마오>의 저자 장융(張戎)의 표현대로 "이 사건 이후 세계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보다 더 애국적이었고 일본과 싸우려는 투지에 불타올랐으며 국민당이 아니라 공산당이 통일전선을 제의했다고 믿게 되"지는 않았을까? 1935년 10월. 대장정을 끝내고 중국 북서지방에 닿은 홍군은 소련 관할 영토의 국경에 이르는 보급로가 절실했다. 이때 북서로 1000Km 떨어진 신장과 500Km 떨어진 외몽골로 향하는 요충을 장악하고 있는 부대는 장쉐량의 병력이었는데, 그는 중국 공산당과 동맹을 맺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는 조건으로 소련이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자신을 지원해주기를 원했던 터이므로 홍군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일본이 북쪽으로 머리를 돌려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스탈린으로서도 매력적인 제안이었으리라. 비록 흉중에 장쉐량이 중국 전체를 단합시켜 대일전쟁을 수행할 역량이 있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즉각적인 거부를 피하면서 장쉐량을 유도해 중국 공산당을 돕도록 만들었다. 1936년 10월 초. 홍군은 외몽골을 통해 150대의 차량으로 들어오는 소련의 무기를 인수하기 위해 대대적인 돌파작전을 개시한다. 장쉐량은 홍군에게 현금과 겨울 옷가지를 제공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사이였기에 8만의 홍군으로 작전을 감행한 것이었으나, 10월 22일 봉쇄작전의 독려차 시안에 날아온 장제스에 의해 계획은 뒤틀어지고 만다. 장쉐량이 장제스의 면전에서 홍군에 대한 공격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황하를 건넌 홍군 2만1800명이 강 건너에 버려둔 채 주력만 산시성 북부의 근거지로 퇴각한 홍군은 10월 말이 되자 고사 직전의 절박한 상황에 놓였을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터.
12월 4일에 시안에 도착한 장제스는 경호를 위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숙소 주변에만 수십 명의 호위병이 배치되었을 뿐 외곽은 장쉐량의 병사들이 경비했다. 납치임무를 맡은 장쉐량의 병사들이 이곳 화청지의 장제스 숙소를 정찰하고 침실까지 점검해 놓은 뒤의 일이다. 지금도 오간청 장제스의 숙소엔 당시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고 장제스의 제복 사진과 쑹메이링(宋美齡)과 함께 찍은 부부사진이 걸려있다.
외적도 아니고, 이념을 달리하는 원수도 아닌 나름으론 동료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손에 죽어야 했던 젊은이의 마지막 느낌은 또 어땠을까. 그날의 교전흔적이 남아있는 유리창과 벽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휴양지에 남은 피냄새가 너무 진하다.
난항을 겪던 회담이 급반전하게 된 것은 모스크바에 인질로 있는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를 풀어주겠다는 중국 공산당 측의 제안 때문이었다. 24일, 국공합작을 받아들이고 25일 장제스가 시안을 떠날 때 장쉐량은 가택연금을 자원하여 장제스의 비행기에 오른다. 그날이 50년간 이어질 가택연금의 시작이었지만 장쉐량에겐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43년 뒤 같은 날짜에 옆 동네 한반도의 육군참모총장 관저에서도 비슷한 납치극이 있었지 않은가. 납치부대와 경비병 사이 총격전이 벌어지고 소장이 대장을 납치하는 데 성공한다. 성공한 납치극이라는 점에서는 1936년 시안과 1979년 서울의 닮은꼴이고, 시안에선 나라를 훔치는 일에 실패했고, 서울에선 성공했다는 점이 다르다. 고향에서 먼 이곳 화청지에서 역사의 윤회를 느낀다. |